요절: 에스겔 1:1 현대인들은 성경을 볼 때, 설교를 들을 때 자신의 현재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을 얻지 못하면 유익하지 못하다고 굳게 믿는 경향이 있는지라 무엇이든지 실용적, 합리적 가치관에 기반하여 현재, 실제 유용한 방향으로 설교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가령 그룹에 대한 설교나 성경 강해가 현재 나의 가정, 나의 사업, 나의 학교 생활과 무슨 연관이 있고, 삶에 유익이 있는가? 하는 식입니다. 미국의 실용주의는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것은 모두 악이요, 무용하다고 믿는 철학이므로, 미국의 기독교적 가치관 역시 이런 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느 한 단어, 한 구절, 구두점 하나까지 소중하지 않는 것이 있고, 엄청난 영적 가치가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현재 삶에 유익한 것만을 설교하고 그것을 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복 신앙이며, 무속 신앙입니다.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 점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영적 대적 요소는 ‘합리주의’입니다. 합리주의란 이성을 바탕으로 이해되는 지식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룹들에 대한 이런 설교나 성경 공부는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황당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 별로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대부분의 요소는 이성이 아닌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여질 때 어휘 하나, 구두점 하나까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이성을 바탕으로 한 성경 공부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씀을 왜곡하거나 문자적, 역사적, 예언적 진리들을 상징적, 은유적, 영적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이는 성경을 한낱 인간들이 만든 문서의 일종으로, 종교 경전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성도들의 대부분은 교회를 와서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에 참여해도 오늘 들은 말씀이 나의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가 현실에서 별 유익이 될 수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들은 현실에 유익하다고 느낄만한 것들을 뽑아서 설교하게 되거나, 본문에 상관없이 그런 방향으로 해석해서 설교하고, 가르치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독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파산 지경에 있는 성도에게 ‘공급자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본문만이 그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대기에 등장하는 족보나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법이나 민수기에 나오는 인구 조사나 에스겔 1장에 나오는 그룹들에 대한 이야기나 마태복음에 1장의 “누가 누구를 낳고”란 말씀들이 다 도움이 됩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전할 당시 유대는 가장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민족 전체가 멸망하고, 포로로 잡힌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주님이 주신 말씀, 설교 주제가 현실과 상관없어 보이는 그룹들을 보여 주신 것이라면 오늘날 자살, 이혼, 파산, 전쟁, 기아 등과 같은 극한 위험에 처했을 때 성도들을 향해 전해 주어야 할 설교 제목 역시 '그룹들'이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에스겔서는 포로된 자들에게 힘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더욱 에스겔서를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상징과 비유, 초자연적인 계시가 많다는 이유가 우리의 현재적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영적 유익과 도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실용주의나 합리주의적 가치관이 아닌 믿음으로 말씀을 듣는 법을 배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에 충실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은 더욱 강건해지며, 성령 충만해 지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1장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에 거주민들이 모두 포로가 되어 버린 절망적인 시대에 에스겔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제삼십년 사월 곧 그 달 오일 내가 그발 강가에서 포로들 가운데 있을 때에 하늘들이 열리며 하나님의 환상들이 내게 보이니라. 여호야긴 왕이 포로가 된 지 오 년이 되던 해 그 달 오일에 갈대아 사람들의 땅에 있는 그발 강가에서 [주]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거기서 [주]의 손이 그 위에 있더라.](겔1:1~3). 주님의 사역은 언제나 사람을 부르심으로 시작되며, 말씀을 보내심으로 시작됩니다. ‘제 삼십년’이란 말은 에스겔의 나이를 나타냅니다. 에스겔이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 갈 때 같이 포로가 되었다면 그의 나이 25세에 포로가 되어 30세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됩니다. 