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에스겔 18:1-23

요절: 에스겔 18:23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합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불공평하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것은 우리 마음에 죄성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 앞에서 즐거워할지니 이는 그분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로다. 그분께서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공평으로 만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8:9), [왕의 능력이 또한 공의를 사랑하니 주께서 공평을 굳게 세우시며 야곱에게 공의와 의를 집행하시나이다.](시99:4). 사람들은 잘못되면 세상 탓, 사회 탓, 국가 탓, 조상 탓, 선생님 탓, 친구 탓하기를 좋아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 탓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해 이 속담을 사용하여 이르기를, 아버지들이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 자녀들의 이가 시려서 진저리치게 되었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1-2). 이 속담은 당시 사회에 꽤 유행하던 유명한 속담이었습니다. 가난은 대물림한다, 머리는 유전이다. 씨는 못 속인다 등이 다 같은 부류의 말입니다. 아버지들이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녀들의 이가 시린 것은 그 영향을 후손이 그대로 다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모든 것을 부모 탓, 조상 탓으로 돌리는 인간의 습성은 세상 사람들의 운명론이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우상 숭배자였지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갈렙은 부모님과 상관없이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르호보암은 다윗과 솔로몬의 믿음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런 예는 허다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날들에 그들이 다시는 말하기를, 아버지들이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 자녀들의 이가 시려서 진저리치게 되었다, 하지 아니하겠으며](렘31:29). 이는 천년 왕국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그들은 이런 속담이 잘못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3절입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사용할 일이 없으리라.](3). 주님은 사람들이 죽고 사는 것이 남의 탓이나 조상 탓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아담의 죄로 인해 지옥에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지옥에 가는 것은 그가 지은 자신의 죄 때문이지 에덴에서 지은 아담의 원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의 죄로 인한 것이지 유전적 요인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조상 탓을 하기를 좋아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도 부모의 음덕(陰德)을 얻고자 함이요, 묘 자리를 고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말이 유행하고, 목사들조차도 자기 윗대 선조가 믿음이 좋아야 큰 목회를 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거지 근성입니다. [오직 사람마다 자기 불법으로 인해 죽을 것이요,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자기 이가 시려서 진저리치게 되리라](렘31:30). 주님은 신 포도를 먹은 사람의 이가 시리지 먹은 사람의 이웃이나 자식이 이가 시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Aids나 당뇨, 알코올 중독자 등의 자식들이 부모의 죄로 인해 천형을 받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린 경우에 이 속담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떤 국가에서는 연좌제란 것이 있어서 적게는 일가족, 3족에서 9족까지 멸한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종으로 팔아 버린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부모 잘못 만났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에서 다시는 이런 속담이 사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 주님은 잘못된 사회 관습, 법, 제도 등을 바로 잡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있는 잘못된 모순, 비합리적인 제도 등은 전적인 사회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비뚤어진 본성, 죄성, 악한 습성 등이 제도, 관습, 법으로 드러난 것 뿐입니다. 현상 이전에 본질의 문제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내적인 것에서 기인합니다. 드러나 보이는 법과 제도를 고치기 전에 먼저 우리 속에 있는 본성을 고쳐야 하는데 이는 거듭나 하나님의 신성한 권능과 본성 속에 참여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조상의 저주니 조상이 범한 죄와 같은 것에서 완전히 단절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법적인 지위를 비롯한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제시합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출20:5,6). 이것은 성경의 연좌제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는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 불법을 범할 때 자손들이 여기에 동참하고, 그 자식이 그 죄에 계속적으로 동참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연속적인 죄악의 대물림을 말하는 것이지, 자식이 아버지나 조상들의 죄를 단호히 혁파하고 우상들을 제거하고 주님을 섬길 때 주님은 벌을 주시기는 고사하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요시야, 아사, 히스기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부모들의 악한 행위를 본받지 않고, 단호하게 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우상을 버렸습니다. 주님이 이들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복 주셨는지 성경은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오늘날 몇몇 가짜 목사들이 조상들의 죄, 저주로 인해 내가 하는 일이 잘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마귀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고, 마귀를 결박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찾아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피우는 담배는 아버지 탓이 아니라 내 탓이며, 내가 마시는 술은 아버지 탓이 아니라 내 탓이며, 내가 배우지 못한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요 내 탓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말씀을 통해서 이런 거짓된 악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맹세하시기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사용할 일이 없으리라.](3)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운명(運命)이니 숙명(宿命)이니 팔자(八字) 타령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4절입니다. [보라, 모든 혼은 내 것이라. 아버지의 혼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혼도 내 것이니 범죄하는 그 혼은 죽을지니라.](4). 모든 혼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혼이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마음대로 하셔도 상관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범죄하는 그 혼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죄를 사함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5-9절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로워서 율법에 맞는 일과 옳은 일을 행하며 산들 위에서 /희생물을/ 먹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집 우상들을 향하여 자기 눈을 들지 아니하며 자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고 생리 중에 있는 여자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며 아무도 학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빚진 자에게 그 담보물을 돌려주며 폭력으로 아무도 노략하지 아니하고 굶주린 자에게 자기 빵을 주며 옷으로 벌거벗은 자를 덮어 주고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내어 주지 아니하며 이득도 취하지 아니하고 자기 손을 억제하여 불법을 떠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한 판단을 행하고 내 법규 안에서 걸으며 내 법도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로운 자니 반드시 살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5-9). 5-9절은 주님께서 정해주신 율법의 의로운 행위들입니다. 5-9절은 구약적 개념의 의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맞은 일을 해야 하고,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에 참여 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고, 이자 놀이를 하지 말고, 강도질하지 말아야 의롭게 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굶주린 자에게 자기 빵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덮을 것을 주고, 사람들 사이에 공평한 판단(재판)을 하고, 법규 안에서 걷고 진실하게 걸으면 그것이 바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의의 기준이 신약과는 많이 다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행위가 기준입니다. 반면 신약에서 성도는 내적 동기, 마음이 기준입니다. 신약 시대에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자신의 몸을 불태워 준다 해도 그것이 의로움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는 하나도 없느니라.](갈2:16). 주님은 믿는 자에게 값없이 의롭다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롬5:1a).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결코 의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어찌된 까닭이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구하였음이라. 그들이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으니](롬9:32).

