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9:1-11
요절: 에스겔 9:4
9장은 우상 숭배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요한 계시록의 대 환란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두 가지 표가 나오는데 짐승의 표가 하나이고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인데 이 내용이 지금 에스겔 9장에 나옵니다.
1절입니다. [그분께서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치며 이르시되, 그 도시를 맡은 자들로 하여금 각각 파괴하는 무기를 손에 들고 가까이
나아오게 하라, 하시니라.](1). 주님은 에스겔의 귀에 크게 외치셨는데 주님의 음성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나팔 소리
같다거나 천둥소리 같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외쳐 이르다는 표현은 주님의 그런 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오랫동안 나며 점점
더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19:19). 사무엘하 22:14에 보면, [주께서
하늘에서부터 천둥소리를 내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 자신의 음성을 내시며]라고 말합니다.
욥기의 증언 역시 일치합니다. [번개가 있은 뒤에 한 음성이 우렁차게 울리나니 곧 그분께서 자신의 빼어난 음성으로 천둥을 치시는
것이라. 그분의 음성이 들릴 때에 그분께서 그것들을 멈추게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음성으로 놀랍게 천둥을 치시며 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시나니](욥37:4,5). 욥기 40:9에도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의 음성은 천둥소리임을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같이 팔을 가지고 있느냐? 네가 하나님같이 음성으로 천둥소리를 낼 수 있느냐?](욥40:9). [또 주께서 하늘들에서
천둥소리를 내시고 가장 높으신 이께서 자신의 음성을 주시니 곧 우박들과 숯불들이로다](시18:13), [주의 음성이 물들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천둥을 치시나니 주는 많은 물들 위에 계시도다.](시29:3). 이런 이유로 신약에서 주님의 음성이 하늘에서
날 때면 주위 사람들은 모두 천둥소리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곁에 서서 들은 사람들은 천둥이 쳤다고도 하며 다른 사람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요12:29). 장차 휴거 때에 주님의 음성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주님의 음성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천둥소리와 같을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온 그 도시를 맡은 자들은 예루살렘의 치리자들이나 바릴론의 군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은
한 민족을 맡기도 하고 도시를 맡기도 하며, 개개인을 맡기도 하는데 예루살렘을 맡은 천사들은 여섯 명이었습니다.
2절입니다. [보라, 여섯 사람이 북쪽을 향한 높은 문의 길로부터 나오는데 각 사람이 살육하는 무기를 손에 가졌으며 그 중의 한
사람은 아마포 옷을 입고 옆구리에 기록관의 잉크통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섰더라.](2). 여섯 명의 천사가 칼이나
도끼 같은 살육 무기를 가지고 손에 들고 나왔는데, 천사 하나가 하룻밤에 18만 5천명을 죽인 예도 있거니와(왕하19:5) 여섯 명이 설치면 한
도시는 하룻 저녁에 충분히 전멸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주님의 진노의 심판을 집행할 천사들입니다. 여섯 가운데 한 명은 옆구리에 기록관의 잉크통을
차고 있는데, 이는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유일한 표현입니다(9:2,3,11). 잉크통을 찼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쓰거나 표시를 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주님은 실제로 그에게 표시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3절입니다. [그룹 위에 머물러 계시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으로부터 떠나 위로 가서 그 집의 문지방에 이르매 그분께서
아마포 옷을 입고 옆구리에 기록관의 잉크통을 찬 사람을 부르시니라.](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디에 거하시는가? 3절 말씀은 성전을
떠나신 주님을 묘사합니다. 주님은 성전의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의 긍휼의 자리에 머무십니다. 거기에는 그룹들이 마주 보고 있고 그 사이에
주님이 거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머물러 계시던 주님이 성전의 문지방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제 곧 성전을 떠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태양을 향해 절을 하며 더럽혔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성전에 머물지 않으시고 떠나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은 단지 건물에 지나지 않으며, 완전히 불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는 역사적 사건이 앞으로 있을 예언적 사건의 예표가 되는 그런
모습입니다.
