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울 것이 없는 하나님의 일꾼
말씀: 딤후2:15
요절: 딤후2:15
어떤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다. 어떤 사건을 듣기만
하였을 경우 24시간이 지나면 불과 8%만 기억하게 되나,
노트에 기록하면서 들으면 25%가 남으며, 자세히 생각하며
복습을 하면 58%가 기억되고, 암송한 것은 100%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저를 가르치신 국어
선생님은 늘 말씀하시기를, "읽지 않는 사람은 읽은
사람을 당할 수 없고, 읽은 사람은 외운 사람을 당할 수 없고,
외운 사람은 외워서 사용해 본 사람을 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지혜로운 말이어서 지금도 제 마음
가운데 깊이 남아 있습니다. 성경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어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성경을
읽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반복하고 노트에 적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사용해 본 말씀은 그렇게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암송이란 것은 단지 지적인 이해와 암기의 영역을
넘어서 마음속에 체화되어 있는 그런 것입니다. 머리로
암기하는 것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잊어버리게 됩니다.
기억력에 의지한 암기의 생명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을 마음속에 쌓아두라는 것은 그런 기억력에
단기 저장(short memory)이 아니라 우리 생각과 마음에 영원히
잊히지 않을 만큼 마음 판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악보를 외우지 않고
연주에 나서는 연주자는 없습니다. 노래 가사를 외우지 않고
무대에 서는 가수가 없고 대사를 외우지 않고 관객 앞에
서는 연극배우는 없습니다. 무기 사용법을 완전히 암기하고
수 백번 연습하지 않고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습니다.
군인들은 소총 분해 결합을 야간에 불빛이 없어도할 수 있을
만큼 반복적으로 연습을 합니다. 단지 머리로만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반복 훈련을 통해 암송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성경을 암송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책상 머리에 앉아서 말씀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전도를 통해서,
원수들과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찾고,
사용하면서 완전히 암송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마음
속에 암송된 말씀은 검투사의 손에 잘 길들여진 칼과 같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장의 붓은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을 그릴 수 있게끔 잘 길들여져 있고,
연주자는 자기의 악기만을 켜려고 합니다. 이는 자기의
악기만이 자기에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마찬 가지로
여러분이 성경을 마음 속에 완벽하게 암송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잘 길들여진 도구로 무엇에나
사용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가능한 많이 읽고, 그 내용을 암송하려고 합니다. 이런
관심과 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은 그 책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 책의 가치를 높이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은 암기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게 하시는 것은 이
말씀들을 통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요, 말씀이 주는
유익을 얻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네 구속자(救贖者)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는 너를 가르쳐 유익하게 하고 네가 마땅히 갈 길로 너를
인도하는 [주] 네 하나님이라.](사48:17). 주님은 우리를
가르쳐서 유익하게 사시는 분이시며, 마땅히 갈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시고, 혼의 안식을 얻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 배우지 않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녀 교육에 온 힘을 집중하는 것은
배움에 미래가 좌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배우는 배움입니다. 가정교육, 학교교육, 성경교육 이 셋
중에 성경 교육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은
가정과 교회를 성경 교육의 터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믿음과 순종을 가르치시고, 주의 말씀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성령께서도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을 교과서로 주시며 지역 교회를 학교로,
삶을 현장으로 삼아 우리를 가르치시는 교사이십니다.
주님은 지역 교회에 목자와 교사를 세우시고 자신의 양들을
먹이고, 감독하고,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칠 때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반드시 암기하도록
합니다. 읽기와 암기는 모든 학습의 기본입니다.
실전과
반복은 암기의 첩경입니다. 마음 속 깊이 저며 드는 그런 한
마디 말씀이 인생을 바꿉니다.
