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17:1-24
요절: 에스겔 17:24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의 집에 준 수수께끼입니다.
수수께끼는 맞추어 보라고 내는 것이며, 답을 찾기 위해 생각을 요구합니다. 성경에 수수께끼를 처음 내었던 사람은 삼손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것을 능히 내게 알게 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얇은 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줄지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내어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라, 하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니](삿14:13-14). 삼손이 낸 이 수수께끼는 삼손 혼자만 아는 답인지라 아무도 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해 결국 답을 얻었습니다(삿14:17). 삼손은 사람들을 골려 주기 위해서 수수께끼를 내었지만
하나님은 생각해 보도록 하기 수수께끼를 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낸 수수께끼는 매우 평범하고 단순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스라엘의 집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비유를 말하여](1-2). 하나님은 수수께끼를 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생각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기에 말씀에 관심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공생애 사역 동안 비유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란 어려운 진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반면 비유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너무 어려운 말로
바뀌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해 주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제자들이 따로 있을 때에 모든 것을 풀어 그들에게 설명해 주시더라.](막4:33-34). 비유는 억지로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하시는 분의 말하고자 하는 의미와 문맥에 맞게 풀어야 합니다. 오늘날 성경 해석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단연 비유에 관한
것입니다. 비유가 아닌 것들을 비유라고 우기거나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등의 혼란이 진리를 배우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전후 문맥을 통해 비유라고 밝히지 않는 것들을 비유로 말하는 것은 매우 곤란합니다. --와 같으니라(as, like)와 같은 유사를 통해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은 주님의 성경 교수법에 해당합니다. 성경을 배우는데는 흔히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같은 것들의 공통점을 찾는다.
둘째, 다른 것의 차이를 찾는다. 셋째,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알고 그 내용을 반복한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비유를 우리 마음대로 푸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풀어 주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3절입니다.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여러 색깔을 하고 날개가 크며 깃이 길고 털이 무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의 가장 높은 가지를 취하고](3).
각 나라나 민족은 저마다 자신들을 상징하는 동물이나 식물이 있습니다. 영국은 사자, 미국은 독수리입니다. 한국은 곰이라고 하기도 하고
호랑이라고도 합니다. 바빌론은 독수리를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여러 색깔을 하고 날개가 크며 깃이 크고 털이 무성한 큰 독수리’라고
말하면 바빌론을 가리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예레미야는 여러 차례 바빌론을 독수리로 언급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그가 독수리같이 날아서 모압 위에 자기 날개를 펴리라.](렘48:40). [보라, 그가 독수리같이 올라와서
날며 보스라 위에 자기 날개를 펴리니 그 날에 에돔의 용사들의 마음이 산고(産苦)를 겪는 여인의 마음과 같으리라, 하시니라.](렘49:22).
여기서 독수리가 누구인지는 금방 드러납니다.
독수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음식이기도
합니다. [날짐승 중에서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러하니라. 이것들은 가증한 것인즉 너희가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수염수리와 물수리와](레11:13).
독수리는 썩은 시체를 먹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독수리는 하늘의 새들을 대표하는 조류입니다. 땅에서는 사자라면하늘에서는 독수리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한 출애굽의 사건은 독수리가 새끼를 품고 광야를 가로 질러 온 것에 비유됩니다.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행한 것과 또 내가 독수리 날개에 너희를 실어 내게로 인도한 것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독수리 날개는 안전하다는 뜻이며,
보호를 나타냅니다. 다른 모든 새들과 달리 독수리는 발이나 부리로 물어서 나르는 것이 아니라 등에 태워서 나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는 것처럼 자기 등에 업습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동물들의 특성과 생리를 어떤 조류학자들보다 더 정확히 아시고, 묘사하십니다.
[독수리가 자기 둥지를 휘저으며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고 자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으며 자기 날개 위에 그들을 업는 것같이](신32:11).
독수리는 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주를 찬송하고 주의 은택을
입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은 [좋은 것으로 네 입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5)고
하셨습니다. [오직 [주]를 우러러 바라는 자들은 힘을 회복하리니 그들은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며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1). 대환란 때 이스라엘이 적그리스도를 피해 도망할 때 그들은 독수리 날개를
받습니다(계12:14). 이런 독수리의 특성으로 인해 제국들은 독수리 문양을 매우 선호하고 자기 나라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기를 매우 좋아
했습니다.