4절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 도시의 한가운데 곧 예루살렘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며 그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찍으라, 하시니라.](4).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도시 한 가운데를 지나가며 어떤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찍게 하십니다. 대 환란 때 마귀는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하는데 매우 유사합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계13:16). 이렇게 표를 받지
않으면 물건을 살 수도 팔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즙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천사가 그들을 뒤따르며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자기 이마 안에나 손 안에 그의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즙을 마시리니 곧 그분의 격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즙이라. 그가 거룩한 천사들의 눈앞과 어린양의 눈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계14:9-10).
표를 받은 자는 고통으로 인해 밤낮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로다.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 자들과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밤이나 낮이나 안식을 얻지 못하리라.](계14:11). 표를 받은 자리에 악취가 나며 몹시
아픈 헌데가 생길 것입니다. [첫째 /천사/가 가서 자기 대접을 땅에 쏟아 부으매 짐승의 표를 가진 사람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악취가 나며 몹시 아픈 헌데가 생기더라.](계16:2). 이들의 종말은 어떻게 됩니까? 불 못입니다. [짐승이 잡히고 또 그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대언자도 그와 함께 잡혔으니 그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기적들로 속이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으로 불타는 불못에 던져지고](계19:20).
반면에 하나님이 주시는 표가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印)을 가진 다른 천사가 동쪽으로부터 올라와 땅과
바다를 해할 권능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외치며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 안에 인을 칠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7:2-3). 이들은 진노 가운데서도 건짐을 받을 자들입니다. [또 그것들에게 명령이 떨어져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나무는 하나도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 안에 하나님의 인(印)이 없는 사람들만 해하라 하더라.](계9:4). [또 내가
바라보니, 보라, 어린양께서 시온 산 위에 서 계시고 그분과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 안에는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더라.](계14:1). 이들은 주님께서 구제해 주실 극소수의 남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대환란 가운데 구제받을 자들에 대해 구체적인
예언이 있습니다. [그때에 네 백성의 자손들을 위하여 일어서는 큰 통치자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의 때가 있으리니 이것은 민족이
있은 이래로 그때까지 없었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에서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건짐을 받으리라.](단12:1).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 역시 구제받을 자들입니다. 잉크통을 찬 사람이 하는 일은 구제받을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누구에게 표를 하는가?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합니다.
영적, 도덕적 타락에 탄식하는 자들, 울부짖는 자들은 그들과 동화되거나 일치되지 않고, 애통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모두 타락하고 죄로 물들어도 ‘그 일로 인해 탄식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이들이 지하 골방이나 뒷골목이나 예루살렘의 산꼭대기에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잉크통을 찬 천사는 예루살렘 한
가운데를 통과하면서 표를 찍었는데 이들은 분명히 죄악 된 세상을 향해 말씀을 외치던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자고로 영적인 사람들은 산이나 들에서
수도원을 지어놓고 은둔 생활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죄악 된 세상을 맞서서 그들에게 죄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자들이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죄악 된 사람들을 마주보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오늘 저는 표에 대한 몇 마디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몸에 표시를 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
살을 베지 말며 너희 몸에 아무 표도 새기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9:28). 표는 주님이 하시거나 마귀가 하는데 모두 자신의
소유물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물건에 표를 해 둘 때는 구분을 필요로 하거나 소유권자가 자신이란 것을 표시할 때입니다. 인류의
최초의 살인자였던 가인(카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표를 받았습니다. 그가 이마에 받은 표는 죄의 표요, 행악자의 상징이었습니다. 창세기 4:15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로 보복을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아무도
그를 찾아 죽이지 못하게 하시니라.](창4:15). 오늘날 성도들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인치시듯이, 자신의 성도가 아닌 마귀의 자녀들에게도
표시를 해 두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지만 주님은 결코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와 마귀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죄악을 행한 자들이 받는 표는 결코 지워지거나 씻겨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표는 이 땅의 어떤 물이나 기름이나 화학 약품으로 씻어도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22 [이는 네가
천연소다로 네 몸을 씻고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불법이 여전히 내 앞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렘2:22).
