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에스겔 3:1-27

요절: 에스겔 3:17


에스겔은 말씀을 받아 먹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양식이며, 그 말씀을 통해 강건해지지 않으면 결코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발견한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의 집에게 말하라, 하시기에
](1).
처음에 에스겔은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말씀을 보았습니다(2:10). 말씀을 보고 읽는 것이 맨 먼저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는 결코
증거의 능력을 얻지 못합니다. 주님은 율법 책을 한 권 베껴다가 [평생토록 자기 곁에 두고 읽어서 [주] 자기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법규를 지켜 행할 것이니라.
](신17:19)고 하셨습니다. 다음은 먹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는 것은 소화하여
영양을 섭취하듯이 자기 것으로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음식을 보기만 해서는 배고픔과 갈증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먹어야 합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묵상’을 명하셨습니다.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 안에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할 것임이라.
](수1:8). 영적 생활의 성공의 비결은 말씀
묵상입니다. 복있는 사람의 행동 특징 역시 묵상입니다. [오직 [주]의 율법을 기뻐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도다.](시1:2).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이었지만 다윗은 묵상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더 복된 삶을 살았습니까? 말씀을 보고 묵상한 다음에는 그것을 말해야 합니다.
이는 성경을 보고, 묵상하지 않고 입을 열어 말하는 자는 거짓 일꾼이거나 종교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보기는
하되 먹지 않는 사람, 먹기는 하되 말하지 않는 사람은 주의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이나 사람들의 생각이나 세상 철학을 전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내가 보고 듣고, 먹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하면 됩니다.


에스겔은 주의 명령에 따라 입을 열어 말씀을 먹었습니다. [내가
입을 벌리니 그분께서 나로 하여금 그 두루마리를 먹게 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 배로 하여금 먹게 하고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창자를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그것을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2-3). 에스겔이 먹은 말씀을 꿀과
같이 단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체험했던 경험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는 주의 말씀을 일컬어 [참으로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또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19:10).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119:103). 에스겔은 말씀으로 배를 채우고, 창자를 채웠는데, 이런 체험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처음 성경을 공부할 때 그 감격과 기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정확하게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을 공부할 때 얼마나 달게
말씀을 먹었던지 저는 거의 매일 성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읽어야지 하면서 앉아 읽다보면 어느덧 몇 시간째 성경을 읽고 있는 자신을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가방에는 신구약 성경, 대역 성경, 영어 성경, 신약 포켓 성경이 한 권씩 들어 있었고, 호주머니에 또 한 권의
작은 성경이 들어 있었습니다. 성경을 영의 양식으로 먹었을 때 저는 식사를 한 두 끼 거르는 것은 쉬웠지만 성경을 읽지 않고는 허기가 져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육신의 허기를 무엇을 채우셨는가?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하시니 그러므로 제자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
](요4:32-34). 그리스도인은 속사람(속 사람 vs 겉
사람, 새 사람 vs 옛 사람, 자연인 vs 거듭난 사람)과 겉 사람이 있습니다(고후4:16). 겉 사람은 육신의 양식을 속 사람은 영의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양식이며, 그것으로 강건해지고, 자라고, 열매 맺습니다.[?이는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2).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부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하여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6).


에스겔이 말씀을 받아먹자 주님은 가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가되 이스라엘의 집에게로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말할지니
](4). 하나님은 “너는 가되...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말할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말씀을 공부하게 하시고, 보내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하시는 원칙입니다.
부름받은 사람에게는 순종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부름 받았을 때 한 순간도 미적거리거나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등은 즉시 주님을 따랐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이 없는 사람들은 제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녹9:59,61). [20그들이
곧 자기들의 그물을 버려 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22그들이 즉시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버려 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마4:20,22).
마태 역시 그렇습니다. [이 일들 후에 예수님께서 나아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 창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눅5:27-28).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방인이 아니라 같은 민족, 같은 언어를 쓰는
이스라엘의 집에게 보내셨습니다. 마치 이곳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있는 미군들과 그 가족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이나 한국에 있는 목사가 미국에
있는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보내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는 /내가/ 말이 생소하거나 언어가 어려운 백성에게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집에게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말이 생소하거나 언어가 어려워 네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백성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라면 그들이 반드시 네 말에 귀를 기울였으리라.
](5-6). 이스라엘의 집은 결코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말을 잘 듣습니다.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 영어로
설교하면 한국인들이 많이 가서 듣습니다. 그들은 결코 한국어를 배워서 선교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영어로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중국에 간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선교사들이 한국어나 중국어나 일본어와 같이 그 나라 언어를 배워서 하면 결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선교사가 졸지에 영어 강사로 전락하는 예도 많이 있는데, 정신만 차리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집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로 향했더라면 그들은 에스겔의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한국인 선교사가 중국, 동남아, 남미 등에서 선교의 열매를 거두는
일은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말을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집은 네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이스라엘의
온 집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
.](7).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다 아시면서도 자신의 종을 보내십니다.
에스겔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내 말(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완악했던지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조건 돌아서고 배척했습니다.


