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이사야 43:1- 48:22
요절: 이사야 48:17
43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약속에 대한 근거는 첫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신 분이라는 것(1)과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불러내신 분이라는 점입니다(1b).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모두 창조하셨지만 특별히 다시 창조하신 것이 있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신약의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주님은 왜 이스라엘을 지으셨습니까? 43장에는 주님께서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7). ② 하나님을 믿고 알고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10). ③ 주님을 위해, 주님의 찬양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21). 이스라엘은 이런 창조 목적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지음받은 피조물이 지으신 이의 뜻에서 벗어날 때 맛을 잃은 소금이요, 빛을 잃은 등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지음받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들을 행할 때만 우리의 존재 의의, 생존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7-앞절을 참조해서 읽어보라.). [모든 선한 일에서 너희를 완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자신의 눈앞에서 매우 기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히13:21).
8-9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으로 인해 눈멀고 귀먼 이방 민족들을 증거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신약의 교회 역시 이 세상에 증거자의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온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셨고, 교회를 통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원자란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나를 알고, 나를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 이전에 지어진 신(God)이 없었으며 나 이후에도 없으리라.](10).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증인이며, 하나님의 택함받은 종입니다. 이 구절은 변개된 성경에 의해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영적인 유대인, 영적인 이스라엘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문자적, 육신적인 유대인들의 존재를 성경에서 지워 버립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으로 창조된 영적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주(여호와)의 증인이요, 택함받은 종이었다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며, 종입니다(행1:8. 5:32, 13:31). 14-21절은 주님께서 이루실 영광스런 회복의 역사를 묘사해 줍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22-28절에 따르면 ① 그들은 주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육신을 신뢰하는 자들은 결코 주를 찾지 않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 야곱아, 그러나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22a).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② 그들은 주님에게 싫증을 냈습니다. [오 이스라엘아, 너는 내게 싫증을 냈으며](22b).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종교 생활은 쉽게 싫증이 나는 법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참된 내적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배도, 찬양도, 모임도 다 귀찮고 싫증을 냅니다. 좀더 심하면 짜증을 내고, 증오하게 됩니다. 미가서 6:3에서 주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이르시되/, 오 내 백성아, 내가 네게 무엇을 행하였느냐? 무슨 일로 내가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믹6:3). ③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실 때 출애굽의 대의명분과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광야에서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들은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너의 번제 헌물의 작은 가축도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너의 희생물로 나를 존경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너로 하여금 헌물로 /나를/ 섬기게 하지 아니하였고 분향(焚香)하는 것으로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23). 주님은 이들이 예배를 무시하고, 멸시했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 역시 얼마나 형식적이고, 헛된 예배를 드리는지 상상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④ 이들은 예배를 위해 드리는 돈을 아까워했습니다. [너는 나를 위하여 돈을 주고 향내나는 갈대를 사지도 아니하고 네 희생물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도 아니하였으며...](24). 오늘날 타락한 성도들 역시 동일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이들의 불법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주 곧 자신을 위해 이들을 용서하시고 범죄들을 지워 버리시고,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5-26). [나 곧 나는 내 자신을 위하여 네 범죄들을 지워 버리는 자니 네 죄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25).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입니다. 주님은 한동안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의 범죄를 징계하시고, 저주를 부으셨지만 자신을 위하여 범죄들을 지워 주십니다.
44장입니다. 1-5절은 회복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땅에 물을 주실 것이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열방의 머리로 우뚝 솟을 것입니다.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솟아나는 풀, 수로 옆의 버드나무처럼 될 것입니다(4). [/그러므로/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주]의 것이라, 하겠고 다른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르겠으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손으로 [주]께 서명하며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자기 이름을 지으리라.](5). 천년 왕국의 신정통치를 가장 잘 묘사해 주는 구절입니다. 나는 주의 것이란 고백은 올바른 신앙 고백입니다.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르는 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한 것입니다. 크리스찬 name을 가지는 것 역시 신앙 고백의 일종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Jacob, James 등이 너무나 평범하고 흔한 이름이 되었지만 이교도 국가에서는 감히 함부로 그런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핍박과 박해를 받을 때는 정통 유대인식 이름을 함부로 짓거나 부르지 못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주께 서명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자기 이름을 짓는 것 역시 온 세상이 이스라엘 천하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6-8절은 하나님만이 지닌 신성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십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신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분명한 증언은 [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입니다.
◎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6) - 이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계1:8).
