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에스겔 강해(05)



말씀 말씀: 에스겔 4:1-17
요절: 에스겔 4:17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혹독한 훈련을 받은 후에 이제 무슨 말씀이든지 순종하여 행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순종하여 수행할 일은 참 이해하기 힘들고, 선뜻 순종하기 힘든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주님이 예레미야에게 처음 주신 일은 이스라엘에게 주실 표적이었습니다. 실물 설교를 통해 그들에게 말이 아니라 뭔가 보여 주게 하셨습니다.

 1-3절입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너는 또 기와를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그 도시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며 그 도시를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보루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산을 쌓아 올리며 또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성벽을/ 부수는 망치들을 사방으로 세우며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그 도시 사이에 두어 철벽으로 삼고 네 얼굴을 그 도시와 마주 대하게 하라. 그 도시가 에워싸임을 당하리니 너는 그 도시를 에워쌀지니라. 이것이 이스라엘의 집에게 표적이 되리라.](1-3). 에스겔은 기와를 가져다가 앞에 놓고 마치 화가처럼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주변에 보루와 산을 쌓아 공격용 전세를 취하는 전쟁 그림을 그리게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2차 포로로 사로 잡혀 와 있는 상태였는데, 예루살렘이 곧 이렇게 포위되어 전멸당할 것임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로 586 B.C 시드기야 왕 재위 11년에 예루살렘은 예레미야의 그림대로 포위당했고, 완전히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그린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섬뜩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고, 조국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할 것이란 암시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기와 위에 그려질 모습이 아니라 주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이 계속해서 내 앞에 있나니](사49:16). 하나님의 손에 새겨진 그림은 지워지거나 부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쉽게 부숴 지는 기와 위에 숯이나 어떤 물감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몰락과 타락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그림으로 그려 놓은 기와와 에스겔 사이에 망치들과 철판을 가져다가 세웠는데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실물을 가져다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마치 어릴 때 병정놀이하듯 하는 이 그림과 모형은 에스겔이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뭔가를 전달해 주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자신은 마치 도시를 공격하는 병사인 것처럼 도시를 마주 대하여 그 도시를 에워싸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표적은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제위 9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에스겔이 기와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향해 보루를 쌓고 쇠망치와 철판을 세운 그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시드기야의 통치 제구년 시월 곧 그 달 십일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자기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을 치고 사방으로 요새들을 쌓으매 예루살렘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니](왕하25:1-2). 하나님의 말씀은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에스겔이 보여준 그림과 모형은 표적으로 보여 준 것으로 약 10년 뒤에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의 정확성, 예언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튼튼한 기초가 됩니다. 

주님은 늘 자신의 종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그 말씀을 성취하심으로 믿음의 근거를 마련해 주십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의 멸망을 상세히 전하셨지만 그 와중에 다시 한번 에스겔을 통해 생생하게 실제 모형도를 세워가며 보여 주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암3:7). 이런 까닭에 우리는 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 

4절입니다.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의 집의 불법을 왼쪽에 놓고 네가 그 위에 눕는 날수대로 그들의 불법을 담당할지니라.](4).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 담당한 예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우리 주님의 타이틀인 “사람의 아들”(인자)이란 칭호로 불렸는데 이는 주님의 사역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백성들의 불법을 담당하는 것은 속죄 염소였습니다. [아론이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염소를 향해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법과 그들의 모든 죄로 말미암은 범죄들을 고백하며 그것들을 염소의 머리에 두고 적합한 사람의 손에 맡겨 그 염소를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법을 자기 위에 짊어지고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16:21-22). 물론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해 두었지만-[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이는 먼 미래의 일이고 에스겔은 당장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는 속죄 염소처럼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왼쪽으로 누워서 이스라엘 집의 불법을 담당했는데, 무려 390일간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이유는 이들의 불법의 연수가 390년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그들의 불법의 햇수를 날수대로 네 위에 놓았음이니 곧 삼백구십 일이라. 너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집의 불법을 담당하고](5). 주님은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셨습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많습니다. 다니엘의 칠십이레도 결국은 49일이 아니라 490년이며 마지막 대환란을 가리키는 한 이레도 일주일이지만 실제로는 칠년입니다. 에스겔에게 주님은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해서 삼백구십일 동안 이스라엘의 불법을 담당하라고 하셨는데, 390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역사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스라엘의 불법의 햇수가 390년이란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범죄한 햇수들을 종합한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에스겔이 이 날수를 채운 후에는 다시 사십일 동안 오른 쪽으로 누워야 했는데 이번에는 유다의 죄악을 담당합니다. [그 날수를 다 채우거든 다시 오른쪽으로 누워 사십 일 동안 유다의 집의 불법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하루를 일 년으로 정하였느니라.](6). 유다는 이스라엘에 비해 그 불법의 정도가 덜했습니다. 둘을 합치면 430년이 되는데 이와 비슷한 수를 찾으면 이집트의 노예 생활의 연도가 되지만 지금 말씀의 초점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비슷한 수를 찾으라면 신, 구약 중간 시기에 해당하는 그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침례인 요한의 외침이 있기 전까지 주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해 침묵의 400여년을 보내셨습니다. 말라기 이후에 대언자가 등장하지 않았고 말씀이 없었습니다.

