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구약 성경 OUTLINE




말씀: 에스겔 15:1-8

요절: 에스겔 15: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심은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 나무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세 종류의 중요한 나무입니다. 올리브 나무가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한다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특권을 상징합니다. 반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양식입니다. 올리브나무는 기름을 냅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즙을 내는데, 이 셋은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무슨 나무든지 나무는 주인이 원하는
가장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나무로서의 가치가 없고, 다만 땔감이 될 뿐입니다. 특히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쓸모없는 나무의 대표 격입니다. 기둥으로 쓸 수도 없고, 가구를 만들 수도 없고, 관상용으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포도나무의 특징을 보면 스스로 똑바로 자라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의지해서 감고 올라갑니다. 포도나무는 혼자 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설 수 없는 민족입니다. 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1,2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보다도 나은 것이 무엇이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 있는 가지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1-2).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점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즙을 내는 것입니다.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를 통치하라, 하니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즙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올라서리요?
하니라.
](삿9:12-13). 포도나무에서 나는 열매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포도즙이나 포도주를 즐깁니다. 포도에서
나는 향기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좋습니다. 포도즙은 육신의 건강, 양식으로서 필수적인 음식이 아니라 마음의 기분을 위한 음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즙과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심장을 강하게 하는 빵이 나게 하셨도다.
](시104:15). [/너는/
네 길을 가서 기쁨으로 네 빵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즙을 마실지니 이는 하나님께서 이제 네가 행하는 일들을 받으시기 때문이니라.
](전9:7).
[잔치는 웃음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즙은 즐겁게 하는 것이로되 돈은 모든 것에 쓸모가 있느니라.](전10:19). 포도즙은
분명히 사람의 마음, 감정 상태를 조절하는 음료입니다. 포도나무로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할 의무와 특권이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많이 낼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8).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포도즙보다 더 좋은 것으로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을 담아
두시는데, 이는 놀라운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 속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포도즙이 불어날 때의 /기쁨/ 보다 더 크니이다.](시4:7)라고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이 주신 기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포도주로 기쁜 마음은 참된 기쁨이 아닙니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포도즙이 불어날 때보다
더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심으로 기쁨을 넘치게 하십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눈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토록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6:11). 이 기쁨은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사 기쁨으로 나오게 하시고 자신의 택한 자를 즐거움으로 나오게 하시며](시105:43).
주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에덴(희락)에 두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 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심으로 기쁨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은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롬14:17). 성도들은 결코 포도즙으로 자신의 기분을 내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쁨의 근원을 찾았기 때문이며, 기쁨이 내 안에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느냐? 고 질문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는 재미가 없어질 것 같아 못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 가운데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술을 먹을 때 잠시 기뻐하지만 잠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
사랑의 기쁨은 포도즙이나 포도주가 주는 기쁨보다 훨씬 큰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입의 입맞춤으로 내게 입
맞추시기 원하노니 이는 당신의 사랑이 포도즙보다 낫기 때문이니이다.
](아1:2). 하나님의 사랑은 몇 백년 묵은 최고급 포도주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줍니다. 주님 역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누이, 내 정혼자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어여쁘냐! 네 사랑이 포도즙보다
훨씬 낫구나! 네 향유 냄새가 모든 향료보다 낫구나!
](아4:10). 그리스도인들은 웃지 않아도 내면에 참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세상 사람들은 웃으면서도 내면에 기쁨이 없습니다. 웃음은 현상이고, 기쁨은 본질입니다. 코메디 프로그램, 연극, 영화, 오락, 운동 등이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까? 웃음을 주기는 하지만 결코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마음 속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끝없이 외부에서 어떤 기쁨을
내 안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나는 것을 아무리 소유해 보아도 우리의 속은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또한 나의 기쁨이요, 나의 모사(謀士)이니이다.](시119:24).
[주의 긍휼이 내 위에 임하게 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이는 주의 법이 나의 기쁨이기 때문이니이다.](시119:77). [주의
법이 나의 기쁨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나의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119:92). [내가 주의 증거들을 영원한
유산으로 삼았사오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내 마음의 기쁨이기 때문이니이다.