여러분은 지난 수 주간
또는 수개월 동안 이런 경험이 없습니까? 전에는 보지
못했던 말씀이 지금 눈에 들어온다. 전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깨닫게 된다. 전에는 들리지 않았는데 새롭게 들리기
시작한다. 이런 체험이 없습니까? 수십 번을 읽었고, 밑줄이
쳐져 있는 구절이지만 처음 보는 듯 한 그런 구절들이 계속
나오고, 처음 보는 듯 한 구절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 늘 접하는 구절이라도 새롭게 이해되고, 새롭게
들리고, 새롭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아니면 나는 본래부터
워낙 성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그 소리가 그
소리처럼 들리고, 그 말이 그 말처럼 보입니까? 성경을
읽어도 늘 그게 그것이고, 설교를 들어도 이미 내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은 분들이라면 여러분은 너무
일찍 득도(得道)한 사람이거나 영적으로 문둥병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문둥병자는 새로움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병자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귀찮습니다. 이와 같이 영이 상하고 병든 자들 역시
그렇습니다. 또 그 소리, 또 그 설교, 또 그 말...이렇게
생각되는 분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위기
상황임을 이 시간 경고해 드립니다.
주님은
날마다 새로운 분이시며, 성경 역시 그러합니다. [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날마다 성경이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들리는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성경 읽기를 쉬지 않습니다. 볼 때마다 새롭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설교를 듣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들으면 들을 때마다 새롭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구절, 익숙한 구절도 그 맛이 다르게
느껴지고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들리고, 새롭게 깨달아지는 사람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기록된 말씀 역시
바뀌거나 업데이트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성경에 대한 인식이 날로
새로워 질 수있습니까? 이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속 사람이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엡4:23)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생각이
새롭게 됨으로써 말씀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12:2) 말씀했습니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라고 했습니다.
생각이
새롭게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새롭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며,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고후5:17, 계21:5). [
좋은 것으로 네 입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5).
말씀을 암송해 둔 사람은 그 암송한 말씀이 날마다 샘처럼
솟아나는 은혜와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외워두었던 말씀이
삶에서 적용되고, 나를 이끌고, 죄를 물리치며, 생각을
지켜주는 그런 체험들을 하게 됩니다.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주님은 성경 암송을 위해
세 가지 유익한 학습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라. [
긍휼과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들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3:3). 늘 곁에 두고 사용할 때 익숙해집니다.
성경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차 안에도 비치해
두고, 화장실에도 한 권 비치해 두십시오. 둘 곳이 없으면
프린트해서 몇 구절이라도 한 주간씩 붙여 두십시오. 저는
집 사람이 변기 앞, 뒤, 세면대, 부엌 등에 붙여둔 말씀으로
인해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연초에 “믿음의 보상” 시리즈는 화장실에
붙여둔 말씀을 매일 보면서 영감을 받아 설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긍휼과 진리가 떠나게 말게 하고”란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항상 곁에 두라는 것입니다. 왕이 된 자들에게
준 명령이 이것입니다. [
평생토록 자기 곁에 두고 읽어서 [주]
자기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법규를 지켜 행할 것이니라.](신17:19). 평생을 자기 곁에
두라. 이것이 암송과 묵상을 위한 가장 첫 번째 방법입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십시오. “네 마음 판에 기록하라”는 말씀은
암송과 묵상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책을
덮음으로써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암송하려는 소원과
의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
그런즉, 오 자녀들아, 너희는
이제 내 말을 듣고 내 입의 말들에서 떠나지 말라.](잠5:7).
“내 말을 듣고, 내 입의 말들에서 떠나지 말라.” 이것이
성경 암송의 첫 번째 비결입니다. 말씀을 내게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은 말씀의 생활화를 이루는 일입니다. 말씀을
내게서 떠나게 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
또
그분의 모든 판단이 내 앞에 있으므로 그분의 법규들을 버려
내게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시18:22). 여러분
곁에 항상 있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곁에 리모컨을 두고, 신문을 두고, 많은 책들을 두지만 정작
말씀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네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
내 아들아,
이것들이 네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건전한 지혜와 분별을
지킬지어다.](잠3:21). 책을 곁에만 두고 펼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몸에서도 떠나지 말아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눈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눈은
지금 무엇을 쫓고 있습니까? 뉴스, 신문, 잡지, 소설 등
사람들이 쓴 책들에 가 있지 않습니까? [
어리석은 자의
눈은 땅 끝에 있느니라.](잠17:24b)고 말합니다. 말씀을
눈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이것은 반복적인 성경 통독을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책을 특별히 암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200 번 정도 읽었을 때 암송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 들리는
마귀들의 속삭임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 성경을 읽는다고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을 보라. 그들은 성경에
박사들이었지만 주님을 죽였다. 이런 식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읽으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은 왜 주님의
말씀과 정 반대로 말을 합니까? 그것은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아니라 마귀의 음성입니다. 마귀는 속빈 강정 같은
인간들 가운데 믿음이 있고, 경건해 보이는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교회 내에서 그런 속삭임을 계속 쏟아냅니다. “교회
내의 누구를 보라. 저렇게 성경을 많이 읽어도 개판이다.