◎ [내가 오래된 백성을 세운 이래로 나처럼 이 일을 크게 외치고 밝히 알리며 또 나를 위하여 차례대로 제시할 자가 누구냐? 그들은 지금 임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임할 일을 저들에게 보일지니라](7). 주님은 예언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대언(예언)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계19:10).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크게 외치고, 밝히 알리며, 차례대로 제시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 주님은 미리 말씀하시고 알리십니다. 성경은 미리 기록된 역사입니다(8).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분명히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암3:7).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가올 일들을 다 말씀해 주심으로 자신이 바로 주 구약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9-20절은 우상을 제작하고,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고, 인간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보다 자신이 만든 우상을 더 섬기고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9). 우상은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우상들과 같으며 우상들을 신뢰하는 자들도 다 그와 같도다.](시115:8)라고 했습니다. 실로 우상은 영적인 눈과 귀를 가리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18). 21-28절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지으셨으므로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21). 이스라엘의 범죄를 지워 버리시고 돌아오도록 초청하십니다(22). 이는 교회에도 마찬가지십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워 버리시고 돌아오라 초청하십니다. 하늘들은 노래하고, 땅의 더 낮은 부분은 외치며, 숲과 그 안의 모든 나무들은 소리내어 노래합니다(23).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구속주이시며 창조주이십니다(24). 이 우주를 자신의 뜻대로 운영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25). 25절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거짓말하는 자들의 증거를 헛되게 만들고 점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서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만들고](25). 주님은 21세기를 거쳐 다가오는 시대를 의와 평화가 넘치는 지상 낙원을 건설하겠다고 말하는 정치인들과 모든 미래학자들의 증거를 헛되게 하사 그들을 거짓말쟁이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첨단 과학을 운운하며, 생명 공학, 유전 공학, 의학이 발전하며 생명 연장의 꿈을 이야기하는 자들의 예언을 간단한 SARS 바이러스로 바보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박사 학위를 소지한 채 거들먹 거리는 자들의 지혜는 일개 점쟁이보다 떨어지고, 점쟁이의 점괘는 촌부의 넋두리보다 가치없는 헛소리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대신 주님은 믿는 자들의 입술에 진리의 말씀을 통해 확실하게 증거하실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자기 종의 말들을 확증하며 자기 사자(使者)들의 계획을 이행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네 안에 사람이 거하리라, 하며 유다의 도시들에게는 이르기를, 너희가 세워지리라. 내가 그곳의 무너진 곳들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고](26). 28절은 고레스를 통해 70년의 바빌론 종살이를 마감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예언한 동시에 이런 해방의 역사가 주의 날에 다시 있을 것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역사적인 사건은 미래의 예언적 사건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사야서를 읽기만 해도 70년 포로 생활을 마감하고 귀환 명령을 내리는 고레스를 통해 주의 말씀이 어떻게 확증되며, 주의 계획이 어떻게 이행되는가를 목격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 온 사실을 통해 앞으로 역시 모든 예언의 성취를 믿음과 소망 가운데 바라볼 수 있습니다.
45장입니다. 앞장 마지막부터 4절까지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고레스가 태어나기 약 200년 전에 이미 그의 이름을 실명으로 기록하시고, 그 일을 말씀대로 이루심으로 성경의 영감과 확실성에 대한 권위를 부여해 주셨으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고레스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목자’(44:28), ‘자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45:1)라고 명명하심으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레스와 예수 그리스도는 둘 다 예루살렘을 회복합니다(슥14:1-11). 둘 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무찌릅니다(45L1, 계19:19-21, 시2:9). 둘 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합니다(45:6, 고전15:28).
7-12절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특히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셨고, 평안도 악도 창조하셨습니다(7). 8절 역시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과 다툼으로서 화를 입었습니다(9-10). 주님은 아버지시며, 주님은 토기장이십니다(10). 환란과 시련이 닥칠수록 우리는 자신을 지으신 분 곧 창조주를 기억하고,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진리로 낳으셨습니다(벧전1:3).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셨습니다(고후5:17). 탕자가 위기의 순간에 살아 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성도들 역시 아무리 범죄하고 타락해도 나를 지으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이킬 수 있다면 모든 어려움은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13절은 다시 고레스에 관한 예언입니다. 14-19절은 이방 민족들 역시 회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0-25절은 땅 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공개적인 초청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고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의로운 가운데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리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22-23). 어떤 신도 사람을 초청할 수 없습니다. 어떤 신도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거짓 신이요, 헛된 신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인들을 초청하시며,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독선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맹세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다 더 높으신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이루어지고, 주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그 말을 보내어 /이루게 하려는/ 일에서 형통할 것임이라.](사55:11).
46-47장은 바빌론에서의 구출과 그로부터 얻은 교훈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빌론은 모든 우상과 인본주의 종교의 본산지입니다. 그들의 우상은 무려 3000여 종류가 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벨과 느보는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우상이었는데, 이들은 짐승의 수레에 실려 옮겨졌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안고, 업으십니다(3-4). 이것이 우상과 하나님과의 차이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비교를 불허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고 독특하신 분이십니다. 우상들의 유혹에 번번히 넘어졌던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70년간 포로 생활을 통해 우상의 실체를 철저하게 경험하고 이후로 다시 우상 숭배의 죄에 빠져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오 범죄자들아, 너희는 이 일을 기억하고 남자답게 행하라. 이 일을 다시 생각 속에 두라.](8). 말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남자들이 남자다움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강하고 용맹함은 사라지고 여성스러워지는 것을 신사답다, 메너있다, 교양있다는 식으로 인식합니다. 주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남자답게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민족 차별, 성(남녀) 차별, 인종 차별, 종교 차별, 지위 차별(주종, 군신 관계) 등 차별을 인정합니다. 인본주의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혐오하는 가치관들이 성경 속에는 그대로 다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그 역할에 충실할 때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화평이옵니다. 남자와 여자는 많은 면에서 다릅니다.
