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16:27-63
요절: 에스겔 16:60
주님은 마치 법정에 선 검사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그동안 행한
죄악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에 상응한 벌이 무엇인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찾아내시고 그것을 밝히 드러내시면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회개하는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죄인들의 회개하지 않는 죄를 모두 기억하시고 갚아 주시지만 회개한 죄는 결코 기억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나 곧 나는 내 자신을
위하여 네 범죄들을 지워 버리는 자니 네 죄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
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보라, 내가 내 손을 네
위에 내밀어서 네가 늘 먹는 양식을 감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들 곧 네 음탕한 길을 부끄러워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에게 너를 넘겨 뜻대로 하게
하였거늘](27). 주님은 범죄에 대한 징계로 일용할 양식을 줄여 버렸습니다. 이는 기근으로 흉년을 보내신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수입의 감소입니다. 다음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대대로 원수였습니다. 원수에게 넘겨
주는 일은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욕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현상을 하나님의 손길이요, 죄에 대한
형벌이란 사실로 알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만족하지 아니하여 아시리아 사람들과도 음녀 짓을 행하였도다. 참으로 네가
그들과 창녀 짓을 행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또 가나안 땅에서 네 음행을 크게 더하여 갈대아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나 네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였느니라.](28-29). 오히려 더욱 음행을 했는데, 아시리아 사람들과 음녀 짓을 했고, 갈대아에 이르기까지 음행을 더했습니다.
주위 부족들의 신을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이방 종교란 종교란 다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성경을
버려둔 채 모든 종교 체계를 다 배워서 교회 내에 끌어 들입니다. 처음에는 캐톨릭을 흉내내다가 요즘에는 종교마다 고유한 장점이 있다, 배울 점이
있다며 종교 통합 운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랑과 일치, 하나 되기 운동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음녀 짓을 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두아디라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으니 이는 네가 이세벨이라는 그 여자를 용납하기 때문이라. 그녀가 자기를 가리켜 여대언자라 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 내가 그녀에게 그녀의 음행을 회개할 여지를 주었으나 그녀가 회개하지 아니하였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요, 그녀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며]
(계2:20~22). 이는 성도 개개인의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한 분 외에 돈, 명예, 권력 등 자신들이 얻고 싶은
것들에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집착합니다. 오순절 운동(movement)이란 복 받기 운동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고 세상과 동화되고, 세상과 일치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음행 장려 운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마음 속에 주님 한 분 외에 다른
것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면 주님은 이용 대상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시73:25). 이것이 참된 신앙이요, 순수한 믿음입니다.
주님은 음녀 짓, 창녀 짓 하는 유대 백성들을 향해 탄식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깊은 한 숨 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때립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네가 이 모든 일 곧 오만하고 음란한
여자의 일을 행함을 보건대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약한고!](30). 오만하고 음란한 여자의 일을 행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약하기
그지없습니다. 행동으로는 어떤 죄라도 다 지을 수 있는 흉악범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피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어찌 그리
약한고!”란 말이 딱 맞습니다. 죄인일수록 죄에 연약한 것입니다. 육신적일수록 육신에 약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 3번이나 큰 소리를 치며 주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의 육신은 강해 보였지만 그의 마음은 어찌 그리 약했던지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고 저주하며 부인하기 까지 했습니다.
겉모습을 꾸미고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속은 약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연약함을 강함으로 바꾸는 방법이 없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몸을 강하게 바꾸시지 않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체질(體質)을 아시며 우리가 /다만/ 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시103:14).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 호흡에 있으며, 단지 바람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아십니다. 그렇지만 이런 연약함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우리의
속 사람을 강하게 하시고, 마음을 강하게 하셔서 주의 능력으로 살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남자답게 강하고 담대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의 밥이 되고, 이스라엘처럼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게 되는데 육신의 일 가운데 처음 나오는 것들이 모두
음행에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色慾)과] (갈5:19).
그래서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1).
우리는 모두 약합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네가 이 모든 일 곧 오만하고 음란한 여자의 일을 행함을 보건대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약한고!](30). 주님은 탄식하십니다.
