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11:13-25
요절: 에스겔 11:19,20
우리는 예레미야, 에스겔을 통해서 계속되는 주님의 경고와 심판,
무서운 징계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로 인한 심판의 집행이지만 그들이 받게 되는 고통은 목불인견(目不忍見),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의 참혹함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흔히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심판의 고통을 주시며, 징계와
채찍질을 하시는가? 너무 심하신 게 아닌가? 의아해 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들어가기에 앞서 주님이 주시는 징계, 심판, 매질, 고통의 바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빌론으로 이미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 비해 더 저주를 받은 듯 하고, 심판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포로로 잡혀 간 것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복 받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질 것이며, 본격적인 심판이 집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고통이 앞으로 있을 더 큰 고통과 심판으로부터의 건짐이요, 주님의 은혜의 역사일 때가 많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가 아니라 “참으로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병들고, 파산을 당하고, 고민과 갈등이 넘치도록 내 주변을 둘러 쌀 때 그 때에서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에스겔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을
통해 극심한 절망과 고통을 통해 그들은 주님을 찾게 되고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잘 먹고 잘 살게 된 다음에 주님을 믿는 경우보다
망하고, 쓰러지고, 병들고, 죽게 된 경우에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이유는 이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땅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 정신적, 도덕적인 의와 평강이
있는 하나님의 왕국과 하늘을 소망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들을 심판하시고 연단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명망을 얻고,
건강한 사람들은 정신보다는 물질에 더 묻힙니다. 하늘보다는 땅에 집착합니다. 영혼보다는 몸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징계와 심판을
통해서 땅이 아니라 하늘에 애정을 두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고의로 사람들의
자녀들을 괴롭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애3:33). 하나님께서 고의로, 일부러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진실로 그들은 잠시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시나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히12:10).
주님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유다를 벌주신 이유는 순종을
배우게 하시고, 더 큰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유없는 고난이 많지만 주님이 주시는 징계와 심판은 아무리 혹독해 보여도 다
은혜를 베푸시려 하심이요, 배움을 위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는 말씀대로 성전의
파괴와 70년의 포로기를 통해서 유대인들은 고질적인 우상 숭배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나 유일하신 참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고통을 주신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신뢰하지 않던 사람도 고통의 순간에는 주님을 찾습니다. 참을만한 적당한 고통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이 닥치면 누구나 다 주님을 찾게 됩니다. 이집트에 살던 야곱의 후손들은 주님을 찾거나 기도하거나 제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던 앗시리아 출신의 파라오가 그들을 심하게 박해하자 그들은 고통 가운데서 울부짖으며 주님을 찾았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주]를 부르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자신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니 내 부르짖음이 그분 앞에 이르되 그분의
귀에까지 이르렀도다.](시18:6).
사람은 고난과 역경 중에 있을 때는 정신이 살아 있고, 깨어
있고, 믿음이 단련되지만 평안과 풍요 속에서는 쉽게 타락하고 마는 것을 흔히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고난을 보내십니다. 고난의 때에는 바로 기도의 때요, 주님을 찾는 때입니다. 여러분들이 언제 가장 간절하고 절실하게, 참되고 진지하게
주님을 찾고 기도했던가? 돌이켜 보십시오. 모두 고난의 때였을 것입니다.
●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면 주님은 고통에서 건지십니다. [이에
그들이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건지시고](시107:6).
●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면 주님은 고통에서 구원하십니다. [이에
그들이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시107:13,19).
●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면 주님은 인도하여 내십니다. [이에
그들이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사](시107:28).
● 고난 중에 부르짖으면 응답하시고 나를 세우십니다. [내가
고통 중에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란 평을 받았던 다윗도
젊은 시절 사울에게 쫓기던 고난과 역경의 시절에는 죄를 범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평안하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왕궁을 거닐 때는 밧세바를
취함으로 범죄했고, 왕국이 크게 번성하자 인구 조사를 함으로써 자신의 치적과 업적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크게 범죄 하였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길을 잃었사오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는 고통,
실패, 아픔, 징계, 시련, 눈물은 우리가 매여 있는 모든 죄와 더러움을 씻어 버리고 은혜와 복을 베푸사 주의 말씀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파멸의 재앙을 내리신 것은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시고, 존귀한 그릇이요 합당한 그릇으로 빚으시기 위함입니다. 밥을 담기 전에 그릇을 닦고, 귀한 것을 담기 전에 한번 물로 씻습니다.