불법의 표시는 인간의 행위로 씻을 수 없습니다. 죄악의 표시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씻는 강력한 화학 약품입니다. 주님의 피의 효능은 불법과 허물을 비롯한 모든 죄를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합니다. 이렇게 피로 한번 씻겨지고 난 후에는 언제라도 말씀의 물로 씻을 수 있습니다. 시편130:3-4 [오 주여, 주께서 불법들을 지켜
보실진대(MARK-표시하실진대) 누가 능히 서리이까? 그러나 용서가 주께 있사오니 이것은 주를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130:3-4).
주님은 불법과 죄의 표시를 지우시고, 성령을 인치심으로 자신의 소유로 표시하십니다. 죄에 대해 슬퍼하는 사람들은 아낌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슬퍼하고, 부담을 느끼며,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주님은 주목하시고, 표시하십니다. 죄에 대해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누구나 단번에 영원히 거룩해집니다. 심판의 날에 어떤 표를 지녔느냐?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사실을 확연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 도시의 한가운데 곧 예루살렘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며 그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찍으라, 하시니라. 또 그분께서 내가 듣는
데서 다른 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그 도시를 지나가며 사람들을 치되 너희 눈이 아끼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여자들을 철저히 죽이되 표가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 하시니 그들이 그 집 앞에
잇는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더라.](겔9:4-6).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이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욥기 10:14을 보겠습니다.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주목하시고 내 불법을 사면하지 아니하시나이다.](If I sin,
then thou markest me, and thou wilt not acquit me from mine iniquity.) 만약 우리가 죄를
범하면 주님께서는 나에게 그것을 표시하십니다. 주님의 눈은 우리의 행한 모든 행위들과 마음속의 깊은 것들까지 감찰하시며 그것들을 모두
기록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죄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한 모든 일들을 다 기록해 두십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불신자들은 백 보좌의 심판석에서 자신이 행한 헛된 말 한마디까지 다 해명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6,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니](마12:36). 주님이 모두 표시해
두셨기에 그 앞에서는 아무도 거짓말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일을 모두 회계보고 해야 합니다. 주님은 대차 대조표를 맞추어
보시듯이 다 세시고, 맞추어 보시고, 어떤 감사(監査)보다 더 철저히 감사(監査)하실 것입니다. 죄에 대한 표는 자기 자신에게도 무거운 짐이
됩니다. 범죄한 사람들이 법 집행을 받고 난 후에도 여전히 ‘범죄자’, ‘전과자’로 낙인찍힌 그 한 가지 사실로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여러분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사람들을 표시(MARK-주목)하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배울 것이 있으며, 얻을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결말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37:37-40, [완전한 사람을 주목하고 곧바른 자를 눈여겨 볼지어다(MARK). 이는 그 사람의 마지막이
화평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범죄자들은 멸망하리니 사악한 자들의 마지막은 끊어질 것이로되 의로운 자의 구원은 주께로부터 오나니 그분은 고난의 때에
그들의 힘이 되시리로다. 주께서 그들을 도우시며 건지실 것이요, 사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건져 구원하시리니 그 까닭은 그들이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시37:37-40). 주님께서 이들을 표시해두라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얻는 결과를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완전한 사람들은 고난의 때에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완전한 사람들은 사악한 자로부터 건져냄을 입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을 주목하고,
표시해 두십시오.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표시해 두고, 주목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까?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 주위에 살아 있는 사람, 완전히 검증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표시하지 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이미 검증이 끝난 사람들을 표시해 두고, 그들의 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실수나 오류가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미 역사에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된 신앙 위인들의 본을 따르십시오. 죠지 휫필드, 쟌 웨슬레, 허드슨 테일러, 죠지 뮬러, 디엘 무디 같은 분들을 표시해 두고 그들의 본을
따라 보십시오. 빌립보서 3:17, [형제들아, 너희는 다 함께 나를 따르는 자가 되고 또 너희가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 같이 그렇게
걷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MARK).](빌3:17).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표를 지녀야 합니다. 신약 성도들이 따라야 할 본으로 제시된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17,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 효력이 있기 때문이라. 이 규칙에 따라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는 내가 내 몸에 주 예수님의 흔적(MARK-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갈6:14-17).