오늘날 교단을 보면 목사님들부터 전 교인이 급격히 여성화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소리에서부터 여성적인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행동이나 하는 짓들이 전부 여자처럼 구는 것을 마치 경건하고 영성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남자답게”란 말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크게 용기를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도시들을 위하여 남자답게 행하자. [주]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시기 원하노라, 하고](삼하10:12). 주님은 욥에게 두 차례나
‘남자답게’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남자답게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물을 터이니 대답할지니라.](욥38:3). [이제
너는 남자답게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물을 터이니 내게 밝히 고할지니라.](욥40:7). 사도 바울 역시 성도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행동하며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전16:13)고 했습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온 땅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그런즉 너는 강건하여 대장부가 되고](왕상2:2)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란
점에서 더욱 강해져야 할 필요를 절감합니다.
사람을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첫째, 책무를 줍니다. [오직 너는 여호수아에게 책무를
주고 그의 용기를 북돋우며 그를 강건하게 하라. 이는 그가 이 백성의 앞에서 건너가서 그들로 하여금 네가 볼 땅을 상속하게 할 것임이니라,
하셨느니라.](신3:28). 주님은 모세를 통해 여호수아에게 책무를 주고 용기를 북돋우며 그를 강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맡은 책무가 있으면 강해집니다. 특히 남자는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으면 놀랍게 강해지게 됩니다.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약해집니다. 반드시 할 일이 있는 사람은 결코 좌절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발악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주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책무를 주셨습니다. 해야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존재 의미와 삶의 소망이 있는 것이요,
그것이야말로 가장 강한 힘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명, 직무를 주셨습니다.
둘째, 의를 행할 때 강건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삼
년 동안 유다 왕국을 강성하게 하고 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건하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삼 년 동안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걸었음이더라.](대하11:17).
옛 길을 걸으면 우리는 안전해지며, 강건해집니다. 죄는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의는 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이는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사악한 자는 넘어져서 해악에 빠질 것임이니라.](잠24:16). 사악한 자는
겉모양이 강하지만 속은 작은 전화 벨 소리에도 놀랍니다. 경찰이 서 있는 모습만 보고도 덜컥 놀랍니다. 무심코 내 뱉은 말에 자신이 한 일이
드러났을까 봐 깜짝 놀랍니다. 사람을 그렇게 약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나 의를 행할 때 양심은 담대해집니다.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사악한 자는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로운 자는 사자같이 담대하니](잠28:1).
셋째, 가난한 자를 배려할 때 주님은 강건하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께서 고난의 때에 그를 건지시리로다. [주]께서 그를 보존하시고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땅에서 복을
받으리라. 주께서 그의 원수들의 뜻대로 그를 넘겨주지 아니하시리이다. [주]께서 병상에 있는 그를 강건하게 하시고 그가 병들었을 때에 그의 모든
잠자리를 만들어 주시리이다.] (시41:1~3). 가난한 자를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은 주님의 뜻대로 하는 금식이요, 주님께 빌려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께 빌려 드리는 것이니 그분께서 그가 베푼 것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항상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믿음은 반드시 덕을 세우는 일로 드러납니다. 가난한 자를 도우는 일은 최상의 건강법이요,
기도 응답에 가장 빠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또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입히며 네 살붙이를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쏟아지고 네
건강이 신속히 솟구치며 네 의가 네 앞에서 나아가고 [주]의 영광이 네 후위대(後衛隊)가 되시리니] (사58:7~8). 여러분이 침상에
누워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고치십니다.
넷째, 집회와 예배에 참석할 때 강해집니다. [성소로부터
네게 도움을 보내시고 시온으로부터 너를 강하게 하시며](시20:2). 교회는 구약의 성소는 아닙니다. 그러나 집회로 모이는 예배, 기도
모임, 성경 공부는 주님이 도움을 보내시고 강하게 하시는 통로입니다. 사자는 사냥을 할 때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녀석을 공격합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 따로 노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약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있을 때 사람은 평소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강해지며 점점 더 강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개인주의와 이기심으로 가득 찬 교인들은 예배, 기도 모임 등의 집회를
매우 경홀히 여김으로 영적 능력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전이나 이후에나
단 한명도 없습니다.
다섯째,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사람의
모양을 한 이가 다시 와서 내게 손을 대며 나를 강건하게 하고 이르되, 오 크게 사랑 받는 사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참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라, 하니라. 그가 내게 말하매 내가 강건하게 되어 이르되,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내
주는 말씀하소서, 하니](단10:18-19). 다니엘은 쓰러졌을 때 주님이 친히 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쓰러질 때 주님이
친히 손을 대시며 강하게 하시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연약한 자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강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약함을 탓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들을 [주] 안에서 강건하게 하리니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르내리리라. [주]가 말하노라.](슥10:12).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강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통해 친히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능치 못할 일이 없게 하십니다.