독수리란 말만 들어도 금방 유대인들은 바빌론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여러 색깔을 내고 날개가 긴 것은 여러 민족을 정복하여 다민족 다언어 제국을 구성한 큰 국가란 의미입니다. 엄청난 부와 권세를
가졌기에 깃털이 무성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가장 높은 가지를 취했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거의 모든 목재를 레바논의 백향목을 잘라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별칭이
레바논이었습니다. 독수리가 주로 산악 지대에 있는 높은 가지들에 올라 있다는 것은 바빌론이 예루살렘에 들이 닥칠 것을 암시합니다. 가장 높은
백향목 가지라고 한다면 왕들, 고관들, 제사장들 무리를 일컫습니다. 백향목 가지를 취했다는 것은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는 뜻입니다. [그가
여호야긴을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아내들과 또 그의 관원들과 그 땅의 권세 있는 자들도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포로로 사로잡아
가고] (왕하24:15). 느부갓네살은 왕족들, 고관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여호야긴은 매우 어린 나이인 8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여호야긴이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나이가 팔 세더라. 그가 예루살렘에서 석 달 열흘 동안
통치하며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였더라.](대하36:9). 이는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라면서 본 것이라곤 주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는 무려 삼십칠 년이나 감옥에 있다가 풀려났습니다(렘52:31).
4절입니다. [그것의 연한 가지들 끝을 잘라 무역하는
땅으로 가지고 가서 상인들의 도시에 두며](4). 연한 가지들이란 일반 백성들입니다. 느부갓레살은 많은 포로들을 잡아 왔습니다. [그가
또 온 예루살렘과 모든 통치자와 모든 용사 곧 만 명의 포로와 모든 기술자와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가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24:14). 바빌론 왕은 포로로 잡아온 백성들을 당시의 상업 지구였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끼는 걸프만
지역에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포로 수용소라는 곳이 결국은 부두 하역장 같은 곳에서 일하는 노예와 같았고, 상인들의 장사를 돕는 일손 역할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의 상술이란 것이 이때의 쓰라린 역사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상업에 능한
민족이 아닌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 상권을 잡고 있는 것은 역사를 통해 환란 속에서 상업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의
도시에서 그들은 상업 기술을 터득했고, 후에 상업의 천재들로 변모하는 역사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의 상술’하면 전 세계에서
인정합니다.
5절입니다. [또 그 땅의 씨를 취하여 열매를 많이 맺는
들에 심되 버드나무같이 큰 물가에 심어 놓았더니](5). 그 땅의 씨란 유다의 ‘시드기야’를 말합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들은
예루살렘입니다. 버드나무 같이 큰 물가에 심어 놓았다는 말은 바빌론 왕이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대리인을 하나 왕으로 세워 두었다는 것입니다.
버드나무는 가지가 워낙 부드러워서 지조 없고, 말 잘 듣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물가에서 자라는 축 늘어진 수양 버들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흔들립니다. 제국의 왕으로부터 수여받은 왕의 자리는 그런 수양버들과 같은 신세입니다.
6절입니다. [그것이 자라서 키가 작고 퍼져나가는
포도나무가 되매 그 가지들이 독수리를 향하고 그 뿌리들이 독수리 밑에 있었더라. 이와 같이 그것이 포도나무가 되어 큰 가지들을 내고 작은
가지들을 내었더라.](6). 바빌론의 섭정을 받게 된 유다는 더 이상 백향목이 아니라 땅에서 기는 작은 포도 나무가 되었습니다. 포도
나무는 무엇을 타고 올라가지 않으면 땅을 기며 퍼져 나가는 나무입니다. ‘그 가지들이 독수리를 향하고’란 말은 무슨 정책을 결정하더라도 바빌론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식민지 국가에 방불한 그런 나라의 신세입니다. 나라의 자주권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포도나무로서
큰 가지와 작은 가지들을 내는 것은 전적으로 유다 왕 시드기야가 하기 나름입니다. 시드기야는 21세에 왕이 되어 9년째 반역함으로 철저히
응징되었습니다.
7절입니다.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다른 큰 독수리가
있었는데, 보라,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로 하여금 자기가 들어 있는 고랑에 물을 주게 하려고 그를 향하여 자기 뿌리들을 구부리고 그를 향하여
자기 가지들을 내었더라.](7). 3절에 이어 7절은 내용이 전환됩니다. 다른 독수리라고 했기 때문에 이는 바빌론이 아닌 다른 나라를
말하는데 이집트입니다. 시드기야는 바빌론에 반역하여 독립하기 위해 이집트와 외교를 맺고 이집트의 군사력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가 바빌론 왕을 배반하고 자기 대사들을 이집트로 보내어 그들로부터 말과 많은 백성을 받고자 하였으니 그가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가 도피하겠느냐? 그가 언약을 어기고서야 건짐을 받겠느냐?](15).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에게 항복하고 그 아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시드기야는 지금 예레미야의 말대로 바빌론의 수하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재무장을 통해 예배와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징계는 징계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와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할 때 더 큰 고난이 닥칠
뿐입니다.