흔히 유대인들은 30세에 성막의 봉사를 시작했고(민4:3,23,30), 우리 주님 역시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것으로 보아 30이란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여호야긴 왕은 왕이 된지 석달 열흘 만에(대하36:5-9)에 포로가 되었는데, 이 때가 주전 597년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다니엘과 같이 왕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발 강가에서 포로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때 하늘들이 열렸습니다. 우리 주님이 침례인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들이 열렸고(마3:16-17),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 하늘들이 열린 것을 보았으며(행7:56),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역시 하늘이 열립니다(계19:11).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본 것은 큰 보자기였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니 마치 네 귀퉁이를 맨 큰 보자기 같은데 땅으로 내려오더라.](행10:11).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르시기를 [또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요1:51)고 하셨는데, 우리는 모두 하늘들이 열리는 것을 볼 것입니다.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하늘이 항상 열려 있는데, 이는 주님이 바로 길이시오,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암울할수록 우리는 땅이 아닌 하늘을 보아야 하며, 위로부터 능력이 임하고, 하늘로부터 각양 좋은 선물들을 기대해야 합니다. 4-11절은 매우 특이한 환상입니다. 그룹들에 대한 환상입니다. [내가 보니, 보라, 북쪽에서부터 회오리바람과 큰 구름과 스스로를 감싸고 있는 불이 오는데 그 사방으로 광채가 있으며 그 가운데 곧 불 한가운데로부터 호박(琥珀) 색을 띤 것 같은 것이 나오고](4). 북쪽은 언제나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지칭합니다. 이 땅에서 하늘을 쳐다 볼 때 우리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자리를 살핍니다. 이는 그곳이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만든 자야, 네가 어찌 그리 끊어져 땅으로 떨어졌는가! 이는 네가 네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사14:12-13). 마귀는 북쪽으로 그 위에 있는 산 위에 앉으리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굴지 말라, 하며 사악한 자들에게는, 뿔을 들지 말라, 하였나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뻣뻣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이는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나 남쪽에서 나오지 아니하며](시74:4-6). 그럼 높이는 일이 어디서 나옵니까? 북쪽입니다. 회오리 바람 역시 주의 재림과 연관되어 나오는 필수적인 말입니다. 구름, 불, 회오리 바람은 성경에서 거의 언제나 재림의 문맥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는, 보라, 주께서 불과 함께, 회오리바람 같은 자신의 병거들과 함께 임하사 격노로 자신의 분노를, 불꽃으로 자신의 책망을 나타내시며](사66:15). 주님은 불과 함께 오십니다. 주님은 재림 때에 불로 믿지 않는 자들을 벌주시며(살후1:7,8), 비를 내리심으로써 유대인들에 대한 징계를 끝내시고 은혜를 베푸시며(시68:7-9), 무지개를 통해 온 땅에 맺으셨던 언약을 새롭게 기억하게 해 주십니다. 5절은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공상 과학 영화를 보는 듯 한 장면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계시입니다. [또 그 한가운데로부터 네 생물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곧 그들이 사람의 모습을 가졌더라.](5). 사람의 모습이란 것은 손, 팔, 발, 다리 등이 있는 전체적인 모양에서 그렇다는 말이며, 얼굴은 4가지였습니다. 이들은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그룹의 모습입니다. [/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각각 네 날개가 있고](6). 네 얼굴은 사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틀 필요가 없이 어디로든지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이 짐승들은 4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사야가 본 스랍들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사6:2). 천사들은 날개가 없습니다. 이들은 스랍이나 천사는 아닙니다. 이들의 모습을 묘사한 에스겔은 계속해서 “...같고”라고 하는데, 이는 이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이 땅에 정확하게 하나님을 그릴 수 있는 어휘가 존재하지 않기에 ...같고, 같이, 처럼 등으로 그리고,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은 무엇과 같으며 누구와 같은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직접 보아도 제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같지 않으며, 누구와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 중에 그렇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7-11절입니다. [그들의 발은 곧은 발이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빛나는 놋 같은 색깔로 빛나며 그들의 네 측면에 있는 그들의 날개들 밑에는 사람의 손들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이 얼굴과 날개를 가졌는데 그들의 날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들이 갈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가더라. 