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 눅8:14 주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며, 형통한 자가 되는 길입니다. 다윗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대가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성경 암송에 매진했고, 자신 안에 간직해둔 말씀을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 안에 새겨둔 말씀을 통해 승리했고, 말씀을 통해 주를 두려워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마음속에 둔 말씀은 다윗을 불패의 장군으로 만들었고, 위대한 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했던 만큼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랑은 온전히 말씀 사랑으로 드러났으며, 그 말씀을 취하기 위해 헐떡였으며, 정금보다 귀히 여기고, 송이 꿀보다 달게 여겼으며, 노략물 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말씀 사랑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입증해 보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주님은 이런 다윗을 "내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뜻을 다 성취하리라, 하시고](행13:22). 성경에 이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다윗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여호수아 1:8에서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 안에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할 것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공과 형통의 여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읽고 공부하는가? 묵상하고 암송하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 암송은 저 하늘에서 성경 퀴즈 대회나 암송 대회가 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시험을 통과해야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는가? 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말씀을 간직하면 그의 영과 생각이 건전해 지고, 정결해지고,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일치하게 됩니다. 생각이 바뀌면 말과 행동은 자동으로 바뀝니다. 말과 행동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인격이 바뀝니다. 인격이 바뀌면 그의 운명도 바뀝니다. 이런 점에서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는 것이 신앙 인격의 출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자산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묵상하고, 순종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성경 읽기와 묵상을 명령하신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인 저와 여러분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일이 무엇인가는 물어 볼 필요도 없는 질문입니다. 큰 성공과 형통을 갈망하는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성경 읽기와 주야로 묵상하며, 그 안에 기록된 대로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주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가 모세가 기록한 모세 오경을 암송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매일 해야 할 직무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읽기와 묵상은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가장 크고도 우선적인 직업이었습니다. 영토 정복 전쟁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성경 읽기였고, 작전을 짜고 군대를 조련하는 일보다 더 빠뜨릴 수 없는 일이 성경 묵상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에 매진하다 보면 앉으나 서나, 밥을 먹을 때나 쉴 때나 잠을 잘 때조차 그 일에 온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전쟁에만 정신이 팔리고, 영토를 차지하는 일에만 온 정신을 쓰라고 하지 않으시고 계속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온 신경을 쓰게 하셨습니다. 일어서나 앉으나 걸을 때나 쉴 때나 여호수아가 할 일은 성경 묵상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 암송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은 언제나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암송한 말씀을 묵상하고, 읽은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할 때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암송이 됩니다. 앉아서도 말씀 묵상, 일어서도 묵상, 누워서도 묵상, 묵상입니다. 저는 때로 성경을 묵상하는 대신 교회와 교인들 생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 이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신경이 항상 말씀에 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일에 가 있거나 사람들에게 가 있습니다. 이는 걱정과 근심, 염려만 줄 뿐입니다. 일과 근심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염려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녀 교육 문제, 사업 문제, 가족이나 친구 문제, 건강 문제 등에 온 신경이 가 있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이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건강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주야로 그런 것들을 걱정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은 결코 믿음이 자라는 법이 없으며, 말씀을 받아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나아가다가 이 /세상/ 삶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완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라.](눅8:14). 주님은 여호수아가 결코 이런 문제로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말고 늘 말씀을 묵상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성경 암송을 잘 하기 위해서 성경 암송의 방해물들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치워 버려야 하는지, 성경을 암송하지 않을 때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증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암송하는 지름길이 늘 그 말씀을 묵상하는 길임을 압니다. 묵상을 하면 암송이 되고, 암송을 하면 묵상하기에 수월해지는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붙어 있으며, 상호 작용을 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묵상하면 말씀이 암송되고, 마음에 성령의 열매를 맺지만 사업과 가족들과 자녀 교육과 장래 일과 돈 문제, 건강 등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 근심과 염려가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립니다. 