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5:1-7:27
요절: 에스겔 6:8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다시 한번 예언적인 설교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면도날이 아닌 칼로 머리와 수염을 자르는 것입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너는 예리한 칼을 취하고
이발사의 삭도(削刀)를 취하여 네 머리털과 수염을 밀며 저울을 취하여 무게를 달고 그 머리털을 나누어 두었다가 /그 도시를/ 에워싸는 날들이
차거든 삼분의 일은 도시 한가운데서 불태우고 삼분의 일은 가져다가 칼로 치며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것들을 따라가며 칼을 빼리라.](겔5:1~2).
머리와 수염을 깎는 일은 기이한 일도 아니고, 표적이 될 일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일인데 왜 주님은 이런 일을 시키셨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일반인들에게 머리와 수염을 미는 일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에스겔이 제사장 집안의 자식이요, 제사장이란 점을 생각해 보면 매운 놀라운
일입니다. [제사장들은 머리를 대머리로 만들지 말고 수염 끝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레21:5)라는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칼을 들고 머리와 수염을 미는 일은 뭔가를 상징하는 일인데 이는
포로 됨과 수치를 상징합니다. [또 그 날에는 {주}께서 강 건너에서 세내어 온 삭도(削刀) 곧 아시리아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와 발의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사7:20). 간단하게 이해하자면 군인들의 머리와 복장, 죄수들의 머리와 복장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포로들은 포로들의 머리와 복장이 있습니다. 적들은 포로들의 머리와 수염을 깎습니다.
에스겔은 깎은 머리와 수염을 세 등분으로 나누어서 삼분의 일은
성중에서 불태우고, 삼분의 일은 칼로 치고,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었습니다(2). 이에 대한 설명은 4절부터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성중에서
태운 머리카락은 예루살렘 성이 불타고 거기서 죽을 사람들을 말합니다(5). 또 다른 삼분의 일은 토막을 내버려야 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할 것을 나타냅니다. 나머지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어지게 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정복자의 땅에 끌려가며 그 일부는 피난처를
찾아 이웃나라로 도망할 것을 나타냅니다. 12절에 주님이 친히 해석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별 다른 해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은 언제나
성경이 스스로 정의하고, 해석을 내립니다. [네 삼분의 일은 네 한가운데서 역병으로 죽으며 기근으로 소멸될 것이요, 삼분의 일은 네 사방에
있는 칼에 쓰러질 것이며 삼분의 일은 내가 /사방의/ 모든 바람 속으로 흩어 버리고 그들을 따라가며 칼을 빼리라.](12).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6-7절에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녀가 그 민족들보다 내 법도를 사악한 것으로 더 많이 바꾸었고 자기 사방에 있는 나라들보다 내 법규를 더 많이 바꾸었으니
이는 그들이 내 법도와 내 법규를 거부하고 그것들 안에서 걷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너희 사방에
있는 민족들보다 번성하므로 내 법규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 사방에 있는 민족들의 법규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6-7).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종교를 바꾸고,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고, 거룩한 율법을 인간의 풍습과 관습으로 바꾸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었습니다. 이는 이교도들에게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민족이 자기 신들을 신이 아닌 것들과 바꾼 적이 있느냐? 그러나 내 백성은
자기 영광을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과 바꾸었도다.](렘2:11).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율법을 이교도의 풍습으로 바꾸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금을 똥으로 바꾸는 일보다 더 한심한 일입니다. [말들이 바위 위에서 달리겠느냐? 사람이 거기서 소들로
쟁기질을 하겠느냐? 이는 너희가 공의를 쓸개로 바꾸고 의의 열매를 독초로 바꾸었음이니라.](암6:12). 이들은 가치 있는 것, 귀중한
것들, 가장 중요한 것들을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것들로 바꾸는데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그 부어 만든 형상에게
경배함으로 자기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모습으로 바꾸었도다.](시106:19~20). 우리는 이런 자들을 바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바꾸었고, 눈에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마땅히 멸해야 할 민족들을 멸하는 대신 그들 가운데 섞여서
살았고, 그들의 행위들을 배웠으며, 자식들을 마귀들에게 희생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땅을 무죄한 피로 오염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멸하라 명령하신 그 민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이교도들 가운데 섞여서 그들의 행위들을 배우며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참으로 그들이 자기 아들딸들을 마귀들에게 희생물로 바쳤으며 무죄한 피 곧 자기 아들딸들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희생물을 드려서 그 땅을 피로 오염시켰도다.](시106:34-38).