이것은 바로 고난의 표입니다. 중세의 성자로 추앙받는 성 프란시스코는 마지막에 자신의 손과 발에 옆 구리에 주님이 입었던 상처와 동일한
오상(五傷)을 입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바울이 ‘내 몸에 주 예수님의 흔적(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런 오상(五傷)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닐 수 있습니까? 골로새서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that which is behind of the afflictions
of Christ)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 들
뒤에 있는 것, 즉 교회를 위해서 일함으로써, 핍박과 박해를 받음으로, 주 예수님의 흔적을 지닐 수 있습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자신이 주님의
제자란 표를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자랑스런 일입니다. 버어마 선교사 져드슨은 온 몸의 상처로 인해, 버어마 당국으로부터 짧은
옷을 입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져드슨의 몸에는 째찍과 매질로 온 몸이 흉했습니다. 져드슨의 발은 차꼬로 채워진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그의 손은 늘 묶여 있었고, 메달려 있었기에 손 목이 성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몸에 지닌 주님의 표(흔적)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자서전 격인 고린도후서 12:23-28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본보기의 표시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5-6절입니다. [또 그분께서 내가 듣는 데서 다른 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그 도시를 지나가며 /사람들을/ 치되 너희 눈이
아끼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여자를 철저히 죽이되 표가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 하시니 그들이 그 집 앞에 있는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더라.](5-6). 주님의 심판은 철저합니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으며, 노약자와 어린이와 여자라고 해서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주님은 표가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표가 있는 자들은 주님이 아끼시고, 구원하십니다. 주님은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거룩한 곳이
가장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자연스럽게 [이는 하나님의 집에서 반드시 심판을 시작해야 할 때가 이르렀음이니 만일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의 마지막은 어떠하리요?](벧전4:17)란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순서는 늙은
사람부터인데 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장로들부터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 어른 행세를 하는 사람들, 장로, 권사, 집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부터 치라는 말씀입니다.
7절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집을 더럽히고 그 뜰을 죽임 당한 자들로 가득 채우라. 너희는 나아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아가서 그 도시에서 죽이니라.](7). 성전은 하나님이 떠나셨으므로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그곳은 제사장들이 더럽혔고, 치리자들이
와서 우상에게 절을 하던 곳이 되어 버렸던 곳이라 주님은 그 집을 더럽히고 시체들로 가득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시체를 만지기만 해도
부정하게 되었는데 이제 이들은 시체로 가득 찬 성전을 보아야 했고, 자신들의 몸이 시체가 되어 그곳에 쌓여 있게 되었습니다.
8절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동안에 나는 남아서 얼굴을 엎드리고 부르짖어 이르되, 아 /슬프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예루살렘 위에 주의 격노를 쏟으사 이스라엘의 남은 모든 자를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매](8). 에스겔은 이 장면을 보고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집행 명령이 떨어진 심판은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분노를
보내어 네 위에 임하게 하고 네 길들에 따라 너를 심판하며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湺應)하리라](겔7:3)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죄악이 충만하게 찼을 때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악이 차면 그것이 곧 끝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은 다급한 마음에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예루살렘 위에 주의 격노를 쏟으사
이스라엘의 남은 모든 자를 멸하려 하시나이까?](8). 에스겔은 후에 다시 한번 이런 질문을 하는데 그는 매우 놀라고도 다급했습니다. [이에
내가 대언할 때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에 내가 얼굴을 대고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아 /슬프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완전히 끝내시고자 하나이까? 하니라.](겔11:13). 주님은 표를 해 두신 자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끝을
내십니다.
전에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이 건짐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누가 와도 죄악된 자들을 중보 기도로 건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땅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자기 혼만 건지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14:14).
예레미야 역시 에스겔과 같이 주님 앞에 민족을 위해 기도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서 있다 할지라도 내 생각은 이 백성을 향하여 기울 수 없나니 그들을 내 눈앞에서 쫓아내고 떠나게 할지어다](렘15:1).