○ 완악한 마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 올립니다. [다만
네가 네 완악함과 뉘우치지 아니하는 마음에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닥칠 진노를 네게 쌓아 올리는도다
.](롬2:5).


○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죄의 속임수에 속았음을 말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중에 하나라도 죄의 속임수를 통하여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3:13).


○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마음이 완악하면 진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완악한 마음은 귀를 막습니다. [또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분께서 다윗의
글에서 어느 날을 오늘로 한정하시며 이르시되,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하셨나니
](히4:7).


○ 마음이 완악하면 말씀을 깨닫지 못하며, 믿지 못합니다. [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 앞에 앉았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것과 마음이 완악(頑惡)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일어난 뒤에 자기를 본 자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음이더라.
](막16:14). 에스겔이 말씀을 전할 대상들은 바로 이렇게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에스겔의 이마와
얼굴은 더 강하고 단단해야 했습니다. [보라, 내가 네 얼굴을 강하게 하여 그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게 하였고 네 이마를 강하게 하여 그들의
이마를 마주 대하게 하였도다. 내가 네 이마를 부싯돌보다 굳은 금강석 같게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집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모습에 놀라지 말라, 하시니라
.](8-9). 백성들이 아무리 뻔뻔하고 완악하고 반역적이어도 그보다 한 수 더 뜨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때로 우리는 아무리 욕하고, 빈정대고, 모욕을 주어도 웃으면서 계속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정작 질리는 것은 전도자가 아니라 불신자들입니다. 한, 두 번 거절해도 만나면 또 전하고, 만나면 또 전하는데 결국 피해 다니는 사람은
전도자가 아니라 불신자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은 얼굴이 얼마나 강한지 자신들을 욕하는 사람들에게서 수치를 느끼지 않으며,
자기를 욕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보면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습니다. 그 이마는 금강석 같은지라 불신자들이 “지독한 놈들!”이라며 얼굴을 돌리게
만드록 맙니다. 에스겔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보라, 내가
이 날 너를 방벽(防壁)을 세운 /견고한/ 도시,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여 그 온 땅과 유다의 왕들과 그 통치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의
백성을 치게 하였음이라.
](렘1:18). 우리 주님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이는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터인즉 내가
당황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그러므로 내가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정하였으니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사50:7).
하나님이 전도자들에게 주시는 강한 얼굴, 단단한 이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말씀을 주십니다.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이를 나의 모든 말을 네 마음 속에 받고 네 귀로 들으라.
](10). 말씀을 마음 속에 받는 것이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을 받고,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무엇을 품고 있는지 주님은 다 살피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악한
계획이나 탐심을 품고, 해악을 숨기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범법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쌓아두고, 숨기고 있다면 그는 증거자가
될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다.](시119:11)고 고백했습니다.
욥기에 [원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도를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 속에 쌓아 두라.](욥22:22)고 말합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이 있으면 걸음이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37:31).
아무리 주의 대언자라 할지라도 말씀을 마음 속에 두지 않으면 그는 반역하는 집과 같이 되고 맙니다(겔2:8). 마음 속에 말씀을 받으면 열매를
맺고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요15:7). 마음 속에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의 화평으로 다스리게 되고, 찬양을 높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 속에서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이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
](골3:15-16).
이런 이유로 에스겔은 마음 속에 말씀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백성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에스겔에게 말씀을
증거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또 /너는/ 가되 포로로 잡힌 자들 곧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하라, 하시니라.
](11). 사람들이 잘 듣고, 반응이 뜨겁다고 해서
흥분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기가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12절은 주의 영께서 에스겔을 들어 올리신 장면입니다. [그때에
그 영(靈)께서 나를 들어올리시매 내가 내 뒤에서 크게 몰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이르시되, 주의 처소에서 나오는 [주]의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하니라
](12). 성령께서 에스겔을 들어 올리신 것은 어딘가로 공간 이동을 위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런 체험을 많이 있습니다(8:3,
11:1,24, 43:5). 이런 예는 신약에서 광야의 빌립의 예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물 속에서 나와 올라올 때에 {주}의
영께서 빌립을 채어 가시니 내시가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더라. 내시는 기뻐하며 길을 가되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모든 도시를 지나가며 말씀을
선포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행8:39-40). 이는 분명히 물리적인 현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공간 이동은 자동차, 비행기
등의 기계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의 영께서 들어 올리시면 훨씬 더 빨리 이동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주의 영은 사람을 순간적으로 들어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켜 버리십니다.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주의 영께서
그를 들어 올려 어딘가로 옮겼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이제 당신의 종들에게 강한 자 오십 명이 있으니
원하건대 그들로 하여금 가서 당신의 선생을 찾게 하소서. 두렵건대 [주]의 영께서 그를 들어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염려하나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왕하2:16). 엘리사가 말렸지만 이들은 엘리야 수색 작업을 강행했습니다.
이들은 엘리야가 저 하늘로 승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라고 믿었고, 잘못하여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회오리 바람에 의해 빨려 올라갔는터라 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의 영께서 사람을 필요한 곳에 옮기시는 일은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심지어 시, 공간을 모두 초월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순간적으로 지상에서 저 하늘로, 게다가 2000년 후의 시간 이동을 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바라보니, 보라, 하늘에 문이 열려 있더라. 전에 내가 들은 첫번째 음성 곧 나팔 소리와 같이 내게 이야기하던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 이에 내가 즉시로 영(靈) 안에 있었더니, 보라, 하늘에
왕좌가 놓여 있고 그 왕좌에 한 분이 앉아 계시더니
](계4:1-2). 사도 바울은 영만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왔는데(고후12:2-5),
에스겔은 온 몸이 전부 같이 성령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이 때 에스겔은 생물들, 바퀴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
내가 생물들의 날개들이 서로 닿는 소리와 생물들을 마주한 바퀴들의 소리와 크게 몰려오는 소리를 들으니라
.](13). 이들의 비행은 오늘날
UFO를 본 사람들이 빛만 보고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한 것과는 달리 상당히 큰 소리를 내는 비행입니다.


