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예레미야 20:1-8
요절: 예레미야 20:9
예레미야 20장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와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주의
음성을 들은 한 제사장의 완악함과 불순종으로 시작합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 집에서 산 질그릇 병 하나를
들고 백성의 원로들과 제사장의 원로들을 모아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그들이 행한 범죄를 지적하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받게 될 끔찍한 재앙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누가 들어도 두 귀가 울릴만한 그런 소식(19:3)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때에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은 또한 [주]의 집에서 우두머리
감독이더니 그가 예레미야가 이 일들을 대언한 것을
들으니라. 이에 바스훌이 대언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베냐민의 높은 문에 있는 차꼬에 채워 두었더니 그곳은 [주]의
집 옆에 있더라.](1-2). 예레미야의 박해자가 누구입니까?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의 수석
감독이었습니다. 임멜은 다윗의 때에 선출된 24명의 제사장
중에 16번째 제사장으로 뽑힌 사람이었습니다(대상24:14).
이는 아비야 계열의 한 제사장 사가랴처럼(눅1:5) 임멜의
계열에서 난 제사장 바스훌이란 뜻입니다. 임멜은 다윗의
시대 사람입니다. 바스훌은 성전 경배 대장이었거나 행정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행4:1). 그는 예레미야가 하는
주의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말씀의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 주고, 깨닫게 해 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도리어 예레미야를 때리고
범죄자처럼 차꼬에 채워 감금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모르고, 주의 말씀을 증거하는 대언자를
때리고 감금하는 사람이 성전의 책임자로 있는 시대라면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는 시대이며(마15:14), 배교의
타락의 절정기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권력을
주의 종을 박해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도행전 23:2에 보면 복음을 증거하고 변론하는
바울을 치라고 명령한 사람은 이방인 불신자가 아니라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야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령하매](행23:2). 주님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주의 종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이렇게
증거하셨습니다. [농부들이 그 종들을 잡아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치매](마21:35). 이 땅에 아벨의
피를 흘린 이후로부터 주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성도들은 맞고, 감옥에 가고, 죽임을 당하는 피 흘린 순교의
발자취를 밟아 왔습니다. 주님 역시 그 길을 가셨고, 우리
역시 그분이 남겨놓은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벧전2:21).
3절입니다. [다음 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차꼬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주]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셨나니](3).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차꼬로 묶어 둔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복음 전도자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몸은 매였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행악자처럼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딤후2:9).
바스훌 역시 예레미야를 묶어 두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지 그 다음 날 풀어 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고난을
당하되 욕하지 않으시고, 아무런 저항이 없으셨던 주님처럼
잠잠히 묶였고, 잠잠히 풀렸습니다. 그가 풀릴 때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스훌에 관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을 바스훌에서 “마골밋사빕-Terror round about o rFear
on every side-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뜻은 사방에 있는
두려움이란 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수만(數鰻)의 백성이 나를 에워싸고 대적한다
하여도 내가 그들을 무서워 아니하리이다.](시3:6),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전쟁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날지라도 내가 이것을
확신하리로다.](시27:3). 그러나 주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사방에 두려움이 임합니다. 악인들은 평안할 때도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에 떨게 마련입니다.
그들에게 임한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첫째, 인명의 피해입니다.
죽음과 포로로 사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이는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라. 보라, 내가 너로
하여금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 원수들의 칼에 쓰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또 내가 온 유다를 바빌론 왕의 손에 넘겨주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칼로 죽이리라.](4).
바스훌은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전한 모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눈으로 다 목격하게 됩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만큼 무서운
놀랍고 두려운 일이 없습니다. 친구들과 친지들은 물론이고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원수들의 칼에 쓰러지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예레미야를 때린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유다의 왕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죽는 것을 보면서 그 동안 행한 범죄에
대한 심판이 임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둘째, 재산상의
피해입니다. 그들은 모든 재물을 다 약탈물로 빼앗길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이 도시의 모든
권세와 그 모든 수고한 것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들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리니 그들이
그것들을 노략하고 취하여 바빌론으로 가져가리라.](5).