주님은 의로운 자들의 행위가 무엇이며, 의롭게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제시해 주시는데 현재 신약 성도들의 기준이 아니라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런 모든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산들 위에서 /희생물을/ 먹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집 우상들을 향하여 자기 눈을 들지 아니하며 자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고 생리 중에 있는 여자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며](6). 산들 위란 등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산당들에게 우상을 드리고, 그 제물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들을 향해 자기 눈을 들지 않는 것은 우상에게 무엇인가 소원을 빌고 바라는 기도와 예배 행위를 말합니다. 우상에게 눈을 드는 것은 영적 음행의 첫 단추입니다. 우리는 눈을 어디에 두고, 누구에게 눈길을 두는가? 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는가?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에덴의 하와는 바라보지 말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지한 나무의 실과를 바라보다 안목의 정욕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그것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롯은 소돔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을 바라보니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무엇은 바라보았습니까? 주님이 주실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롯이 아브람과 갈라선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창13:14). 그는 한 줌의 땅도 소유하지 못했지만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그 땅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가 바라본 땅이 그의 땅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주님의 날을 바라 보았습니다.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 그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느니라, 하시니](요8:56). 그의 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직 기록된 말씀을 통해 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 우리는 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오 [주]여, 아침에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위를 바라보리이다.](시5:3). 각양 좋은 것들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 옵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우리는 땅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지 말고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거든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愛竄)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골2:1-2). 기도한 후에 위를 보십시오. 이사야는 영광의 주를 본 후에 언제나 위를 쳐다 보았습니다. [나는 학이나 제비같이 지저귀고 비둘기같이 애곡하며 내 눈이 쇠하도록 위를 바라보았나이다. 오 [주]여, 내가 학대를 받사오니 나를 위하여 /그것을/ 처리하소서.](사38:14).

● 주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께 바라던 한 가지 일 바로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하여금 평생토록 [주]의 집에 거하여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의 /성/전에서 여쭙게 하는 것이라.](시27:4). 주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주님처럼 변화됩니다. 주님은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믿음으로 바라 볼 수 있습니다.