성경을 끼고 사는 누구를 보라. 엉망이지 않느냐!”며
사람을 보게 하고 악한 판단을 하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성경 읽기를 명하시고, 암송을 명하신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불순종하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은
말씀하십시오. “마귀야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주님의 음성은 이것입니다. [
그것들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한가운데 간직하라.](잠4:21).
여러분이 성경을 읽는
가장 중요한 동기와 목적은 “
주님이
읽으라고 했기 때문에 읽는 것”입니다. 교회내의
누구처럼 되기 위해서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고, 교회
내의 누구에게 인정받으려고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변화가 없어 보이고, 열매가 없어 보이고,
남들 눈에 인정을 받지 못할지라도 나는 주님이 네 눈에서
떠나지 말라고 하신 한 마디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에 읽어야
하며, 그 말씀에 순종해서 읽는다면 그것은 믿음에 순종한
것이며, 믿음으로 행한 일이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결과와
보상이 반드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적 야망이나
인정받으려는 마음, 남에게 보이고자하는 마음,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읽는 사람은 성장도 없고, 열매도,
변화도 없을지 몰라도 믿음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성장과
변화가 없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믿음은 반드시 실체와
증거가 있습니다(히11:1). 반드시 해야 할 일과 올바른 일을
잘못된 동기와 목적으로 행함으로써 성장과 열매가 없고,
때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때는 동기와 목적을
잡아주고, 권면해 줌으로써 바르게 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아예 하는 일 자체를 부정하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 내의 이런 사악한 무리들은
반드시 회개를 하든지 척결을 해야 합니다.
셋째,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수1:8a).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을 읊조리며 읽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시와 찬미와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할 때 그 말씀은
마음속에 깊이 뿌리 내려집니다. 눈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입은 말씀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읽은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고, 선포하고, 가르칠 때 그 말씀은 더욱
살아서 활동하게 됩니다. 말씀의 교제를 통해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는 일 역시 성경 암송에 큰 유익을 줍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말씀을 체험에 근거한
형제들의 간증을 통해 들을 때 얼마나 놀랍고 신선한지
모릅니다. 이는 영적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
즐거운
말들은 벌집 같아서 혼에 달고 뼈에 건강을 주느니라.](잠16:24).
저는 무작정 성경 구절을
암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암송의 방법 역시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위의 세 가지 방법은 주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자연스럽게 암송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한 때 암기 교육의 폐해를
강조하며 이해 중심의 학습을 주창한 교육학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암기의 바탕 없이는 어떤 배움도 참된 배움이 되지
못합니다. 외국어만 암기 과목이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
역시 기본적인 원리와 공식은 암기해 두어야 합니다. 이런
암기는 머리로 하는 암기지만 성경은 마음으로 외우고(bear in
your heart), 두려움과 믿음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딤후2:15). [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여러분은 공부(工夫)란
단어의 한국말 의미를 아십니까? 아니면 study란 영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압니까? 일본어든 중국어든 간에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안다면 주님이 무엇이라고 명하신 것인지 알
것입니다. 여러분의 머리 속에 개념을 잡고 있는 ‘공부’(study)라는
단어의 용례는 주로 학교에서 학생 시절에 사용했던
말들인지라 읽고, 외우고, 시험 보는 것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공부란 단어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법대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합니까? 법을 배운다, 법을
안다, 법을 외운다, 법을 공부한다. 정답은?? 의대에서
학생들은 의학을 배웁니까? 공부합니까? 교수들은 배웁니까?