](시119:111). [근심과 고통이 나를 붙잡았사오나
주의 명령들은 나의 기쁨이니이다.
](시119:143). [오 [주]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법이 내 기쁨이니이다.](시119:174).
주의 증거, 주의 법, 주의 명령들이 나의 기쁨입니다.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은 넘치는 기쁨이요, 충만한 기쁨입니다. 마음이 슬프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시19:8). 성경이
마음을 기쁘게 해 줍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기도 응답입니다.
주님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1).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6:24). 성도들의 내면은 기쁨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 마음 안에 평안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 기쁨은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너희에게 근심이 있으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
그런데 이런 기쁨을 전혀 누려 본 적이 없는 성도들은 다른 무엇에서부터 기쁨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술, 여자, 쾌락, 명예, 돈, 권세, 사랑을
구걸하지만 어디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볼 때면 큰 문제 의식을 느끼곤
합니다. 물론 삶의 고단함이 있고, 근심과 걱정의 파고가 높이 치는 항해 길이지만 “이것이 아니다!”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했던 사도들,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던 바울과 실라의 믿음과 동등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무엇인가 기뻐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5:16)는 말씀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받은 구원입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그분을 믿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니 이는 /너희가/ 너희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벧전1:8-9).
구원받은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들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이 일로
기뻐하지 말고 오직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10:20) 하시며, 구원받은 기쁨을 가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세월이 지나면 처음받은 기쁨, 첫 사랑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사라질 때 우리는
회개하고 주님이 주신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붙드소서.](시51:12).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은 앞으로 넘치는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 또한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4:13).주님은 앞으로 있을 기쁨, 영광을 위해 현재 기쁨으로 오래 참고, 기쁨으로 고난당하고,
기쁨으로 박해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현재 받는 고난은 앞으로 있을 넘치는 기쁨을 위한 것이므로 또한 기쁜 것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므로 기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편지를 쓰는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일1:4). 성도를 심방하는 목적 역시 동일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잉크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기를 바라노니 이것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이1:12). 우리는 모두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거운 짐과 근심이 되는 사람, 짜증을 유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신자나 우리와 영이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겠지만 같은 진리를 믿는 형제 자매들에게는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절입니다. [거기에서 나무를 취하여 무슨 작업을
하겠느냐? 사람들이 그것에서 못을 취하여 무슨 그릇을 걸겠느냐?
](3).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영토는 포도원이요, 백성들은 거기에 심기운 포도나무란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진리였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주께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이집트에서 가져다가 이교도들을 쫓아내시고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에 빈터를 준비하시고 그 뿌리가 깊이 박히게 하시니
그것이 땅을 채웠으며 산들이 그 그늘에 덮이고 그 가지들은 좋은 백향목같이 되었으며 그녀가 자기 줄기들을 바다까지 내보내었고 자기 가지들을
강까지 내보내었거늘
](시80:8~11)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역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가 울타리를 두르고 돌을 주워
내고 최상품의 포도나무를 심고 그 한가운데에 망대를 세우고 또 그 안에 포도즙 틀을 만들었도다. 포도원이 좋은 포도 내기를 그가 바랐더니
들포도를 내었도다.
](사5: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포도원을 가꾸시고, 포도나무를 잘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좋은 포도를 낸
것이 아니라 들포도를 내고 말았습니다. 참 포도나무가 들포도가 되어 버린 것은 변질되었다는 뜻입니다. 귤이 변하여 탱자가 된 것처럼 참
포도나무가 들포도가 되어 버린 것은 그들이 주님을 버린 결과입니다. 이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지라 주님조차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를 귀한 포도나무 곧 온전히 올바른 씨로 심었거늘 네가 내게 이방 포도나무 곧 변질된 초목이 됨은 어찌된 까닭이냐?
](렘2:21).
