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14:1-10
요절: 에스겔 14:9
성경의 하나님은 종교인들이 말하는 하나님과 너무나 달라서 성경을 처음 읽는 성도들이 깜짝 놀랄 만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화를 내신다,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등은 마치 속 좁은 인간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이야기이지 하나님께는 해당 사항이 없는
성품인 줄 아는 것은 종교이지 성경적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속이신다! 이 말은 기독교를 종교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과연 그런 말이 있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사람을 속이시는 하나님!! 이는 분명히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을 속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대언하는 에스겔의 증거입니다.
1-2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의 장로들 가운데 몇 사람이 내게 와서 내 앞에 앉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2).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에스겔에게 증거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의 말씀이 임한 것은 주님의 영이 임한 것과 같습니다. 주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주님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임했다'고 번역한 모든 말은 came unto me(내게 왔느니라)입니다. 포로로 잡혀왔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에스겔에 앞에 왔다면 매우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에스겔을 대적하기 위해 왔다면 저주받을 일입니다. 분명 장로들
중에 몇 사람이 에스겔 앞에 와서 앉았습니다. 그때 에스겔에게는 주의 말씀이 왔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대적하기 위해 우리 앞에 오면, 하나님
역시 그들을 대적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너희를 넘겨줄 때에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바로
그 시각에 /지시를/ 받을 것임이라. 이는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이라.](마10:19~20).
우리는 주님을 증거 할 때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이는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모세를 파라오와
백성들 앞에 세우시며 [그런즉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하여 네가 무슨 말을 할지 가르치리라.](출4:12)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대적들의 날카로운 논리 앞에
조금도 위축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끌고 가서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거나 궁리하지 말고 그 시각에 너희가
무엇을 /지시/ 받든지 그것을 말하라. 이는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막13:11).
이런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때에 리베르티 사람과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 하는
곳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더니 스데반이 지혜와 영으로 말하는 것을 능히 대적하지 못하매](행6:9~10).
다수의 사람이 스데반 한 명과 논쟁을 벌였으나 아무도 대적하지 못했습니다. 대적자들이 우리 앞에 설 때 주님 역시 우리를 통해 그들과 함께 마주
서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논쟁하는 일을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작심하고 나타난 이단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앉는다 해도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러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릴 때에 그 도시가 온통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매 그의 영이 속에서
격동하므로 그가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독실한 인사들과 논쟁을 하고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니라.](행17:16~17).
지혜가 많아서 유대인들, 철학자들을 이긴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이 그와 함께 하며 주님이 그들을 대적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이긴 것입니다.
3절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었으니
과연 그들이 내게 물을 수 있겠느냐?](3).
에스겔 앞으로 나온 장로들은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이
과연 하나님께 진리를 물을 수 있으며, 이런 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무엇을 두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을 살피시는 분이시며, 무게를 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무엇을 두어야 하는가?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둔 사람들은 우상 숭배자입니다.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돈, 권력, 명예, 정욕 등의 우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저는 한 때 출세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다. 명예도 얻고, 권력도 얻고, 돈도 얻고 싶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주님께서 이런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기 전에는 마음 속에 계신 주님은 나의 도우미요, 비서요,
참모요, 종이었지만 결코 나의 주인으로 섬기고 경배하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있는 소원들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별로 없게 되자 삶의 의욕도 없고, 신앙 생활에 대한 회의도 생기고, 기쁨도 평안도 없었습니다.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운 채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마음 속에 둔 우상들을 제거하고, 불법들을 떨쳐 버린 후에야 저는 영적 평안과 진정한 혼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무엇을 두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너는 마음 속에 두](신6:6). [원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도를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 속에 쌓아 두라.](욥22:22).
말씀이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은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37:31).
처음에는 신앙이 좋았다가 삶의 연수가 더할수록 믿음이 약해지고, 퇴색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앙연륜에 비해 터무니없이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오늘날 지역 교회가 약화되고 세속화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읽지도 않고, 혹 읽더라도 늘 보는 부분만 보는 편식 현상이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단어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모든 기록들이 다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욥이 말한 대로 [그분의 말씀들을 마음 속에 쌓아 두라.] 이는 묵상과 암송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 범죄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시119:11).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는 그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불법이 들어있으면 불법자요, 해악이 들어 있으면 범죄자가 됩니다.
잔꾀가 들어 있으면 약은 사람이 되고, 정욕이 들어 있으면 우상 숭배자가 됩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옵니다.