그들의 얼굴 모습으로 말하건대 그 네 /생물/이 사람의 얼굴과 오른쪽으로 사자의 얼굴과 왼쪽으로 소의 얼굴을 가졌으며 또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더라. 그들의 얼굴은 이러하며 그들의 날개는 위로 펼쳐진 채 각각의 두 날개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두 /날개/는 그들의 몸을 덮었으며](7~11). 발과 발바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들이 걸어 다니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날아다닙니다. 날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개 아래 손도 있습니다. 이들의 나는 모습은 회전하지 않고 직진을 하는데, 이는 오늘날 UFO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비행 방법과 같습니다. 날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묶여 있다는 말이 아니라 닿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전의 지성소 안에 새겨진 그룹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대하3:10-12).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 두 그룹의 형상을 새기게 하셨는데, 언약궤를 덮게 하셨고(출25:20), 긍휼의 자리(자비석) 양 끝에서 서로 맞닿아 덮도록 하셨습니다. 한 그룹의 길이가 5 큐빗 짜리 날개 두개이며, 두 그룹은 총 20큐빗이 됩니다. 이는 지성소의 너비가 20큐빗(대하3:8)이므로 지성소 벽이 꽉 차게 되며,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란 말씀대로입니다. 이들은 맞닿은 채 움직이지만 전혀 회전하지 않습니다. 방향을 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3차원에서의 비행체가 날아가면 반드시 회전하게 되어 있지만 이들은 마치 빛이 움직이듯이 움직입니다. 이들이 설 때는 날개를 드리우면 그만입니다(24). 17절에 보면 이들의 비행 방법이 너무 놀랍습니다. [그들이 갈 때에는 자기들의 네 측면으로 가되 가면서 돌이키지 아니하더라.](겔1:17). 회전하지 않는 비행체란 것은 주님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의 특징은 회전이나 굴절이 없는 직진성입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이 생물들은 그룹들인데 이유는 에스겔이 1장에서 본 생물들의 정체를 10장에서 직접 밝혀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룹들이 들려지니 이것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본 생물이라.](겔10:15). 우리는 여기서 잠깐 그룹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그룹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 당한 뒤 다시 동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동산의 입구를 지키는 존재들로서 나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에덴의 동산은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 있었다면 아담은 전 생애 동안 그들이 에덴의 동산을 지키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룹’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처소이며, 운송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셨으니 바람의 날개들 위에서 보이셨도다.](삼하22:11). 주님은 그룹들을 타고 날으십니다. 주님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십니다. [[주]께서 통치하시니 만백성이 떨 것이요, 그분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시99:1), [오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는 땅의 모든 왕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나이다.](사37:16). 주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고, 천사들의 모습도 만들라는 명이 없으셨지만 그룹들은 만들고 새기도록 하셨습니다. 언약궤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모세는 성막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만들었습니다. 성막은 하늘의 구조이며, 모형입니다. 주님은 모세를 산으로 불러서 성막의 모형을 보여 주셨습니다. [너는 주의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 준바 그것들의 양식대로 그것들을 만들도록 하라.](출25:40). 이 때 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룹들입니다. 특별히 긍휼의 자리를 덮는 그룹들을 “영광의 그룹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궤 위에는 긍휼의 자리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지금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히9:5). 지성소는 하나님의 처소이고, 언약궤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이 끝났을 때 언약궤를 그룹들을 새겨 놓은 그 아래 두게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주]의 언약궤를 궤의 처소로 들여왔으니 곧 그 집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으로, 지성소로 곧 그룹들의 날개들 밑으로 들여오니라. 