성전에 남은 작은 그릇하나까지 모두 바빌론으로 옮겨지고
맙니다. 안식일과 안식년을 어겨가면서 모은 재산들은
남김없이 다 빼앗기고 맙니다. 얼마나 철저히 빼앗아 갔는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또
주의 집의 놋 기둥들과 받침대들과 주의 집의 놋 바다를
산산조각 내어 그 놋을 바빌론으로 가져가고](왕하25:13).
이들은 느부갓네살의 약탈로 인해 더욱 두려움이 커질
것입니다.
셋째, 바스훌과 그 집안
사람들과 그들의 거짓 대언을 들은 모든 친구 역시 재앙을
피해가지 못합니다. 더 이상 재앙은 남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 바스훌과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가 될 것이요, 너는 바빌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서 묻히리니 너와 및 네 거짓 대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가 그러하리라, 하셨느니라.](6). 하나님은 바스훌의
집에 재앙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론의 계열에서 나온 제사장
집안이지만 그는 거짓 대언자였습니다. 주님은 “너와 및 네
거짓 대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라고 하심으로 그가 종교적
직무로는 비록 주의 집에서 우두머리 감독(1)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 대언자란 것입니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 협의회 회장, 선교회 회장, 민족 복음회
운동 간사, 총무, ** 교회 담임 목사, ***신학교 교수 등등”과
같은 직무를 명함에 찍어 다니지만 그가 정작 하나님 앞에서
“너와 및 네 거짓 대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 거짓 대언자는 참
하나님의 종을 꾀어 죄를 짓게 합니다. [이에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대언자라. 천사가 주의
말씀으로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로 하여금 빵을 먹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그러나 그가 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였더라.](왕상13:18).
● 거짓 대언자는
하나님께 속임을 당합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檳玆)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제 대언자들의 말이 한
입으로 왕에게 좋게 고하니 원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말처럼 되게 하여 좋은 것을 말하소서,
하니](왕상22:23).
● 백성들은 거짓 대언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보지 말라,
하고 대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들을
대언하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들을 대언하라.](사30:10). 거짓 대언은 시대적 요청이며,
만민의 소원입니다.
● 백성들은 거짓 대언을
사랑합니다. [대언자들은 거짓되이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1).
● 주님은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으로는 약탈(掠奪)하는 이리니라](마7:15)
● 거짓 대언자는 많은
사람을 속입니다. [거짓 대언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고](마24:11).
● 거짓 대언자는 큰
표적과 이적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이적(裏蹟)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그 택하신 자들까지도 속일 것임이라.](마24:24).
● 사람들은 거짓
대언자들을 칭찬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대언자들에게 이같이 행하였음이라.](눅6:26).
거짓 대언자들은 평화를
외치지만 그들에게는 사방에 두려움이 임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불안하면 불안할 수록 평화를 외칩니다. 거짓
대언자들의 설교 제목은 언제나 평화, 위로, 성공, 축복과
같은 긍정적인 메시지가 주류를 이룹니다. 주님은 거짓
대언자들의 설교를 이렇게 평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화평이 없는데도 화평이라 말하였음이라.
보라, 한 사람이 벽을 쌓으면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섞지
않은 회반죽으로 그 벽에 바르는도다.](겔13:10).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것,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설교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곧 예루살렘에 관하여
대언하며 화평이 없는데도 예루살렘을 위하여 화평의
환상들을 본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대언자들이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13:16).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
발생하는 현상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죄에 대한 회개없는
마음의 평안은 언제나 거짓입니다. 애통함이 없는 위로는
위로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당대의 모든 거짓대언자들은
평화를 외쳤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은 안식과 평화를 주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회개와 돌이킴없이 무조건 평화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의
조건은 이렇습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義)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85:10). 화평은 의와 함께
발을 맞추어서 옵니다. 의가 없이는 화평이 없습니다. [의의
일은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확실한
안전이니라.](사32:17).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해 탄식했습니다. 화평을 주시고자 해도 그들에게 주실 수
없는 안타까움을 들어 보십시오. [네가 내 명령들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하였더라면 네 화평이
강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사48:18).
