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네 마음에 간직하라.


말씀: 욥22:22
요절: 욥22:22

저는 이 교회에서 성경 읽기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고 독려해 왔습니다. 그리고 성경 묵상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자주 설교했습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실천하고 있는가는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 암송에 대해서는 거의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는 읽기와 묵상의 중간 단계로 암송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경을 암송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 암송은 많은 영적 유익이 있습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단지 머리로 외우는 지적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알려지는바 되기 위한 핵심적인 사역입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는(keep) 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붙들고, 굳게 지키는 일이야말로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암송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이 그 말씀을 영원토록 항상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잊을 수 있습니다. 전혀 기억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말씀을 한 마디도 잊지 않으시고, 모두 암송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언약 곧 천대에 이르기까지 친히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시105:8).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요,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이 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동일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그분의 언약 곧 천대에 이르기까지 명령하신 그 말씀을 항상 기억하되](대상16:15). 주님은 우리가 자신의 어떠함같이 어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거룩하신 것 같이 우리 역시 거룩하기를 원하시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같이 우리 역시 그렇게 사랑하기를 원하시며,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 역시 그렇게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같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준은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나 여건이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거룩함의 표준, 경건의 표준, 사랑의 표준, 용서의 표준은 이 땅에 있는 누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대한 것과 동일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말씀을 모두 외우셨습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성경이 손에 없으셨지만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시고, 그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율법사들의 집요한 공격에 언제나 성경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을 찾아 보라.” 명령하셨고, “성경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책망하시면서 성경 구절들에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완전히 암송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성경 암송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표준이요, 푯대는 언제나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행할 때 주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행했다”고 말합니다. 동일한 일이라도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할 때 그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믿음의 결과가 있으며, 믿음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베드로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너희 그물들을 내려 한 번 끌어당기라, 하시매 시몬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잡은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5:4~5). 이왕 던질 그물이라도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는 것과 그냥 내리는 것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씀을 암송해 두면 무슨 일에든지 자신이 암송한 말씀을 기억하고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 일은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 되며, 말씀에 순종하는 귀한 삶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기억하여 그 말씀을 따르는 삶을 믿음의 삶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거나 흘려들었다면 그는 믿음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말씀을 순종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말씀을 가능한 한 많이 기억해 두는 것일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호수아 1:8에서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 안에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할 것임이라.](수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이끌며, 주님이 주신 유업의 상속을 차지해야 하는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은 군대를 조직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만들게 하고, 전쟁 연습을 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 한 가지를 정해 주셨는데 그것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일이나 희생물을 바치는 일이나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백성의 영적 지도자로서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모세가 기록한 성경을 계속 읽는 것입니다. 또 읽은바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를 명한 이유는 오직 하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에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켜 행하기 위해서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종교심이나 신앙심을 자랑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오직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영적 자산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묵상하고, 순종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성경 암송은 묵상에 이르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암송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묵상하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이 직접 주님의 말씀을 암기, 암송하라는 말씀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성경 암송을 명령하지 않으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암기하라, 외우라, 암송하라는 말씀대신 ‘기억하라. 간직하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항상 기억하는 일은 암송하지 않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씀을 마음속에 지키는 일 역시 암송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암송에 대한 직접적인 어휘를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더욱 강력한 말씀으로 성경을 암송하도록 명령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접할 수 있습니다. 올 한해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모두 성경을 부지런히 읽을 뿐 아니라 묵상을 위해 암송하는 시간들을 많이 갖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지혜는 그것을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나무라. 그것을 간직하는 자마다 행복하도다.](잠3:18)고 말했습니다. 지혜를 붙잡고, 간직하는 일을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지혜의 말씀을 읽고, 암기하는 것입니다. 때로 어떤 말씀은 외워두지 않으면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외워둔 말씀은 마음 속에 숨겨둔 칼과 같아서 언제든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외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훈계는 네 생명인즉 그것을 굳게 붙잡으며 그것을 놓치지 말고 지키라.](잠4:13). 굳게 붙잡고, 놓치지 말라. 이것은 암기하라는 말보다 더 강력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성경을 암송하라는 말씀대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단지 지적인 영역에서 그치지 않고 사고와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도 나를 가르쳐 내게 이르기를, 내 말들을 네 마음에 간직하라. 내 명령들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잠4:4). “내 말들을 네 마음에 간직하라”는 말씀은 암송을 전제로 합니다. 암송하지 않고서 간직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유학을 공부했던 우리 조상들은 천자문(千字文)에서 시작해서 소학을 시작으로 유교 경전을 암송함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공부 방법은 무조건 암기였습니다. 이렇게 암기하는 훈련으로 인해 한문은 우리 말 어법과 문법이 완전히 달랐지만 자유자재로 문장을 구사하고,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그 교훈들을 자연스럽게 활용하며 가르치곤 했습니다. 전에 저는 <묵상과 경건> 시간에 김득신과 조헌이란 사람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다시 한 번 그들을 통해 도전을 받고자 합니다.