이는 그룹들이 궤의 처소 위에서 자기의 두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운반/ 막대들을 위에서 덮었음이더라.](왕상8:6-7). 구약의 대언자들이 “그룹들 사이에 거하신 주님”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룹들 아래에 놓인 언약궤를 주님의 모형으로 보고 한 말입니다. 그룹들 가운데 하나님께 반역한 그룹이 있습니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이요,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불타는 돌들 한가운데서 오르내렸도다.](겔28:14). 마귀는 본래 덮는 그룹이었습니다. 마귀는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문자적 의미인데, 적그리스도의 뿌리는 바로 덮는 그룹입니다. 덮는 구릅은 사면이 아니라 위에 있는 그룹이었고, 가장 영화로운 피조물이었습니다. 마귀는 덮는 그룹이었다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쫓겨나서 지금은 둘째 하늘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멸하시는 것입니다. [네 상품이 많으므로 그들이 네 한가운데를 폭력으로 가득 채우매 네가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리라. 오 덮는 그룹아, 내가 너를 불타는 돌들 한가운데서 /쫓아/내어 멸하리로다.](겔28:16). 여기는 4개의 그룹이 사면에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전면이 사람의 얼굴, 오른쪽은 사자, 왼쪽은 황소, 뒷면은 독수리의 얼굴입니다. 이 모습은 요한계시록 4:7절에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짐승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첫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둘째 짐승은 송아지 같으며 셋째 짐승은 사람 같은 얼굴을 가졌고 넷째 짐승은 날아다니는 독수리 같더라.](계4:7). 많은 주석가들이 이 짐승들을 사 복음서에 비유해서 마태복음은 사자, 마가복음은 황소, 누가복음은 사람, 요한 복음은 독수리에 비유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이시며, 마가복음은 종처럼 일하시는 황소의 모습이며, 누가복음은 인정이 많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며, 요한복음은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 즉 독수리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12-14절입니다. [그들이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가고 그 영(靈)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되 갈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더라. 생물들의 모습으로 말하건대 그들의 모양은 타오르는 숯불 같고 등불 모양과도 같은데 그 /등불/이 그 생물들 가운데서 오르락내리락하더라. 그 불은 밝으며 그 불에서부터 번개가 나오고 그 생물들이 달려갔다 돌아오는 것은 마치 번개가 번쩍이며 나타나는 것 같더라.](12-14). 그룹들의 비행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일사분란하고, 고도의 훈련된 전투기 조종사들의 비행 모습보다 더 화려합니다. “곧게 나아가고...돌이키지 아니하더라”는 표현은 그룹들의 비행이 자유자재로 시간과 공간에 전혀 구속 받지 않는 그런 차원을 보여 줍니다. 이런 성경 구절들을 대할 때 문자적으로 이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어김없이 영적 해석을 내 놓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의 모양은 타오르는 숯불 같고”란 말씀을 그들의 모습으로 보지 않고 “완악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진노의 표현” 같은 식입니다. 이런 영적 교훈 위주의 설교나 성경 해석은 마음의 위로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성경의 사실성, 실재성을 부정하는 교묘한 마귀의 농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영적 실체들이며 전혀 상징이나 비유의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어도 머리 속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런 비슷한 것들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5절입니다. [이제 내가 그 생물들을 보니, 보라, 그 생물들 옆의 땅 위에 그 네 얼굴과 함께 바퀴가 하나씩 있고](15). 에스겔은 좀 더 자세하게 보았는데, 생물들이 땅 위에 착륙했기 때문입니다. 네 얼굴과 함께 바퀴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바퀴는 총 네 개입니다. 바퀴들은 생물과 함께 있었고, 위에 있기도 했고(10:12), 그 안에는 영이 생물의 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들리면 이들도 스스로를 들어올리니 이는 생물의 영(靈)이 /바퀴/들 안에 있었음이더라.](겔10:17). 16절은 바퀴의 외모와 구조입니다. [그 바퀴들의 외모와 구조는 녹주석 색깔을 띤 것 같은데 그 네 /생물/의 모습은 한 가지더라. 그들의 외모와 구조는 마치 한 바퀴의 한가운데 또 한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16). 바퀴들의 색깔은 녹주석 색깔 같은 것이고, 모습은 오늘날 자동차 바퀴와는 달리 바퀴 안에 또 한 바퀴가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인데 이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문구점에 가면 여러 가지 모형들이 있는데, 바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바퀴가 그런 것인지 중심축이 한 개인데 두 개의 바퀴가 수평으로 겹쳐져 있는 모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17절은 이들의 비행 모습니다. [그들이 갈 때에는 자기들의 네 측면으로 가되 가면서 돌이키지 아니하더라.](17). 