어떤 것을 담으려면 불로 살짝 데우기도 하는데 무균 처리를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자를 보내시고, 귀한 말씀을 담아
두시기 위해서 그들을 더욱 연단하고 정련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딤후2:20-21). 하나님은 우리 안에 더 좋은 것을
담아 주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제거해 버리십니다. 이것이 때로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징계와 심판을 내리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명백한 증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고 /주신 것이니/ 이 왕국을 위하여 너희도 고난을 당하느니라.](살후1:5). 하나님의 백성에 임하는 불같은 시련은 죄의 결과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도 시련을 보내셨고, 초대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에게도 불같은 시련을 보내셨습니다. 요셉에게도 다니엘에게도 그의 세
친구들에게도 불같은 시련을 보내셨는데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채찍은 주님의 사랑의 표요, 합당한 사역자로서의 자격
요건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하나님께서 징계와 심판을 주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존귀와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귀한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주님이 오실 그 때에 주님 앞에서 칭찬, 존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1:7). 우리에게 슬픔, 고난, 약함이 없다면 종교 생활은 하겠지만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참된 신앙 생활을 거의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위대한 것은 각 지역을 돌아 다니며 잘 먹고 잘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고통과 모욕과 슬픔만이 기다렸습니다. 그가 로마에 갔을 때는 감옥이 기다렸고, 손과 발에는 형틀이 채워졌습니다. 이런 시련으로 인해 그는
주님의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을 확신 가운데 주님 만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신 것도 그들을 영원히
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존귀와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그토록 가혹한 시련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 이 교회에 닥치는 모든 시련과 고통은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성도와 교회, 주님께서 영광과 존귀를 주시는 성도와 교회로 빚으시려는 선한
뜻과 계획의 하나임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고 심판과 징계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은 유익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고난과 고통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고통은 슬픈 것 같지만
변하여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인내를 이루어 줍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라.](약1:3). 눈물과 슬픔의 시련은 사람을 성숙시키며, 인내심을 키워줍니다.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5:3~4)했습니다. 원숙한 신앙 인격은
타고난 성품이 아니며,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이지 거저 주어지는 은사가 아닙니다. 인내와 소망은 시련을 통해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내 안에 형성되며 이루어지는 것으로 점진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 또한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12-13).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을 통해 범죄한 유대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1, 2차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다니엘,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 에스겔은 물론이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포로기 동안 이방 땅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느헤미야, 에스라, 모르드개, 믿음의
여인 에스더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고통의 풀무 속에서 탄생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믿음의
사람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시련과 고통이 사람을 만들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주셨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시련
가운데서 단련되며, 그렇게 단련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은 넘치는 기쁨을 즐거워했습니다.
아무런 시련없이 승리한 신앙인은 단 한명도 없으며, 위대한
믿음의 사람 가운데 고통의 풀무 가운데서 연단 받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고통과 고난, 시련과 슬픔, 징계와 심판을 통해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심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온에서 애곡하는 자들에게 재 대신 아름다움을 주고
애곡 대신 기쁨의 기름을 주며 근심의 영 대신 찬양의 옷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주]께서 심으신바 의의 나무라 일컬음을 받게 하고 그분께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61:3).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13절입니다. [이에 내가
대언할 때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에 내가 얼굴을 대고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아 /슬프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완전히 끝내시고자 하나이까? 하니라.](13). 통치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었습니다.
에스겔은 이 죽음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에스겔이 단지 대언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블라댜가
죽음을 당했으니 에스겔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슬픔에 찬 음성으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블라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란 이름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자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다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의 물음에 답해 주셨습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네 형제들 곧 네 형제들과 네 친족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온 집 모두를 향해
이르기를, 너희는 [주]로부터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소유가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14,15).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땅을 주실 때 무조건 영원한 소유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땅이란
사실에만 집착했지만 그 땅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자신들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모든 법규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해 내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민족의 풍습대로
걷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였므로 내가 그들을 몹시 싫어하였음이라.](레20:22~23). 그런데 이들은 “너희는
주로부터 멀리 떠나라”고 외쳤으니 당연히 포로가 되고 심판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통치자들, 대언자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이 앞장서서 배교를 부추기는 말들을 하고 다녔습니다.
땅은 사람으로 인해 더럽혀지고, 사람으로 인해 저주를 받고,
사람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인이 흘린 피로 인해 땅은 소출을 내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민족의
범죄로 인해 그 땅은 더렵혀졌습니다. [너희는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이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이
모든 민족들이 이 모든 것에서 더럽게 되었고 그 땅도 더럽게 되었음이니 그러므로 내가 그 불법을 그 땅 위에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자기
거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그런즉 너희 곧 너희 민족에 속한 자든지 너희 가운데 거하는 타국인이든지 내 법규와 내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들 가운데 하나라도 행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 전에 있던 그 땅의 사람들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 땅이 더럽게 되었음이니라.) 이것은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힐 때에 그 땅이 너희 전에 있던 민족들을 토해 낸 것같이 또한 너희를 토해 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레18:24~28).