말씀이 속에 있으면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고, 불법이 마음 속에 있으면 기도가 막히고,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고, 죄악에 빠지게 되며, 마음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됩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참으로 주의 법이 내 마음 속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여러분은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능구렁이가 몇 마리 들어 있습니까? 아니면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까?(약3:14). 그렇다면 우상을 마음
속에 품고 나온 이스라엘 장로들과 똑 같습니다.
둘째, 우리 마음 속에는 성령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갈4:6).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 마음 속에/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고후1:22).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외치지만 정작 자신 안에는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거나
전혀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충만하라(Be filled with Spirit)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이
공허하고 텅 빈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속에 말씀과 성령으로 채움 받지 못한 사람들은 주로 다른 무엇으로 마음을 채웁니다. 잠언 기자가
말하기를,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길에서 난 열매를 먹으며 자기 계략들로 채워지리니](잠1:31), [마음이 타락한 자는 자기 자신의 길들로 채워지려니와 선한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만족을 얻으리라.](잠14:14)고
한 대로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채워지라.]는 명령대로 우리는 주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셔야 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옵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3:17).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거하지 않는 사람은 다 우상을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통해 일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 마음속에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벧전3:15).
여기서 소망이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
낙담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는 자들이며, 육신의 겉모습을 통과해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은 환난과 연단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성경은 이 소망을 일컬어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 의의 소망, 산 소망, 부르심의
소망, 하늘에 쌓아 둔 소망, 영광의 소망, 구원의 소망, 영원한 생명의 소망, 좋은 소망, 더 나은 소망이라고 합니다. 소망은 혼의 닻과
같습니다(히6:19). 이 소망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히7:19).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지어 줍니다. 소망이 있으면 깨어
있게 됩니다. 소망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오실 그 은혜로
인하여 끝까지 소망을 가질지어다.](벧전1:13).
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순결합니다.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순결하지 못한 것은 마음 속에 소망되신 주님되신 우상들을 세워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우리 마음속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두셨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 속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포도즙이 불어날 때의/기쁨/ 보다 더 크니이다.](시4:7).
주를 기뻐하는 것이 힘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의가 되시려고 죄가 되셨듯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기쁨은
구원받은 성도의 표지입니다. [의로운 자들아, 너희는 [주]를 기뻐하라. 찬양은 곧바른 자들이 마땅히 행할 바로다.](시33:1).
환경이나 지금 처한 현실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의 근원은 주님이시오, 기쁨의 대상 역시 주님이십니다. [너는 또 [주]를 기뻐하라. 그분께서 네 마음의 소원들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시37:4).
주님이 기쁨의 대상이요, 근원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그때에 즐거워하며 [주] 너희 하나님을 기뻐하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이른 비를
적당히 주셨기 때문이며 또 너희를 위해 비를 내려 주시되 이른 비와 첫째 달의 늦은 비를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니](욜2:23).
마음 속에 우상이 있는 분들은 결코 주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를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것을 쓰는 것이 참으로 내게는 부담이 되지 아니하며
너희에게는 안전하라.](빌3:1).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주님이 기쁨의 대상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을 얻고, 성취하고, 뭔가 되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우리는 왜 기뻐하는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
또한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13).
신약 성도들은 기쁨으로 일했고, 찬양했고, 주님을 섬겼고, 구제했습니다. 빵을 나누는 교제도 기뻐했고, 맞으면서도 기뻐했고, 감옥에 갇혀서도
기도한 후 기쁨으로 찬양을 불렀습니다. 기쁨이야말로 성도의 진정한 힘입니다. 기쁨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능력입니다. 기쁨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음 속에 우상을 세워 둔 채 하나님 앞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제거하십시오.
여섯째, 우리 마음속에는 형제들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 모두에 대하여 이같이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라. 나의
결박당한 일과 복음을 변호하고 확증하는 일에서 너희는 다 나의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니라.](빌1:7).
형제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형제들이 있기에 그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게 됩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고후11:29).
형제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일곱째, 우리 마음 속에는 화평/평안/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불안, 걱정, 근심, 염려, 조급함, 초조함 등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항목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성소에는 기쁨,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나님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고후13:11). 여러분 안에 마음의 평안, 화평이 없다면 마음속에 우상을 세워 둔 채 주님께 나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평에 이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 속에서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이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 속 우상을 제거하고, 불법을 제거하십시오. 마음속에 두어야 할 것을 두고, 버려야 할 것들은 버리도록 하십시오.