“조선 시대의 선비 김득신(金得臣)은 <사기>"백이전"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읽은 책들의 목록과 그 독수(讀數)를 기록해 놓은 <고문36독수기(古文三十六讀數記)>에서 자신의 독서내력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는 글의 말미에서 말하기를, "<장자>와 <사기>, <한서>, <대학>, <중용>을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만 독의 수에 이르지 않았기에 이 독수기에 싣지 않았다. 너희 자손들이 이 독수기(讀數記)를 읽는다면 내가 책읽기에 게으르지 않았음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 상하 수 천년의 시간과 종횡으로 3만리 넓은 지구상에 독서에 열심이고 굉장한 분 가운데 백곡(김득신)을 으뜸으로 쳐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그를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1억 번 정도는 아닐지라도 비슷한 예는 조선시대의 선비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일손(金馹遜)은 한유(韓愈)의 문장을 천 번, 노수신(盧守愼)은 <논어>와 두시(杜時)를 2천 번, 최립(崔 )은<한서>를 5천 번 읽었고, 차운로(車雲輅)는 <주역>을 5천 번, 유몽인(柳夢寅)은 <장자>를 천 번, 정두경(鄭斗卿)은 <사기>를 수천 번 읽었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학자 유희춘(柳希春)은 <주자대전>을 암송했고, 송익필(宋翼弼)은 <주자어류>를 암송했는데 조헌(趙憲)은 그 두 저서를 모두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들은 단 권으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주자대전>은 124권, <주자어류>는 140권이나 됩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암송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이 되풀이해서 같은 책을 읽은 것이 아닙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한 권의 책을 200번 정도 읽으면 그 책을 암송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암송하기 위해서 수천 번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 책의 교훈을 묵상하고 그 책의 진수를 뽑아내서 궁극적으로는 그 책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 그렇게 거듭해서 읽은 것입니다.” 이들의 행적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믿고 순종한다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하면 반디불 정도의 조명도 되지 않는 그런 책에서 빛을 얻고, 그대로 살기 위해서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읽고 암송할 정도였다면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구절이 속담이나 유명한 격언이 사용되는 것만큼도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은 편하게, 적절한 때에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알지만 Satan came also(욥1:6, 2:1)이란 말은 그렇게 잘 사용할 줄 모릅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다”라는 불교 용어는 멋지게 사용할 줄 알지만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나니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5:7)란 말씀은 잘 사용할 줄 모릅니다. 이는 그 사람이 얼마나 신앙심이 좋고, 종교적 열정이 있는가의 문제를 떠나 말씀의 생활화가 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말씀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생활하는 것은 말씀 사용 능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효는 백행지본(모든 행실의 근본)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보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란 말씀이 훨씬 낫습니다. 말씀을 언어생활과 일상 삶에서 잘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암송해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 입술로 나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이 나오면 그것을 우리는 위선이나 거짓말이라고 부릅니다. 마음과 입술이 따로 놀면 그것을 성경은 ‘비뚤어진 입’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마음 속에 암송해 두면 마음과 입술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갑니다. [분별을 중시하고 네 입술로 하여금 지식을 간직하게 하라.](잠5:2). 입술이 지식을 간직하는 방법은 마음속에 말씀을 간직해야 합니다. [네가 만일 이것들을 네 속에 간직하면 그것이 즐거운 일이니 그것들이 어울려서 네 입술에 꼭 맞게 되리라.](잠22:18). 여러분의 입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길어 올리고, 그 배에 흐르는 생수의 강을 흘러 내 보내는 그런 입술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을 외워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암송해 씨를 뿌려야 할 때에 씨를 뿌리지 못하게 됩니다. 주린 혼에게 음식을 주어야 할 때 줄 수 없게 됩니다. 목마른 혼에게 음료를 공급할 수 없게 됩니다. 마음속에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자신 안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말씀이 있어야 할 곳은 우리 속입니다. 손에는 성경이 있고, 눈에도 성경 말씀이 있고, 귀에도 있지만 마음속에 거하게 하지 않는다면 영적 생활은 정상적인 영적 생활은 영위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모두 암기 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은 어려서 모세 오경을 암송하고 시편을 기본적으로 암송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는다고 증거하셨습니다.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5:38). 이들은 말씀을 머리 속에는 담아 두었지만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머리 속에만 아니라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 합니다. 말씀은 머리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외우는 것입니다.

