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12:1-28
요절: 에스겔 12:25
에스겔 12장은 에스겔이 짐을 싸서 백성들 앞에서 이사를 함으로써 자신을 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짐을 챙겨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보여준 이사는 더나은 곳으로 주거 환경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포로가 되어 다른 땅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반역하는 집의 한가운데 거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1-2). 하나님은 유다를 반역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민족이 형성될 때부터
마치 전통처럼 굳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처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탐을 하고 왔을 때 그들은 최초로 주께 반역을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반역하지 말 것을 촉구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우리의 빵이기 때문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매 주의 영광이 회중의 성막에서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타나니라.](민14:9-10). 이
때부터 시작된 반역은 틈만 나면 주님을 거슬리고 반역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이런 습관을 알고 탄식을
했습니다. [이는 너의 반역하는 것과 뻣뻣한 목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보라, 이 날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지금까지
[주]께 거역하였거늘 하물며 내가 죽은 뒤에는 얼마나 더하랴?](신31:27). 그들의 역사는 주님께 반역하는 반역의 역사였기에 주님은
이스라엘을 반역하는 집이라고 명명하셨는데 에스겔에만 무려 12번이나 이 말이 반복됩니다. 에스겔은 반역하는 집의 한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 에스겔이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실 곳이 바로 반역하는 집 한 가운데서 사역하실 것임을 예표 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종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백성들이요, 불순종의 세대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반역자들의 특징이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에 그분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참으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함으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사6:9-10).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백성들을 보게 하고, 듣게 하여
깨달아 회심하게 하고 고침을 받게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반대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반역하는 집은
진리를 볼수록 진리를 거슬러 행합니다. 진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불신과 불순종으로 반응합니다. 모세도 말하기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이 날까지 주께서 너희에게 주시지 아니하였느니라.](신29:4)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제 이 말을 들을지어다.](렘5:21).
주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믿는 자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예를
들어 목이 말라 죽게 된 하갈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 주시매 그녀가 우물을 보고 가서 부대에 물을 채워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니라.](창21:19). 누구라도 주님께 간구할 때 주님은 생수의 샘을 발견하게 하셔서 그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게하시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여시사 보게
하옵소서, 하니 [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보라,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게하시가 눈이 열렸을 때 그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반면 엘리사를 치러 온 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시리아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그가 [주]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이 사람들을 치사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니 그분께서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을 치사
눈을 어둡게 하시니라.](왕하6:18). 주님은 눈을 열어 주실 수도 있고, 눈을 어둡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 눈이 열리고 밝아집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반역하는 집이란 뜻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말씀은 보게 합니다.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시19:8). 다윗의 기도가 이것입니다. [내 눈을
여사 나로 하여금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 역시 이것입니다. [너희의
지각(知覺)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눈을 뜨셔야
합니다. 눈을 열어 보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반역하는 집은 결코 들을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데 이르지 못합니다(딤후3:7). 마귀는 빛을 가리는 베일을 칩니다(고후4:4).
눈이 감긴 사람은 예수님을 보아도 알아 볼 수 없듯이 성경을
배우고 설교를 듣고, 공부를 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자기들과 함께 대화하는 분이 예수님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셨을 때에 비로소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 앞에 앉으셨을 때에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나누어
그들에게 주시매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더니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0~32).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눈을 열어 주는 일입니다. 복음 전파, 선교는 눈을 열어 주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직무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백성과 이방인들에게서 건져 내어 이제 그들에게로 보내는 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로 하여금 죄들의 용서를 받고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 가운데서 상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더이다.](행26:17~18).
그러나 이스라엘의 집은 여전히 반역했고, 그들은 눈은 감기어져 있었습니다.
3절입니다. [그런즉 사람의 아들아, 너는 떠나가기 위하여
물건을 준비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낮에 떠나가라. 네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 처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비록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라
할지라도 혹시 깊이 생각하리라.](3). 에스겔은 짐을 싸들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제사장인 에스겔이 물건을 싸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면 그들은 무엇인가 생각할 것이란 기대 때문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최대의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대언자 에스겔의 실물 설교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셨습니다.
4절입니다. [그리고 너는 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
물건을 내어 놓되 떠나가기 위한 물건같이 내어 놓고 또 저물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나가되 포로가 되어 나가는 자들같이 나가라.](4).
