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예레미야 3:20-4:31

요절: 예레미야 4:14


3:20-25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된 지적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의 죄악을 다양하게 설명해 주셨는데 첫째,
그들은 자기 남편을 속이고 떠난 것 같이 하나님을 속이고
떠났습니다
(20). [오 이스라엘의 집아, 마치
아내가 자기 남편을 속이고 떠나는 것같이 너희가 나를
속였느니라
. [주]가 말하노라.
](렘3:20). 하나님이
사람을 속이는 방법은 주로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는 방법은 위선과
가식입니다. 모든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속임수에 속지 않지만 그런 속임수를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집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섬기는 듯이 종교 의식이나 행사를 가졌는데, 그런 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이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나의
장로들이 자기 혼을 구제할 양식을 구하다가 이 도시 안에서
숨을 거두었도다.
](애1:19). 주님을 거짓되이 경배하고,
거짓되이 믿는 것은 다 주님을 속이는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도 주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 부부는 땅을 팔아 땅값의 얼마를 감추고
전부를 헌금한 것처럼 내어놓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선이 얼마나 큰 죄인지 잘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야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고
땅값의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3).
우리는 이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자기 길을 굽게 하고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21). 그들은
기도해야 할 대상을 두고도 높은 산에 올라가서 산당이나
숲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기 길을 굽게 하고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가? ①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법규를 지키지 않을
때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신8:11). ② 마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신8:14). ③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신8:19).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
우상을 숭배하는 경우가 있고,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지키지
않거나 마음이 교만할 때 필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④
악을 행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삿3:7). 죄에는 지식과
지혜가 없습니다. 죄인들은 일부러 주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은 자신의 조국이나 부모나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입니다. 자기
이름을 잊어버리면 정신 병원으로 가거나 요양원으로
가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지옥으로 갑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사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돌아가며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리하리니
](시9:17)고
말했습니다.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고 지옥에 갈 일은 없겠지만(가능한 일인가?)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아, 이제 너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할지어다
.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갈기갈기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으리라.
](시50:22).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십니다. [오 야곱 곧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니 이것들을 기억하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오 이스라엘아, 너는 내게서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사44:21).


22절은 타락한 자녀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타락한 자녀들아, 너희는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타락한 것을 고쳐 주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이는 주께서 [주]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이다.
](22). 회개는 구원에
앞섭니다. 고침받기 전에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은 고치시는
분이신데 이것이 성경적 치유입니다. 오늘날 회개와 회심의
경험도 없이 머리에 손을 얹거나 어떤 방식으로
치유하겠다는 치유 은사주의자들은 다 거짓말쟁이들입니다.
① 주님을 타락한 것을 고쳐 주시는 치유자이십니다.
우리가 타락했다면 주님께로 나아와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② 주님은 잘못된 길에 들어선 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사57:18). 길되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고침받아야 할 환자요, 부상자입니다. 십자가의 좁은 길,
어린 양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 아니라면 그는 돌이켜
주님의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의의 길, 평강의 길,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이라면 반드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고쳐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주리라. 또 그를 인도하여 그와 및 그의
슬퍼하는 자들에게 다시 위로를 얻게 하리라
.](사57:18).
주님이 치유해 주시는 이유는 이를 통해 치유받는 당사자
뿐만 아니라 온 민족이 주님의 길을 알고, 주님의 구원을
알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이로써 주의 길을 땅 위에
알리시며 주의 구원하시는 치유(治癒)의 힘을 모든
민족들에게 알리소서.
](시67:2). ③ 주님은 마음이
불안한 자를 고쳐 주십니다
. [내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노라. [주]가 말하노니, 평강이 있을지어다. 멀리 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쳐 주리라, 하시기 때문이니라.
](사57:19).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자 그대로 최고의 치유자를 지니고 있었고,
영적으로도 최고의 치유자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율법대로 살면 결단코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15:26).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내 명령들을 귀담아 들으며 내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
, 하시니라.
](출15:26). 그러나 주님의 이런
초청에 그들은 냉담하였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심한 부상으로 고통당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네 상처는 치유할 수 없고 네 부상은 심하도다.
네 소문을 듣는 모든 자가 너로 말미암아 손뼉을 치리니
이는 네 사악함이 항상 그들 위로 지나갔기 때문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나3: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결국
대환란을 거쳐 천년 왕국에 가서야 주님의 완전한 치유를
받게 될 것입니다. 병상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만
손해입니다. [[주]께서 자신의 백성의 터진 곳을
싸매시고 그들의 맞은 곳을 치유(治癒)하시는 날에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나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보라, 내가 이곳에 건강과
치유를 가져오며 그들을 치유하고
평안과 진리의
풍성함을 그들에게 드러내며
](렘33:6).