이는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의미 없는 교환이 얼마나 자주 발생합니까? 영적인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로 바꾸었습니다. 믿음은 합리주의, 실용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바꾸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사람들이 세운 신학, 철학, 교육을 선택했습니다. 경건을 버리고 물질주의,
쾌락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본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심판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는 또 그 중에서 조금을 가져다가 네
옷자락에 묶고](3). 에스겔이 자른 머리털의 일부는 옷자락에 따로 묶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부를 태우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의
와중에서도 주님은 얼마를 남겨 두셨는데, 이들이 바로 은혜와 긍휼을 따라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남은 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수의 남은 자들은 늘 다수를 쫓아가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킨 자들이며, 배교의 세대에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며,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며, 주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사야는 [만군의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우 소수의 남은 자라도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같이 되고 고모라같이 되었으리로다.](사1:9)고 선언했습니다. 후에 에스라는 말하기를, [이제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남은 자들을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시고 또 자신의 거룩한 곳에서 우리에게 못을 주셨사오니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히시고 우리를 우리의 속박 가운데서 조금 소생(蘇生)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스9:8). 남은 자들을
통해 주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계속해서 흘러가게 하십니다. [유다의 집에서 피하여 남은 자들은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며 피하는 자들이 시온 산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주]의 열심(熱心)이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왕하19:30,31, 사37:31,32).
13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내가/ 내 분노를 다
이루겠고 또 내 격노로 하여금 그들 위에 임하게 하여 위로를 받으리라. 내가 내 격노를 그들 안에서 다 이루게 될 때에 나 [주]가 나의
열심(熱心)으로 그것을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13). 주님은 격노를 쏟아 부어 다 이루심으로 위로를 받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심판의 격노가 다 쏟아 부어지고, 에스겔을 통해 보여준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때 유다는 ‘주의 열심’으로 그것을 말한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심판에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주께서 열심히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 왕국의 건설입니다. 메시야 왕국의 건설은 주님의 열심이
이루실 작품입니다.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君臨)하여 그 왕국을
정비(整備)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시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熱心)이 이것을 이루리라.](사9:7).
의의 왕국 건설, 지상 메시야 왕국 건설은 주의 열심이 이루실 일이며, 지금도 진행 중에 있는 일입니다.
둘째, 남은 자들의 구원에 관한 사역입니다. [이는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며 피하는 자들이 시온 산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주]의 열심(熱心)이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사37:32).
주님은 땅 끝에 있는 소수의 남은 자들도 다 불러 모으십니다.
셋째, 복수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의를 흉패(胸牌)로
대시고 구원의 투구를 자기 머리에 쓰시며 복수의 의복을 옷으로 입으시고 열심(熱心)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며 그들의 행위대로 적절하게 갚으시되
자신의 대적들에게는 격노로 갚으시고 자신의 원수들에게는 보복으로 갚으시며 섬들에게도 보복으로 갚으실 것임이라.](사59:17-18).
주님은 원수를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은혜와 긍휼을 거부한 죄인들에게 격노와 보복을 쏟아 부으시는 보복의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있습니다. [이는 주의 집에
대한 열심(熱心)이 나를 삼키고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음이니이다](시69:9). 주님은 무슨 일에든지 열심히 하십니다.
‘열심’은 주님의 성품입니다.