거룩한 땅, 더러운 땅은 모두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유난히 땅과 사람 간의 친화력, 명당자리, 정기 등을 따지며 관심을
갖는데 좋은 땅이란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섰던 땅은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터가 좋은 곳이란 주님이 계신 곳,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좋은 땅을 더럽힘으로써 그 땅에서 토해내지고 말았습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교도들 가운데로 내던지고 여러 나라 가운데로 흩었을지라도 그들이 이르게 될 여러
나라에서 내가 그들에게 작은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라.](16). 이 말씀은 대언자 에스겔에게 주는 소망과 약속의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불태워지고 없어질지라도 사람들은 각자 흩어진 그 곳에서 주님을 섬길 수 없으며, 예배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함께 밤을 세워 기도했습니다. 이들은 작은 성소가 되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모르드개나 에스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사흘 밤 낮을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모두 작은 성소가 되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오랫동안 슬피 울며 금식했는데
이런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그들에게 작은 성소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서 주님은 떠나셨지만 각
사람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는 그곳에 주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그곳은 어디이든 주를 향한 기도의 제단이 마련되며, 주님은
그들에게 작은 성소가 되십니다. 주님이 그들이 흩어진 땅에 있는 동안 그들의 성소가 되신다는 말씀은 약속의 땅이 아닌 이방인들 사이에 거하면서
어떻게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주] 그분을 거룩히
구별하고 그분을 너희가 두려워 할 분으로 삼으며 너희가 무서워 할 분으로 삼으라. 그분께서 성소가 되실 것이로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실족하게 하는 바위가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주민들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사8:13~14). 주님을 거룩히 구별하여 두려워 할
분으로 섬기면 성소가 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걸림돌이 되고 실족하는 바위요, 함정과 올무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작은 성소가 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거처가 바로 우리
마음 속이란 의미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은 주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요, 몸은 주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입니다(고전3:16, 6:19, 고후6:16,
엡2:21). 우리는 어디에 거하든 우리에게 작은 성소가 되셔서 늘 거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희를 백성들로부터 모으며 너희가 흩어져 /거하던/ 여러 나라로부터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17).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귀환을 약속하셨습니다. 다 죽을 것만 같았던 무서운 심판이 지나면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입니다. 이는 70년 포로기에 대한 약속일 뿐 아니라 1948년에 실현된 이스라엘 정부 수립, 그리고 대 환란을
겪으면서 세워질 천년 왕국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18절입니다. [그들이 거기로 가서 그곳의 모든 역겨운
것과 모든 가증한 것을 거기서 제거하여 버리리라.](18). 하나님은 이들이 다시 모일 때는 정결하게 될 것이며, 분리하는 민족이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징계와 심판의 효과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스스로 고행(苦行)을 자처하며 금식하고 자학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은 거룩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와 슬픔은 의의 열매로 맺힙니다.
19-20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한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그들의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연한/ 마음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내 법규 안에서 걷게
하고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9-20). 이 말씀은 구약 속에 있는
거듭남의 진리요, 생명의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이 보다 더 위대한 복음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을 택하사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셨지만 진정한 생명의 변화, 마음의 변화, 새사람이 되는 것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관원이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왔을 때 곧 바로 이 말씀을 근거로
“너희는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을 배척하고 거부함으로써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으며,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육신은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 믿는 이방인들의 마음 가운데 한 마음을 주셨고, 한
새로운 영을 넣어 주셨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 같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규칙에 따라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6:16). 그리스도인들은 참 이스라엘이라 불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유대인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겉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겉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그 할례가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속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런 사람에 대한 칭찬은 사람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롬2:28-29).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골2:11)를
베푸셨습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중생의 거듭남을 주셨습니다(딛3:5).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고후5:17). 주님은 교회와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눅22:20).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며, 주의 규례와 법규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에스겔을 통해 주신 주님의 말씀은 교회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유효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교회를 핍박했지만 주님의 새 언약은 폐기되지 않았고, 그들은
영원히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한 백성이 될 것이라. {주}가 말하노라.](히8:10). 히브리서 기자는
에스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범죄 한 후에 간절히 원했던 한 가지 소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반복적으로 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외친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범죄를 너희에게서 떨쳐 버리고 너희를 위하여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만들지어다.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18:31)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새로운 영, 새로운 마음을 지녀야 함을 말합니다.