노아, 다니엘, 욥, 모세, 사무엘은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보 기도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유다의 죄악이었습니다. [네
두려움이 황폐함같이 이르겠고 네 멸망이 회오리바람같이 이르겠으며 네게 근심과 걱정이 이르리니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터이나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아침 일찍 나를 찾을 터이나 그래도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니] (잠1:27-28)란 말씀대로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에스겔의 울부짖는 기도에 이렇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의 불법이
심히 크고 그 땅이 피로 가득하며 그 도시는 사악함으로 가득하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주]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하기 때문이라.](9). 이미 8장에서 주님은 유다에서 벌어지는 가증한 일 3가지를 차례대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주께서 보지 아니하신다고 입을 놀렸는데 주님이 이 땅을 버리시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 주셨고, 주님께서 그들이 행하는
은밀한 일들까지 낱낱이 보고 계심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대로 이들은 자신들이 심은 그대로 거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속는 속임수 가운데 하나는 뿌린 대로 거두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길에서 난
열매를 먹으며 자기 계략들로 채워지리니](잠1:31). 호세아 8:7에도 말씀하시기를, [이는 그들이 바람을 심었은즉 회오리바람을
거둘 것임이라. 그 /심은/ 것이 줄기가 없은즉 이삭이 양식을 내지 못할 것이요, 혹시 낸다 할지라도 타국인들이 삼키리라.](호8:7)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법칙을 거슬러서 주님께서 무엇을 해 주시도록 구할 수 없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갈6:7). 죄악의 씨를 심고 복과 형통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심지 않고 거두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심하게 자신을 속인 경우입니다. 죄악을 뿌리고 심은 후에 복을 거두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주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거두는 것은 늘 심는 것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밀 한 말을 밭에 뿌리면 한 말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적게는 서른 말에서
많게는 백말까지도 거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악의 씨앗 역시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 아니라 뿌린 것보다 수 십배 수 백배의 열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숭배한 우상 숭배의 죄가 이렇게 무섭고 크게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심지도 않고 단지 영적인 사람,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느 대언자들 못지 않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지만 유다의 죄는 그들의 기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넘어 서 버린 것입니다.
다시 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의 불법이 심히 크고 그 땅이 피로 가득하며 그 도시는
사악함으로 가득하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주]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하기 때문이라.](9). 주님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한 말 두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지 반드시 그에 대한 보응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상 숭배의 죄악도
죄악이지만 하나님을 조롱하는 무지와 불신의 말을 쏟아내었는데 주님은 그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니](마12:36). 말은 씨앗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의 배는 자기 입의 열매로 만족될 것이요, 그는 자기 입술의 소산(燒産)으로 충족되리라.](잠18:20).
사물에 대해 잘못 말하는 것보다 사람에 대해 잘못 말하는 것이 더 큰 죄이며, 사람에 대해 잘못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에 대해 잘못 말하는 것은
더 큰 죄악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들 보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 혀를 지켜 악에서 떠나게 하고 자기 입술을 지켜 교활한 것을
말하지 말게 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구하고 그것을 따를지니 이는 주의 눈은 의로운 자들 위에 거하며 그분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열려 있으되 주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기 때문이니라.](벧전3:10-12).
10절을 보십시오. [또 나로 말하건대 내 눈이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가 불쌍히 여기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길대로 그들의 머리에
보응하리라, 하시더라.](10). 주님은 그들의 길대로 그들의 머리에 보응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행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부당한 일로 인하여 보응을 받으리니 여기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함이 없느니라.](골3:25).
11절입니다. [보라, 아마포 옷을 입고 옆구리에 잉크통을 차고 있는 사람이 그 일을 보고하며 이르되,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대로 내가
행하였나이다, 하더라.](11). 잉크통을 차고 있는 사람은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대로 내가 행하였나이다"라고 보고했는데, 그가 한 일은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로 인하여 탄식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건져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주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행하였나이다” 이것이 종들이요, 청지기들이 심판석 앞에서 드릴
최선의 보고입니다. 우리 주님 역시 그런 보고를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끝마쳐서 아버지를 땅에서 영화롭게
하였나이다.](요17:4). 우리가 행한 일들과 말들로 인해 주님께 심판을 받게 될 때 바울처럼 “나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쳤노라” 할
수 있다면 복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