때로 신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심판과 징계를 스스로 힘으로 벗어
보려고 합니다.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벗어 던지려고 합니다. 주님이 메어 주신 멍에를 벗어 던지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매우 큰
잘못입니다. 징계와 심판은 주시는 대로 감당해야 합니다. 다만 주님의 긍휼을 기대하고,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스스로 힘으로 벗어나려고
하면할수록 더 옥죄어 들고, 더 무거워 집니다.
시드기야가 왕이 되어서 해야 할 일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던 각종 가증한 우상들을 제거하고, 회개를 통한 영적 각성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이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쫓아내실 때가 이르렀음이라. 이때에 시드기야가 바빌론 왕을 배반하니라.](왕하24:19-20). 전대 왕들이 불러온 심판과 화를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그는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국가 경영에 대한 통찰력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안목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더욱
심해졌고, 주님을 더욱 멀리했습니다. 주의 눈 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였습니다. 마음은 교만해져서 자기를 낮추지 않았습니다. [주 자기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고 대언자 예레미야가 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전하여도 그 앞에서 자기를 낮추지 아니하였으며 또 느브갓네살 왕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였으나 그가 느부갓네살을 배반하고 목을 뻣뻣하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또 제사장의 모든 우두머리들과 백성들도 이교도들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 크게 범죄하고 주께서 예루살렘에 두어 거룩하게
하신 그분의 집을 더럽게 하였더라.](대하36:12-14). 그는 주님의 집인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집을 더럽게 한
시드기야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성전대신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
(고전3:16~17). 성전을 더럽히는 일은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19~20).
우리는 영과 혼과 몸을 모두 거룩히 여겨야 합니다. 몸을 의의 병기로 내어 드리지 못하고 불의의 도구로 내어 준다면 주님은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8절입니다. [그 포도나무를 큰 물가 좋은 땅에 심은 것은
그것으로 하여금 가지들을 내고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루게 하려 함이었더라.](8).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가 더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는 하나님께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아무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주님이 큰 물가 좋은 땅에 심으셨던 것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어떤 땅입니까? [이는 [주] 네
하나님께서 좋은 땅으로 너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니 그곳은 시내가 있고 골짜기와 산에서 흘러나오는 샘과 깊은 곳이 있는 땅이요, 밀과 보리와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요, 기름과 올리브와 꿀이 나는 땅이라. 또 그곳은 네가 먹는 빵이 부족하지 않은 땅이요, 네게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은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쇠요, 산에서는 놋을 캐리라. 네가 먹어 배부르게 되고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좋은 땅을 주셨으므로 그분을 찬송하리라.]
(신8:7~10).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땅입니다. 이런 땅을 주신 것은 육신이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율법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 좋은 땅을
주셨지만 이들은 이 땅에서 나는 좋은 것으로 온갖 악을 행하는데만 골몰했습니다.
9절입니다. [너는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나무가 형통하겠느냐? 그 독수리가 그 뿌리들을 뽑고 그 열매를 잘라 내어 그 나무로 하여금 시들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큰
권능이나 많은 백성으로 그것을 뿌리째 뽑지 아니한다 하여도 그 나무가 봄에 낸 잎사귀가 다 시들리라.](9). 유다의 시드기야는 일개
변방의 봉국의 군주에 불과했지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영적 각성을 통해 나라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며
이집트를 의지해서 느부갓네살을 대적할 생각만 했습니다.
이들은 유다가 황폐하게 된 것이 바빌론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원인을 잘못 짚었습니다. 그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바빌론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바빌론이란 외적인
현상만 보았을 뿐 자신들이 하나님께 대적함으로써 하나님이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을 통해 자신들을 심판하고 있다는 영적 진리, 즉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외적 현상만을 봅니다. 본질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행한 죄와 불신, 불순종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외적으로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빌론은 완전히 유다를 멸할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왕을 임명해 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은혜를 배반하고 다른 독수리 즉 이집트를 끌어 들여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이는 민족을 더욱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로 몰고 가는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비록 유다 가문의 혈통이긴 하지만 정식 왕위 계승자가 아니라 바빌론에
의해 책봉된 꼭두각시 왕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정치적 약점으로 인해 시드기야는 바빌론에 반항을 함으로써 자신의 왕위의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얕은 꾀를 부렸습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뜻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그
나무가 형통하겠느냐? 그 독수리가 그 뿌리들을 뽑고 그 열매를 잘라 내어 그 나무로 하여금 시들게 하지 아니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의 원인과 이면을 깊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상보다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벗어나려고 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과 관계성 회복과 죄의 회개, 영적 각성에
주력하고 바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바른 예배를 통해 정상적인 신앙을 설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입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것입니다. 똑같은 비가 내려도 살아 있는 나무에게는 수분이 되고 영양분이 되지만 죽어 있는 나무는 더욱 썩게 만들어 버리듯이
동일한 재앙과 심판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정금같이 단련하는 풀무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혼을 불태우는 용광로가 됩니다.