가르칩니까? 공부합니까? 공부란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여러분들은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공부’란 말은 완전히
익혀서 몸이 저절로 반응할 정도로 숙달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그대로 몸이 조금의 거부감이나
어려움 없이 반응하도록 하는 것을 ‘공부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석봉의 어머니가 눈을 감고서 떡을
써나 불을 끄고서 떡을 써나 차이가 없었는데 아들 석봉이는
불을 끄면 글자를 제대로 쓸 수 없었습니다. 마음에 있는
대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는데 이는 공부가 덜 된
상태입니다. 공부가 된 사람이란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에 있는 것이 몸으로 표현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공부하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조금도 실수하지 않고
몸으로, 행동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완전히
암기한 것을 수백 번 연습하고 수년을 단련해야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라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그렇게 숙달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머리로 암기하라는 말씀의 차원을 몇
백배 더 강도(强度)있는 명령인 것입니다. 공부가 되어 있는
사람이 부끄러울 것이 없는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우리는 필답 고사와 같은
시험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마귀가 내는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성경을 철저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욥은 마귀가 내는
시험을 마음속에 암송해 둔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욥은
제대로 공부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평소에 자신의 마음속에
쌓아둔 말씀이 없었다면 그는 인내의 본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욥은 친구 엘리바스가
[
원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도를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 속에 쌓아 두라.](욥22:22)고 권면하자, [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라고
대답했습니다. 욥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수많은
시험에서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겼습니다. 요셉 역시
마음속에 심겨진 말씀으로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다니엘
역시 마음속에 있는 말씀으로 시험을 이겼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그러합니다. 그들은 시험이 왔을 때 ‘몇 일간 기도해
보고 결정해야겠다!’거나 ‘성경을 새로 한 번 읽어
보아야겠다!’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었고
제대로 공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말씀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결단을 하는 대신
꽁무니를 빼다가 슬며시 타락(backsliding)하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獨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을 그는 어떻게 아들을 바쳤습니까? 몇 일간을
고민했습니까? 아니면 기도했습니까? 금식을 하며 힘을
달라고 구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즉각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 암기가 아니라 완전히
생각과 행동을 주저없이 움직일 만큼 자유로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바쳤으니 곧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 독생자(獨生子)를 바쳤느니라.](히11:17)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에 대해서 말씀하신 모든 약속의
말씀이 마음 속에 완전히 암송되어 있었으며 25년의 시험
속에서 단련되었고, 마음에 있는 것이 몸으로, 행동으로
옮겨질 정도의 공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요, 승리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암송하고 공부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일, 영적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공부하라고 하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유능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열정은 있으되 기본은 없는 사람, 종교심은 있으나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지와 열정’을 겸비한
부끄러운 일꾼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정통해야 하며,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모든 사항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누가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일꾼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누가 묻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모른다고 답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묻는 말에 대답해 주려면
말씀을 마음속에 완전히 암송하고 있어야 합니다. [
의로운
자의 마음은 대답을 얻으려고 연구하거니와/study/ 사악한
자의 입은 악한 것들을 쏟아내느니라.](잠15:28). 말씀을
암송해 두지 않는 사람은 대답을 하는 대신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고 맙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외워두지 않음으로써
영적 전쟁의 패배자가 되고, 답변을 주지 못하는 상담자가
되며, 부끄러운 일꾼이 되며, 교회의 문제아가 됩니다.
우리가 성경 스토리나 성경의 내용을 이야기 해 주는
정도라면 말씀을 굳이 암송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워들은
풍월(風月)을 주절거리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성경 이야기, 성경의 사상, 예수의 정신, 기독교 철학,
메시지를 전해 주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words-어휘, 단어)/말들]을
전해 주라고 하십니다. 말들을 전해 주려면 그 말들을
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비게이터 선교회의
창시자였던 도슨은 성경을 암송함으로써 위대한 구령자로
살았고, 선교회를 창시했습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또 다른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해서 성경구절을
암기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방법은 없다."(도슨
도르트맨)는 그의 가르침대로 성경 암송을 했던 형제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후대에 그를 알았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슨은 투지가 넘치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살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에는 언제나 힘이
넘쳤습니다. 도슨은 신학, 헬라어, 히브리어 등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도 없었으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교제를 통해 그의 믿음을 키워 갔고, 이것이 그가 바로
쓰임을 받게 한 이유였다." 도슨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능력있는 일꾼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비결은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과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열심히
암송했는가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루 한
구절 암송을 목표로 해서 천 날 동안 천 구절을 외었습니다.