예레미야 31장을 펴 보십시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31:31). 이 언약은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집과
유다의 집과 맺을 언약입니다. 초림 때에 유대인들의 완악함 때문에 성취되지 못했던 약속은 재림 때에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첫 언약이라고 하고 장차 맺어질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을지라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주]가 말하노라.](렘31:32).
그들은 주님을 버렸고, 주님 역시 그들을 일시적으로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33).
이 약속은 대환란 이후에 맺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 날들 이후’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언약이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반해 두
번째 언약은 마음 판에 기록됩니다. 새 언약의 결과는 이것입니다. [다시는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이나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나를 알 것임이요, 또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주]가 말하노라.](렘31:34).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마음으로 믿는다면 불법은 용서되었고, 마음
속에는 주님이 거하십니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 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뒤에 또, 내가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 이제 이것들을
사면하셨은즉 다시는 죄로 인하여 헌물을 드릴 필요가 없느니라.](히10:16~18).
에스겔 36장을 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정결한 물을 너희
위에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되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모든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겔36:25). 이 역시 대 환란이
끝난 후에 있을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이 세례의 근거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세례로 죄가
깨끗해 질리도 없지만 주님이 세례를 말씀하신 것이 전혀 아닙니다. 정결한 물을 너희 위에 뿌려서 모든 더러움과 모든 우상으로부터 정결하게
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럼 무슨 말인가? 일차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은 말씀의 물입니다. 그러나 대환란 때에 우리는 물이
아니라 불의 심판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위에 쏟아지는 것은 불입니다. [이때에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불태우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어내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가운데서 깨끗하게 하시리라.](사4:4). 이스라엘의 죄는 심판하는 영과 불태우는 영으로 씻겨
집니다. 이것을 물을 뿌린다고 표현한 것인데 주님의 영은 말씀의 물로도 표현되고 불로도 표현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여기서도
물론 정결한 물은 세례가 아니라 말씀의 물입니다. 정결한 물이 의미하는 것은 주님의 심판하는 영, 불태우는 영, 말씀의 물입니다.
[또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같이 /연한/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내 법규
안에서 걷게 하리니 너희가 내 법도를 지켜 행하리라.](겔36:26-27).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선포하셨던 주님은 에스겔을
통해서도 동일한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구약 성도는 신약 성도들과 같은 거듭남이 없었지만 약속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의 새로움,
속사람의 변화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옛 사람은 아무리 개혁하고 개선해도 옛 사람이면, 겉 사람은 고친다고 새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1절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자기의 역겨운 것들과
가증한 것들을 /좇으려는/ 마음을 따라 걷는 자들로 말하건대 내가 그들의 길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보응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21).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보응하시고 심판하시는데 이 심판은 회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입니다.
22절입니다. [그때에 그룹들이 자기 날개들을 들어올리는데
바퀴들도 그들 곁에 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위에서 그들을 덮었더라.](22). 성전에서 떠나시기 전에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셨고,
이제 성전을 떠나 다시 올 때까지 이방인의 때가 계속 됩니다.
23절입니다. [[주]의 영광이 그 도시 한가운데를 떠나
위로 올라가서 도시의 동쪽에 있는 산 위에 서니라.](23). 우리는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이 산이 올리브 산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셨고, 거기에서 떠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했던 주님의 말씀 역시 이곳에서
선포되었습니다(마24).
주님이 서셨던 올리브 산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서실 곳입니다.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바로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니라.](행1:11). 주님은 이곳으로 오십니다. [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길에서 오는데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큰 소리 같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겔43:2). 이는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그 날에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 올리브 산이 그 한가운데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므로 심히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그 산의 반은 북쪽으로, 그 산의 반은 남쪽으로 이동하리라.](슥14:4). 이는 대 격변이
일어날 것을 말하는데 지질학적으로 지도가 변해 버릴 것이란 말씀입니다.
24절입니다. [그 뒤에 그 영(靈)이 나를 드사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갈대아에 있는 포로 된 자들에게로 데리고 가시더니 내가 보았던 그 환상이 나를 떠나 위로 올라가더라.」(24).
하나님의 영께서 에스겔이 본래 있던 포로들의 정착지인 그발 강가로 데려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떠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여
주시고, 이 땅에 우리를 두신 이유는 바로 주님의 심판을 남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도록 하심입니다. 에스겔은 이 뜻을 정확히 알고 행했습니다. [이에
내가 포로 된 자들에게 [주]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것을 말하니라.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