여덟째,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없는 마음은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 황무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움직일 수 없는 왕국을 받을진대 은혜를 소유하자. 이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공경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도록 섬길지니](히12:28).
우리는 은혜 안에서 강건해야 하며(딤후2:1), 은혜로 주께 노래해야 하며(골3:16), 은혜가 우리 안에서 군림해야(reign)
합니다(롬5:21). 은혜가 우리를 가르치도록 해야 합니다(딛2:11-12).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이미 교만이란 우상이 마음 속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4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집에서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나 [주]가 그의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4).
주님은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고,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나아오는 자에게도 응답하십니다.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그들의
우상들의 수효대로 응답하십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탐욕으로 고기를 구했을 때 주님은 주셨습니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으되 그들의 혼은 야위게 하셨도다.](시106:15).
대신 그들의 혼은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돈이 우상인 사람은 주님께 열심히 구할 때 주님께서 돈과 겸하여 가족 간의 불화, 돈에 대한 염려, 돈을
탐하는 친구들, 사기꾼들, 도둑들과 강도들을 함께 보내 주십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 카지노, 경마, 경륜 등에서 한 건 올린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의 우상에 따른 응답이었다면 그는 슬픔을 함께 받게 됩니다.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시겠다는
말씀은 심판이요, 저주요, 재앙입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반면 주님이 주신 복은 어떻습니까? [[주]의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나니 그분께서는 이것에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
여러분들은 어떤 기도 제목이 이루어진다고 무작정 좋아 할 일이 아닙니다. 좋은 직장을 잡게 해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했던 형제는 그 직장에 매여
믿음에서 떠나 버리고 세상에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형제는 예쁜 자매를 구했는데 결국 그 자매로 해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백배나
많았습니다. 이런 예는 허다합니다. 내가 구한 것이 주님의 뜻대로 구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세워두고 구한 것이라면 그 응답은 받지 못한 것보다
더 해롭습니다.
5절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집이 다 자기 우상들로 말미암아 나와 사이가 멀어졌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 상태대로 그들을
취하고자 함이라.](5).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워 둔 자기 우상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상태대로 그들을 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상태에 있는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친히 보시는 대로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아 주셨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주께서 주의 긍휼을 보이시고 곧바른 자에게는 주의 곧바르심을 보이시며 순수한 자에게는 주의
순수하심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주의 적대(敵對)하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고난받는 백성은 구원하시나 교만한 눈빛은 낮추시리이다.]
(시18:24~27). 주님은 있는 그대로 보응하십니다. 모든 결과는 우리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이지 결코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대로 취하시는 주님!! 사람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사람의 길이 자기 눈에는 모두 옳게 보여도 [주]는 마음을 살피시느니라.](잠21:2). [말하기를, 보라,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어찌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시겠느냐? 또 네 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분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각 사람에게 보응하시지 아니하겠느냐?](잠24:12).
주님께서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고, 그 마음 상태대로 취하신다면 우리는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하며, 선하고 순수한 양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고 각 사람의 길과 각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각 사람에게 베푸느니라.](렘17:10).
마음의 우상을 제거하십시오.[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리하면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계2:23).
마음 속 우상을 둔 채 주님께 올 때 주님이 응답하시는 응답은 심판을 위한 응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각종 우상을 마음에 둔 채 주님 앞에
나오면서도 살고 있는 것은 주님의 전적인 은혜와 오래 참음의 결과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을 살피실 때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성령께서 중보하시는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멸망치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7).
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 자신을 돌이켜 우상들을 떠나라. 너희 얼굴을 돌려 너희의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6).
주님은 그들의 살 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회개하라. 너희 자신을 돌이켜 우상들을 떠나라. 우리가 회개하면 주님께서도 회개(돌이키심)하십니다.
심판의 말씀이 선포될 때 심판을 유예하거나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심판하되 각 사람의 길대로
심판하리라.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켜서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라. 그리한즉 불법이 너희를 황폐하게 하지 아니하리라.](겔18:30).
주님은 회개하지 않고 죄인들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는 죽는 자의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그런즉 /너희는/ 너희 자신을 돌이켜서 살지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18:32).
주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회개한 영혼에게 주님은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회개한 영혼에게 주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일 곧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킨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10). [만일 내가 /멸하리라/ 선포한 그 민족이
자기들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들에게 행하려고 생각했던 그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18:8).
이런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이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은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 문자 그대로 집행되지만 회개할 때는 모두 무효가 됩니다. 주님의
심판의 판결을 무효로 만들고 싶다면 회개하고 악에서 떠나면 됩니다.