7-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네 얼굴을 돌려 에워싸인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게 하고 네 팔을 드러내며 그것을 향하여 대언하라. 보라, 내가 끈을 네 위에 놓으리니 너의 에워싸인 날들이 끝나기까지 네가 몸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리지 못하리라.](7-8). 에스겔 그냥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끈에 메여 있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끈에 매인 에스겔처럼 꽁꽁 묶여서 꼼짝하지 못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예루살렘이 되어 보여 주기도 하고 대언자로서 말씀을 증거하는 1인 2역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9절입니다. [너는 또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그것들로 빵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누워야 할 날수대로 곧 삼백구십 일을 먹되](9). 에스겔의 음식은 매우 열악하기 그지없었는데, 밀로 된 빵이 아니라 온갖 잡곡을 썩어 만든 빵인 것을 보아 예루살렘의 식량난이 심각할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390일 동안 이런 빵을 먹는 것은 390년간 전쟁, 가뭄 등의 피해로 인해 먹을 것이 거의 없을 것임을 말하는데 이 기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참조 구절이 없습니다. 구약의 어느 시점에도 예루살렘은 390년간 포위를 당해 본 적이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해석해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혼혈이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는 본문이 말하는 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해석입니다. 어쨌든 에스겔을 통해 보여 주신 것은 그들의 불법의 햇수 동안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물질적인 복은 영적인 복을 받은 후에 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죄악과 불법을 행하는 동안 성도들에게 행복과 복된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10-11절입니다. [너는 먹을 음식을 무게로 달아서 하루에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마시되 때를 따라 마실지니라.](10-11). 에스겔이 먹은 음식의 양은 덩어리 단위가 아니라 무게로 달아서 이십 세겔씩 달아서 주었는데 이는 가중되는 식량난으로 인해 식량 배급제가 실시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십 세겔은 7/8파운드 즉 475그램인데 이는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지급되는 한끼 식사보다 더 적은 양입니다. 기근의 때에는 늘 저울이 등장하는데 이는 무게를 달아서 식량을 분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셋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들으니 셋째 짐승이 이르되, 와 보라, 하기에 내가 보니, 보라, 검은 말이라. 그 위에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계6:5).  

기근은 늘 가뭄이나 전쟁과 동반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물 역시 풍족하지 않습니다. 물 한 힌이라고 하면 6ml 정도의 물 즉 한 스푼도 채 안되는 물입니다. 마치 물을 약먹듯이 먹어야 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12절입니다. [너는 그것을 보리 과자같이 먹되 그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에게서 나온 똥으로 그것을 구울지니라, 하시니라.](12). 연료가 부족하면 가축들이나 짐승들의 똥이 훌륭한하 연료가 됩니다. 화덕에 구운 것이 아니라 똥으로 불을 피워서 그 재 속에 반죽을 넣어서 굽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똥을 재료로 쓰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는 그만큼 재료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한 줌의 빵을 사람의 똥으로 불을 만들어 그 속에서 구워 먹는 것은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보잘것 없는 음식을 이토록 수치스럽게 만들어 먹는 일은 남모르게 해 먹어야 할 일임에도 에스겔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구워 먹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백성임을 자부하며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기던 그들이 그들에게서 나온 똥으로 빵을 구워 먹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선민으로서의 모든 자존심과 긍지를 모조리 밟혔으며, 조롱과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장면을 볼 이방인들은 자기 집에 돌아가서 두고 이들의 먹는 것을 화제 거리로 삼을 것입니다. 불법을 행한 죄의 징벌이 이렇게 처절합니다. 