6장은 이스라엘의 산들을 향해 대언하는 에스겔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산들을 향해 대언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의 산들에 각종 산당, 작은 숲, 제단, 우상들이 가득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산들아, 너희는 {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하나님]께서 산과 언덕과 강과 골짜기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 곧 내가 칼을 가져다가 너희 위에 임하게 하고 너희 산당들을 멸하리니)](3). 산에는 산당이 있고, 골짜기에는
자녀들의 살을 태워 인신 공양하는 제단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너희 산당들’(3), ‘너희 제단들’(4), ‘너희
우상들’(6), ‘너희 형상들’(6). 이것이 멸망 받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요, 그들의 유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위에 칼을 임하게
하셨는데, 칼은 언제나 전쟁을 의미합니다. 전쟁은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장소, 물건, 사람 등을 모두 앗아 갈 것이며, 파괴시킵니다. 전쟁은 이
땅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심판이요, 지옥은 저 세상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손으로 우상을 섬긴
유대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칼과 기근, 역병이 유대를 몰아쳤고(11) 거의 모두가 전멸을 당했습니다(12). 이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들
앞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심판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 소멸하시는 불로써의 하나님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멀리 있는 자는 역병으로 죽고
가까이 있는 자는 칼에 쓰러지며 남아 있어 에워싸임을 당하는 자는 기근으로 죽으리라. 내가 이와 같이 나의 격노를 그들에게 다 이룰 것인즉
그들의 죽임 당한 자들이 자기들의 제단 사방에 있는 우상들 사이와 높은 언덕들과 산들의 모든 꼭대기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와 모든 굵은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우상에게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던 곳에 있으리니 그때에야 비로소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12-13).
타락한 사람들은 평화로운 때, 잘 먹고 잘 사는 때에 하나님을 잊고,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주님의 징계와 심판이 집행될 때 정신이 번쩍 들고
죽어가면서 주님을 알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신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일은 공의로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믿고 신뢰하던 것들을 주님께서 파괴하심으로 그것들이 멸망의 원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상과
우상 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철저히 멸망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 내에 만연하는 우상 숭배는 반드시 교회를 철저하게 망하게 하고
말 것입니다. 에스겔이 대언하던 당시 이미 포로로 잡혀 와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나마 복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잡혀 오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칼,
기근, 역병 중 하나로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최악의 상황이라 생각되는 일들이 오히려 남아 있는 더 큰 심판과 재앙으로부터의 보호와
구출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은 혹독한 심판의 과정에서 다시 한번 남은 자들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남은 자를 남겨 두리니 이것은 너희가 여러 나라로 두루 흩어질 때에 민족들 가운데서 그 칼을
피할 자들이 너희에게 있게 하려 함이라.](8). 이는 주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또한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쳐 이르되,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으리라.](롬9:27).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은혜의 택하심에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
7장은 땅에 대해 대언하는 에스겔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땅에
대해 대언하게 하셨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주} [하나님]이 또 이스라엘 땅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끝이로다. 그 끝이 그 땅의
사방에 이르렀느니라.](2).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이 땅은 약속의 땅이며, 거룩한 땅입니다. [[주]께서
반드시 그 거룩한 땅에서 자신의 몫 유다를 상속하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라] (슥2:12). 그 땅이 이제 끝이 다가왔습니다.
“끝났다”란 표현은 동양인 정서에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란 뜻입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면 종료 상황을
말하지만, 보통 “끝장났다”라고 표현되는 말에는 참혹성,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이제 시작되었다란 말입니다. 성경에서 끝, 마지막이라고 하면 대
환란을 의미하는데, 역사적 사건은 언제나 예언적 사건을 암시하는 성경적 구조로 보아 이스라엘이 겪는 재앙은 장차 임할 대환란의 재앙과
흡사합니다. 땅은 사람의 영적 상태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7:1-7절은 범죄로 인해 당하는 심판의 묘사인데 이는 대 환란
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몇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슬프다 그 날이여! 이는 [주]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라. 그 날이 전능자에게서 나온
멸망같이 이르리로다.](욜1:15). [이는, 보라, 화덕같이 불태우는 날이 임하기 때문이니 참으로 교만한 자와 악하게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가 되리라. 그 날이 임하여 그들을 불태우고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말4:1). [화
있을진저, [주]의 날을 사모하는 너희여!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주]의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니 /그것은/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해 도망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으로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린 것 같도다. [주]의 날은 빛이 없는 어둠이
아니겠느냐? 너무 어두우므로 그 날에는 밝음이 없지 아니하겠느냐?](암5:18-20). 모두 무시무시한 말씀들입니다.