[이와 같이 그 영께서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기에 내가
고통 중에 영(靈)이 흥분한 가운데 가니라. 그러나 [주]의 손이 강하게 내 위에 임하여 계시니라
.](14). 에스겔은 이 때 상당히
쓰라린 심정이었는데(in the bitterness) 이유는 간단합니다. 반역하는 민족에게 애가와 곡이 가득 적힌 재앙의 말씀을 듣고 전하러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통 중에 영이 흥분한 가운데’ 갔지만 쉽게 요즘 말로 풀어 쓰자면 ‘괴로운 심정으로 열 받은 상태로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역자의 발걸음이 늘 즐겁게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의 손이 강하게 에스겔 위에 임하여 계시므로 에스겔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요나는 도망이라도 쳤지만 에스겔은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간 곳은 텔아비브였습니다. [그때에
내가 텔아비브에 이르러 그 포로 된 자들 곧 그발 강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들이 앉은 곳에 앉고 거기서 그들 가운데서 놀란 상태로 이레를
지내니라. 그 이레의 끝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5-16). 텔아비브는 곡식 이삭의 언덕이란 뜻으로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인 그발 강가에 있는 비옥한 땅입니다. 이곳은 유대인들의 정착지입니다. 이곳에서 에스겔은 그들이 앉은 곳에 7일이나 앉아서 놀란 상태로
지냈는데, 이들의 포로 생활이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욥의 재난을 듣고 위로하러 왔다가 7일동안 아무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욥2:12-13). 이레 동안 앉아 있었다는 것은 훗날 있을 칠년 대환란을 예표하는 말입니다. 이레의 끝에 말씀이
임했는데, 이는 대환란의 끝을 예표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집에게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내가 주는 경고를 그들에게 줄지니라
.](17). 파수꾼은 전쟁의
위험을 알아내어 재앙을 대비케 하는 사람들입니다. 망대에 서서 주위를 살피고,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소식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영적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만약 파수꾼이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칼이
임하는 것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칼이 임하여 그 중에서 누구든지 제거하면 그는 자기 불법
가운데서 제거된 것이거니와 내가 그의 피를 파수꾼의 손에서 요구하리라.
](겔33:6).