열매의 문제는 곧 나무의 문제입니다. 나무의 문제는 곧 땅의 문제입니다. 약속의 땅은 주님이 복주신 땅이요, 기쁨의 땅이었지만 범죄함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텅빈 포도나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텅 빈 포도나무요, 자기를 위하여 열매를 맺는 /나무/로다. 자기 열매가
많은즉 그가 제단들을 많게 하였으며 자기 땅이 좋은즉 그들이 좋은 형상들을 만들었도다.
](호10:1). 주님은 이스라엘 밖의 들 포도를
쓸개 포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 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즙은 용들의 독이요, 독사의 지독한 독이라.
](신32:32-33). 이런 포도나무는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포도에서 난 것을 먹는 대부분의 술은 용들의 독이요, 독사의 지독한 독입니다. 저주받은 사람들이 용의 독을 몸에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사람들이 술로 망했고, 세상 사람들은 술로 망해가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보라, 그것은 땔감으로 불에 던져지느니라.
불이 그 나무의 두 끝을 삼키며 그 한가운데는 불타게 되나니 그것이 무슨 작업엔들 적합하겠느냐?
](4). 불타는 포도나무를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은 불타지만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불타는 가시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 것을 본
것처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포도나무 역시 불에 던져지지만 그 뿌리까지 뽑혀서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가지들만 불에 던져집니다.


이는 주님의 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들처럼 버림받아 시드나니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느니라.
](요15:5~6). 주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불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구원을 위협하는 구절처럼 이해되기도 하는데 조심해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성도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생명의 관계요, 유기체적인 관계입니다. 성도는 결코 조직체가 아닙니다.
생명이 연결된 유기체입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후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지옥 불에 던지우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불에 던지는 자는 천사들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천사들이 사람을 단으로 묶어서 불에 던지는 기사는 보았어도 사람이 성도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는 예를 성경에서 본 적이 없으며,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적 배경을 통해서 볼 때 징계와
고난과 심판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서 흩어 버리시고, 고난과 극심한 심판을
받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성도들 역시 주님의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이는 고난과 단련을 통한 영광의 상처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죄로 인해 맞는 징계입니다.


5절입니다. [보라, 그것이 온전할 때에 어떤 작업에도
적합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불이 삼키므로 불타게 되면 어찌 무슨 작업엔들 적합하겠느냐?
](5). 포도나무는 온전할 때에도 작업에 적합한
재목이 아닙니다. 하물며 불에 탄 나뭇가지야 어디에도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불에 탄 포도나무가지가 되었습니다. 신약의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포도원을 빼앗겨 버렸습니다(마25:33-41). [또 다른 비유를 들으라.
어떤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을 파서 포도즙 틀을 만들고 망대를 세워 농부들에게 세(貰)로 주고 먼 나라로 갔다가 열매
맺는 때가 가까이 이르매 열매를 받으려고 농부들에게 자기 종들을 보내니 농부들이 그 종들을 잡아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치매
그가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이 그 종들에게도 그렇게 하거늘 그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으나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자, 그를 죽이고 그의 상속을 가로채자, 하고 이에 그를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내쫓고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오면 그 농부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그 사악한 자들을 무참히
멸하고 자기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주리라, 하니
](마25:33-41).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포도원을 잃어버린 채 2,000년이나 방황하다 1948년 일부를 회복하고 전 지역의 회복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숲의 나무들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내어 주어 땔감이 되게 한 것같이 예루살렘 거주민들도 그리하리라.
](6).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명료하고 정확하여 그 뜻을 오해하거나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왜 자신들에게 심판이 닥쳤는지, 왜 주님이
불을 통과하게 하셨는지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민을 불에 내어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는데 예레미야 52장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제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의 제십구년 오월 곧 그 달 십일에 바빌론 왕을 섬기는 호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주]의 집과 왕의 집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우되 지위가 높은 자들의 집까지 다 불태웠으며
](렘52:12~13).