사면이 모두 같은 모습이라면 어디로 가더라도 정면으로 가는 듯한 모습일 것입니다. 얼굴 역시 사면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로 날아 가더라도 늘 정면으로 가는 모습만 보일 뿐 뒤로나 옆으로 나는 모습은 있을 수 없습니다. 회전하지 않는 것은 마치 열차가 역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철로를 돌지 않고 곧 바로 갈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어느 방향이든지 그 자리에서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날아 간다는 말입니다. 18절은 바퀴들의 테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 바퀴들의 테들로 말하건대 그것들은 심히 높아서 무서우며 눈으로 가득하여 그 네 /생물/의 사방을 둘렀더라.](18). 이 모습은 요한이 본 것과 약간 다릅니다. 요한은 바퀴들이 아니라 날개 아래에 눈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네 짐승이 저마다 자기 둘레에 여섯 날개를 가졌고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이시라, 하고](계4:8). 요한이 본 짐승들은 날개가 여섯이요, 그 날개 안쪽에 눈들이 가득했으며, 바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여기서 눈들이란 것은 미확인 비행 물체(UFO)의 아래에 동그란 창들이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림들이나 사진들을 보면 원형 날개를 따라서 수십개의 둥그스런 원들이 있는데 이런 모습이 연상됩니다. 저는 나름대로 마음 속에 연상되는 그림들이 있긴 하지만 정확하게 이 모습니다! 라고 그려낼 자신이 없습니다. 19절입니다. [그 생물들이 갈 때에는 그 바퀴들도 그들 곁에서 가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들리면 바퀴들도 들리더라.](19). 생물들과 바퀴는 함께 움직입니다. 이는 이 둘 간에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말해 주는 구절입니다. 바퀴들은 그냥 단순한 바퀴가 아니라 생물체입니다. 10:16-17절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룹들이 갈 때에는 그 바퀴들도 그들 곁에서 가고 그룹들이 자기 날개들을 들어올리고 땅을 떠나 올라갈 때에는 그 바퀴들도 그들 곁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며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들리면 이들도 스스로를 들어올리니 이는 생물의 영(靈)이 /바퀴/들 안에 있었음이더라.](10:16-17). 바퀴들과 그룹들의 관계는 몸과 영의 관계처럼 그런 상호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열왕기상 7장에는 바퀴들의 제작 과정이 있는데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부어서 만든 바다(왕상7:23)가 있고, 거기에 사자들과 소들의 그룹 모양이 새겨졌습니다(왕상7:29). 그 밑에 바퀴를 제작했습니다. [테두리 밑에는 네 바퀴가 있고 바퀴의 축은 받침대에 연결되었는데 바퀴의 높이는 일 큐빗 반이며 바퀴를 만드는 일은 병거 바퀴를 만드는 일과 같아서 그 축과 통과 테와 살을 다 부어 만들었더라.](왕상7:32-23). 물대야와 받침대, 바퀴가 완전히 일체이듯이 이들은 하나의 영에 의해 움직이는 일체입니다. 20-21절입니다. [그 영(靈)이 어디로 가고자 하든지 그 생물들도 자기들의 영(靈)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들을 마주하여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바퀴들 안에 있었음이더라. 저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저들이 서면 이들도 서며 저들이 땅에서 들리면 바퀴들도 그들을 마주하여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바퀴들 안에 있었음이더라.](20-21). 생물은 넷이지만 영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영들이 아니라 영입니다. 이들은 넷이지만 하나입니다. 에스겔 10장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보니, 보라,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들의 모양은 녹주석 색깔을 띤 것 같고 그들의 모양으로 말하건대 그 네 /생물/의 모습이 한 가지인데 마치 한 바퀴의 한가운데에 또 한 바퀴가 있는 것 같더라.](겔10:9-10).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부를 때 “오 바퀴야”(10:13)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을 여셔서 에스겔에게 그룹들과 바퀴들을 보여 주셨는데, 이는 보통 대언자들에게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 것과는 달리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땅을 잃어버린 백성, 포로된 백성들을 향해 대언할 에스겔에게 땅이 아닌 하늘을, 바빌론의 군대가 아닌 하늘의 군대를, 제국의 왕이 아닌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을 보여 주심으로써 땅에서의 모든 문제를 훌쩍 넘어서게 하신 것입니다. 하늘을 보십시오. 22-25절은 궁창으로 눈을 돌린 모습입니다. [그 생물의 머리들 위에 있는 궁창의 모습은 무서운 수정 색깔 같으며 그들의 머리 위로 펼쳐져 있고 그 궁창 밑에는 그들의 날개들이 서로를 향해 곧게 펴져 있는데 /그들이/ 각각 두 날개를 가지고 이쪽에서 자기 몸을 덮으며 각각 두 날개를 가지고 저쪽에서 자기 몸을 덮었더라. 그 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들의 날개 소리를 들으니 큰 물들의 소리와도 같고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군대의 떠드는 소리와도 같더라. 그들이 설 때에는 자기 날개들을 내렸더라.