다섯째, 예수의 이름은 강하게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강건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그분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6).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성도는
고난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우리는 연약한 자를 강건하게 할 수 있는 믿음을
얻습니다.
여섯째, 심방을 통해서 주님은 강하게 하십니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양 무리들을 강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형제들을 강하게 해 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목자는 죽어가는 혼들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너는/ 깨어서 아직 남아 있으나 죽으려 하는 것들을 강건하게 할지니 이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완전함을 찾지 못하였음이라.](계3:2). 심방은 혼들을 강하게 하는 유익한 수단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지역들을 다시 돌며
그들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거기서 얼마를 지낸 뒤에 떠나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온 지방을 차례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강건하게 하니라.](행18:23).
저는 지금까지 심방의 가치를 잘 몰랐습니다. 가는 것을 매우 귀찮아하고, 성도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교회들에서
하는 심방 예배의 폐해를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는 심방을 통해서 형제들을 강하게 하는 일을 할 것을 결단합니다.
일곱째, 성령을 통해서 강하게 하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부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하여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6).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보다 더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의 영으로 충만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연약하고 두려움에 떨던 갈릴리의 어부들을 모두 순교자로 만들었습니다.
강하게 되고 싶다면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주님께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실 것을 기도하십시오. 타이어에 가득한 바람은 무거운 차체를 거뜬히
들뿐 아니라 속도를 내어 달리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빠지면 고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타이어는 고무보다 바람이
핵심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죄는 타이어를 펑크 내는 못과 같이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맙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할 때 성령의 은사들이 드러나고,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過度)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한 가지는 성령 충만입니다.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성도들은 오직 성령 충만함을 통해서만 영적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덟째, 주님은 자신의 권능으로 강건하게 하십니다. [끝으로
내 형제들아, {주} 안에서와 그분의 강력한 권능 안에서 강건하라.](엡6:10). [그분의 영광스런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1:11). 주님의 권능은 우주 만물을 친히 창조하시고, 붙들고
계시는 능력입니다. 주님의 권능은 병든 자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능입니다. 주님은 그 권능으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자신의 영광스런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하심으로 우리는 모든 일에 기쁨으로 인내하고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아홉째, 은혜가 사람을 강건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딤후2:1).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맛본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맛본 사람은 진정 강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보다 강합니다.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종교
의식이 아닙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훈련이 아닙니다. 육신적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 세상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
연약한 자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성도들, 은혜 안에 머무는 자들은 의를 행합니다. 은혜는 주님의 권능이 우리 안에서 효력있게 역사하여 복음의 사역자를 만듭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따라 그분의 권능이 효력 있게 활동함을 힘입어 내가 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노라.](엡3:7). 은혜를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 날부터 온 세상에서처럼 너희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도다.](골1:6).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의 죄만을 짊어지신 것이 아닙니다.
연약함, 질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마8:17).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지만 속 사람은 강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주님으로 인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
범죄한 인간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 위에는 은혜와 복이 머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더 많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저주가 되신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셨음을 믿을 때 은혜가
가르치고 다스리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열 번째, 주님과 함께 할 때 강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와 함께 하사 나를 강건하게 하심은 그 선포한 말씀이 나로 말미암아 온전히 알려져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獅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4:17).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려면 내가 항상 하나님 편에
서면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
편에만 서면 임마누엘의 은혜를 항상 누릴 수 있게 됩니다.
31-34절입니다. [네가 모든 길 머리에 네 우뚝 솟은
처소를 짓고 모든 거리에 네 높은 처소를 만들고도 삯을 거절하니 창녀 같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자기 남편대신 다른 사람들을 취하여 간음을 행하는
아내와 같도다. 그들은 모든 음녀에게 선물을 주거니와 너는 네 모든 사랑하는 자에게 선물을 주며 삯을 주어 사방에서 네게 이르게 하여 너와 행음(行淫)하게
하는도다. 네가 행음할 때에 다른 여자들과 반대되는 것이 네게 있음은 행음을 벌이려고 너를 따르는 자가 없기 때문이며 또 네가 대가를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대가를 주기 때문이라. 그런즉 너는 반대가 되느니라.](31-34). 이스라엘은 창녀 짓을 하기는 하는데 돈을 받는
창녀가 아니라 도리어 돈을 주는 창녀입니다. 이상한 창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간음하는 아내”와 같다고 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정혼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사54:5, 호2:2). 다른 음녀들과 반대로 행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자원해서 음행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35-43절 말씀은 창녀짓 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이 주시는
벌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오 창녀야”하고 부르십니다. 주님은 그들이 행한 일을 그들의 신분으로 보십니다.