에스겔이 떠나는 모습은 포로가 붙들려가는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이를 통해 그들이 당할 재앙을 보여 주셨습니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그들이 모두 포로가 되어 바빌론 땅으로옮겨질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5-6절입니다. [너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성벽을 뚫고
거기로 떠나가되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네 어깨에 메고 나르면서 앞으로 나아가며 네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말지니 이는 내가
너를 세워 이스라엘의 집에게 표적이 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에](5-6). 에스겔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성벽을 뚫고 나갔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성벽이 이와같이 부수어지고 이렇게 끌려 올 것이란 예언입니다. 주님은 반역하는 집을 향해 대언자를 세워 무언의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며, 자연 현상을 통해서, 매시간 터져 나오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에스겔이 하는 행동은 마치 연극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친히
연출하신 연극이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닥칠 일들을 예언적으로 보여 주신 행동이란 점에서 이들은 무엇인가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에스겔이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않고 가는 것은 마치 중죄인들에게 얼굴에 두건을 씌우고 어딘가로 끌고가는 그런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중죄인이었습니다.
7절입니다. [내가 명령을 받은 대로 행하여 낮에 내
물건을 내어 놓되 포로의 물건같이 내어 놓으며 또 저물 때에 내 손으로 성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것을 내어다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 어깨에
메니라.](7). 에스겔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행했습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왜 이렇게 행하는지 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다
해도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명령대로, 말씀하신 대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종된 자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다 이와같이 행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을 때
주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했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창6:22,7:5).
이것이 노아의 위대한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이 명령하신대로 할례를 행했고(창21:4), 모세와 아론 역시 명령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주]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출7:6). 그들이 주의 명령하신 대로 움직였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이 주의 명령하신 대로 모세를 기다리는 대신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주님의 진노는 불같이 타올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의 여정 동안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명령하신 대로 행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을 때 그들은 반역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역자들은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설교해야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보라, 내가 [주] 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법규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가 들어가 소유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신4:5). 결코 자기가 깨달은 대로,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사람들에게 배운 대로 행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말씀을 전해야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백성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義)가 되리라, 할지니라.](신6:25).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과 같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롬3:28,30,5:1,갈2:16).
그러나 우리가 행함으로 얻게 될 의(義) 역시 여전히 존재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는 의를 가지게 됩니다. [또
그녀에게 깨끗하고 희고 고운 아마포 /옷/을 차려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는 이 고운 아마포가 성도들의 의(義)이기 때문이라, 하더니](계19:8).
8,9절입니다. [아침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집 곧 그 반역하는 집이 네게 말하기를, 너는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아니하더냐?](8,9).
하나님은 그 다음 날 에스겔에게 어제 한 일이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에스겔의 행동을 통해 “너는 무엇을
하느냐?”하고 물었다는 것은 무관심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며, 무언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표적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11절은 백성들이 에스겔에게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 엄중한 경고는 예루살렘의
통치자와 그들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온 집에 관한 것이라, 하고 또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표적이라. 내가 행한 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지리니
그들이 떠나가고 포로가 되어 가리라.](10-11). 에스겔이 자의적으로 아니면 미쳐서 한 행동이 아니라 그가 한 행동은 주님이 경고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하시고, 그 행동에 대한 해석을 친히 주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온 집
앞에 닥칠 일들에 대한 생생한 현장 재현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모습은 잠시 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그대로 역사의 현장에서 실현되었고,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투스 장군에 의해서 실현되었으며, 앞으로 적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한번 실현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엄중한 경고를 해 주어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덕담(德談)을 해야 좋아합니다. 장미 빛 미래에 대해서 말해 주어야 믿으려고 합니다. 대신 부정적이고, 재앙에
대한 경고는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12절입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통치자는 어두울 때에
자기 어깨에 /물건을/ 지고 앞으로 나가고 그들은 성벽을 뚫고 /물건을/ 거기로 가지고 나가며 그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자기 눈으로 땅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라.](12).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왕의 눈을 빼어서 결박을 하고 끌고 옴으로써 두건을 쓰고 아래를 보지 않은 채 짐을
옮기는 에스겔의 행동은 한 치도 오차 없이 그대로 적중했습니다(렘52:8-11).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의 말씀이요, 그 말씀의 정확도는 오차도
빈틈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벧후1:19).