마음에 암송된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전도자는 애를 써서 받아들일 만한 말씀들을 찾았나니 /여기/ 기록된 것은 올바른 것이요, 곧 진리의 말씀들이로다.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집회의 스승들이 굳게 박은 못들 같으니 이 말씀들은 한 목자께서 주신 것이니라.] (전12:10~11). “받아들일 만한 말씀들”이란 것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받아들여야 하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을 마음 속에 받아 들이고 그것을 암송해 두면 “굳게 받힌 못들”처럼 됩니다. 마음 속에 말씀이 단단히 박혀 있는 못과 같다면 여기에 사랑의 띠(골3:14), 화평의 매는 띠(엡4:3), 진리의 허리 띠(엡6:14)를 맬 수 있게 됩니다. 못이 대충 박혀 있으면 조금 무거운 것을 걸면 빠져 버릴 것입니다. 걸어 두었던 것들은 다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여러분들은 무거운 것을 걸려면 못을 단단히 박을 것입니다.

성경 암송은 말씀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시 때때로 성령의 감동이나 조명을 통해 필요한 말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주님은 말씀을 받아서 마음속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양식인 말씀을 마음 속에 쌓아 두어야 필요할 때 먹고 마시고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적이 오면 말씀의 칼로 물리칠 수 있고, 마음에 어둠이 찾아오면 말씀의 등으로 비출 수 있으며, 생각과 양심이 더러워지면 말씀의 물로 씻을 수 있으며, 누가 물어 오면 온유함으로 답변해 줄 수 있습니다. 말씀이 마음 속에 없으면 그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의인 중이 하나요, 시련을 당했을 때 인내의 본으로 기록된 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욥은 성경 암송을 강력하게 주창했던 사람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원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도를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 속에 쌓아 두라.](욥22:22)는 권면을 했을 때 그는 양심에 조금도 거릴낄 것이 없었습니다. 욥은 평소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을 귀히 여겼고, 그로 인해 인내의 열매를 맺었으며,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욥의 인내는 순전히 말씀을 믿고, 마음속에 쌓아둔 성경 암송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 말씀을 꾸준히 접했으며 암송했습니다. 성경 암송은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한결 같이 주창한 것입니다. 솔로몬 역시 성경 암송을 명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들을 지키며 내 명령들을 네게 쌓아 두라.](잠7:1).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함으로 내적 변화와 성장을 통해 삶의 변화와 인격 성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련을 통과하고, 시험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온지 가장 오래된 분이 이제 약 3년이 되었습니다. 3년을 이 교회에 다니면, 다른 교회에 다닌 사람들에 비해 마음에 믿음이 크게 성장하고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까? 외적인 변화는 그냥 두더라도 마음속에 믿음이 크게 성장하고, 성격이 다듬어지고, 말과 행실이 혁명적으로 변하고, 어떤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까? 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별 것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자신이 킹제임스 성경을 알고, 성경대로 믿는 믿음을 추구하고 나서 많이 변했습니까?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남이 나를 판단하고 실망하기 전에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볼 때 실망스럽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이미 지난 3년이 아니라 그 전부터 바른 성경을 알고 믿음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제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성장이 없다면 그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이거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말씀이 없는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구원은 단숨에 이루어지지만 믿음의 성장이나 생각의 변화, 삶의 가치관이 변화되고, 그대로 바뀌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신앙 인격은 단번에 다듬어지지 않습니다. 말씀 침례교회에 오기 전과 이곳에 온 후에 여러분은 어떤 성장과 변화가 있습니까? 열매가 있습니까? 성질 급한 사람 여전히 급하고, 성격 더러운 사람은 여전히 더럽고, 악한 사람은 여전히 악하고,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여전히 세상을 추구합니다. 교회에 대충 다니던 사람은 지금도 대충 다닙니다. 3년이 아니라 이 교회에 100년을 다녀도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 누가 왔을 때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모범의 대상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는 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고, 이 교회를 다니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비판자가 아니라 비판을 받는 입장에 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단히 변화와 영적 성장을 위해 매진해야 합니다. 손에 든 킹제임스 성경이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말씀이 자라게 합니다.

