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에스겔 2:1-10 
요절: 에스겔 2: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그 위에 게신 분의 모습을 본 에스겔은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있는 말씀을 들을 때면 우리는 두려워 떨며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내가 서 있는 곳으로 그가 가까이 나아오니 그가 나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오 사람의 아들아, /너는/ 깨달을지니 이는 이 환상이 끝이 /임하는/ 때에 있을 일이기 때문이니라.](단8:17).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엎드렸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눅5:8). 엎드리는 자세는 기도의 자세인 동시에 말씀을 듣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더니](1). “사람의 아들아”란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정확히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시 8:4). 여기서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아들이 같은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구절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 곧 주를 위하여 친히 강하게 하신 사람의 아들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80:17). [[주]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나이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14:3).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이는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사람이란 뜻입니다. [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나니 내 음성은 사람의 아들들을 향한 것이라.](잠8:4). 하나님은 다니엘, 에스겔에게 사람의 아들[人子]란 칭호를 자주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된 권능을 주셨습니다. 동시에 우리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1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더니](1). 엎드려 말씀을 듣던 에스겔을 주님이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선다는 것은 일을 하라, 원수를 대적하라, 싸우라는 의미입니다. 아기는 기어 다닙니다. 다음에 걷습니다. 그 다음에는 섭니다. 서지 못하면 일을 할 수 없고, 대적하여 싸울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엎드려 있던 여호수아를 “일어나라”하셨습니다.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같이 얼굴을 대고 엎드렸느냐?](수7:10). 이는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명을 받은 사람은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주]의 영광이 일어나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사60:1).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하시느니라.](엡5:14). 주님은 자고 있는 베드로를 깨웠습니다. [보라, {주}의 천사가 베드로에게 이르매 감옥 안에 한 광체(光體)가 빛나더라. 그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일으켜 세우며 이르되, 빨리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의 손에서 풀려 떨어지더라.](행12:7).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엎드려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일어나라는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내게 이르되, 오 크게 사랑 받는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들을 /너는/ 깨닫고 똑바로 일어서라. 이는 내가 지금 네게 보내심을 받았음이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뒤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단10:11). 말씀 앞에 엎드린 자들을 세우시고,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일으켜 세우시는 원리는 이렇습니다. 이는 에베소서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앉습니다. [그분께서 그 권능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휘하사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시고 하늘의 처소들에서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엡1:20). [또 함께 일으켜 세우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의 처소들에 앉히셨으니](엡2:6). 주님은 우리를 앉히십니다. 앉지 않고는 설 수 없습니다. 앉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음은 걷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우리는 조심스럽게 걷게 됩니다.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여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서 조심스럽게 걷고](엡5:15). 마지막 단계는 서는 것입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胸鉀)을 입고](엡6:14). 원수를 향해 섭니다. 적을 마주 보고 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앉고, 걷고, 서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靈)께서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세워 내 발로 /서게/ 하시기에 내가 그 말씀하신 이의 말을 들으니](2). 주님은 에스겔을 똑 바로 서게 하셨습니다. 이는 다니엘에게 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이제 그가 나와 말하고 있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깊이 잠들었으나 그가 내게 손을 대어 똑바로 일으켜 세우고](단8:18). 우리는 곧게 서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우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똑바로, 굳게 서는가? 첫째, 부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고전15:58). 부활의 믿음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는 믿음이며, 죽음 앞에서도 무릎이 약해지지 않고, 두 발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부활은 육신의 연약함을 완전히 극복한 승리의 신앙입니다.

둘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행동하며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전16:13).

셋째, 하나님이 주신 전신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를 동여매고 의의 흉갑(胸鉀)을 입고](엡6:14). 빛의 갑옷, 전신갑옷이 없으면 적의 위협을 받을 때 숙이게 되고, 숨게 되고, 피하게 됩니다. 결국 지치면 등을 돌려 도망가 버립니다.

넷째, 복음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 대한 일들 곧 내가 너희에게 가서 보든지 떠나 있든지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이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함께 힘쓰며](빌1:27). 믿음과 행실이 다를 때 사람들은 굳게 서지 못합니다. 자신의 신앙 양심이 자신을 고소할 때 사람은 숨고 싶어지고,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복음에 합당한 행실을 할 때 성도는 사자같이 담대해 집니다(잠28:1).

다섯째, 주님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2:7). 주님 안에 내려진 뿌리는 뽑히지 않으며,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는 강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매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감사가 넘칠수록 뿌리는 더욱 깊이 내려지고, 확고해 집니다. 몸이 아파 병들어도 감사하고, 돈 벌이가 시원치 않아도 감사하는 언어 생활은 결코 그냥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성도, 그 안에서 세움을 입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열매입니다.