끝에 대해서 주님이 친히 아모스 대언자에게 설명해 주신 말씀을
보십시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내게 보이셨나니, 보라, 여름 과일 한 바구니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바구니이니이다, 하니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들 곁을 그대로 지나가지 아니하리니 그 날에는 /성/전의 노래들이 울부짖음이 될 것이며 곳곳마다 죽은 시체가 많이 있어 사람들이 묵묵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암8:1-3). 여름 과일을 히브리어로 Kitz라고 합니다. 끝을 히브리어로
Keetz라고 합니다. 이는 발음이 비슷합니다. 한국말로 눈(目)과 눈(雪), 말과 말, 밤과 밤에 해당하는 그런 식의 말인데 주님은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바구니를 보여 주시고 무엇이냐? 물으신 것은 바로 언어적 용법을 통해 ‘끝’에 관해 말씀하시는 동시에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대로 [이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아직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너희가 아나니](마24:32)란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여름이 수확의 계절입니다. 잠언 10:5에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잠자는 자는 수치를
끼치는 아들이니라.](잠10:5)고 말씀합니다. 여름은 낫을 들고 거두는 시기인데, 우리 주님은 낫을 들고 오시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십시오. [14또 내가 바라보니, 보라, 흰
구름이 있고 그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분의 머리 위에는 금 왕관이 있고 그분의 손에는 예리한 낫이 있더라. 15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으신 이에게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주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이는 땅의 수확물이 익어 주께서
거두실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구름 위에 앉으신 이께서 낫을 땅 위에 휘두르시매 땅의 /수확물이/ 거두어지니라. 18또 불을 다스릴
권능을 가진 또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을 가진 자에게 큰 외침으로 외쳐 이르되, 너의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들을
모으라. 이는 그 포도들이 충분히 익었음이니라, 하더라.](계14:14-18). 끝이란 말은 주님께서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수확하시는
날인데, 진노의 포도즙 틀에 넣어서 모두 밟아 버리시는 그런 날입니다. 이는 이방인의 충만함이 차는 날이요(롬11:25) 지상에 전무후무한 대
환란이 전개되어 모든 것을 끝장내는 날입니다.
4절입니다. [내 눈이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길들에 따라 네게 보응하여 네 가증한 일들이 네 한가운데 있게 하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4).
진노의 날에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은 누군가 아는 무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들은 요한계시록 7:4-8에 나오는 “머리에 인을
맞은 십사만 사천”이며 “끝까지 견디는 자들”(마24:13)이며, 요한계시록 14:12에 “하나님의 명령들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재앙, 끝, 고난의 날, 심판 등 모두 대 환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5-7). 주님은 보응의 하나님이심을 반복해서 말씀해 주시는데, 오늘날 현대 기독교에서 너무나 간과되는 주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오직
인자하시고, 은혜롭기만 하시고, 사랑만 말씀하시는 듯하여 죄인들을 보면서 손을 내미시고, 눈물을 줄줄 흘리시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로
돌아오라”며 사정하시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그려 놓습니다. 이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떠받드는 하나님, 형편없이 망가진 죄인들의
뒤치다꺼리를 하시면서도 웃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그 날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눈이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내가 불쌍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길들과 네 한가운데 있는 네 가증한 일들에 따라 네게 보응하리니 내가 /너희를/ 때리는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9). 주님의 긍휼은 거두어지고, 보응이 있으며, 때리시는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그것이 이르렀도다. 아침이 나아갔으니 막대기가 꽃을 내며 교만이 싹을 내었도다.](10). 아침은 두말할 필요 없이 재림의 아침입니다.
주님은 day star, morning star이십니다. 주님은 새벽을 알리시고, 곧 의의 태양으로 떠오르시는데 지금이 바로 밤인 까닭입니다.
교회 시대는 밤입니다. 사도 바울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롬13:12)라고 말합니다. 막대기가 싹을 내었다는 말은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열두 막대기나 아론의 싹난 막대기가 아니라 11절에 나오는대로 “사악함의 막대기”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막대기는 꽃을 내고,
교만이 싹을 내었는데 온 세상의 죄악이 활짝 만개했음을 말합니다.