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니 그들이 설 때에는 자기 날개들을 내렸더라.](22-25). 궁창이란 우주 공간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穹蒼)이 있어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들과 궁창 위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니라.](창1:6-8). 하나님은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둘째 하늘을 말합니다(창1:14-17). 에스겔이 본 궁창의 모습은 오늘날 우주선이 전송해 오는 사진들과는 달리 흑암이 아니라 ‘무서운 수정 색깔’ 같았습니다. 이는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의 경계에 있는 유리 바다 때문입니다. 유리 바다는 수정같이 맑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의 보좌 앞은 수정 같은 유리 바다입니다. [왕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 네 짐승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계4:6). 에스겔이 본 궁창의 모습은 바로 이 모습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때 이 유리 바다 위에 서서 노래하게 됩니다. [또 내가 보니 불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는데 짐승과 그의 형상과 그의 표와 그의 이름의 수(數)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의 하프를 가지고 유리 바다 위에 서서](계15:2). 엘리후는 욥에게 궁창에 있는 이 바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대가 그분과 더불어 단단하고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을 펼쳤느냐?](욥37:18). 오늘날 과학자들에게 조차 생소한 이 바다의 정체에 대해서 3500전의 엘리후와 그의 친구들은 이런 주제가 일상 생활의 대화였습니다. [물들은 돌로 숨긴 것같이 /굳게/ 숨겨져 있고 깊음의 표면은 얼어 있느니라.](욥38:30). 에스겔은 이 바다의 얼음을 보고 “무서운 수정 색깔 같으며”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룹들은 날개없이도 비행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이들의 날개는 가리는데 쓰고, 착륙(정지)하는데 사용합니다. 날개로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큰 물들의 소리, 전능자의 음성, 군대의 떠드는 소리와도 같다고 합니다. 26-28절은 이제 에스겔이 보았던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에스겔이 그룹, 바퀴, 궁창 다음으로 본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왕좌의 모습이 있는데 그 모양이 사파이어 같고 그 왕좌의 모습 위에는 사람의 모양을 닮은 모습이 왕좌 위로 있더라. 내가 보니 그분의 허리 모양 위는 속에서 사방으로 /불타는/ 불의 모양과도 같고 호박(琥珀) 색을 띤 것과도 같은 것이 있으며 내가 보니 그분의 허리 모양 아래는 마치 불의 모양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더라. 사방으로 /퍼지는/ 그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모양 같으니 이것은 [주]의 영광의 모습을 가진 모양이더라. 내가 그것을 볼 때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을 들으니라.](26-28). 에스겔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왕자의 모양이 사파이어 같다고 묘사했는데, 이는 요한이 묘사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보좌의 모양대신 보좌에 앉으신 분의 용모에 대해서 묘사했습니다. [이에 내가 즉시로 영(靈) 안에 있었더니, 보라, 하늘에 왕좌가 놓여 있고 그 왕좌에 한 분이 앉아 계시더니 앉으신 분의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왕좌 둘레에 무지개가 있어 보기에 에메랄드 같더라.](계4:2-3). 장차 우리가 만나 뵙게 될 주님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이 일곱 등잔대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가 발까지 내려온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시는데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며 그분의 두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두 발은 용광로에서 달구어낸 정제(精製)된 놋 같으며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계1:13-15). 여러분들이 미리 이 분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 두셔야 저 하늘에서 “실례지만 뉘신지요?”라고 묻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미리 보고 들은 사람들은 놀랄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식한 소리를 연발합니다. 요한이나 에스겔이나 본 것은 동일하지만 서술 방법은 약간 다릅니다. 유사점과 차이점을 눈여겨 보면 우리는 종합적으로 균형잡힌 모습을 알 수 있게 됩니다. 1장의 전체적인 모습은 주님의 재림하실 때의 광경입니다. 우리는 모두 에스겔이 엎드려 주의 말씀을 들은 것같이 성경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 말씀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와 같은 생각을 품는 사람은 주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일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주의 말씀을 엎드려 듣고, 두려워 떨며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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