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11:1-12
요절: 에스겔 11:5
마지막 말세의 특징은 거짓이 진리를 압도하고, 유언비어와 소문과
소문이 꼬리를 물지만 사람들은 정작 주님이 주신 성경 말씀인 진리로부터는 귀를 돌이킨다는 점입니다.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딤후4:3~4)는
말씀은 멸망을 앞둔 사회라면 어디나 예외 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앞두고 천사들의 말을 들은 롯은 자기 딸들과 사위들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은 전혀 그것을 농담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이에 롯이 나가서 자기 딸들과 결혼한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이 도시를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하였으나 그의 사위들이 그를 농담하는 자로 여겼더라.](창19:14). 대홍수를
앞두고 방주를 몸소 만들면서 의의 말씀을 증거한 노아의 음성에 사람들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데 목수로
일했던 일꾼들조차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지라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방주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건물을 짓는
건축자들이 지옥에 가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스겔을 통해 전하는 주님의 말씀 역시 이와
동일합니다. 멸망은 언제나 갑자기 닥칩니다. [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임하리니 그가 갑자기 망하여 구할 길이 없으리라.](잠6:15),
[그들의 재앙이 갑자기 생기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겠느냐?](잠24:22). 그러나 주님은 갑작스런 멸망 이전에 오랫동안 수
십 차례, 수백 번 이상 자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셨음을 아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들은 갑자기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오래 전부터
계획했고, 예고했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자주 책망을 들으면서도 듣지 않는 귀, 듣지 않는 마음으로 인해 주님조차도 어떻게 구할 길이
없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굳게 하는 자는 갑자기 멸망을 당하되 구할 길이 없으리라.](잠29:1).
우리는 얼마나 갑자기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거하는 곳을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대하36:15), [[주]께서
너희에게 자신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일찍부터 일어나 보내시고 보내셨으나 너희가 주의하여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렘25:4).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노아는 무려 120년 동안 의를
선포했습니다(벧후2:5). 그러나 심판이 집행되는 것은 갑작스럽고 순식간으로 보입니다. 준비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닥치든지 다
순식간이요, 갑자기 임하는 법입니다. 불법은 쌓이는 순간 때가 차면 그 끝이 이르고 심판이 집행되는데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불법이 너희에게 무너지려고 터진 담 곧 높은 담에서 부풀어올라 순식간에 갑자기 부서지는 담같이 되리라, 하셨은즉](사30:13).
이와 반대로 거짓 대언자들은 늘 ‘심판은 없다 또는 심판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먼 훗 날 언제가 심판이 올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알지 못할 것이며 해악이 네게 닥치리라. 그러나 네가
능히 그것을 물리치지 못할 것이며 황폐함이 네게 갑자기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47:11).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영(靈)께서 또 나를
들어올리사 [주]의 집의 동쪽 문 곧 동쪽을 바라보는 문으로 데려오시니라. 보라, 그 문의 입구에 스물다섯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 가운데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통치자들이라.](1). 여기 나오는 스물 다섯 사람은 이미
8:16에서 언급된 백성의 고관들(대상24:2-5)입니다. 에스겔이 친히 밝힌대로 이들은 ‘백성의 통치자들’입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대신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중에 이름이 언급된 두 사람이 있는데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냐의 아들 블라댜입니다. 전에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가 언급된 적이 있는데(겔8:11) 이번에는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야아사냐란 이름은 “주께서 들으신다”란 뜻의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블라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란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이들이 자기 이름대로 주께 간구했으면 주님은 그들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간구하는 대신 태양신에게 간구했습니다.
2절입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은 이 도시에서 해악을 꾸미며 사악한 꾀를 내놓는 자들이니라.](2).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평가하는 것은 그들의
혈통이나 그들의 지위나 학식이나 권력 등의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보실 때 그들은 ‘이 도시에서 해악을 꾸미며 사악한 꾀를 내놓는
자들’이었습니다. 뭔가를 꾸미는 것은 좋은 것이 없습니다. 꾸미는 것은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거나 속이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화장을 하는 것도
뭔가를 꾸미는 일인데 'make up'이란 뜻 자체가 ‘속이다’란 뜻입니다. 시편 37:2에 다윗은 말하기를, [사악한 자가 의인을 치려고
꾀를 꾸미며 그를 향하여 자기 이를 가는도다.](시37:12)라고 했습니다. 가장 악한 것은 합법을 가장한 불법, 법을 아는 지식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악을 꾸미는 행위입니다. [법을 힘입어 해악을 꾸미는 불법의 왕좌가 어찌 주와 교제를 갖겠나이까?](시94:20).