7절입니다.[이는
이스라엘의 집과 이스라엘에 머무는 타국인 중에 자기 자신을 분리하여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나에 관하여 묻고자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는 나 [주]가 친히 응답할 것임이라.](7).
이스라엘에 머무는 타국인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지켜야만 그 곳에 살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분리하여 주님을
떠나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면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주님은 친히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하면 주님 역시 그들에게
내리실 재앙을 거두어 들이십니다. 매우 상습적이고도 악질적인 죄인들 가운데 아합이란 왕은 엘리야를 통해 선포되는 멸문의 재앙에 대한 심판을 듣고
겸손히 행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의 시대에 이르러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9).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역시 그러했습니다.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손히 행하매 [주]께서 진노를 돌이키사 그를 다 멸하지 아니하셨으며 또 유다의 형편도
좋아지니라.](대하12:12).
주님은 회개하는 영혼, 겸손히 행하는 영혼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8절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향하여 내 얼굴을 /굳게/ 세우고 그를 표적과 속담거리로 삼으며 내 백성의 한가운데서 끊으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8).
회개치 않고 여전히 자기를 하나님과 분리한 채 자기 우상들을 들고 나올 때 주님은 그 사람을 향해 얼굴을 굳게 세우십니다. 얼굴을 세운다는 말은
대적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은 세상과 밀착합니다. 우상과 밀착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면 세상과 분리되고, 세상과 연합하면
하나님과 분리됩니다.
분리는 성경적 명령인데 반대로 잘못 분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자신을 잘못 분리한 경우입니다. [이는 야고보가 보낸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으나 그들이 오매 할례자들인 그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가 자기 자신을 분리하였음이라.](갈2:12).
형제들과 연합해야 할 때 그는 자신을 형제들과 분리했습니다. 이는 잘못된 분리입니다. 거짓 교사들 역시 자신들을 잘못 분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를 분리시키는 자들이며 육체적 감각대로 살고 /성/령이 없는 자들이니라.](유1:19).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분리하고 모든 지혜를 찾아 참견하느니라.](잠18:1).
이들은 하나 되어야 할 순간에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반대로 분리해야 할 것들에는 사랑으로 하나되자!고 외칩니다. 이런 자들을
주님께서 심판하셔서 배교의 말로가 무엇인지 표적과 속담 거리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반역하면 고라의 이름이 생각나고, 세상을 사랑한
사람하면 데마, 헌금을 속인 사람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름이 선포되듯이 주님은 이들을 그런 속담 거리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좋은
간증의 본이 아니라 따르지 말아야 할 본으로서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만일 대언자가 어떤 일을 말할 때에 속임을 당하였으면 나 [주]가 그 대언자를 속인 것이니 내가 내 손을 그
위로 내밀고 그를 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서 그치게 하리라.](9).
거짓 대언자는 마귀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속였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워두고, 불법들을 얼굴 앞에 두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을 경우에 속여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거짓 대언자들을 속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보소서, 이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
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하니라.](왕하22:23).
경건하고 자기 의로 가득 차 있는 성도들 가운데 성경을 부인하면서까지 주님은 절대로 누구를 속이지 않고, 마귀를 통해 속이신다느니 하면서 주님을
변호하는 성도들이 있는데 성경은 분명히 “나 주가 그 대언자를 속인 것이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속인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인
사람들은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권능과 지혜가 그분께 있고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분께 속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모사(謀士)들을 노략하사 끌어가시고 재판관들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욥12:16~17).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다 하나님께 속하여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가 학교에서 배운 학문과 책에서 읽은 지식이 가득 차 있는데 주님은 그것으로 그 사람을 속이십니다. 어떤 이는 자만과 자존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주님은 그것으로 그 사람을 속이십니다. 마음속에 자기 우상들이 있으면 성경을 읽어도 자기 합리화하는 구절로만 읽히며, 설교를
들어도 자기의 욕심을 정당화 해 주는 말씀으로만 들립니다. 그래서 속습니다.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그 까닭은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모든 자들로 하여금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10~12).
하나님께서 속이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제일 원인인요,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기뻐한
것이 두 번째 원인입니다.