24-25절은 범죄의
결과입니다. 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발버둥쳤는데
결국은 양떼와 소떼, 아들 딸들이 다 삼킴을 당했습니다
(24).
수치 중에 눕습니다. 이는 비참한 죽음을 말합니다(25a).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요셉은 다 평안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믿음의 영웅들은 마지막 가는 길이
아름다웠습니다. 반면 사울은 40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마지막은 수치 가운데 누웠습니다. 엘리는 40년간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실질적인 재정일치 시대의 1인자로
살았지만 그의 말년은 언약궤가 빼앗기고, 아들들이
죽었으며,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게하시는 당대의 최고 대언자요, 전
시대의 가장 능력있는 대언자 엘리사를 섬기는
수종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문둥병자로서의 최후였습니다.
웃시야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마지막 죽음은 비참했습니다.
그는 주제넘게 왕으로서 제사장의 직분을 넘보다 이마에
나병이 솟아 죽었습니다(대하26:19-20). 반면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지만 주님을 보면서 죽는 영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주의 구원을 보고 죽었습니다(눅2:29).
비누엘의 딸 안나는 84년을 과부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이스라엘의 구원인 예수를 보고 예언하며
죽었습니다(늑2:37-29). 범죄자의 말로는 수치 가운데 죽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최후를 예비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③ 우리의 혼동이 우리를 덮습니다(25b).
혼동이란 기대한 결과와 반대로 나타나거나 예측이
불가능한 것을 일컫습니다. 믿음의 길은 결과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은 기록된 말씀대로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신뢰하거나 우상을 신뢰한 자들의
결과는 혼동일 뿐입니다. 불신과 범죄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은 혼동에 덮였습니다. 모든 불신자들은 혼동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가닥 운(運)에 의지합니다.
결과를 예측하거나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들이 /과연/ 나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냐? 그들
스스로가 자기 얼굴에 혼동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냐?
](렘7:19).


4장은 범죄한 이스라엘의
패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북쪽에서 앗시리아가 남하 정책을
펴면서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서 멸망당하였고, 유대의
대부분 땅 역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앗시리아 군대를 맞이하면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방법을
모색했지만 대언자를 통해 주신 주님의 해결책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해결책은 첫째,
내게로 돌아 오라
. 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내 눈앞에서 네 가증한 것들을 버리고자 하면
옮겨다니지 아니할 것이요)
](1). 불신자들이나 육신적인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화를 냅니다. 군대가 쳐들어오는데 현실적인 대책은 말하지
않고 ‘주께로 돌이키고, 가증한 것들을 버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 회심, 악을 버리는 것이 적을 이기는
길이요, 자기 민족을 지키는 일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 가정을 지키는 길, 나를 지키는 길이 힘을
기르고, 돈을 벌고, 배경을 만들고, 친구나 친척들로 belt를
형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대책입니다.