13절입니다. [또 내가 내 그물을 그 위에 치고 그를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갈대아 사람들의 땅 바빌론으로 데려가리니 그가 거기서 죽으려니와 그곳을 보지는 못하리라.](13). 그물은 고기를
잡거나 짐승, 새를 잡는데 쓰는 사냥 도구입니다. 그물로 사람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올무 역시 사냥 도구입니다. 내 그물, 내 올무라고
하셨는데 이는 느부갓네살을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그물, 올무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도끼라 불리기도 합니다. [너는 나의 싸우는
도끼요, 전쟁의 무기니 이는 내가 너를 들어 민족들을 산산조각 내고 너를 들어 왕국들을 멸할 것임이라.](렘51:20).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을 온 땅의 쇠망치라고 불렀습니다. [어찌하여 온 땅의 쇠망치가 쪼개어지고 부러졌는가! 어찌하여 바빌론이 민족들 가운데서 황폐한
곳이 되었는가!](렘50:23).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내 종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북쪽의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을 취하고....](렘25:9a). 하나님은 악인들을 심판하는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내어 주었고 또 들의 짐승들도 그에게 주어 그를 섬기게 하였느니라.](렘27:6).
주님의 종이란 꼭 대언자를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의
종이란 주님께서 쓰시는 사역자라면 신자, 불신자 가릴 것이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고레스가 주님의 종이이었듯이 이 땅에 있는 통치자들,
권력자들은 모두 주님의 종입니다. 국가 공무원들은 모두 주님의 종들이며, 사역자들입니다. [모든 혼들은 위에 있는 권력들에게 복종할지니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이 없으며 이미 있는 권력들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거역하는 것이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 이는 치리자들이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아니하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기 때문이니 네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이는 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네게 선을 베푸는 자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네가 악한 일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헛되이 칼을 차고 다니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보복하는 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집행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진노로 인하여서만이 아니라 양심을 위하여서도 반드시
복종해야 하느니라. 이런 까닭에 너희가 공세도 바치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기 때문이니라.](롬13:1~6).
어쨌든 주님은 느부갓네살이란 자신의 그물과 올무를 통해
시드기야를 잡아 옵니다. 시드기야는 바빌론으로 왔지만 눈이 뽑혔기 때문에 그곳이 어디인지도, 보지도 못한채 죽고 말았습니다. 이 예언 역시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 되었습니다.
14-15절입니다. [또 내가 그의 곁에서 그를 돕는 모든
자와 그의 모든 부대를 /사방의/ 바람을 향하여 흩고 또 그들을 따라가며 칼을 빼리라. 내가 그들을 여러 민족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나라 가운데
흩어지게 할 때에야 /비로소/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14-15). 유다는 어떤 경우에도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를 도와준다고 해도 주님은 유다를 흩어 버리시고, 따라가며 칼을 뺀다고 하셨습니다. 바빌론은 당시 제국을 건설하면서 유다가 원군을 요청할만한
나라들을 모두 점령해 버렸습니다. 이집트로 원조를 청해도 소용없으며, 이웃 누구와 동맹을 맺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역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진정한 도움의 대상인 하나님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데 전념합니다. 가장 쉽고도 안전한 방법이 기도하는 것이며, 주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인데 이 한 가지
방법을 제외한 방법만 찾습니다. 미련한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하고 육신적인 성도들은 인간적인 모든 방법과 도움을 구하다가 지칠대로
지친 후에야 비로소 주님께 돌아와 항복하고 은혜를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물도 흩어지고, 친구도 흩어지고, 가족도 흩어진 후에야 정신을
차리는데 그 때 깨닫는 한 가지는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찾고 깨닫습니다.
16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을 남겨
두고 칼과 기근과 역병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이 이르게 될 이교도들 가운데서 자기들의 모든 가증한 일을 밝히 알리게 하리니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16). 심판의 재앙 가운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몇 사람을 남겨 두고”란 말씀입니다.