38절입니다. [또 너를 심판하기를 혼인을 깨고 피를 흘린
여자들을 심판하는 것같이 하여 격노하는 피와 질투하는 피를 네게 주며](38). 격노하는 피와 질투하는 피를 주신다는 것은 “피에는
피”의 원칙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은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습니다.
39-41절은 전쟁의 비참함입니다. [또 너를 그들의 손에
내어 주리니 그들이 네 우뚝 솟은 처소를 헐고 네 높은 처소를 부수며 또 네 옷을 벗기고 네 아름다운 보석들을 취하며 너를 벌거벗겨 알몸으로
버려 두고 또 무리를 데리고 와서 너를 치되 돌로 치고 칼로 찌르며 네 집들을 불태우고 많은 여자들의 눈앞에서 네게 심판을 집행하리라. 내가
너로 하여금 창녀 짓 행하는 것을 그치게 할 것인즉 너도 다시는 삯을 주지 아니하리라.](39-41). 미군 포로 사건에서도 보았지만
포로들을 사로잡아 옷을 벗기고 수치를 주는 일은 동서고금에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벌거 벗겨서 때리고 칼로 찌르는 일은 예삿일입니다. 가죽을
벗기기도 합니다. 일본군이 독립군을 향해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전쟁에서나 포로들의 인권은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행한 음행으로 인한 벌이요,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을 집행하심으로 그들이 다시는 창녀 짓을 하지 못하게
하셨고, 더 이상 삯을 주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바빌론에 의해, 신약에서는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이런 고통을 당했는데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대환란이 남아 있습니다.
42-43절입니다. [이로써 내가 너를 향한 내 격노를
풀며 내 질투가 너를 떠나게 하리니 내가 평온하여 다시는 분노하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애타게 하였은즉, 보라, 나도 네 길대로 네 머리 위에 보응하리니 네가 네 모든 가증한 일보다 더한 이 음탕한 짓을 행하지 아니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42-43). 하나님은 범죄하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 애를 태우십니다.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마치 타락한
아들이 범죄하는 것을 속상해하는 부모의 심정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쏟아 부으시는 것은 더 이상 음탕한 짓을 행하지 않고, 주님이
평온하여 다시는 분노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44절은 오늘날 이곳 미국에 있는 속담인데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보라, 속담을 사용하는 자마다 너에 대하여 이 속담을 사용하여 이르기를, 어머니가 그러하면 그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44).
우리 말로는 부전자전(父傳子傳)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모델이 되고, 딸은 어머니가 모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유전적, 환경적
요인이 모두 다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해 이 속담을 사용하여 이르기를, 아버지들이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 자녀들의 이가
시려서 진저리치게 되었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겔18:2). 주님은 불법은 삼, 사대까지 물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어떠함을 보면 딸을 알 수 있고, 아버지의 어떠함을 보면 아들을 알 수 있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길은 회개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계에 흐르는 복을 끊는 것은 죄입니다. 다윗, 솔로몬에 이어지는 유다의 가문은 죄로 인해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가문은 대대로 제사장의 명문 혈통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죄로 인해 망했습니다. 사무엘의 아들은 사무엘처럼 훌륭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믿음과 신앙이 유전이 아니란 사실을 보여 줍니다.
45-46절입니다. [너는 자기 남편과 자녀들을 심히
싫어하는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네 자매들 곧 자기 남편과 자녀들을 심히 싫어한 자들 가운데 하나라. 너희 어머니는 헷 족속이요, 너희 아버지는
아모리 족속이며 네 언니는 자기 딸들과 함께 네 왼쪽에 거하는 사마리아요, 네 동생은 자기 딸들과 함께 네 오른쪽에 거하는 소돔이라.](45-46).