여섯째, 좋은 전통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서신으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붙들라.](살후2:15). 우리는 성경에서 조상들의 전통(갈1:14), 사람들의 전통(골2:8), 장로들의 전통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는 그런 악한 전통들이 많이 있음을 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곧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너희가 행하는 바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이라. 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저버리는도다.](막7:8-9). [너희의 전해 내려온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더라.](막7:13). 이런 전통과 달리 우리가 지켜야 할 좋은 전통들이 있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전해 준 전통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의 첫날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성경의 명령도 아닙니다. 사도들이 전해 준 전통입니다. 사도들은 구제, 이웃 사랑, 자기 손으로 열심히 일하여 이웃을 돕는 것 등과 같은 아름다운 전통들을 많이 전해 주었는데 우리는 이런 전통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을 버리는 자들은 형제로서 교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너희에게 명령하노니 너희는 질서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살후3:6).

주님께서 엎드려 있던 에스겔, 다니엘, 여호수아를 일으켜 세우셔서 일을 하게 하시듯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원수를 마주보고 대적하게 하십니다.

3절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을 보내셨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반역하는 민족, 나를 반역한 민족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바로 이 날까지 이르렀나니](3).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보내신 분의 사명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셔서 자신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시는데 이것을 “보내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보내셨습니다. 부르심이 있고, 보내심이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리라.](출3:10).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 하나님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너희 조상들의 [주]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라. 이것이 영원토록 나의 이름이요, 이것이 모든 세대를 향한 나의 기념물이니라.](출3:14-15). 하나님은 모세를 파라오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를 부르시든 부르신 자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열두 제자, 사도 바울 등 예외가 없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매우 상세하게 나옵니다. 차례대로 몇 구절을 보십시오. [곧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그분을 따라가니라.](막1:20). 주님은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오니라.](막3:13). 주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일을 시키시고자 함이었습니다. [7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기 시작하시며 부정한 영들을 제압하는 권능을 주시고...12그들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선포하고](막6:7). 주님은 부르신 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우리는 모두 부르심을 받아 성도가 되었고, 보내심을 받아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을 부르셔서 보내셨듯이 저와 여러분을 부르셔서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이것은/ 기록된바,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며 좋은 일들의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함과 같으니라.](롬10:15). 하나님은 에스겔을 ‘반역하는 이스라엘 집’에게 보내셨듯이, 저와 여러분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있는 그곳은 여러분이 주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곳입니다.

4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뻔뻔하고 마음이 뻣뻣한 자손들이기 때문이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하라.](4).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뻔뻔하고 마음이 뻣뻣한 자손들’이라고 평하셨습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창조하시고, 부르시고, 택하신 민족임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결코 잘 낫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인들은 입양을 하든, 직원을 뽑든 일반적으로 머리가 좋고, 인물이 출중하고, 가능성이 있고, 순종적인 사람들을 선택합니다. 반면 이곳 미국 사람들 가운데 때로 양자를 입양할 때 건강하고 머리 좋고, 인물 좋은 아이들이 아닌 뇌성마비 환자나 장애인들을 입양하여 키우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들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입양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경우는 이스라엘이 잘 나서가 아니라 못 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사랑 때문 입니다. [[주]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들의 뒤를 이은 그들의 씨를 택하시고 자신의 큰 권능으로 친히 보시는 중에 너를 인도하여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시며](신4:37).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수가 가장 적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백성보다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모든 백성들 중에서 수가 가장 적으니라. 다만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셨으므로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고자 하시므로 자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노예들의 집에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에서 구속(救贖)하셨나니](신7:7-8). 셋째, 이스라엘이 의롭거나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조상들과 맺은 약속 때문입니다. 그들은 목이 뻣뻣한 백성이었습니다. [네가 가서 그들의 땅을 소유하게 됨은 네가 의롭거나 네 마음이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요, 오직 이 민족들이 사악하므로 [주] 네 하나님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기 때문이니 이것은 [주]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로 하신 말씀을 친히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너는/ 알지니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이 좋은 땅을 소유로 주신 것은 네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니라. 이는 네가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이니라.](신9:5,6). 이들은 주님 앞에서 결코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은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나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입은 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과 못남 때문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주님은 왜 이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고전1:28).