성경에서 남자답게 행하라고 권면한 말씀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0:12, [크게 용기를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도시들을 위하여 남자답게 행하자. [주]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시기 원하노라, 하고](삼하10:12). 욥기 38:3, [이제 너는 남자답게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물을 터이니 대답할지니라.](욥38:3). 욥기 40:7, [이제 너는 남자답게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물을 터이니 내게 밝히 고할지니라.](욥40:7). 하나님은 욥에게 남자답게 대답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너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행동하며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전16:13).
47장입니다. 바빌론 종교의 특징은 일시적 쾌락과 부가 있다는 점입니다(8). 그러나 결말은 패망입니다(9). 10절은 오늘날 소위 자칭 무신론자들이 가장 즐겨 애용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신념과 믿음이 사실과 진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신이 없다고 믿는다고 해서 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믿느냐? 보다 무엇을 믿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며, 누구를 믿느냐?가 영생을 결정해 줍니다. 12-13절은 이들의 생활이 마법, 마술, 점성술로 점철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보내실 때 이런 마법과 마술, 점성술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던 것이 백해 무익함을 발견할 때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48장입니다. 여기는 불순종하고 반역한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 보여 줍니다. 1-2절은 위선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육신적으로, 종교적으로는 이스라엘이지만 내적으로는 진실함과 의로움이 없었습니다(1). 거룩한 도시 출신이라 말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외적 형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미리 주시고,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지만 그들의 완고함은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습니다(4). 5-11절은 주님이 예언의 성취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과 동떨어진 사람들은 어떤 예언의 성취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었는데 침례인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라 말할 생각을 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느니라.](마3:9)고 말함으로써 육신적, 종교적 특권이 영적인 구원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들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씨란 점은 인정하셨지만 그들의 영적 상태는 아브라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의 행위를 하고자 할 것이로되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지금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39-40). 유대인들은 위선과 가식이 문화요, 의식이었습니다. 선민 의식이 가득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실함과 의로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유대인들의 이런 점을 지적했습니다. [보라, 네가 유대인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율법에 안주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이는 겉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겉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그 할례가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속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런 사람에 대한 칭찬은 사람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롬2:17, 28-29). 이는 오늘날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인들이 자신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모두 위선자요, 가식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교인이긴 하겠지만 크리스찬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들고 다니면 믿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속에서 솟아나는 의로움과 진실함을 보지 못할 때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를 위하여 곧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리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히리요?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11).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다시 한번 자신을 위해서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며, 영광을 받아야 마땅한 분이신데, 이 땅에서 그 일을 해야 할 민족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이름을 더럽히자 하나님은 친히 자신의 이름을 위해 일하시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을 구속하신 것은 이교도들 앞에서 자신을 알리고,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였나니 곧 내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고 그들과 함께 거하는 그 이교도들의 눈앞에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내 자신을 그들에게 알렸노라.](겔20:9).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였나니 곧 내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고 그 이교도들의 눈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었느니라.](겔20:14).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구속한 유대인들의 멸망과 패망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9절,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분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찬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참고 끊어 버리지 아니하리라.](사48:9). 이스라엘이 행한 범죄와 완악함만을 볼 때면 이들은 지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아무런 이상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본다면 작은 한 민족이 나라를 이루었다고 바빌론과 앗시리아의 잇따른 침략에 의해 멸망해 버린 그런 민족으로 기술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건져낸 히브리 민족을 그대로 멸망하게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을 수 없으셨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오 너희 이스라엘의 집아, 내가 너희의 사악한 길과 너희의 부패한 행위대로 너희에게 행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할 때에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20:44).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출애굽의 사건보다 더 극적인 사건이 바빌론의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건입니다. 바빌론에서의 귀환은 모세와 같은 지도자도 없었고, 10번의 극적인 재앙도 없었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이적도 없이 자연스럽게 귀환했습니다. 14-15절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대로 70년이 차자 곧 바로 귀환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간직한 유대인들에게 이 일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뼈속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을 것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16절에서 주님은 이 일을 은밀히 말한 것이 아니요, 공개적으로 미리 말했음을 상기시키면서 바빌론 귀환이 주님과 주의 영께서 이루신 일임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17-19절은 이들이 바른 길대로 행했더라면 바빌론의 포로는 고사하고 강대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을 것이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복을 차버리고 화를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입니다. 20절은 바빌론을 나오면서 이 일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21절은 출애굽의 사건을 상기하면서 그 두 사건을 비교해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역사를 통해 배우는 한 가지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점을 절감하지만 주님은 동일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22절이 결론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화평이 없다, 하셨느니라.](22). 동일한 말씀이 57:21에도 반복됩니다.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시느니라.]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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