이런 죄는 배운 사람일수록 더 많이 저지릅니다. 주님이 미워하는 여섯 가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꾀를 꾸미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여섯
가지를 미워하시며 참으로 일곱 가지가 그분께 가증한 것이니 곧 교만한 눈빛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손과 사악한 꾀를 꾸미는 마음과
신속히 해악으로 치닫는 발과 거짓들을 말하는 거짓 증인과 형제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는 자니라.](잠6:16-19). 선한 양심과
의로운 마음이 바탕되지 않는 교육은 악을 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지식이 악을 꾀하는 도구요, 불법을 행하는 수단입니다. 이는 비단 세상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다니지만 육신적인 성도들에게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성경 지식을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과 죄를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삼고, 교회를 나오지 않고 놀러 다니면서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다!’고 외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예배를 드리는 대신 오락과 육신의 쾌락을 더 사랑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헌금과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다. 신약에서는 낼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나는 돈을 너무 사랑해서 헌금하기 싫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배란 생활 가운데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지 교회에 나가서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廢)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란 말씀은
절대 인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을 일컬어 성경은 “법을 힘입어 불법을 꾀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머리에 지식이 있지만 마음에
은혜와 의가 없는 사람들은 늘 사악한 꾀들을 꾸미며, 변명거리를 찾아내고, 자기 방어 논리만을 만들어 냅니다. 이들은 결코 회개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미워하십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게 행하며 사악한 꾀들을 꾸미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잠14:17).
이런 자들을 주님은 저주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 침상에서 불법을 꾀하며 악을 꾸미는 자들이여! 아침이 빛을 발하면 그들이 그 일을
행하나니 이는 그 일이 그들의 손의 권세 안에 있기 때문이로다.](미2:1). 믿음은 잔 머리를 굴리는 일이 아닙니다.
3절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우리가 집들을 짓자. 이 도시는 가마솥이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느니라.](3). 주의 전을 등진 채 태양을 향해 경배하던 백성들의
통치자들이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와 조명을 얻는 대신 자기들이 절한 태양신에게 계시를 받았던지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우리가 집들을 짓자”라는 지극히 정치적이며 인기 영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2차 포로로 바빌론으로 잡혀갔고, 남아 있는
예루살렘은 언제 망할지 모르는데 그들은 영적 각성이나 회개대신 ‘걱정하지 말자. 이곳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는 이들의 패망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이 말은 오늘날 거짓 대언자들의
단골 메뉴입니다. ‘주님 오시려면 아직 멀었다.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등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서 ‘꼭 지금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세요’ 같이 말합니다.
[이 도시는 가마솥이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는
말은 심판을 경고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가마솥처럼 튼튼해서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가마솥 안에 있는 고기처럼 자신들은
절대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기들의 소망일 뿐 진리가 아닙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끓는 가마솥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이 두번째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기에 내가 이르되, 내가 끓는 가마솥을 보는데 그 표면이
북쪽을 향하고 있나이다, 하니](렘1:13). 그렇다면 안에 있는 고기는 모두 익거나 타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냉장고
대용으로 고기를 넣어서 보관하는 안전한 가마솥이 아니라 끓는 가마솥이라고 말씀합니다. [양떼에서 좋은 것을 취하고 또 그 뼈들을 솥 밑에
태워 그 솥이 잘 끓게 하며 또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의 뼈들을 그 안에서 삶게 할지어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화
있을진저, 피 흘린 도시 곧 찌끼가 나가지 아니하여 그 안에 찌끼가 남아 있는 솥이여! 그것 위에 제비를 뽑을 것도 없이 조각 조각 그것을
내어올지니](겔24:5-6). 예루살렘은 불태워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끓는 솥 안의 고기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조언도 결코 들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죄에는 결코 지혜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해로운 조언들이 너무 많습니다. 부활, 휴거,
재림, 영원한 지옥 불 등에 대한 말씀을 상징이나 비유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재림은 무슨 재림? 휴거 참 웃기고 있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복음을 완전히 다 전하게 하시고 지상 천국을 건설하게 하신 후에나 오실거야! 이런 말들이 모두 해로운 조언들이며, 태양신을 숭배했던
통치자들과 동일한 영을 받은 자들의 목소리입니다(요일4:1).