파수꾼은 복음 전도자에 해당되는 직무입니다. [
예루살렘아, 내가 네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웠나니 그들이 낮이나 밤이나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주]에 관하여 말하는 자들아, 너희는 잠잠하지
말며
](사62:6). 전도자는 다가올 지옥과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고 불신으로 말미암는 저주에 대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분명히 하셨는데, 이는
오늘날 복음 전파에 게으른 성도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가령 내가 사악한 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그에게 경고를 주지 아니하거나 그 사악한 자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사악한 길에서 떠나 그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사악한 자는 자기 불법 가운데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요구하리라. 그런데 네가 그 사악한 자에게 경고를 주었으되
그가 자기의 사악한 /행위/와 자기의 사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불법 가운데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혼을 건졌느니라.
](18-19).
경고하지 않음으로 인해 불신 가운데 죽은 죄인의 피를 파수군인 에스겔에게서 요구하겠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이 날
너희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거니와 내가 모든 사람의 피로부터 깨끗하니
](행20:26)라고 했는데, 이는 전도자의 직무를 마쳤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칼이 임하여 그를 제거하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가리라
.](겔33:4). 그러나 전도자가 알면서도
전파하지 않음으로써 그 사람이 피하지 못했다면 그때는 전하지 않는 사람에게 피를 요구하십니다. [가령 내가 사악한 자에게 말하기를, 오
사악한 자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그 사악한 자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사악한 자는 자기 불법
가운데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요구하리라
.](겔33:8).


이것은 경고입니다. 파수꾼은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결코 사랑이나
은혜를 나불대면서 ‘주님은 결코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않아요!’ 같은 소리를 해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경고가 아닙니다. 믿으면 좋아요!
이것도 경고가 아닙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이것이 경고입니다. 이렇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경고는 없고 오직 덕담만
있습니다. 이는 반성경적입니다.


20절은 오늘날 성도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또한 의로운 자가 자기 의에서 돌이켜 불법을 행할 때에는 내가 그 앞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두리니 그가 죽을 것이니라. 네가 그에게
경고를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죄 가운데서 죽으려니와 그의 의 곧 그가 행한 의는 기억되지 아니하겠고 오직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요구하리라.
](20). 하나님께서 범죄자의 길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이 돌이켜 범죄할 때 주님은 그
앞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stumbling stone이나 실족케 하는 무엇을 두셔서 죽게 하십니다.


전에 이미 한 번 다루었던 말씀인데 다시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과연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시는가? 주님께서 사람을 속이시는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도 속일 수 있는가? 답은
‘그렇다’입니다.


주님은 겸손하고 의로왔던 사울이 범죄했을 때 성령을 거두시고
악령을 주셨습니다. 사울은 처음에 왕이 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대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주의 말씀을
버렸을 때 무슨 일이 났습니까? 사무엘상 16:14,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삼상16:14).
성령 충만이 기쁨과 담대함을 주는 반면 악한 영은 괴로움을 줍니다. 사무엘상 18:10, [그 다음날 하나님께로부터 온 악영이 사울 위에
임하매 그가 자기 집 한 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
](삼상18:10). 사울이 질투심에 사로 잡혔을 때 악령이 찾아 왔습니다. 악령이
임해도 대언을 한다는 점에서 성령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는 표적과 기사가 모두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보여 주는
예입니다.


재판관기 9:23,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판9:23).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의 자식들이요, 자기 형제들을
하룻 만에 73명이나 죽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심판하시기 위해 악한 영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말세에 하실 일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에 강한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1,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살후2:11). 현재 많은 사람들이 거짓을 성경 진리처럼 믿는 것은 주님께서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말을 믿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합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대언자들이 거짓말로 대언할 때 자신들조차 자신들이 속은 것을 알지 못한채 대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승리한다는 대언자들의 말을 믿고 나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범죄하는 성도들 앞에 걸림돌을 둔 것은 한 편으로는
은혜입니다. 처음에는 양심에 걸려넘어지고, 다음에는 교회 건물이나 성경의 표지만 봐도 마음이 걸리고, 설교가 마음에 걸리고, 갑자기 친구나
아내,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마음에 걸리고, 성령의 증거가 마음에 걸립니다. 이런 장애물들을 통해 성도는 죄악의 길을 평안히 걷지 못하고 자꾸
비틀거리게 되는데, 이 때 돌이켜야 합니다.