어머니가 헷 족속인지라 딸이 헷 족속의 일을 배우고 풍습을 따라 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아버지가 아모리인이면 아들이 아모리 풍습대로
생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딸들은 사마리아와 소돔이라고 하셨는데 이곳이 음행의 동네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이 가정은 아모리인
아버지, 헷 족속 어머니, 사마리와 소돔의 딸들로 구성된 집안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유다의 예루살렘의 모습인데 너무나 기형적입니다.
성경은 예루살렘을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계11:8).
47절입니다. [네가 그들의 길들을 따라 걸으며 그들의
가증한 일들을 따라 행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기고 네 모든 길에서 그들보다 더 부패하였도다.](47).
예루살렘은 주위 이방 민족들보다 한 수 더 떠서 죄를 지었는데, 그들이 행한 죄악들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소돔이 예루살렘을 향해
“형님”이라고 부를 지경이었습니다. 죄에 관한한 소돔은 예루살렘보다 한 수 아래였을 정도이니 예루살렘은 죄악과 불법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녀와 그녀의 딸들은 너 곧 너와 네 딸들이 행한 것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48).
49-50절입니다. [보라, 네 동생 소돔의 불법은
이것이니 곧 그녀와 그녀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빵의 풍족함과 게으름이 많이 있는 것과 그녀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손을 강하게 하지 아니한
것과 또 그들이 거만하여 내 앞에서 가증한 짓을 행한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선하게 여기는 대로 그들을 제거하였느니라.](49-50).
예루살렘이 졸지에 소돔의 언니요, 형님의 지위가 되었으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주님은 소돔을 네 동생이라고 부르셨는데, 동생 소돔의 불법을
지적하심으로써 예루살렘의 죄를 함께 지적한 것입니다. 소돔의 불법은 오늘날 우리들의 불법이기도 합니다.
첫째, 교만함 둘째, 빵의 풍족함 셋째, 게으름이 많은 것, 넷째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손을 강하게 하지 않는 것 다섯째, 내 앞에서
가증한 짓을 행한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죄악으로 인해 주님은 그들을 이 땅에서 제거하셨습니다. 풍요로운 물질 문명은
주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쓸 때 그것은 심판의 원인이요, 죄악이 됩니다. 소돔은 교만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대적하시는 죄입니다. 소돔은 빵이 풍족했습니다. 땅이 너무나 좋았고 소출이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바라는 복 중에 하나이지만
주님은 이것이 그들의 불법이라고 하십니다. 빵이 풍성한 것이 그들의 불법이 된 것은 영적 양식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빵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물질주의 가치관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곳 미국의 가치관이기도 합니다. 게으름이 많은 것이란 오늘날 말로 바꾸면 문화 생활, 여가 생활,
오락에 해당합니다.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 생활에 매진합니다. 주 5일 근무에 이틀을 어떻게 놀까?, 휴가는 어떻게 보낼까? 등에
골몰합니다. 영화관, 낚시터, 등산, 캠핑, 관광 등...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술집, 도박장, 오락장을 찾아 다닙니다. 이런 것들은
게으름이 많은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없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곳 미국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그들의 복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불법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주신 복을 그들은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만 사용했습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증한 짓을 했는데 육신의 음행을 자행한 것을 말합니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하는 가증한 짓들 가운데 단연 으뜸은
음행입니다.
51절입니다. [사마리아는 네 죄들의 절반도 짓지
아니하였으되 너는 네 가증한 일들을 그들보다 더 많이 행하였으며 네가 행한 모든 가증한 일들로 네 자매들을 의롭다 하였느니라.](51).
북왕국 사마리아가 남왕국 유다보다 먼저 망한 것은 그들의 죄가 더 커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앗시리아에 망할 때 현재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이
행한 죄들의 절반도 짓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오래 참으신 것은 다윗의 언약 때문이요, 크신 긍휼 때문입니다.