4절입니다. [그러므로, 오 사람의 아들아, /너는/
그들을 쳐서(against) 대언하고 대언할지니라, 하시니라.](4). 주님은 해악을 꾸미고 사악한 꾀를 내는 자들을 향해 그들과
반대로(against) 대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영을 받은 목회자들, 신학교들, 부흥사들, 인본주의 교회들이 설교하고
가르치는 내용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킹제임스 성경을 손에 잡고, 그들이 말하는 거짓 대언들과 정 반대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5절입니다.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으니 이는 너희 생각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다 알기 때문이라.](5). 주님은 에스겔에게 전해야 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집은 예루살렘을 가마솥이요, 자신들이 고기이며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으니 집을 짓자고 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생각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아십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주님 앞에 무엇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주님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화가 미칩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 계획을 [주]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이여! 그들의 일들은 어둠 속에 있은즉 그들이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나니](사29:15).
주님 앞에 비밀은 없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시139:2)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완전한 마음과 자원하는
생각으로 그분을 섬길지어다. 이는 [주]께서 마음을 다 살피시고 생각으로 상상하는 바를 다 아시기 때문이니 네가 만일 그분을 찾으면 만날
것이로되 네가 만일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28:9). 다윗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사람됨 그 자체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함같이 그 사람도 그러하기 때문이라.](잠23:7a).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가? 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어떠함에 달려 있습니다.
육신적인 사람인가? 영적인 사람인가? 의 판단은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거니와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생각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3~24).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기 때문이라.](딤후1:7). 생각이 이전과 그대로인 사람은 변화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이
거듭났습니다. 혼은 구원받았는데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혼적 변화는 생각이 완전히 새로워지고, 바뀌었다는 것으로 혼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워진 생각, 바뀐 생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생각을 사로 잡는다.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고후10:5).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차를 명차라 할 수 없듯이 통제할 수 없는 생각을 지닌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대로 펼치고 헛된 생각과 불법의 생각이 나래를 치는데 어쩔 수 없다면 그것은 브레이크 없는 차나 마찬가지로 달리는 자체가
위험천만입니다. 어떤 형제는 그렇게 말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생각이 떠오르는데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의 생각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주님은 죄인들의 그 마음 상태를 잘 아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또 그때에 여러 가지 일이 네 생각
속에 떠올라 네가 악한 생각을 하며](겔38:10). 그래서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을 통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악한 생각은 마귀가 뿌리는 씨앗입니다. 자살, 충동, 분노, 억눌림, 답답함 등과 같은 것들을 모두 사로잡으십시오.
2.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2).
우리는 이 구절이 로마서12:1에서 헌신의 구절 다음에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데는 주께 자신의 몸을 드리는 헌신이 최상의
방법이요, 세상을 미워함으로 동화되지 않는 것이 그 다음 가는 좋은 방법입니다.
3.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하라.](롬12:3). 건전한 영적 생각은 주님의 은혜를 힘입을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화평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냉철하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4. 헛된 생각 속에서 걷지 말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같이 걷지 말라.](엡4:17).
하나님은 어떤 생각의 소유자이십니까? 주님은 생각이 한결 같으신
분이십니다. [오직 그분은 생각이 한결 같으시니 누가 그분을 돌이키리요? 그분께서는 자신의 혼이 원하는 것을 행하시나니](욥23:13).
주님은 생각이 많으시지만 질서정연한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뜻이 변하지 않으시는 불변의 하나님이십니다(말3:6).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바 놀라운 일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이 많으므로 차례대로 그것들을 들어가며 주께 아뢸 수 없나이다. 내가
그것들을 밝히 드러내어 말하고자 하여도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40:5). 우리를 향한 주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알기 때문이라. 그것은 평안을 주려는 생각이요, 재앙을 주려는 생각이 아니니 곧 기대하던 결말을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라. [주]가 말하노라.](렘29: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집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헛된 생각,
불법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발은 악을 향해 달려가며 그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데 빠르고 그들의 생각은 불법의 생각이니라. 황폐와
파멸이 그들의 길에 있으며](사59:7). 불법의 생각이란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며, 우습게 아는 생각을 말합니다.
불법의 생각이란 하나님 대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또 그들은 불법들을 탐구하며 부지런히 찾아
이루나니 곧 그들 각 사람의 속 생각과 마음이 깊도다.](시64:6). 주님은 이들이 불법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한 복을 주실 수
없으시며 기도에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을 씻어 사악함에서 떠나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 네 헛된 생각이 어느 때까지 네 속에 머물겠느냐?](렘4:14). 그러나 예루살렘은 말씀의 물로 마음을 씻는 일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헛된 생각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일이 될 줄로만 압니다. 마치 도박하는 사람들은 다 잃을
때까지 돈을 딸 수 있다는 생각에 붙잡히고, 다 잃은 후에는 빚을 내어 다시 하면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 결국 죽을 때까지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죄는 반복적으로 지어도 언제든지 회개할 수 있고, 자신의 영적인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계속 죄를 짓습니다. 이런 것이 헛된 생각입니다. 이런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롬8:7).