대언자들, 제사장들이 진정으로 예루살렘의 화평을
구하고자 한다면 전면적인 회개를 촉구하고 마음을 주께로
돌이키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화평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사악한
자에게는 결코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7절부터는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 놓았습니다. 바스홀에 대해 대언을 했던 예레미야는
상당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막 풀려나는 순간에
최고의 권력가에게 최악의 대언을 했고, 저주를 한 꼴이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속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날마다 조롱을 받으며 사람마다
나를 비웃으니](7).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불만을
털어 놓고 있습니다. 그의 불만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예레미야는 주님이
자신을 속였으며, 자신이 속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기대한 것과 너무나 다른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한 후에 더 큰 위험에 빠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아무리 위대해도 사람일 뿐이라는
진리를 배웁니다.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한 뼘만큼
되게 하셨사오니 내 시대가 주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듯
하오며 참으로 사람은 최선의 상태에서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39:5). 목회자나 선교사들에게 가장
힘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전했지만 회개의 열매도
없고, 부흥도 없고, 사람들에게 약간의 찔림도 주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올 때 예레미야처럼 자신이 주님께 속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침례인 요한을 볼 때 더욱
분명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약속된 메시야인가? 의심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 중에서 두 사람을 불러 예수님께 보내며 이르되,
오실 그분이 선생님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가
이르되, 침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 보내며 말하기를,
오실 그분이 선생님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눅7:19-20). 대언자들의
이런 회의(懷疑)와 소명에 대한 극단적인 의심은 선교사들,
목회자들 사이에도 늘 존재합니다. 교회가 잘 안될 때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과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의심합니다. 열매가 전혀 없을 때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탈출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주님 앞에서는 인정을 받고 싶었는데,
대체 이것이 뭡니까? 하는 심정입니다.
둘째, 예레미야는 자신이
날마다 조롱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불만입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매 맞으며 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모세나 사무엘처럼 존경받는 민족의 대
선지자는 되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씨가 먹혀 들 줄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미스바의 대각성
운동같은 회개의 열풍은 없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하는데, 수 십년을 매일 하루같이 거절,
배척, 모욕을 당하면 절망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비가 오는 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어야
하는데, 몇 년 동안 예레미야는 매일같이 배척만 받았습니다.
셋째, 그는 모든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반대를 받아도 누군가
뜻을 같이하고 동조해 주는 사람이 있고, 이해 해 주는
사람이 조금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겐
위로는 제사장과 같은 원로들, 장로들 아래로는 일반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조롱을 당하고, 사람마다 자기를 비웃는
일은 마음이 여린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실하게 주의 말씀을
전한 결과가 그러했기에 그는 더욱 절망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말을 시작한 이후로 부르짖되 폭력과 노략을
부르짖었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이 날마다 나를
치욕거리와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나이다.](8). 예레미야는
어릴 때 부름받았습니다. 그가 말을 주의 사역을 시작한
후에 덕담이나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임박한 재앙이 닥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받는 이런 모욕과 조롱의
근본 원인이 “주님의 말씀”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조롱을 받고 매를 맞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질이 더러워서,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신실하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바 말씀을
전하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이 날마다 나를 치욕거리와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나이다.](8b). 주의 말씀을 먹을 때 우리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되지만(렘15:16), 세상과 주위로부터는
치욕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주께서
우리를 우리 이웃들에게 모욕거리가 되게 하시며 우리를
둘러싼 자들에게 조롱거리와 조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다.](시44:13)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이웃들에게 모욕거리가 되며 우리를 둘러싼 자들에게 조롱거리와 조소거리가 되었나이다](시79:4)라고
자신의 쓰라린 체험을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칭찬을 구한다면 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딤후3:12).
인기있는 설교자는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신자는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핍박, 모욕, 조롱은 신앙
생활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되이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이는 하늘에서 너희 보상(湺尙)이
크기 때문이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특히 예레미야와 같이
사역자로 세움을 입은 사람들은 박해를 받도록 세움을
입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명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런
박해로 인해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런
박해를 받도록 세우심을 받은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아느니라](살전3:3).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그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 같아서 내 뼈 속에
사무치니 내가 참기에 지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노라.](9).