13절입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로 쫓아낼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바로 이와 같이 자기들의 더럽혀진 빵을 먹으리라, 하시기에](1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배가 될 것을 약속해 주셨는데, 이는 조건부 언약이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면 그렇게 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보배가 아니라 거름덩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모세를 통해 준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참으로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보배가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 또 너희는 내게 제사장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들을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이렇게 되어야 할 민족이 이방인들 앞에서 더럽혀진 빵을 먹습니다. 죄는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듭니다. 불법을 행할 때 사람들의 자랑거리는 치욕거리가 되며, 긍지는 변하여 심한 부끄러움이 됩니다. 

죄악 된 민족의 종말은 불결한 빵을 먹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강력한 경고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들을 잡아먹은 예가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 아들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너희 딸들의 살을 먹을 것이며](레26:29).이것도 없어서 문제일 정도였습니다. [자기가 먹는 자기 자녀들의 살을 그들 중 누구에게도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원수들이 네 모든 성문에서 너를 에워싸고 곤경에 빠뜨려 괴롭게 하므로 그에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며](신28:55). 음식 규례가 철저하고 정결하여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인분에 구운 빵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잡아먹는 상황까지 전개됩니다. 목메어 단 동물들, 찢긴 짐승조차 먹지 않았고 돼지도 불결한 음식이라고 먹지 않았던 민족이 어느 이방 민족보다 더 가리지 않고 먹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은 오직 불법과 죄로 인한 심판이었습니다. 

에스겔은 주님의 명령에 질겁을 했습니다. 그는 도저히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그런 명령이라고 생각했던지라 입을 열어 주님께 말했습니다. [내가 이르되, 아 /슬프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이는 내 혼이 /지금까지/ 더럽게 된 적이 없었음이니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절로 죽은 것이나 갈기갈기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내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14). 에스겔은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나 유난히 더 음식 규례에 철저했던지라 인분에 구운 빵을 먹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놀라고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주님 앞에 고했습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항변하는 장면과 매우 흡사합니다(행10:11-15).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깨끗하게 한 음식을 더럽다고 생각했지만 에스겔은 실제로 더러운 빵을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가증한 것들을 입에 담기 시작한지 오래였습니다. [내가 하루 종일 손을 펼쳐서 자기 생각을 따라 선하지 않은 길로 걸어가며 반역하는 백성을 향하게 하였나니 곧 동산에서 희생물을 드리고 벽돌 단에서 분향하며 내 앞에서 계속하여 내 분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그들은 무덤사이에 머물며 무덤의 기념비가 있는 데 거하고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이르기를, 너는 너 스스로 서 있고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이는 내가 너보다 거룩하기 때문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하루 종일 타오르는 불이로다.](사65:2-5).


여기서 한 가지 배울 수 있는 진리는 혼과 몸의 관계입니다. 에스겔은 “내 혼이 지금까지 더럽게 된 적이 없었음이니이다”라고 했는데, 구약 성도들의 혼과 몸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몸의 부정이 곧 혼의 불결이었습니다. [내 혼이 진토(塵土)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나를 살리소서.](시119:25). 그래서 율법에 금한 음식을 먹든지, 더러운 것을 만지든지 할 때면 그 사람의 혼도 더럽혀 집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15:10-11). 주님의 이 가르침은 당시 손 발을 씻고, 잔을 깨끗이 하여 음식을 먹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던지라 베드로는 주님께 이 말씀의 해석을 요구했습니다. 모두 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느냐? 무엇이든지 입 안에 들어가는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증거, 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니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거니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6-20).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이 바뀐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뭔가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적 할례’-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성령의 칼로써 우리 안에 영적 할례를 행하셨습니다. [또한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림으로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느니라.](골2:11).