남은 자에 대한 주님의 약속이 없다면 세상은 완전히 암흑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시고, 그들을 통해
다시 이 땅에 주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또한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쳐 이르되,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으리라.](롬9:27).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이렇게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은혜의 택하심에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 이 진리는 앞으로 있을 대 환란 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그 때에도 이 땅에는 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그들이 이교도들
가운데서 자기들의 모든 가증한 일을 밝히 알립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악을 증거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를 증거할 것이며, 하나님이 죄악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오, 거룩한 하나님이란 사실을 증거할 것입니다. 이들의 증거를 듣게 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남은 자들이 다시 본래의 땅으로 돌아가게 될 때 그들의 증거를 들었던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시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동시에 하나님을 증거 하시고, 알게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이유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시는 이유는 모두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상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증거요, 표적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나를 알고 나를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 이전에 지어진 신이 없었으며 나 이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주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0-11).
17-18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떨면서 네 빵을 먹고 벌벌 떨며 근심하면서 네 물을 마시고](17-18). 전쟁 때에 떨며 빵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렇다면 이것은 기근으로 인한 걱정 때문입니다. 먹으면서도 이것을 먹고 나면 다시는 먹을 수
없는데 하는 근심으로 인해 떨며 빵을 먹는 것입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떨며 빵을 먹는 모습은 부스러기 하나라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조심성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본문은 빵을 잡은 손이 평소처럼 빵을 잡은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꼭 잡고, 행여나 놓칠까 극도로 조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이 표현은 생활에서 관용적으로 표현되는데, “그 사람은 돈이라면 손을 부들부들 떤다!”고 하는데 이는 극도로 인색한
노랭이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주님의 복은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생활의 전 영역에 다 미치듯이, 주님의 저주
역시 영적인 부분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주께 반역하는 집은 믿음과 경건 등 영적인 파산뿐 아니라
먹고 마실 물도 파산이 납니다. 잠을 자도 근심과 두려움으로 단잠을 자지 못합니다.
19절은 이유를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이 땅 백성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주민들과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들이 근심하면서 자기들의 빵을 먹고 놀라며
자기들의 물을 마시리니 이는 이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의 폭력으로 인하여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치고 이 땅이 황폐하게 될 것임이라.](19).
이미 앞에서 수 차례 나왔듯이 전쟁 뿐 아니라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닥쳐서 빵과 물이 없게 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전쟁에 대한 공포요, 기근에 대한 공포입니다. 특히 먹을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장
먹고 살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수입이 전혀 없다! 상상하기도 싫은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를 두려워함으로써 생활의 모든 근심과
염려에서 놓임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 /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이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로다. 젊은 사자들은 부족하여 굶주릴지라도
[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8~10). 또 이르시기를, [이는 [주] 하나님께서 해와 방패가
되시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곧바르게 걷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리이다.](시84:11)했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함으로써 이런 것들이 충분히 채움받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먹고 입을 것만 구하고, 주님의 왕국과 의를 구하지 않을 때 두려워 떨며 먹고 마시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사람이/ 거주하는 도시들이 황폐하게
되겠고 이 땅이 황폐하게 되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20). 이는 바빌론의 전쟁 수행 방법이 주로
초토화 작전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도시들은 완전히 황폐화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며, 실제로 예루살렘은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앞으로 남은 대환란의 전주곡에 불과합니다. 예루살렘의 미래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그들의 시체가 그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이리니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또한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계11:8). 주님은 마흔
두 달 동안 이곳을 이방인들에게 내어 주어 짓밟히게 하셨습니다(계11:1,2). 에스겔의 예언은 당장 눈 앞에 닥칠 바빌론에 의한 파멸과 먼
훗날 닥칠 대환란의 일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21-22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땅에 있는 /속담/ 곧 날들이 연기되고 모든 환상이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하는 너희의 이 속담이 /도대체/
무엇이냐?](21-22). 당시 이스라엘에는 불신 풍조가 워낙 만연했던지라 주의 대언자들이 하는 말은 공공연히 무시되기 일쑤였는데 그
대표적인 말이 “곧 날들이 연기되고 모든 환상이 이루어지지 아니 한다”는 속담(잠언)입니다. 속담은 사람들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보편적인 진리를
함축해 놓은 말인데 인생의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시국에 따라 이상한 말들이 떠돌아 다니거나 유행을 타기도 합니다.
“날들이 연기 되고 모든 환상이 이루어지 아니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대언자들의 대언에 대한 조롱이 썩인 속담입니다.
언제 이사야냐 예레미야의 말이 성취된 적이 있다고 그러나?