나에게 100% 달성을 위한 강한 열망이 없었다면 결코 이 일을
해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을 처음 시작하던 날 당시 우리의
목표는 하루에 한 영혼을 만나고, 하루 한 구절씩 암송하며,
하루 한 시간씩 개인적으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열정을 가지고 이것들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1956년 6월 18일에 물에 빠진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그 소녀가 구조될 때까지
물속에서 그녀를 떠받치고 있다가 소녀가 구출되는 순간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대언자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모조리 외우도록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눈으로 성경을
읽는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 속에
외워야 했습니다. [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니이다.](렘15:16). 그는 이렇게 먹은 말씀으로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삼았고 이 말씀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서기관 바룩에게 그대로 읊어 주어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마음에 받은
말씀을 입으로 말한 것을 기록하여 책이 된 것입니다.
암송되어 있지 않으면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대언자들은 성경을
외웠다고 말하는 대신 성경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발견한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의 집에게 말하라,
하시기에](겔3:1). 말씀을 먹는 일이 암기요, 묵상입니다.
읽고 묵상하는 일은 자연스런 암송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음료로 삼는다면 여러분은 이미
많은 구절들이 외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양식으로 삼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먹으라”는
말씀은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암송하고,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계10:9).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설령 그가
정말 거듭났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서신을 결코
읽을 수 없을 것이며,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지낸다 해도
결코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없을 것이요, 안약을 사서
발라 본다 해도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향수를 뿌렸는데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비싸든 간에 그 제품은 가짜로
판정할 수밖에 없듯이, 여러분을 통해 그리스도를 읽을 수도,
향기를 맡을 수도, 빛을 볼 수도 없다면 그는 거짓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에 군대에서 주일에 종교
외출을 위해 행정반에서 예배 시간만큼 외출증을 끊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내에 있기 싫었던 군인들이 모두
교회에 가겠다고 외출증을 발급받으려 하자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을 구분할 필요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지휘관은 즉시 네가 아는 성경 구절 3개만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거의 대부분이 알아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중에는 진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3구절을
외우지 못해서 포기한 사람들이 수두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입니다. [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눅8:11b).
내 안에 씨앗이 없는데,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한다면 그는
바보입니다. 하나님은 자라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말씀의
씨앗이 없는 사람을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씨가 있을 때
물을 주는 이가 있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실 수 있습니다.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우리 안에 자라는 것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말씀이
자랍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나고 흥왕하더라.](행12:24).
여러분은 자신의 다른 무엇이 자라나기를 기대했다가는
낭패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밭입니다.
지성과 감성, 의지력은 모두 밭의 양분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암송하는 것은 땅 속에 많이 뿌려진 씨앗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미 해군 병사로 로버트슨(Roy
Robertson)의 이야기입니다. 1941년 12월 6일,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한 함선 '웨스트버지니아'에서 복무하던 미군들은
일본기 360대의 습격을 받고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로버트슨은 기관포로 달려갔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단지
연습용 탄환 밖에 없었습니다. 실탄이 보급되기까지는 약 15분이
더 걸렸습니다. 15분 동안 그는 기관포에 앉아 소리만 내며
싸우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는 그때 가짜의 무력함과
허무함을 절실히 맛보았습니다. 전쟁 후 그는 성경공부
그룹에 참석했습니다. 열 명쯤이 둘러앉아 자기가 아는 성구
한 구절씩을 돌아가며 외웠습니다. 로버트슨 병사가
유일하게 암송하던 성구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한
절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은 앞의 사람이 이미 외워
버렸습니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그는 할 수 없이 똑같은
성구를 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날 밤 교회 한 구석에
앉아 깊이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나는 가짜다"하는
것이 스스로 자신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자신은 마치
실탄 없이 공포를 쏘고 있는 인생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며칠을 반성하고
결심하고 진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진실하게 예수를
믿고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힘썼습니다. 이 사람이 군대를
전역한 후에 도슨 도르트맨과 함께 네비게이터(Navigators)
선교회를 창설했습니다. 그는 가짜에서 진짜가 되었습니다.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성도들 가운데 수많은 가짜들을 보아왔고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결코 생각이나
가치관,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고, 이 성경을 쓰다 다른 성경을 바꿔 잡는 선택 능력을
가짐으로써 남들이 볼 때나 자신이 생각할 때 놀라운 변화가
있는 것 같지만, 내적 변화는 전혀 없습니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해서 속까지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몇 번의 옷을 갈아입는다고 해도 속은 항상
그대로이듯이,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를 옮겨 다닌다고 해도
내면의 변화와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모를 꾸미고, 치장하고, 가꾸는
그런 놀라운 변장 솜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러분 속 중심을 달아 보시고,
마음을 시험하시고, 깊은 곳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가짜에서
진짜가 되십시오. 경건의 모습을 갖추지 말고, 경건의
능력을 갖추십시오. 환경이 나빠서 기인한 문제는
환경을 바꾸어 줌으로써 해결되지만 내 속에 있는 육신의
본성에서 기인한 문제는 어떤 환경에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마음속입니다. 성장을 멈춘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 보셔야 합니다.