●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자신의 얼굴을 돌려 야곱의 집에게 숨기시는 [주]를 바라며 그분을 바라보리라.](사8:17).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고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사45:22). 주님은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보게 하셔서 구원을 주셨는데 이는 신약의 구원 방법이 바라보는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예수를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 주님 외에 다른 어떤 도움을 바라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은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를 바라보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리리니 내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들으시리로다.](미7:7). 이스라엘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악한 자는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려 하지 아니하고 곧바른 땅에서 불의하게 행하며 [주]의 위엄을 바라보지 아니하나이다.](사26:10), [화 있을진저, 도움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이여! 그들은 말들을 의지하며 병거들이 많으므로 병거들을 신뢰하고 기병들이 심히 강하므로 기병들을 신뢰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바라보지도 아니하고 [주]를 찾지도 아니하는도다.](사31:1).

● 우리는 영원한 것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는 보이는 것은 잠깐 있을 뿐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니라.](고후4:18). 일시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 땅에 속한 것, 육신에 속한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 봅니다. 사람들은 외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과 본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질이 바뀌지 않습니다. 행동을 바꾸기 전에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듯이,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지 않는 이상 어떤 본질적인 변화도, 성숙도, 성장도 없습니다. 바라보면 바라보는 대로 변화됩니다. 평생을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산 사람의 얼굴 모습이 큰 바위 얼굴처럼 변했다는 나다니엘 호돈의 글이 교과서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생을 주의 영광을 바라보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후3:18).

우상들을 향해 눈을 드는 사람은 우상처럼 되고 맙니다.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런즉 네 눈이 단일(單一)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요,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니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등불이 어둡게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6:22-2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 주셔서 영원을 바라 볼 수 있게 해 주시며, 주님의 영광과 위엄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행26:18-복음, 시19:8-말씀, 엡1:18-성령).

“자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고”란 말씀은 음행과 연관된 죄입니다. 육신의 일들은 첫째가 음행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첫 번째 죄악 역시 음행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음행, 호색, 간음으로 치닫게 됩니다.

7절입니다. [아무도 학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빚진 자에게 그 담보물을 돌려주며 폭력으로 아무도 노략하지 아니하고 굶주린 자에게 자기 빵을 주며 옷으로 벌거벗은 자를 덮어 주고](7). 학대란 말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약자들에게 끔찍한 공포입니다. 성적 차별, 인종 차별도 학대에 해당합니다. 아동 학대는 물론이거니와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학대가 일어나는데 모든 혼은 주님의 것이기에 누가 누구를 학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학대하는 자학 역시 죄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란 것이 금욕을 바탕으로 한 자학 행위를 서슴없이 행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엄히 금하신 것입니다. 우리 몸, 영, 혼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고전6:19).

빚진 자에게 담보물을 돌려 주는 것은 착취를 금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담보는 원금과 이자보다 훨씬 높게 책정됩니다. 2만불 정도의 가치가 나가는 담보물을 잡고 1만불도 빌려 주지 않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경매로 처분하는 일이 허다한데 이것은 완벽한 착취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이것이 명백한 합법인지라 당연시되고 있는데 시스템 자체가 마귀적인 것이요, 삶 자체가 이미 비 성경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폭력으로 아무도 노략하지 않고”란 말씀은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탈취를 자행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고, 벌거벗은 자를 덮어 주는 것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에서 헌금을 모아다가 빵을 주고, 옷을 주기는 하는데 혼을 구원할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혼의 구원을 도외시한 채 빵과 옷만 나누어 주는 것을 구제 사업이요, 사랑의 봉사라고 치부하는 것은 선한 일이긴 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8절입니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내어 주지 아니하며 이득도 취하지 아니하고 자기 손을 억제하여 불법을 떠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한 판단을 행하고](8). 고리 대금은 성경에서 엄히 금하는 행동입니다. 같은 형제들끼리는 이자 놀이를 해서는 안되며, 타국인들에게는 적절한 이윤을 취할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곁에 있는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 주거든 너는 그에게 빚쟁이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지니라.](출22:25). 값없이 빌려 주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댓가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우리가 주님께 거저 받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거저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복을 받는 일입니다. [너는 네 형제에게 꾸어 주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나 음식물의 이자나 이자를 낼 만한 어떤 것의 이자도 받지 말지니라. 네가 타국인에게는 꾸어 주고 이자를 받아도 되려니와 네 형제에게는 꾸어 주고 이자를 받지 말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가 가서 소유할 땅에서 네가 손을 대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23:19,20).