막대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은 스스로 설명합니다. [오
내 분노의 막대기 아시리아 사람이여, 그들의 손에 있는 지팡이는 내 격노니라.](사10:5). 아시리아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막대기는 곧 마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오 시온에 거하는 내 백성아, 그
아시리아 사람이 이집트/가 행한/ 방식대로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지팡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사10:24).
‘그 아시리아 사람’이 막대기로 유대인들을 때리고 칩니다. 막대기는 적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의 목소리로 말미암아 그
아시리아 사람이 두들겨 맞을 것임이니 곧 막대기로 치던 그 자라.](사30:31). 막대기로 치던 자는 분명히 적그리스도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폭력이 일어나 사악함의 막대기 속으로
들어간즉 그들과 그들의 무리와 그들의 소유 중 하나도 남지 아니하겠고 그들을 위하여 통곡하는 일도 없으리로다.](11). 사악함의
막대기는 주님께서 친히 제거해 주십니다.
12-15절은 대환란 때의 재앙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16절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마24:15-16) 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도피하는 자들은 도피하여 골짜기의 비둘기같이 산들 위에 거할 것이로되 그들이 다 각각 자기 불법으로 인하여 애곡하며](16).
겨우 숨어서 도피 생활을 하는 자들은 ‘자기 불법’으로 인하여 애곡하는데, 그들이 행한 가장 큰 불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곡하기를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기를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 자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곡이 있으리니 /그것은/ 마치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서의 애곡과 같으리라.](슥12:10-11).
이들의 눈물은 진실한 회개의 눈물입니다.
19절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은을 거리에 던지겠고
그들의 금은 옮겨지리니 그들의 금과 은이 [주]의 진노하시는 날에 능히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그들이 자기 혼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자기
창자도 채우지 못하리니 이는 이 일이 그들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라.](19). 왜 은과 금을
버립니까? 대환란 즉 주의 진노의 날에는 재물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짐승의 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사고 팔 수 없습니다. 은과 금이 그들을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잠언 기자가 말한 대로, [재물은 진노의 날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나 의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11:4)는
말씀대로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섬기던 은과 금은 결국 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구원은 금, 은에 있지 않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대속(代贖)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1:18). 오직 주님의 능력, 보혈에
있습니다.
20-22절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 화려함이 어떻게
더럽혀지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서지 못할 것에 서게 되고,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곳이
얼마나 더렵혀지는지 주님은 거룩한 도성을 “영적으로는 소돔과 이집트”(계11:8)라고 부르셨습니다. 22절의 은밀한 장소는 ‘지성소’를
말합니다.
25절입니다. [파멸이 이르리니 그들이 화평을 구하여도
결코 없으리라.](25). 역사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늘 주위 나라들과 동맹이나 화평을 맺었지만 화평을 얻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주위 아랍국이나 팔레스타인과 화평을 구하고 있지만 전쟁이 끝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화평은 주님과 화해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롬5:1).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이는 어디서 화평을 구해도 화평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大使)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너희에게 간청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5:20). 우리는
화평의 복음, 화평의 길, 화평의 매는 띠로써 화평의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이 결코 알 수 없는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26-27절입니다. [해악 위에 해악이 이르며 소문 위에
소문이 이르리니 그들이 대언자의 환상을 구하되 제사장에게서는 율법이 사라지겠고 노인에게서는 모략이 사라질 것이며 왕은 애곡하겠고 통치자는
황폐함으로 옷 입을 것이며 그 땅의 백성의 손들은 괴로움을 당하리라. 내가 그들의 길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그들이 /나를/ 떠난 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6-27). 현실의 환란 가운데서 가장 큰 환란은 도무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악 위에 해악이 있고, 소문 위에 소문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믿을만한 소식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앞을 알 수가 없습니다. 대언자들에게 가도
아무런 대언을 하지 못하고, 제사장에게 가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대언자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알았습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하리니 이는 제사장이 만군의 [주]의
사자(使者)이기 때문이니라.](말2:7). 그러나 대언자들과 제사장들,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한 일은 주의 법을 버린 것입니다. [대언자들은
거짓되이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1).
이들의 종말은 주님의 심판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행한 대로 그대로 보응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