52절입니다. [또 네가 네 자매들을 /의롭다/
판단하였은즉 너도 네 자신의 수치를 담당할지니 이는 네가 그들보다 더 가증하게 네 죄들을 지었음이라. 그들은 너보다 더 의로우니라. 참으로 네가
네 자매들을 의롭다 하였은즉 너도 당황하며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52). 남왕국은 유다가 망할 때 그들이 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과 동화되고 이방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들은 사마리아보다 더
악한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행한 것을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더 가증하게 죄를 지었고, 수치를 담당할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53-54절입니다. [내가 그들의 포로 된 자들 곧 소돔과
그 딸들의 포로 된 자들과 사마리아와 그 딸들의 포로 된 자들을 다시 데려올 때에 그들의 한가운데서 네 포로 된 자들의 포로 된 것을 다시
데려옴으로써 너로 하여금 네 자신의 수치를 담당하게 하고 네가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당황하게 하리니 이는 네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음이라.](53-54).
주님은 심판의 선고 가운데서도 그들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대 환란이 끝난 후 천년 왕국에 이루어질 문자적인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것 같이 땅 끝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모두 약속의 땅으로 모으실 것입니다. 소돔은 창세기 18장에서 완전히 망하고 그
땅에 모압 족속이 살았습니다. 주님은 모압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렘48:46,47). 예루살렘이 받는 심판은 이방 민족들에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였지만 결국 행하는 짓들이 거의 비슷하다가 망하는 것을 볼 때 주위 민족들은 마음에
큰 위로가 되는 법입니다. 때로 남이 받는 환란과 시련은 나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데 주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55-57절입니다. [네 자매들 곧 소돔과 그 딸들이
자기들의 이전 지위로 되돌아가고 사마리아와 그 딸들도 자기들의 이전 지위로 되돌아 갈 때에 너와 네 딸들도 너희의 이전 지위로 되돌아가리니 이는
너의 교만하던 날에 네 입이 네 아우 소돔을 언급조차 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때는/ 네 사악함이 드러나기도 전이요, 시리아의 딸들과 그 사방에
있는 모든 자들과 사방에서 너를 멸시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너를 모욕하던 때라.](55-57). 55절은 천년 왕국때 지위가 회복될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그의 딸들, 사마리아와 그 딸들이 예표하는 것은 이방인들인데 이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천년왕국에서는 왕같은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너의 교만하던 날에’란 말은 예루살렘이 죄를 지으면서도
이방인들을 우습게 알던 때를 말합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데 소돔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우습게 알
때 일본이란 이름조차 부르지 않고 늘 ‘왜놈’이라고 불렀듯이 유대인들은 소돔은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선과 가식으로 자신들의
교만을 뽐냈습니다. 아직 유다의 사악함은 드러나기 전이었지만 시리아의 딸들, 주변 민족들, 블레셋이 유다를 꾸짖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꾸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교회에게 순결을 요구하고, 정직을 요구하고, 탐욕을 부리지 말 것을 요구하며 제발 빛과 소금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는데 얼마나 준엄하게 꾸짖고 비판하는지 듣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담당했습니다. [네 음탕한
짓과 네 가증한 일들을 네가 담당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58). 죄는 뿌린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59절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고 언약을 어겼은즉 나도 네가 행한 대로 너를 다루리라.](59).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이요,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신29:13,13). 그들은 주님 앞에서 맹세로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을 파기한 것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언약을
어긴 대로 보응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전에 맺은 언약은 파기 되었습니다.
이제 새 언약이 필요합니다. 60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어렸을 때에 너와 맺은 언약을 내가 기억하고 너를 위하여 영존하는 언약을 세우리라.](60). 하나님은 심판의 와중에서도
계속해서 새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을지라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렘31:31~33).
61절입니다. [그리하면 네가 네 자매들 곧 네 언니와
동생을 받아들일 때에 네 길들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들로 주려니와 /이것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61).
이전 언약과 달리 새 언약은 마음 속에 새겨지며, 영으로 맺어지는 언약인지라 이스라엘은 이전 일들을 부끄러워하며 죄악을 미워하게 됩니다. 신약
성도들은 모두 새 언약의 상속자들입니다.
62-63절입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워 너로
하여금 내가 [주]인 줄을 알게 하리니 이것은 네가 행한 모든 일들로 인하여 내가 네게 대하여 진정된 후에 너로 하여금 기억하고 당황하게 하며
네 수치로 인하여 다시는 네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62~63). 주님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못박아 죽여 버린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오, 구약에서부터 말씀하시고 일하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맺어지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줄을 알게 할 것이며, 자신들이 행한 일을 기억하고 당황하게
되며, 수치로 인하여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은혜와 긍휼을 볼 때 입을 열 수 없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