못난 자들이 자존심이 더 강하고 교만한 경우가 허다한데, 이는 열등감의 표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었지만 이들의 실상은 마음이 뻔뻔하고, 뻣뻣한 반역하는 심성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대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5절입니다.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들 가운데 지금까지 한 대언자가 있었음을 그들이 알지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5). 하나님은 자신의 일꾼을 보내실 때 청중들의 반응을 미리 아십니다. 그들이 듣고 믿을지, 들으려 하지도 않을지, 죽여 버릴지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한 가지 목적 때문에 에스겔을 보내셨는데, “그들 가운데 지금까지 한 대언자가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또 너 사람의 아들아, 네 백성의 자녀들이 아직도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서로 서로 각각 자기 형제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청하노니 오라. [주]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 들어 보자, 하고](겔33:30). 그들은 주께서 나온 말씀을 믿자, 순종하자는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들어나 보자”는 반응은 보였습니다.

5절 말씀은 오늘날 구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지속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들에게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전도자들이 전도지를 돌리고, 복음을 외치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속에 한 명의 복음의 증인’이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후에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석에서 “나는 복음을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란 변명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6절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비록 찔레와 가시가 너와 함께하며 네가 전갈들 가운데 거할지라도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집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모습에 놀라지 말지어다.](6). 이스라엘을 포도, 올리브, 무화과 나무로 비유한다면 주위 이방 민족들을 일컬어 찔레 나무로 비유합니다. 이는 이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아프게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의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모든 자들의 아프게 하는 가시나 찌르는 찔레가 다시는 그들에게 있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 [하나님]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28:24). “찔레와 가시”는 저주의 상징이며, 악한 자들 특히 벨리알의 자식들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벨리알의 아들들은 다 내어버릴 가시나무들 같으니 그 까닭은 그것들을 손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삼하23:6). 찔레와 가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나는 격노하지 아니하나니 찔레와 가시들을 세워 나와 싸우게 할 자 누구리요? 내가 그것들을 헤치고 나아가며 그것들을 다 같이 불태우리라.](사27:4). 에스겔이 찔레와 가시와 함께 한다는 것은 바로 벨리알의 자녀들,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전갈들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에스겔이 당할 고난을 말합니다. 전갈은 광야에 거하는 독충의 일종인데 사람을 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압할 권능’(눅10:19)을 주셨는데, 에스겔 역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은 반역하는 집에 말씀을 증거할지라도 그들이 에스겔을 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위협과 불편과 어려움은 있을지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고난을 없애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찔레와 가시가 함께 하며, 전갈 가운데 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나를 빼내 주시고, 그런 것들이 나와 함께 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거기에 두십니다. 주님께서 에스겔을 보내셔서 거기에 두셨듯이 우리 역시 악하고 음란한 세대 속에 두십니다.

성도는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주] 너희 하나님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임이라, 하였노라.](신3:22).

②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지니 이는 [주] 네 하나님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니라.](신7:21). [네가 나가서 네 원수들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를 보고 또 너보다 많은 백성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이집트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주] 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니라.](신20:1).

③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6/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膽大)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이는 [주] 네 하나님 그분께서 너와 함께 가실 것임이니라. 그분께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니라. ...8[주] 그분께서 너를 앞서 가시고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하니라.](신31:6).

④ 우리와 함께 하는 이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우리와 함께한 자들이 그들과 함께한 자들보다 많기 때문이니라, 하고](왕하6:16).

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용기를 내고 아시리아 왕이나 그와 함께한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이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께서 그와 함께하는 자들보다 위대하시기 때문이라.](대하32:7).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요일4:4)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⑥ 우리는 참새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앗시리온에 두 마리, 두 앗시리온에 다섯 마리에 팔리는 참새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으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눅12:7).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관찰하시고,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⑦ 생명의 왕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앞으로 당할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우리에게는 보상이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왕관을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승리이며, 손실이 아니라 최대의 혜택입니다. 이 생은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셨듯이,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인 너희에게 이르노니, 몸을 죽이고 그 뒤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12:4).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 몸을 죽이는 것이며,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에스겔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역자들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요소가 바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의 영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기 때문이라.](딤후1:7).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믿음이 승리를 가져오듯이(요일5:4),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찔레와 가시, 전갈 가운데 있는 것을 두려워 하시는 분들은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을 얻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7절입니다. [그들은 심히 반역하는 자들이니 그런즉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너는 내 말들을 전할지니라.](7). 주님의 관심은 “내 말들”입니다. 주님은 사상이나 의미, 자신의 뜻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 말들을 전할지니라”고 하십니다. 때로 설교자들이 성경 속에 담긴 사상, 철학, 메시지, 하나님의 뜻은 이러하다느니 개요를 전하는 것을 설교로 아는데,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들”을 전하라고 하셨지 뜻을 전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2[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주]의 집 뜰에 서서 [주]의 집에서 경배하려고 오는 유다의 모든 도시들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전하라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8이제 예레미야가 [주]께서 모든 백성에게 전하라 명령하신 모든 말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대언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들고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렘26:2,8).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 의미를 전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항상 말씀들(words)입니다.