10절입니다. [보라, 참으로 그것이 심겼어도
형통하겠느냐? 동풍이 그것에 손을 대면 완전히 시들지 아니하겠느냐? 그 나무가 자기가 자라던 고랑에서 시들리라, 하라.](10). 어떤
바람은 농작물에 치명적입니다. 특히 더운 바람은 농사를 망치게 하는데, 팔레스타인의 동풍이 그런 바람입니다. 동풍은 바빌론에서 불어오는 바람 즉
느부갓네살의 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드기야는 그 자리에서 말라서 시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11-14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제 /너는/ 이 반역하는 집에게 말하기를, 이것들이 뜻하는 바를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보라,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곳의 왕과 그곳의 통치자들을 사로잡아 자기와 함께 바빌론으로 끌어가고 왕의 씨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그와 언약을 맺고
그로부터 맹세를 받으며 또 그 땅의 강한 자들을 데려갔으니 이것은 그 왕국을 낮추어 스스로 높이지 못하게 하며 오직 자기의 언약을 지켜야만
/능히/ 설 수 있게 하려 함이라.] (11-14). 주님은 비유를 말씀해 주신 후에 친히 비유를 풀어 주시듯이 에스겔을 통해 주신
수수께끼의 비유를 친히 풀어 주셨습니다. 11-14절은 이미 앞에서 들려준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빌론 왕은 여호야긴을 사로잡아 가고 왕의
씨 중에서 하나인 시드기야를 택해 언약을 맺고 맹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높이지 말고 오직 바빌론 왕과 맺은 언약을 지켜야만 살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빌론 왕을 배반하고 자기
대사들을 이집트로 보내어 그들로부터 말과 많은 백성을 받고자 하였으니 그가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가 도피하겠느냐? 그가 언약을
어기고서야 건짐을 받겠느냐?](15). 이 내용은 예레미야 52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는
반역을 결행했습니다. 그는 형통하지도 못했고, 도피하지도 못했고, 건짐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밖을 포위해 버렸고, 성
안에는 기근으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도망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자기 아이들이 죽고, 눈이 뽑혀서 바빌론까지 붙잡혀가서 죽는 날까지
감옥에 있어야 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이집트에 말과 군대를 요청했습니다. 이집트는 말이
번성했기 때문에 기병대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기병대가 약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을 번식시키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왕이 된 자는 자기를 위해 말들을 많이 늘리지 말 것이요, 말들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후로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라](신17: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말과 군대, 육신을 의지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세상과 연합해서 세상의 도움을 받는 것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들리니 나의 도움이 거기서 오는도다.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께로부터
오는도다.](시121:1-2). 말을 번식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6일 전쟁이라고 불리는 중동전이 벌어졌을 때
이스라엘군 지휘관은 모세 다얀이었습니다. 모세 다얀 장군은 “우리에게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무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외신 기자들은
이스라엘이 비밀리에 핵무기나 수소 폭탄을 제조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쟁에 핵을 사용하려 한다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필승의 전쟁 무기는 시편 121:1-2절이었습니다. 그는 단숨에 3억의 주변 아랍국과 상대해서 질풍노도와 같은 작전으로 승리를
쟁취했는데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에 시작된 전쟁을 다음 안식일을 지키기 전까지 끝을 내고 말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엿새 만에 그 엄청난 아랍 족속의
땅을 점령하고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과 손을 잡고 일하는 것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부국강병은 어느 통치자나 꿈입니다. 강력한 군대를 가지는 것을 소원하지 않는 지도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강함은
그들의 외교나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듯이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세상에 원조를 청하지 말아야 합니다.