예레미야는 자신의 불만, 어려움, 겪고 있는 시험을 주님
앞에 내려 놓으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 같아서 내 뼈 속에 사무치니](9).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담으면 그것이 타오르는 불이
되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요4:14,7:38).
사람은 마음 속에 가득 담고 있는 것을 입으로 내게
마련입니다. 설령 그것이 하찮은 신변 잡기이던지 우스개
소리든지,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든지, 어디서 들은 말이라도
언젠가는 입으로 나옵니다.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결국 폭발했는데, [이는 내게 말할 것이
가득하며 내 안에 있는 영이 나를 강권하기 때문이로다.](욥32:18)라고
했습니다. 묵상의 사람 다윗을 보십시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우므로 내가 생각에 잠길 때에 불이 붙으니 이에
내가 내 혀로 말하기를,](시39:3). 그는 말을 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가 결국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말씀이 내 안에 가득한 사람은 그것을 입으로
쏟아내는데, 찬양이든 간증이든 기도로든 복음 전파로도
쏟아냅니다. 늘 성경을 읽고, 주야로 묵상하고, 종일토록
묵상할 때 우리는 말씀으로 인해 박해와 모욕과 수치가
오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전9:16).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여 나의 본성, 죄성,
연약함, 의심을 모두 극복해야 합니다.
10절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이 중상모략하는 것과 사방에서 두렵게 함을 내가
들었음이라. 그들이 말하기를, 전하라. 우리도 그것을
전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이들도 다 내가 그만두기를
기다리면서 말하기를, 혹시라도 그가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그에게 우리의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10).
예레미야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사람들이 하는 중상 모략과 두렵게 함을
들었습니다. 친구들이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음모를 꾸미고
유혹하는 말들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처한 이런 위험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다 고했습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 생활입니다. 주님께 아뢰고, 주의 상담을
들을 때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칭찬을 듣기를 원하지만
사람들의 칭찬이 아니라 주께로부터 오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다윗 역시 예레미야처럼 주위에서 들려오는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이는 내가 많은 사람에게 모함을
들었으므로 사방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오니 그들이 함께
의논하여 나를 치려하면서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시31:13). 주님 역시 마찬가지셨지만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기록된 대로만 걸으셨습니다.
성도가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처음 듣는 소리가 “이단에
빠졌다”, “종교에 푹 빠졌다”, “미쳤다” 등입니다.
목사나 선교사들 역시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처럼 중상모략,
모함을 듣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하오나
[주]는 강하고 두려운 분 같으사 나와 함께 계시므로 나를
핍박하는 자들이 걸려 넘어져 이기지 못하고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리니 이는 그들이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니이다. 그들의 혼동은 영존하여 결코 잊혀지지
아니하리이다.](11). 예레미야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내려놓고 주님으로부터 답을 얻었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므로”(11).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며,
해답입니다. 누구든지 예레미야를 이기기 위해서는
예레미야와 함께 계시는 강하고 두려우신 주님을 이겨야
합니다. 누가 주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끝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아무도, 어느 누구도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절대적인 열세와 악조건 속에서 일을 하면서
원수들을 대적했습니다. [내가 돌아본 뒤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치리자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아들딸과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느4:14).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원수들은 사자처럼 덤벼들어도 대적하여 싸울
때 물러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도망하리라”(약4:7)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터에서, 또 원수들의
손에서 무수히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그의 간증 한
토막입니다. [사악한 자들 곧 나의 원수, 나의 대적(對敵)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걸려서 넘어졌도다.](시27:2).
예레미야는 제대로 방향을 잡았고, 원수들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내었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하오나,
오 의로운 자를 시험하사 속 중심과 마음을 보시는 만군의 [주]여,
내가 주께 내 사정을 드러내었사오니 주께서 그들에게
원수갚으심을 내가 보게 하옵소서](12). 이 기도는 이미
앞에서 똑 같이 한번 드린 기도입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이
시험하시고, 속 중심과 마음을 보시는 주님이심을
알았습니다(렘11:20).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고 각 사람의 길과 각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각
사람에게 베푸느니라.](렘17:10). 주님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는 기도를 통해서
주께서 자신의 사정을 모두 다 드러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주님 앞에 아뢰는 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속 중심을 살피시기에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주님께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26:2에 [오
주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시며 내 속 중심과 마음을
단련하소서.](시26:2)라고 합니다. 자신의 원수들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이는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맡기라고
하신 말씀대로입니다(레19:18, 신32:35, 롬12:19). 성도들은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맡기고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수를 용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기도가 막히고, 영적 생활에 방해를 받으며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13절입니다. [[주]께
노래하라.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이는 그분께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손에서 가난한 자의 혼을 건져 내셨음이니라.](13).