화염에 싸인 예루살렘을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는 반복되어서 이 일은 주후 70년 경 로마에 의해서 다시 한번 자행되었고, 앞으로 대환란 때 다시
한번 일어날 예언적 사건의 모델입니다. 침례인 요한이 유다 백성들을 향해 [또한 도끼가 이제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마3:10)는 경고했는데, 그 경고대로 유대인들은 찍혀서 불에 던져졌습니다. 이는
역사가 입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역사적 예로 마칠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열매맺지 못할 때 내어 버려져 말라 버리고, 사람들은 주워 다가 불 속에 던져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요15:6). 성도들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나니
](마7:17-19). 나무가 병들고,
벌레가 먹고, 속에서 썩어 버렸다면 도저히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화-사과 농부의 이야기, 속이 빈 나무, 속이 빈 사람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땅이 있어야 합니다. 광야나
가시밭길, 돌짝 밭에 뿌려진 씨는 결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좋은 마음 밭이 되지 않으면 좋은 열매,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느니라.](마13:8).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 맺는 조건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
]
(고후4:10~12). 이것이 열매를 맺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고 있는 한 알의 밀입니다. 밀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 외에 없습니다. 내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밖으로 표출되어 또 다른 생명을 맺는 유일한 방법 역시 죽음에
넘겨지는 것 외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은 신약 성도들이 영적 열매를 맺는 성경적인 본이요, 예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졌고,
항상에 죽음에 넘겨졌습니다. 이 죽음은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열매맺는
기쁨이 있습니다. 승리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4).
--안에 거한다, 머문다는 것은 이해하기 쉬운 진리입니다. 우리는 미국 땅에 거합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미국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모두 이 땅에 살지만 애정과 마음, 생활권은 모두 하늘에 가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
거하지만 육체 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신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것이며, 마음과 애정과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생명, 소망, 생활 등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성도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인내하느니라.
](약5:7).
열매는 은사와는 달리 금방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가 되어야 드러납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때
성령의 열매, 구령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도 인내가 필요하고, 섬김에도 인내가 필요하고, 말씀 전파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녀 교육이나 성도의 양육이나 모든 면에서 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내를 길러 주시는데, 환난을
통해서입니다(롬5:3). 징계를 보내시기도 하십니다. [이제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 환란, 징계, 시련, 슬픔, 고난과 같은
풀무가 없이 열매를 맺은 위대한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 다니엘, 욥, 바울 그 누구하나 이런 과정이 없었던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기뻐하는 것은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내를 맺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구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곧 /주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것과 더불어 /너희는/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것들이 너희 안에 있어
풍성한즉 너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빈약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 (벧후1:4~8).
안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밖으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열매는 일이 아닙니다. 열매는 행위가 아닙니다. 열매는 은사가 아닙니다.
열매는 안에 있는 생명이 밖으로 분출되는 것입니다. 안에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본질을 외면하고 현상만을 추구하거나 속은 무시하고
밖에 관심을 두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7-8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내 얼굴을 /굳게/
세우리니 그들이 이 불에서 나와도 다른 불이 그들을 삼키리라. 내가 그들을 향하여 내 얼굴을 /굳게/ 세울 때에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그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하였음이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7-8). 주님이 얼굴을 굳게
세우시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적하시면 들어가도 저주요, 나와도 저주를 받습니다. 불에서 나와도 다른 불이 그들을 삼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때까지 이런 역사적 현상은 반복됩니다. 그런 후에야 그들은 주님이 주님인 줄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은 예언적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인 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못 박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대환란이란 심판을 통과한 후에야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대적하십니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약4:6).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오 너 지극히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노니 이는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징벌하는 때가 이르렀음이라.
](렘50:31). 주님은 세상의 친구가 되는 성도들을 대적하십니다(약4:4, 벧전5:5).
우리 말로 ‘물리치시되’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resist'란 단어입니다. 주님은 대적하십니다.


우리는 구약의 기록들을 본으로, 교훈으로 삼아 영적 생활의 귀한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Archived(완료) > 구약 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스겔(18)  (0) 2006.07.02
에스겔(17)  (0) 2006.06.24
에스겔(15)  (0) 2006.06.22
에스겔(14)  (0) 2006.06.21
에스겔(13)  (0) 2006.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