16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빌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그 왕과의 맹세를 멸시하고 그 왕과의 언약을 어겼은즉 반드시 그 왕이 거하는
처소 곧 바빌론의 한가운데서 그 왕과 함께하다가 죽을 것이라.](16).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시드기야가
바빌론 왕과 언약을 세웠으면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에스겔의 예언대로 죽었습니다. 이로써 왕국은 멸망되고, 그들이
지키지 않았던 안식년을 땅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써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이 성취되어 마침내 그 땅이 자기의 안식을 누렸으니
이는 그 땅이 황폐한 동안 안식을 지키고 칠십 년을 마쳤음이더라.](대하36:21).
17-18절입니다. [파라오가 자기의 강한 군대와 큰
무리를 동원하여 작은 산을 쌓아 올리고 보루(堡壘)를 세워 많은 사람을 멸하려 하되 그 전쟁에서 그를 위하여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리라.
보라, 그가 이미 자기 손을 내밀어 /언약을 맺었거늘/ 그 언약을 어겨 그 맹세를 멸시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도피하지 못하리라.](17-18).
이집트는 계속해서 남하해 오는 바빌론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을 도우려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렘44:30). 전략적 동맹을 맺었지만
아무 힘이 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를
그의 원수 곧 그의 생명을 찾는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의 손에 내어 준 것같이 이집트 왕 파라오호브라를 그의 원수들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내어 주리라.](렘44:30).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인간적 도움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이집트를 이미 칼케미쉬 전투에서 끝장을 내어 버렸습니다. 이집트의 기병대는 예루살렘 부근으로 오지도 못했습니다.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참으로 내 맹세를 멸시하고 내 언약을 어겼은즉 내가 그 /죄대로/ 그의 머리 위에
보응하리라. 또 내가 내 그물을 그 위에 치고 그를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바빌론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나를 대적하여 범법한 그 범법으로 인하여
거기서 그를 /법대로/ 심문하리라.](19-20). 하나님은 시드기야가 바빌론에 한 충성 맹세를 잘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바빌론에 한
맹세는 주님께 한 맹세요, 주님께 한 언약으로 보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삶의 원칙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요, 세상에 세운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시드기야가 ‘내 맹세를
멸시하고, 내 언약을 어겼은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드기야가 눈이 뽑힌 채 바빌론에 잡혀가 재판을 받고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을
통해 그의 머리 위에 그대로 보응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그의 모든 도망한 자들과 그의 모든 부대가
칼에 쓰러질 것이며 남은 자들은 /사방의/ 모든 바람을 향하여 흩어지리니 나 [주]가 이것을 말한 줄을 너희가 알리라.](21).
이방인의 때는 이때부터 열렸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북쪽으로는 러시아, 동쪽으로는 아랍과 시리아
지역, 서쪽으로는 이태리와 스페인, 독일과 프랑스, 유럽 전역에 흩어졌고,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사방의 모든 바람을 향하여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신약에서 한 번 더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사방에서 다시 모으시는 날까지 이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22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또 내가 그 높은 백향목의 가장 높은 가지를 가져다가 세우리라. 내가 그 어린 가지들의 꼭대기로부터 연한 가지를 잘라 내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22). 22절은 메시야의 도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3,4절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느부갓네살은 버드나무 같은 연한
가지를 내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높은 가지”이십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차례 가지로 언급됩니다(사11:1,
53:2, 슥3:8,6:12, 렘33:15).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가지를 취하셔서 우뚝 솟은 산에 심으신다는
것은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것이
가지들을 내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온갖 날개를 가진 날짐승이 다 그 밑에 거하고 또 그 가지들의 그늘에도 거하리라.](23).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천년 왕국 시대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높은 산이란 시온 산을
말합니다(시2:6,9:11).
24절입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주]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마르게 하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을 알리라. 나 [주]가 이것을 말하고 행하였느니라.](24).
높은 나무는 적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고, 낮은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나무를 낮추시고, 낮은 나무를 높이십니다. 푸른
나무 역시 적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성경에서 푸른 나무는 늘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사용된 것을 봅니다. 적그리스도는 푸른 월계수로 예표됩니다.
[사악한 자가 큰 권능을 가진 것을 내가 본즉 스스로 푸른 월계수같이 뻗어 나갔으되 그가 사라졌으니, 보라, 그가 없어졌도다. 참으로 내가
그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였도다.](시37:35-36).
그러나 본문은 재림에 간한 구절이라기보다 초림에 대한 구절로
이해됩니다. 24절을 초림에 적용하자면 푸른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마른 나무는 적그리스도에 의해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을 예표합니다. [그들이
푸른 나무에 이런 일들을 행할진대 마른 나무에는 무슨 일을 행하리요? 하시니라.](눅23:31).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마른
나무가 되는데 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2000년 이상 고난당하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천년 왕국이 되면서
무성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