나는 기도도 할 만큼 했고,
설교도 들을 만큼 들었고, 성경도 읽을 만큼 읽었지만
그렇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신앙의 갈림길에 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합니까?
문제의 해결자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변화의 능력자이신
주님을 찾고, 나의 마음과 생각과 영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장을 위한 첫 걸음을 내 디뎌야 합니다.
성장을 위한 첫 걸음이 바로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일입니다.
가짜에서 진짜가 되십시오.
겉껍데기의 변화가 아니라 속이 변화되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더럽고 사악한 육신의
본성과 기질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새벽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성경 통독을 하든 그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묻겠지만 간단합니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의지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포기하고 주님을 찾고 부르고 의지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헐벗고 비참한 사람이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요, 가련한 사람이다. 나는 죄인 중의 우두머리다.”란
냉철한 자기 진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건지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십시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우리는 왜 성경을 암송해야 하는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요,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없습니다. 구령의 일군이요,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고 싶다면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하고,
이해하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함으로 우리는
범죄 하지 않게 됩니다. [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다.](시편119:11).
육신의 본성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법은 말씀 암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특히 청년의
때에 육신의 정욕을 피하는 방법은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할 따름이니이다.](시119:9).
요셉과 삼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청년기에 요셉은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삼손은 말씀을 경히 여김으로써 정욕의 이끌림을 받아
원수들의 포로가 되고, 눈이 뽑혔습니다. 마음속에 말씀이
숨겨져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을 암송할 때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
내가 고난 당할 때에
이것이 내 위로가 되었사오니 이는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여러분은 진정으로 고난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때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고,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다는 그런 귀한 체험을 해
보셨습니까?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다!! 시편119편에는 이
말씀이 무려 11번이나 반복됩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이 주의
말씀이라면 말씀이 없을 때 살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주는 인내와
위로는 사람들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곧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롬15:4).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 일수록
마음속에 거하는 말씀이 위로와 힘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번창하고, 죽으면 부활하게 하는
것이 생명의 말씀의 권능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쓰러질지라도 일으키시며, 죽을지라도 살리십니다. 여러분
안에 말씀이 거하고 있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
내가
결코 주의 훈계들을 잊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그것들로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편119:93). 다윗이 주의
훈계들을 잊었다면 주님은 그것들로 다윗을 살리실 수
없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자신이 잊지 않았던 주의 훈계들로
주님께서 자신을 살렸다고 간증합니다. 여러분이 잊지 않고
암송하고 있는 그 말씀들로 주님은 여러분을 살리십니다.
성경 암송은 마음 속에
말씀을 간직하고 그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주님이 자라나게 하시며, 열매 맺게 하실 수
있는 씨앗입니다. 우리 마음 밭에서 자라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넓은 들판에 한 두 개의 싹이 나서
자라는 것보다 온 밭을 가득 덮을 만큼 자라나는 것이
보기에도 좋고, 열매도 많습니다. 주님은 더 많은 열매, 더
풍성한 수확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십시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