영어에 '암기하다'라는 단어는 memorize입니다. 이는 ‘기억하다’란 말 그대로 기억력으로 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암송하다는 말은 숙어로 쓸 때 'bear in your heart'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품다’란 뜻입니다. 마음속에 말씀을 품는 것이 바로 성경 암송입니다. 다윗의 성경 암송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외웠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다.](시119:11). 머리로 외운다면 암기력이 좋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잘 외우겠지만 마음으로 외운다면 말씀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 잘 외웁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 그들의 머리가 나쁘다거나 지능이 모자란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꾸짖으셨고, 믿지 못하는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과 애정의 대상은 무엇이나 잘 외워집니다.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이나 역사의 인물, 사건, 지리 시간에 배우는 인명 또는 지명, 화학 시간에 배우는 각종 용어들은 전혀 못 외우는 아이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NBA 스타들의 신장, 특기, 그들의 취미 생활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암기의 천재처럼 보일 정도로 이미 경지에 도달해 있는 아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기억력이란 마음의 문제란 것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마음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듣고, 읽은 말씀이 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이는 암송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너는 마음 속에 두고](신6:6). 여러분은 말씀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오늘날처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는 과거에 성경을 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성경 한권을 구하려면 필사(筆寫) 하는 사람을 고용하여 몇 달간을 베껴서 써야 했습니다. 덕분에 한 가정에 한 권의 성경을 갖게 된 시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암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적어 와서 집에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두고 외웠습니다. 말씀을 듣고 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이 운율체로 되어 있고 모두 노래처럼 되어 있는 것은 암송의 용이성을 위해 주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입니다. 주님은 성경 암송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들을 너희 마음과 너희 혼에 두고 또 그것들을 너희 손에 매어 표적으로 삼고 너희 눈 사이에 붙여 이마의 표로 삼으며](신11:18). 이렇게 암송한 말씀을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도록 하셨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words)을 주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암송해 두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의 교훈이나 스토리는 말해 줄 수 있지만 말씀 자체를 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지만 성도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는 “말씀”(words)입니다. 말씀은 교훈이나 메시지가 아닙니다. 말씀은 스토리(이야기)가 아닙니다.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단어, 어휘)입니다. 말씀은 사상이나 철학이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단어(어휘)를 그대로 전달해 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절하게 소화해서, 각색하고, 의미를 더하는 따위의 일을 해서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씀(words)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 즉 그 어휘를 말합니다. 이는 그대로 암기해 두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구와 대화할 때도 성경의 가르침이나 사상이나 교훈이나 메시지가 아니라 말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나 사도 바울의 사상이나 대언자들의 교훈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어휘)으로 구원받고, 그 말씀으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나 철학에서는 그 가르침의 사상이나 정신이 중요합니다. 불교 정신이 곧 불교의 가르침이요, 유교 정신이 유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정신,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흔히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팽개치고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이요, 희생이요, 섬김이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씀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매우 타당하고,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정신에 앞서서 말씀을 더욱 중요시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정신만 요약하자면 “믿음, 소망, 사랑”으로도 요약할 수 있겠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복음의 정신, 예수님의 정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words)이 중요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막7:14). 나의 사상이나 교훈이나 가르침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리니](눅6:47).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말씀이 영적 생명의 씨앗입니다. 말씀이 구원을 줍니다. 정신이나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8:51). 핵심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핵심 정신을 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외워야 합니다. 