주님은 지금까지 자신의 혼을 건져 오셨듯이 앞으로도
건지실 것입니다. 믿음은 미래에 있을 일들을 현재로,
과거형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그가 기도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했으며, 믿음을
회복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 기도할 때 마음이 흔들리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신앙을
회복했고, 주위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을 가졌는데 이는 가가
처음에 소명을 받았을 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보라, 내가 이 날 너를 방벽(培壁)을
세운 견고한 도시,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여 그 온 땅과
유다의 왕들과 그 통치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의 백성을
치게 하였음이라. 그들이 너와 싸우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주가
말하노라.](렘1:18-19). 이 말씀에 따르면 왕들, 통치자들,
제사장들,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대적하여 싸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예레미야의 몫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여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이미 그는 미래의 일을 과거형을 말할 수
있고, 현재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와
약속의 말씀이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는지 배웁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을
원하든지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막11:24).
믿음은 미래를 현재로, 과거형으로 만듭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받은 말씀을 잃어 버렸거나 잊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과거, 현재, 미래에 영속적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고 계시며 또 건지실 줄을
우리가 신뢰하노라.](고후1:10). 지금까지 살았으며, 현재
살아 있다면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14-18절입니다.
시험으로부터 이긴 대언자 예레미야의 장엄한 한편의
시적인 기도입니다. 13절에서 믿음의 찬양을 드린
예레미야가 갑자기 돌변해서 14-18절은 낙담과 절망으로
바뀌었는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본문을 보겠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내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이 없었더라면, 내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에게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하여 그를 매우
기쁘게 한 사람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그가 [주]께서
무너뜨리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도시들같이 되었더라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를 한낮에는 외치는 소리를
들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나니 이는 그가 나를 모태에서부터
죽이지 아니하였음이요, 혹은 내 어머니로 하여금 내 무덤이
되게 함으로 그녀의 태가 나로 인해 항상 불러 있게 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수고와
슬픔을 보며 내 날들을 부끄러움으로 소진(消盡)하는가?](14-18).
14절은 마치 욥의 고백을
듣는 것 같습니다. [내가 태어난 그 낮과 사람들이
사내아이를 수태하였다 말하던 그 밤이 소멸되었더라면](욥3:3)하며
자신이 받는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저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산(死産)하지 못한 것을 원통해 할 정도였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부터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뱃속에서 나올 때에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3:11).
지금 예레미야는 대환란을 맞이하는 유대인들이 갖는
역사적, 예언적 고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욥기 역시 42장으로
되어 잇는데 이유없이 마귀에게 대환란을 당함으로써
고통받는 42개월의 인내와 오래 참음의 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침공, 로마의 침공과 더불어 장차
임할 대환란 때에 유대인들은 모두 14절과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15절 역시 같은 문맥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태의 열매요, 유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짐이 되고, 저주가 되는 때가 있는데 대환란 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마24:19)이라고
하셨습니다. 16절은 주님의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가
차라리 예루살렘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루살렘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이 전파되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믿지 않는
도시들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파멸을 보게 됩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도시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1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迎顚)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거기서
떠날 때에 너희 발 밑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을 대적할
증거로 삼으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그 도시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막6:11).
18절을 보십시오. 이는
마치 전도서를 읽는 듯한 기분입니다. 이는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주님께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이 당하는 인생의
고통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바빌론 포로기 때 이 경험을 했으며, 예언적으로는 다가올
대 환란 때 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것이 유산되거나 어린 때 죽은
것보다 더 불행하고 허무한 삶입니다. 모두 복음을 통해
주님 안에서 허무, 불행, 근심, 염려, 슬픔을 떨쳐 버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