9절입니다. [내 법규 안에서 걸으며 내 법도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로운 자니 반드시 살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9). 주님의 법 안에서 걷고 지켜 행하는 자는 의로운 자요, 반드시 삽니다. 조상이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무슨 짓을 했든 무슨 저주를 받았든지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며, “그는 의로운 자니 반드시 살리라” 하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의인의 개념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믿음은 물론이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매우 중요합니다. 반면 신약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에 믿음의 선한 행위가 뒤 따라 와야 합니다. 의인이 되기 위해서 주의 법규 안에서 걷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10-13절입니다. 주님은 한 가지 예를 통해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강도요, 피를 흘리는 자요, 이런 일들 중 하나와 비슷한 것은 행하되 마땅히 행할 바는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산들 위에서 /희생물을/ 먹고 자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고 폭력으로 노략하며 담보물을 돌려주지 아니하고 우상들을 향하여 자기 눈을 들며 가증한 일을 행하고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내어 주며 이득을 취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그가 살지 못하리라. 그가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으리라. 그의 피가 그에게 돌아가리라.](10-13). 이전에 주님은 “의인은 반드시 살리라”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말씀하셨고, 이번에는 “악인은 반드시 죽으리라”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각인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남의 죄를 나에게 묻지 않으십니다. 조상의 죄를 나에게 대물림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욥기에 [이는 그분께서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고 각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가는 길에 따라 얻게 하시기 때문이니라.](욥34:11)고 했고, 시편 기자 역시 [오 {주}여, 긍휼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으시기 때문이니이다.](시62:12)고 했습니다. 잠언에 [말하기를, 보라,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어찌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시겠느냐? 또 네 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분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각 사람에게 보응하시지 아니하겠느냐?](잠24:12)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벧전1:17)고 권면합니다.

14-17절입니다. [이제, 보라,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깊이 생각하여 그와 같은 것을 행하지 아니하며 산들 위에서 /희생물을/ 먹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집 우상들을 향하여 자기 눈을 들지 아니하며 자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고 아무도 학대하지 아니하며 담보물을 잡지 아니하고 폭력으로 노략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굶주린 자에게 자기 빵을 주고 옷으로 벌거벗은 자를 덮어 주며 자기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떠나게 하고 이자나 이득을 받지 아니하며 내 법도를 집행하고 내 법규 안에서 걸을진대 그는 자기 아버지의 불법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리라.](14-17). 하나님은 반대의 예를 드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한 행위를 보았지만 따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행한 죄악의 길이 아니라 의의 길을 갔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불법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리라”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조상의 저주니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하는 말같지 않는 소리가 허망함을 봅니다. 아하스와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아하스가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더라. 그가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통치하였으나 자기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주 자신의 하나님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걸으며 또 참으로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교도들의 가증한 일들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여러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밑에서 희생물을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16:2-4). 아하스는 이방 종교를 수입하는데 열심이었고, 남의 나라의 종교와 신들을 이스라엘의 신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마스커스를 방문했다가 거기에 있는 제단들에 반해서 그 모양 그대로 예루살렘에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아버지의 이런 행위들을 전혀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가 자기 조상 다윗이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니라. 히스기야가 산당들을 제거하고 형상들을 깨뜨리며 작은 숲들을 베어 내고 모세가 만든 놋 뱀을 산산조각 내니 이는 그때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그 뱀에게 분향하였음이더라. 그가 이 뱀을 느후스탄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니 그 이후의 유다 왕들 중에 그와 같은 자가 없었으며 또한 그 이전에도 없었더라.](왕하18:3-5). 히스기야는 아버지의 죄에 전혀 물들지 않았고, 아버지에게 임했던 저주 가운데 단 하나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조상의 저주를 후대에 물려 주시는 것이 아니며, 아버지의 죄악을 자녀에게 묻지 않으십니다.