둘째, 너희의 묵은 땅을
갈라
.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
](3). 죄악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 온 다음에는 ‘너희의 묵은 땅을 갈아야’
합니다. 묵은 땅은 겸손하지 않는 마음, 완악한 마음, 부패한
마음입니다. 주님은 여러 차례 우리의 마음은 밭에다
비유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셨습니다.
호세아 10:12,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10:12). 묵은 땅을 가는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개척 정신입니다. 부드러운 새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롭게 황무지가 된 땅을
갈아엎는 작업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땅을
버리지 말고 그 땅을 갈고, 부수라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채 씨만 뿌려봐야 자랄 수도 없습니다. 갈고
부수어서 거기에 씨를 뿌리면 주님은 비를 주심으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회심의 경험이 없고, 회개하지 않는
혼들이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목회자들은 거듭난 주님의 양들을
먹일 생각은 하지 않고, 염소들과 이리들, 개들과 독사들,
돼지들에게 음식을 주느라 정신없습니다. 개들과
돼지들에게 주지 말고, 던지지 말라고 한 것들을 던지면서
그들을 위해 희생과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갖은 생색을 다
내는 한심한 일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거듭나지 않는 혼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침례인
요한이 그러했듯이 땅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기분 나빠하든
말든, 다음에는 교회에 안 나올 것 같든 말든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지옥과 심판에 대해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경고와 책망을 주어야 합니다.


셋째, 마음의 포피를
베어 내라
(4).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아,
너희는 [주]를 위하여 너희 자신에게 할례를 행하고 너희
마음의 포피(包皮)를 베어 내라
.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행위가 악하므로 나의 격노가 불같이 일어나 /너희를/
태우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4: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란 증표로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에 할례의 의식을 행했다고 해서
끝났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주님이 외적인 의식으로 주신
것에는 그 안에 반드시 내적이고 영적인 것을 상기하고
지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외적인 할례가 있으면 마음의
할례가 있습니다. 외적인 물 침례가 있으면 영적 침례가
있습니다. 육신적 이스라엘이 있으면 영적인 이스라엘이
있습니다(갈6:16). 겉으로 유대인이 있으면 영적 유대인이
있습니다. 지역 교회가 있으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있습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분리가 없이 합치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요 이상적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지역
교회를 통해 구현되고,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 몸을
통해 열매로 향기로 드러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영적인 몸된 교회를 강조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지방 교회는
지역 교회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그것이 곧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물 침례를 너무나
중요시한 나머지 그것이 영적 침례요, 구원의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어떤 교회는 믿음으로 주어진 영적 침례만
강조함으로써 물침례를 제대로 주지도 않고, 어쩌다
형식적으로 한번 주고 맙니다. 외적인 의식만 중요시하고,
영적이고 내적인 것들을 버린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반면 내적인 것들만 중요시하고 외적인 것들을
버린다면 그는 허무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는 몸은 있는데
영혼이 없는 사람이나 영혼은 있는데 몸은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음이라.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저것도 행하지 않은 채 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마23:23).
이는 행위는 있는데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이듯이, 믿음은
있는데 행위가 없는 것 역시 동일한 문제임을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신약 성도들은 대부분 믿음은 있다고
하는데 행위가 뒷받침되지 못하므로 죽은 믿음, 허무한
사람이란 평가를 받습니다(약2:20).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외적인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당연히 받아야 하고, 그 할례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포피(包皮)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지니
](신10:16). 할례의 목적은 속을 덮고 있는 겉(껍데기,
덮개)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몸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겉 사람을 벗어버리는 전신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할례, 영적
수술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2:11-12, [또한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
로 말미암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림으로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느니라
.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의 활동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았느니라
.](골2:11-12).이
할례는 인간의 손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할례입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몸은 혼과 몸이 붙어
있었습니다. [내 혼이 진토(塵土)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나를 살리소서.
](시119:25).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양날 선 칼인 말씀으로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이 수술은 어떤 최신 레이저 수술보다도
정교하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육체에 할례를
받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주님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마음의 할례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 마음과 네 씨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고
네 마음을 다하며 네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사 너로 하여금 살게 하실 것이며
](신30:6). 신약
성도들에게도 마음의 할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는
겉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겉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그 할례가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속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런 사람에 대한 칭찬은
사람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롬2:28-29).
천년 왕국에서도 역시 마음의 할례는 유효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자손 가운데서 /거하는/
타국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타국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겔44:9). 현재 우리는 마음의
포피를 벗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와 탐욕으로 마음을
덮지 않는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베일로 덮어 버립니다(고후 4:4). 탐욕은 믿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가려 버립니다. 마음을 덮는
베일은 언제 벗겨집니까? 주께로 돌아설 때 벗겨집니다.
마귀에게 가려졌든, 율법으로 가려졌든 주께로 돌아서면
베일은 벗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서면 그 베일이 벗겨지리라.
](고후3:16).