흔히 종교 통합론자들은 기독교 정신이나 불교 정신이나 모슬렘이나 그 정신은 다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고, 섬기는 것에 대한 가르침은 종교마다 거의 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를 향해 “예수님의 박애 정신, 희생정신”을 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신이 아니라 “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4). 주님은 정신이 아니라 말(words)을 듣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기독교 정신을 이해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words)을 한 단어, 한 단어 듣고 읽고 묵상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성경을 암송하라고 하신 것은 기독교 정신이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words)들을 모두 마음 속에 넣어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계속해서 네 마음에 묶어 두며 네 목에 매어 두라.](잠6:21). [그것들을 네 손가락에 묶으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7:3).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말씀은 마치 땅 속에 있는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듯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말씀은 우리 안에서 등이 되고 빛이 되며,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히4:13). 말씀을 깨닫게 될 때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을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 속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포도즙이 불어날 때의 /기쁨/ 보다 더 크니이다.](시4:7). 여러분들이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기쁨을 위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는다면 외부의 어떤 사건이나 일이 낙담케 하거나 절망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웃음이 현상이라면 기쁨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 기쁨의 뿌리가 마음속에 있는 말씀에서 온 것이라면 이 기쁨은 참된 기쁨입니다.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속에 둘 때 우리는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37:31). 말씀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원칙과 기준, 법이 내 안에 이미 확립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고로 나의 발을 미끄러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경 암송이란 마음속에 말씀을 두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의 발을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마음 속에 말씀을 암송해 둘 때 믿음으로 사는 삶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취향대로, 하고 싶은대로 해야 편합니다. 본성을 거슬러 행하는 일은 무엇이나 괴롭고 힘듭니다. 마음 속에 있는 대로 행동하는 일은 쉽고 기쁩니다. 말씀이 암송되어 마음 속에 거할 때 주의 뜻을 행하는 일은 나의 본성이 되고, 욕구가 되며, 취향이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억지로, 힘겹게 주의 뜻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즐거움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참으로 주의 법이 내 마음 속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이런 삶이 가능한 이유는 마음 속에 주의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음 속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암송해 두면 주의 뜻을 행하고 싶은 소원이 생기는 법입니다.

말씀을 배우지 않는 사람에게 성경은 행하기 어렵고, 주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되지만 주의 법이 내 마음 속에 있을 때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은 욕구가 되고, 자연스런 소원이 됩니다. 주님께서 “내 짐은 쉽고 가벼움이니라”고 하실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 주의 계명은 무겁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니](요일5:3). 왜 무겁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말씀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주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쉽고 가볍지만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겁고 힘듭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서 이십년을 종처럼 일하면서도 조금도 힘들지 않게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라반의 딸 라헬을 사랑하여 일한 칠년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섬겼으나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인하여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창29:20).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주님의 말을 지키는 자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나의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명령들이 무겁지 않다(요일5:3).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우리가 내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을 지키는 자는 주의 명령들이 무겁지 않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말씀을 간직하고 지키는 일이 바로 말씀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성경 암송은 나의 영적 생활의 변화의 출발점이요, 성장의 시작점이 될 것이며, 열매를 맺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이제 성경 암송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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