18절입니다. [그의 아버지로 말하건대 그가 잔인하게 학대하고 자기 형제를 폭력으로 노략하며 자기 백성 가운데서 선하지 아니한 일을 행하였으니, 보라, 그가 자기 불법 가운데서 죽으리라.](18). 아버지는 아버지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19절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된 일이냐?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율법에 맞는 일과 옳은 일을 행하며 내 모든 법규를 지켜 행하였을진대 그는 반드시 살리라.](19).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조상의 저주니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운운합니다.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는 자들이 주로 오순절, 은사주의 계열의 사람들이 가진 신학입니다.

20절입니다. 주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 주십니다. [범죄하는 그 혼은 죽을지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로운 자의 의가 그 의로운 자 위에 임하겠고 사악한 자의 악이 그 사악한 자 위에 임하리로다.](20). 주님은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으십니다.

21절입니다. 사악한 자에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범죄한 혼이 사는 길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가 돌이켜서 자기가 범한 모든 죄에서 떠나 내 모든 법규를 지키고 율법에 맞는 일과 옳은 일을 행할진대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21). 회개란 죄에서 돌이키고 떠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돌이키고 떠난 다음에는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파라오는 내가 범죄했노라고 말했습니다(출10:16).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22:34에는 발람 역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 역시 사무엘 앞에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삼상15:24, 30)라고 두 번이나 고백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마27:4)라고 하지만 그것은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사람 가운데 바른 회개를 한 사람은 다윗 한 명 뿐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노라](삼하12:13). 다윗은 자신의 죄를 지적한 나단 대언자에게 죄를 고백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죄를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바로 주께 범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I have sinned’였지만 다윗은 I have sinned against the LORD(삼하12:13)라고 함으로써 마음으로부터 정확하게 죄를 뉘우쳤습니다. 사무엘하 24:10, [다윗이 백성의 수를 센 뒤에 그의 마음이 찔렸으므로 다윗이 주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하여 크게 범죄하였나이다. 오 주여 이제 간청하옵나니 주의 종의 불법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이는 내가 매우 어리석게 행하였음이니이다.](삼하24:10). 여기서도 다윗은 자신의 죄를 주께 아뢰었습니다. 범죄했지만 회개할 때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참된 회개에 대한 깊은 영적 각성을 얻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한다고 기도하면서 사실은 전혀 마음을 바꾸지 않는 거짓 회개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 고백입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아버지가 무서워서, 선생님이 무서워서 일단 위기를 모면하려고 무조건 잘못을 빌듯이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올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캐톨릭 교인들이 사제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참회 역시 성경적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8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8)라고 말씀합니다. 파라오, 사울, 발람, 가룟 유다 중 어느 누구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범죄하였노라.’는 자책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이것은 반성과 후회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챨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살인자가 교수형을 싫어하듯이 사람은 죄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만약 내가 형벌 때문에 죄를 싫어한다면, 나는 죄를 회개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란 사실만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범죄로 볼 수 있다면, 내가 그분을 상처 입히고 죽게 만들었단 사실을 보고, 내 마음이 부서져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다(repent)란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돌아서다”란 뜻입니다. 죄의 단절과 더불어 죄를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의 핵심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반성문을 쓰듯이, 재판정에서 ‘네 죄를 네가 알렸다’에 대한 반응으로 ‘예’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이사야 55:7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단절을 볼 수 있습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는 그분께서 넘치도록 용서하실 것임이라.](사55:7).-버리고/ 돌아오라. 이것이 회개입니다. 잠언28:13을 보겠습니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누구든지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긍휼을 얻으리라.](잠28:13).-시인하고/ 버리는 자. 이런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요,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오래 참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킴이 없이 죄로부터만 돌아서는 것은 거듭남이 없는 개혁과 개선에 불과합니다.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자기 잘못만 시인하는 것은 일이 실패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손해를 본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파라오, 발람, 사울 같은 죄인들은 하나같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돌아왔기 때문에 잘못했다는 것이지 죄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 뉘우침이 아닙니다. 마치 카운셀러의 말을 듣지 않아서 주식 투자에 실패한 투자자가 ‘이번에는 내가 잘못했네, 자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당신 말을 듣지 않아서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제가 크게 잘못했습니다.’와 같은 식입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인정할 뿐 아니라 거기서 떠납니다.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진리를 쫓아가야 합니다.