그러게 말야, 속담에 “곧 날들이 연기되고 모든 환상이 이루어지지 아니한다”는 말도 있잖은가? 하면 “꼭 맞는 말이야!” 하며 맞장구를 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오늘날도 누가 주님이 곧 오신다!고 증거하면 “주님은 천년이 하루이시지 않는가!” 하면서 조롱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이샤야가 대언할 때 사람들은, [그들은 이르기를, 그분께서 서둘러 자신이 행하시는 일을 속히 이루사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계획이 가까이 임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5:19)하며 덤벼들었고, 예레미야가
대언할 때는 [보소서,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주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지금 임하게 하라, 하나이다](렘17:15)하며 덤벼
들었습니다. 요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평화의 때에 위기를 조장하는 언론처럼 되어 버렸고, 마치 임하지도 않을 전쟁을 소문나게 함으로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사람, 늑대 소년의 이야기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백성들의 불신이 이 정도에 이르렀을 진대 다른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들은 오히려 거짓 대언을 철석같이 믿고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2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에서 이것을 속담으로 사용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들이 가까우며 모든 환상의 성취도 그러하니](23). 하나님은 이 속담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다시 이런 말을 입에도 담지 못할 것입니다. 날들이 가까웠다는 것은 주님이 언제나 하시는 말씀 같지만 정말 임박한 것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먼 훗 날에 주님을 만날 것 같지만 눈 앞에 다가온 것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더딘 것 같지만
언제나 가깝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어떤 사람은 2000년 전에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더욱 가깝습니다. [또한 때를 알거니와 지금이 잠에서 깨어야 할 바로 그때이니 이는 지금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깝기 때문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1-12). 사람들이 주님은 안 오신다. 일부러 이 사실을 잊어 버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22:20).
24절입니다. [이는 헛된 환상이나 아첨하는 점술이 다시는
이스라엘의 집에 있지 못할 것임이라, 하라.](24). 지금까지 세상은 거짓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집행되면 거짓과 점술,
아첨이나 헛된 환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복주의, 은사주의는 환란의 때에는 결코 부흥할 수 없는 이단 종파입니다.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진다는
거짓말도 낙관주의도 환란의 때에는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철학과 교육의 이상도 전쟁이 한번만 나 보면 얼마나 허무한
소리인지 다 드러납니다. 종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 주지만 그런 가르침이 사람을 회심케 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네 대언자들이 너를 위해 헛되고 어리석은 것들을 보았으므로 네 불법을 들추어내고 네 포로 된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너를 위해 거짓된 경고와 추방당할 구실만 보았도다.](애2:14). 사람을 회심시키는 것은 죄에 대한 책망과 경고입니다.
25절입니다. [그 까닭은 내가 [주]이기 때문이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이루어질 것이요, 다시는 연기되지 아니하리라. 이는, 오 반역하는 집이여, 너희가 /살아 있는/ 날 동안에 내가 그
말을 하고 그것을 이행할 것임이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하셨다, 하라.](25).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55:11에도 이르기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그 말을 보내어
/이루게 하려는/ 일에서 형통할 것임이라.](사55:11)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100% 정확하게 성취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보라, 이스라엘의 집에 속한 자들이
말하기를, 그가 보는 환상은 여러 날 뒤에 있을 일이라. 그가 먼 장래에 대하여 대언한다, 하느니라.](26-27). 사람들은 자꾸 먼
훗 날로 돌리려고 합니다. 먼 장래 이야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이 곧 집행되며, 반드시 집행된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지라 먼 미래의 이야기로 우리의 현재의 기억 속에 두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이것은 비유나 은유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다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당시 백성들이 자신의 말을 먼 훗날로 돌리거나 자꾸 비유로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 통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르되, 아 슬프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그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비유를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겔20:49). 지금 이 시대는 멸망을 앞둔 배교한 유다와 다른 점이 없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현재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려고 하는 대신 먼 훗날 아니면 비유적으로 만들어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2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 말 중에서 하나도 다시는 연기되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이른 말이 이루어지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하라](28). 주님은 다시 한번 예언의 급박성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문자적으로, 실제 그대로 현실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믿지 않았습니다. 재앙에 대한 문자적 경고를 듣고 돌이키면 어떻게 됩니까?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는
요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문자 그대로 믿고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겸손하게 회개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의 이런 대언을 통해 돌이키기만 한다면 그들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망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늘 경고를 받고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