21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 의로운 자에게
경고하여 그 의로운 자가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므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그는 반드시 살 것이니 이는 그가 경고를 받았음이라. 너도 네 혼을
건졌느니라
.](21). 혼을 이겨오는 일은 언제가 기쁜 일입니다. 말씀을 통해 경고를 주어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게 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회개케 하는 일은 하늘에 큰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눈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15:10).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그 죄인을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한
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인즉 그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할지니라
.](약5:20)고 했습니다.


22-23절입니다. [[주]의 손이 거기서 내 위에 임하여
계시니라.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평야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하시기에 내가 일어나 평야로 나아가니, 보라,
[주]의 영광이 거기 서 있는데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영광과 같으므로 내가 얼굴을 대고 엎드리니
](22-23). 여기서 평야란 시날
광야입니다.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을 세운 곳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을 거기에 나가게 하셔셔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이 일어나 평야로 나아가 보니
거기에는 그발 강가에서 본 주의 영광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주의 영께서는 에스겔 안으로 들어와 에스겔을
세우셨습니다. [그때에 그 영(靈)께서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세워 발로 /서게/ 하시고 나와 말하며 이르시되,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있으라.
](24). 엎드려 있던 에스겔이 일어나 말씀을 듣는데, 잠시 후에 에스겔에게 닥칠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집에 들어가 있으라는 말은 영어로 "shut thyself within thine house"
인데, 집안에 네 자신을 감금해 두라는 말입니다. 별도 지시 사항이 있을 때까지 꼼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종은 자신이 임의대로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 주의 명령에 따라 묶여서 움직이는 자들과 같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가 손을 내밀리니 다른 이가 네게 띠를 띠워서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시니라
.](요21:18)고 하셨는데, 이는 주의 종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5절입니다. [그러나, 오 너 사람의 아들아, 보라,
사람들이 네 위에 끈을 놓아 너를 묶으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서 나오지 못하리라
.](25). 끈에 묶인 것은 인신 구속을 말합니다.
에스겔은 몸이 구속됩니다. 가택 연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고, 사도들이 그러했고, 베드로, 바울 등 감옥에 갇히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적인 일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감옥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롬16:7). 에스겔의 사역은 시작부터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에스겔은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아예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붙게 하셔서 아무 말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너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하고 그들에게 대하여 책망하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
.](26). 문을 걸어 잠그고, 묶고, 벙어리까지 만들어 버리시다니 참으로 가혹한 일인 것
같습니다. 분명히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묶어 두시고 벙어리가 되게 하셨다면 앞 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서
에스겔이 주님이 전해주신 말씀 외에 자의적으로 이스라엘을 책망하거나 경고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때로 인정에 매여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들을 말하거나 말씀 외의 것들을 말하는 경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의 혀를 에스겔이 임의대로 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하신대로만 쓰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몸을 하나님께 의의 도구로 드려야
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肢體)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6:13). 이제 우리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전6:20). 에스겔이 맨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이 “내 말을 들으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고 말할 때만 혀를 풀어 주셨습니다. 2:3, 3:4, 3:11, 3:17등 이 명령은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하라. 듣는 자는 들을 것이요,
/듣지/ 아니하는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
](27).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아예 입을
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기 전까지는 침묵해야 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만 말해야 합니다.


전령이 명령을 전달하면서 명령만 전달해야지 명령을 전하기 전,
전한 후에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마구 더하면 안 됩니다. 때로 주제넘게 상관의 명령이나 지시 사항의 BEHIND STORY까지 전하려고 하거나
막전 막후 실세의 역할까지 겸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주의 종은 결코 주님의 말씀에다가 이것은 이런 뜻이고, 이것은 이렇고 하며 자기 생각을
첨삭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 주님은 단연 본이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5:30). 주님은 듣는대로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이 없으시거나 할 말이 없으셔서 그러셨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하실 말씀이 많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 참되시매 내가 그분에게서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니
](요8:26).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존(永存)하는 생명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내가 말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 하시니라
.](요12:50). 에스겔이 벙어리가 된 것은 바로 이런 목적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뜻대로가 아니라 들은대로, 명령대로, 성경대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안에서 걸으라 하는 것이라.
](요이6). 에스겔이 혀가
풀려 전하는 모든 말은 에스겔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며, 듣는 자는 들을 것입니다.


주님은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할 때 듣는 자는 들을 것이요, 듣지 않는 자는 듣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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