주님은 악한 자들을 더욱 악하게 만드셔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멸망케 하신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주님은 악한
영을 보내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삿9:23).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삼상16:14). [그 다음 날 하나님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 위에 임하매 그가 자기 집 한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
(삼상18:10a). 이들은 모두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자기 뜻대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우상들이 세워져 있지 않는지,
불법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주의해서 살펴 보고, 모두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10절입니다. [그 대언자의 형벌이 그에게 묻는 자의 형벌과 같은즉 그들이 자기 불법의 형벌을 담당하리니](10).
주님은 하나님께 속은 거짓 대언자만 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거짓 대언자에게 물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형벌을 주십니다. ‘같은즉’이란 말은 거짓
대언자가 받을 형벌과 거짓 대언자에 물은 사람의 형벌이 같다는 말입니다. 이단 두목이나 이단 종파의 신자는 같은 형벌을 받습니다. 속이는 자와
속은 자는 매 한 가지입니다. 속임을 당하는 것도 죄입니다. 속지 말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거짓 대언자는 가서 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죽여야 할 대상입니다. [너희 가운데 대언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 표적이나 이적을 네게 보이고 그가 말한 그 표적과 이적이 이루어질
때에 네게 이르기를, 네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 대언자나 그 꿈꾸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이는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가 너희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시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며 그분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굳게
붙들고 그 대언자나 그 꿈꾸는 자는 죽일지니 그 까닭은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너희로 하여금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고 속박의 집에서
구속(救贖)하신 [주] 너희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며 또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걸으라 명령하신 길에서 너를 밀어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네 안에서 악을 제거할지니라.](신13:1~5).
오늘날 성도들이 잘 속는 속임수를 몇 가지 살펴보면 단연 으뜸은 세상 염려와 재물에 관한 것입니다. 재물의 속임수는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립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것에 대한 정욕(情欲)이 들어와 말씀을 숨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하게
되는 자들이요,](막4:19).
노후가 걱정되고, 하루 하루 살아갈 앞 날이 걱정됩니다. 아무 걱정과 염려없이 사는 사람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내일 염려를 오늘
하는 사람들은 속은 것입니다. 보험, 연금, 주식 투자 등을 하면서 장래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축과 투자가 나쁜 것이 아니라 염려하고 돈을
많이 벌려는 마음으로 인해 속습니다. 속이는 사람과 속는 사람이 받은 형벌은 같습니다.
두 번째, 결혼과 이혼에 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불신자와 결혼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속은 것입니다. 이런 속임수는 교회 내에서도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이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혼은 부득이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교회 성도들도 이혼을 가급적
하지 말자이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혼과 이혼은 신앙과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속은 것입니다.
한국은 크리스천들의 이혼비율이 불신자보다 높습니다. 이는 다 속은 것입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도 속은 것이지만 신자가 이혼하는 것도
속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된 까닭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주]께서 증인이 되셨음이라. 그녀는 네 짝이요, 네 언약의 아내로되 네가 그녀를 대적하여 속임수를 행하였느니라. 주께는 영(靈)의 여분이
있었으되 주께서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것은 주께서 경건한 씨를 구하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 영을
조심하여 결코 어려서 취한 아내를 대적하며 속임수를 행하지 말지니라.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나는 /아내/ 버리는 것을
미워하노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옷으로 폭력을 덮기 때문이로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 영을 조심하여 속임수로 행하지 말지니라.](말2:14-16).
속이는 사람과 속는 사람이 받은 형벌은 같습니다.
셋째, 교육과 학문에 속습니다. 특히 철학과 과학은 성도들을 속이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이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골2:8).
많이 배운다고 진리에 근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점수를 주지만 성경은 높은 학위에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위가 낮은 자들은 헛되며 지위가 높은 자들은(high degree)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을 다
더해도 허무보다 가볍도다.](시62:9).
하나님의 말씀이 철학과 과학 위에 있습니다. 속이는 사람과 속는 사람이 받은 형벌은 같습니다.
넷째, 성경으로 속이는 거짓 교사들에게 속습니다. [[주]의 일을 속임수로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억제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렘48:10).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듯이 거짓 교사들이 넘쳐 납니다(벧후2:1). 속지 않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쉽게 속듯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쉽게 속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간교한 술수로 속이고자
하는 자들의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엡4:14).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을 붙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속이는 사람과 속는 사람이 받은 형벌은 같습니다.
다섯째, 죄의 속임수에 속습니다. 사소한 죄는 지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벼운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중에 하나라도 죄의 속임수를 통하여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사람은 처음부터 속임수에 속아서 죄를 범했습니다. 사람들은 잘 속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속지 않도록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부지런히 말씀의
조명을 구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