8절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오직 너는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반역하는 집같이 반역하지 말며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니라.](8). 성도들은 언제나 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기 전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정확히 듣기 위해 “귀”를 열어야 합니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앞섭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전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그들을 위한 교훈에 인(印)을 치시니](욥33:6), [그분께서는 가난한 자를 그의 고난 중에서 건지시며 또 학대당할 때에 그들의 귀를 여시나니](욥36:15). 말씀을 들어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일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영적인 복들을 쏟아 부으십니다. 주님께서 아침마다 귀를 일깨우십니다. 귀가 열리고, 일깨움을 받으면 입을 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사50:4-5).

주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받아먹게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을 전하는 자가 도리어 반역하는 집과 같이 동화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이교도처럼 중언부언하며 기도하거나 자기 육신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데 정열을 불태웁니다. 말씀을 들을 줄 모르고, 말씀을 먹지 않는 설교자는 증거를 해도 성경이 아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신변잡기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참 하다가 끝내고 맙니다. 성경 교사, 설교자, 증거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사전 준비물은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먹은 것은 두루마리 책 한 권이었습니다. [이에 내가 보니, 보라, /그분께서/ 한 손을 내게 보내셨는데,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 한 권이 있더라.](9). 두루마리 책이라고 하면 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왔나이다.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 이것이니 곧](시40:7).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했는데 그것을 두루마리 책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주]의 모든 말씀을 그의 입에서 받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렘36:4).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받아먹으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이런 명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인지라 누구나 다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신 교훈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말씀을 먹고, 말씀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끝없이 돈과 빵을 추구하며 배를 섬기는 자들이며, 탐욕에 빠지는 법입니다.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끝없이 물질적인 소욕을 주님의 복인 줄로 믿고 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하셨음에도 결코 마음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성경은 영의 양식입니다. 말씀은 젖입니다(벧전2:2). 그래서 이 말씀의 젖을 통해 자라납니다. 말씀은 물입니다. 이 물로 씻기도 하고(엡5:26), 마시기도 합니다(요4:13-14). 말씀은 빵입니다. 말씀은 사과입니다(잠25:11, 아2:3). 말씀은 단단한 고기입니다(고전3:2, 히5:12,14). 말씀은 송이 꿀입니다(시19:10, 119:103). 말씀은 버터가 되기도 하고(사7:15, 22), 기름이 되기도 합니다(왕상17:14,16). 말씀이 없을 때 영의 기갈과 기근이 옵니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요,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욥을 보십시오. 그는 당대에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원칙은 주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보다 중요시한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니이다.](렘15:16). 그럼 말씀들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종이를 뜯어다가 먹는 것입니까? 예전에 저희 선배들 가운데 영어 사전을 통째로 외운다고 ‘한 페이지를 외우고 씹어 먹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종이를 뜯어 먹으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3:10에 그 의미가 나와 있습니다.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이를 나의 모든 말을 네 마음 속에 받고 네 귀로 들으라.](겔3:10). 이것이 말씀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계10:9).

이렇게 말씀을 받아먹을 때 그는 더 이상 반역하는 집과 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러 나섰다가 반역하는 집과 같이 되어 버리거나 반역을 선동하는 배교자가 되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그들이 말씀을 받아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책은 안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안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더라.](10). 에스겔이 받아먹은 말씀은 애가와 애곡, 재앙의 말씀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다 보면 복에 관한 말씀보다 재앙과 저주에 관한 말씀이 3배 이상 더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은혜와 복, 사랑과 주님의 선물에 대해 가득한 책 같지만 이는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소리이지 주님을 거부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온통 저주와 심판과 재앙이 넘치는 책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성경은 은혜의 말씀(눅4:22), 권능의 말씀(히1:3), 생명의 말씀(요6:68,행5:20, 빌2:16,요일1:1), 위로의 말씀(살전4:18), 지혜와 지식의 말씀(고전12:8), 믿음의 말씀(롬10:8, 딤전4:6), 소망의 말씀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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