베드로는 이 사실을 분명히 들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한 경우였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계속 길을 가다가 그 도시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여섯 시쯤 되었더라. 그가 매우 시장하여 먹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그가 무의식 상태에 빠져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니 마치 네 귀퉁이를 맨 큰 보자기 같은데 땅으로 내려오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짐승이 있더라. 또 한 음성이 나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이는 내가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결코 먹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매 그 음성이 다시 두번째 말하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 일이 세 번 있은 뒤에 그 그릇이 다시 하늘로 올려지더라.](행10:9-16). 베드로는 주님께 직접 묻고 그 대답을 들었지만 여전히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있다고 주장했고,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먹는 음식으로 경건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나 양심에 묻지 않고 먹어도 됩니다. [무엇이든지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5). 이방 종교들은 개고기를 먹지 말라(불교), 소고기를 먹지 말라(힌두교), 돼지 고기를 먹지 말라(회교) 는 등의 고기 시장에서 파는 것들을 금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금욕을 위주로 하는 종교와 복음의 차이를 성경은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니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이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없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것이 거룩히 구별되기 때문이라.](딤전4:3-5).

하지만 에스겔은 구약의 제사장의 아들로서 경건하게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살아 왔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주님의 이런 명령은 자신이 배우고 아는 성경 지식과 상식, 믿음에 너무나 위배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에스겔은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정해 준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 속에 작정하였으므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내시들의 우두머리에게 간구하니](단1:8). 다니엘의 이런 결심이 주님의 눈에 선한 것이었듯이 에스겔의 결심 역시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에스겔에게 주신 사명은 자신의 일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민족들의 죄악을 보여 주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더러운 음식이 아니라 더러운 자아입니다. [하물며 불법을 물 마시듯 하는 사람이야 얼마나 더 가증하고 더럽겠느냐?](욥15:16).

15절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의 말을 들으시고 인분 대신 쇠똥으로 대신하게 해 주셨는데 이는 매우 큰 은혜입니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네게 사람의 똥 대신 쇠똥을 주었으니 너는 그것을 가지고 네 빵을 준비할지니라, 하시고](15). 에스겔의 간청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빵 지팡이를 부러뜨리리니 그들이 염려하며 빵을 달아 먹고 또 놀라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빵과 물이 부족하여 서로 놀라고 자기 불법으로 인하여 소멸되리라.](16-17). 지팡이는 사람이 몸을 기대어 설 수 있게 하는 최소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빵 지팡이를 부러뜨리신다는 것은 그들이 먹고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마저 없애 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지팡이가 부러지면 일어 설 수 없듯이 빵 지팡이를 부러뜨려지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이런 식량난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왕하6:26-29). 이는 이사야가 일찍이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는, 보라, {주} 곧 만군의 [주]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을 제거하실 것임이니 곧 /그들이/ 의지하는 모든 빵과 의지하는 모든 물과](사3:1). 예레미야 역시 이 사실을 자세하게 언급했습니다. [내가 너희의 빵 지팡이를 부러뜨리면 여인 열 사람이 한 화덕에서 너희의 빵을 구워 다시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레26:26).

본래 예루살렘은 먹을 것이 넘치는 풍요의 도시입니다. [오 예루살렘아, [주]를 찬양하라. 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는 그분께서 네 문들의 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분께서 네 영토 안에서 화평을 이루시고 가장 좋은 밀로 너를 채우시며](시147:12-14). [내가 이곳의 양식에게 넘치도록 복을 주고 빵으로 이곳의 가난한 자들을 만족하게 하리로다.](시132:15). 이런 땅이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을 잡아먹는 형편이 된 것은 순전히 그들의 범죄로 인함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풍요로움을 유지하려면 늘 주님의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빈곤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Archived(완료) > 구약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스겔(07)  (0) 2006.05.25
에스겔(06)  (0) 2006.05.24
에스겔(04)  (0) 2006.05.22
에스겔(03)  (0) 2006.05.21
에스겔(02)  (0) 2006.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