넷째, 애곡하고
울부짖으라
(8).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북쪽에서
앗시리아가 쳐들어와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란 경고입니다.
이는 단지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주의 심판이란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6-8). 심판의 때에 할 수 있는
일은 심판을 겸손하게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때 저항하거나 반발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는데
그때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그나마 고통을
더는 길이요, 짧게 하는 길입니다.


다섯째, 네 마음을 씻어
사악함에서 떠나라
(14). [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을
씻어 사악함에서 떠나라
.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
네 헛된 생각이 어느 때까지 네 속에 머물겠느냐?
](14).
노략당하는 소리가 단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에서까지
알려집니다. 북왕국은 신속하게 멸망했고, 그 소식은
유다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16절에는 유다의 도시들을
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이 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앗시리아의 대군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먼저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치고, 속국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아니면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망하는 것입니다. 달리 길이 없으면 외국 군대를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방법이 아니라
‘네 마음을 씻어 사악함에서 떠나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4:18,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죄인들아, 너희 손을 정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
.](약4:18).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씻는지 압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됩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 만일
우리가 죄 없다 말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는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7~9).
예수의 피만큼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떤 죄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씻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말씀의 물로 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의 조명을 얻고,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마음 가운데 어둠대신 빛을 더러움 대신
깨끗함을 주는 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
](요1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
](엡5:26).
날마다 성경을 읽는 일은 설교를 잘하기 위함도 아니고,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며,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결과일
따름입니다. 성경을 읽는 일은 아침에 세수를 하고, 세면을
하며, 샤워하듯이 자신의 속 사람을 씻는 일입니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이나 기근이나
전염병으로 망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죄악으로 인함이기
때문에 죄를 버리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원인을 앗시리아가 아닌 이스라엘에게서
찾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네 길과 네 행위가 이
일들을 초래하여 네게 임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이 네
사악함이니 그 까닭은 이것이 쓰고 네 마음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니라
.](18).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런 경고를 주는 예레미야의 심정은 애가 타고 끓었습니다.
동족의 멸망을 미리 본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구원의 길이 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당하는
멸망일 때, 전하는 사람의 심정은 죽을 맛일 것입니다(19, 21).
하물며 지옥으로 달려 가는 혼들을 바라보는 저희들의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없고, 연민도, 슬픔도 없다면
우리에게 과연 한 조각이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지옥을 믿고, 하늘을 믿고,
구원을 믿는다면 구원받지 못한 혼들에 대해 가슴속에는
애가 타고, 애가 끓고, 마음이 아프고, 속이 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교인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는 구원이나 지옥이란 단어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괜히 그런 말해서
분위기 망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분란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주님의
양들이 주님의 교회에서 개들이나 돼지들, 이리들, 독사들을
섬기며 함께 나뒹굴며 사이 좋게 지내라는 명령을 받았단
말입니까? 회개를 거부하고, 구원에 대해 반응이 없고, 바른
성경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과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본다는 것은 마치 우상 숭배자들과 함께 연합한 것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흉내만 낼 뿐 결코 반응하지 않습니다.


23-28절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대환란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창세기 1:2과 너무나 흡사하여 현 세계의 창조 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23-28절은 땅과
하늘이 심판받은 결과 어떤 상태인지를 말해 줍니다. 이는
창세기 1:2이 창조의 한 과정이 아니라 역시 심판의 결과란
점을 분명하게 알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 1:2이 이전 세상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9-31절은 전쟁으로 인해 온
땅이 황폐화되고, 그 통이 초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다고
말합니다. 아이를 낳아본 여자들은 누구나 이 고통을 잘 알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심판의
두려움에 대해 떨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심판을 피하는
길에 대해서 소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혼들에 대해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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