사악한 자가 회개할 때 주님은 그가 지은 범죄를 깨끗하게 지워 주시며,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22절입니다. [그가 지은 모든 범죄가 그에게 언급되지 아니하리니 그는 자기가 행한바 자기 의(義) 가운데서 살리라.](22). 주님은 우리가 회개한 죄를 용서하신 후에는 더 이상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나 곧 나는 내 자신을 위하여 네 범죄들을 지워 버리는 자니 네 죄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 우리는 주님의 피로 씻음받은 죄에 대해서 감사하고 더 이상 그 죄를 다시 생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23절입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어찌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그가 돌이켜서 자기 길들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23). 주님은 사악한 자가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회개없이 죽음에 이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한 명의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18:32절 참조, 33:11 참조. 주님은 돌이켜서 살라고 하십니다. [이는 죽는 자의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그런즉 /너희는/ 너희 자신을 돌이켜서 살지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18:32),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사악한 자의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사악한 자가 돌이켜 자기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돌이켜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떠나라.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주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이며, 이유입니다.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이요, 또 모든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음이니이다, 하더라](계4:11).

사람이 주를 기쁘게 해 드리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1. 유다의 아들 오난이 행한 일을 주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셔서 죽이셨습니다. [[주]께서 그가 행한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도 죽이시니라.](창38:10).

2. 백성이 불평할 때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셔서 불을 내리셨습니다. [백성이 불평하니 [주]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니라. [주]께서 들으시고 분노하사 그들 가운데 [주]의 불이 붙게 하시고 진영의 맨 끝 부분에 있는 자들을 소멸시키시매] (민11:1).

3. 다윗이 행한 밧세바와의 일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셔서 그의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애곡하는 일을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니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그러나 다윗이 행한 그 일을 [주]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니라.](삼하11:27).

4. 다윗이 행한 인구 조사를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을 치시매](대상21:7).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자랑을 위해 하는 일을 주님은 매우 싫어하십니다.

5. 하나님은 주님을 배척하고 서로 동맹을 맺는 이방인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진노하사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심히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들을 괴롭게 하시며 /이르시되/,] (시2:5). 이런 점에서 주님은 바벨을 기뻐하지 않으셨듯이 U.N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연합, 비동맹, 비일치의 3비 원칙에 입각해서 살아야 합니다.

6. 주님은 회개없는 헌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주께서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으리이다. 주께서는 번제 헌물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51:1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의 번제(燔祭) 헌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불렀으며 나는 수소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1:11). 헌물이 회개와 기도를 대신 할 수 없고, 종교적 행위와 열심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7. 하나님은 말의 힘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말(馬)의 힘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즐거워하지 아니하시고](시147:10). 주님은 군대를 의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을 주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8. 주님은 남이 잘되는 것을 즐기거나 남이 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기뻐하지 말며 그가 걸려 넘어질 때에 마음으로 즐거워하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염려함이니라.] (잠24:17~18).

9. 주님은 서원을 하고 갚지 않거나 미루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미루지 말라. 이는 그분께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 네가 서원한 것을 갚을지어다.](전5:4).

10. 진리가 없어 악을 행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진리가 없어지므로 악에서 떠나는 자가 자기를 /내주어/ 탈취물이 되게 하매 [주]께서 이것을 보시고 공의가 없음을 기뻐하지 아니하셨도다.](사59:15).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사65:12,66:4 참조).

11. 사악한 자가 회개없이 죽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어찌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그가 돌이켜서 자기 길들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사악한 자의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사악한 자가 돌이켜 자기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돌이켜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떠나라.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12. 하나님 없이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또 안락하게 지내는 이교도들을 아주 심히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내 백성을/ 조금 기뻐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협력하여 고통을 더하였음이라.](슥1:15).

13. 아이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라.](막10:14).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는 것을 주님은 심히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도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남은 부분과 함께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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