에브라임은 생각이 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새 대가리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에브라임은 생각이 없는 어리석은 비둘기 같아서 그들이 이집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아시리아로 가는도다.](호7:11).
주님은 에브라임을 생각없는 조두(鳥頭)-새 대가리-로 부르셨는데, 오늘날 불신자들의 마음 상태입니다.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어 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롬1:28). 이들은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대체물들을 두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6-8절입니다. [너희가 이 도시에서 너희의 죽임 당한
자들을 많게 하고 도시의 거리들을 죽임 당한 자들로 채웠도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이 도시 한가운데
남겨 둔 너희의 죽임 당한 자들은 그 고기요, 이 도시는 그 가마솥이거니와 내가 너희를 도시의 한가운데서 끌어내리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였은즉
내가 칼을 가져다가 너희 위에 임하게 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6-8). 그들이 가마솥처럼 안전하다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말한 가마솥은 불타는 솥이요, 끓는 솥이었던 셈이 되었습니다.
통치자들의 헛된 소리는 자신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을 완전히 살육의
도가니로 몰고 갔습니다. 통치자들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내가 또 말하노니, 오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의 집 통치자들아, 청하건대
너희는 들을지어다. 공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마땅한 /본분이/ 아니냐?](미3:1).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말씀대로
통치자들의 권세는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공의롭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분을 버리고 어떻게 했는가 보십시오.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여 그들/의 몸/에서 가죽을 벗겨 내고 그들의 뼈에서 살을 뜯어내며 또 내 백성의 살을 먹고 그들/의 몸/에서 가죽을
벗겨 내며 그들의 뼈들을 꺾어 조각조각 자르기를 냄비와 솥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미3:2~3). 이들은 악질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악행을 일삼았고, 백성들을 약탈했습니다. 미가서에는 이들 통치자들이 얼마나 많은 악행을 행했는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집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집 통치자들 곧 공의를 몹시 싫어하고 모든 공평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하노니
너희는 이 말을 들을지어다.그들이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불법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우두머리들은 대가를 바라고 재판하며 그 제사장들은 품삯을
바라고 가르치며 그 대언자들은 돈을 바라고 점을 치면서도 [주]를 의지하여 말하기를,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냐? 어떤 재앙도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그런즉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같이 쟁기질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같이 되며 그 집의 산은 숲의
높은 곳과 같이 되리라.](미3:9~12). 멸망을 앞둔 사회는 외적의 칩입 이전에 부정과 부패로 무너지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통치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한국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나라입니다. 정치인, 관료들의 부정이 유난히 심한 이유는 이들이
모두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인 정치인들, 관리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9-10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그곳의 한가운데서 끌어내어
타국인들의 손에 넘겨주고 너희 가운데서 심판을 집행하리니 너희가 칼에 쓰러지리라. 내가 이스라엘의 경계에서 심판하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9-10). 하나님은 이런 심판을 집행하시면서도 계속 반복적으로 주시는 한 마디 말씀은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말씀을 믿음으로써 입니다. 말씀을 거부할 때 주님은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은 성경에서 67번이 나오는데 그 중에 53번이 에스겔에 나옵니다. 주님은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 준 말씀과 심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해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12절입니다. [이 도시는 너희 가마솥이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그 한가운데서 고기가 되지 아니하리라. 오직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의 경계에서 심판하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는
너희가 내 법규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법도를 집행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사방에 있는 이교도들의 행위대로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11-12).
통치자들이 말했던 안전한 가마솥이 되지 못하고 끓는 가마솥이 되었고, 안전한 고기가 아니라 열기에 타고 익어 버린 고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멸하시고 쫓아내게 하신 이교도들의 행위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교도들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삼하22:44).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에 있는 모든 이교도들을 멸하게 하시고, 그 땅을 주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였나니 곧 내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고 그들과 함께 거하는 그 이교도들의 눈앞에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내 자신을 그들에게 알렸노라.](겔20:9). 20:14,22절 참조할 것. 주님의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로 인해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이교도들의 행위를 본받고,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 일은 위로는 왕과 제사장들로부터 아래로는 민초들까지 예외가
없었습니다. [또 제사장의 모든 우두머리들과 백성들도 이교도들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 크게 범죄하고 [주]께서 예루살렘에 두어 거룩하게
하신 그분의 집을 더럽게 하였더라.](대하36:14). 그렇다면 주님께서 행하실 일은 심판 외에 달리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배우고 공부하는 성도들이 같은
형제이지만 많은 책임감과 의무, 특권이 있음을 기억하고 죄악을 대적하여 말씀을 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