마음의 생각과 모든 신경을 말씀에 집중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나 업무나 가정에 소홀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의 형통함을 위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한 번에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것에 집중할 수 없지만 성도들은 말씀에 집중함으로써 모든 일에 능률과 효율이 배가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제 경험상 성경 묵상과 암송을 가장 방해하는 것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먼저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갈듯이, 우리는 말씀 묵상과 암송을 하기 전에 처리해 두어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처리하지 못하면 말씀 묵상과 암송은 요원합니다. 첫째, 네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라. 사람마다 기구한 사정이 있고, 저마다 말 못할 사연이 한두 가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습니다. 성경을 볼 수 없는 사정, 교회를 못 다니는 사정, 교회를 옮겨야 하는 사정, 말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내게 왜냐고 묻지를 마라”는 그런 사정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겉으로 행복해 보이고, 유복해 보이는 사람도 파고 들어가 보면 모두 깊은 사연을 품고 삽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에 따라 위선자가 되기도 하고, 인격이 원숙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기구한 사연을 지닌 사람 중에 단연 으뜸이라면 욥일 것입니다. 욥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 존경을 받으며, 부자로, 권세자로 명성을 날리며 살다가 처음으로 극심한 고난과 재앙을 당했습니다. 누가 봐도 저주를 받은 듯이 보였고, 멸문지화(滅門之禍)란 말이 욥에게 해당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욥은 그런 가운데서 그 고난의 원인을 분석하고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대신 단련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 많던 재산은 모두 날아가고, 다복했던 자식들은 모두 죽고, 자신의 몸은 병들고, 아내는 자신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재기를 꿈꾸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합니까? 찾아온 친구들에게 원조를 요청합니까? 아니면 금식 기도를 합니까? 이런 때에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욥이 한 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 구하겠고 내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리라.](욥5:8). 기도하고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현재의 처지를 비관하고, 근심하고, 걱정해 봐야 좋아질 것 없습니다. 있던 믿음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 사정을 아뢰고 맡기면 어려움과 시련은 성장의 기회가 되며, 화가 변화여 복이 됩니다. 사람과의 문제이든, 일의 문제이든, 자기 문제이든 간에 그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이 맡아 주십니다. 자신의 사정을 자신이 풀려고 할 때 그는 결코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 맡길 때 여러분에게 닥친 모든 사정은 다 변하여 선이 되고, 유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정금같이 단련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맡길 뿐 아니라 영을 주의 손에 맡깁니다. [주의 손에 내 영을 맡기나이다. 오 진리의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를 구속(救贖)하셨나이다.](시31:5). 이는 십자가에서 주님이 그러하셨고, 돌에 맞은 스데반이 그러했습니다. 주님께 맡긴 영이라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생명을 주님께 맡긴 사람은 말씀에 집중할 수 있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맡겨야 할 것은 우리의 길입니다.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시37:5). 여러분은 한두 번 자신의 진로 문제로 고민해 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어릴 때는 꿈을, 젊을 때는 이상을, 늙어서는 먹고 살 길을 찾아 헤매어 보았을 것입니다. 나아갈 길을 진로(進路)라고 합니다. 진로 선택은 누구에게나 고민입니다. 진로를 바꾸는 일은 더욱 용기와 힘을 필요로 합니다. 나의 갈 길을 헤매다 보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학교 선택, 직장 선택, 배우자 선택, 교회 선택, 자녀들의 학교 선택...우리는 계속해서 선택의 연속이며, 그 때 마다 길을 잡아야 합니다. 때로 유능하고 현명한 길잡이가 있어서 내가 걸어야 할 길을 잘 인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길, 가야 할 길, 그 길을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십시오. 주님이 그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매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로 고민하는 사람은 고민만 하다가 아무 것도 못합니다. 여러분의 길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자신의 길을 자신이 찾는 사람은 길도 찾지 못할 뿐더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길을 주님께 맡겨 버릴 때 여러분은 모두 말씀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넷째, 네 짐을 주께 맡기라. 우리가 맡은 짐은 성경 묵상과 암송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진 무거운 짐들은 반드시 벗어 버려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믿음의 경주를 달릴 수는 없습니다. 짐을 진 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는 더욱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히12:1).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나의 어깨에 우리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고, 나의 어깨에 몇 명의 운명이 얹혀 있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무거운 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무거운 짐, 벗어 버려야 할 짐이란 죄와 불법입니다. [이는 내 불법들이 내 머리를 덮었음이오니 그것들이 무거운 짐 같으므로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나이다.](시38:4). 이 짐을 십자가의 주님 앞에 던져 버려야 합니다. 죄의 짐을 벗으면 영혼은 참된 쉼과 자유를 얻습니다. 이 짐을 진 채 성경을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은 힘든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 그분께서 항상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의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형제들은 가장으로서의 짐이 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짐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며 함께 나누어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인생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짐을 진 채 주님을 따르려 하지 말고 주님께 던져서 맡기십시오. 짐을 진 채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짐을 주님께 던져서 맡기면 주님은 우리의 짐을 져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게 하십니다. 다섯째, 여러분의 일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해야 할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정말 바쁜 세상입니다. 아침부터 일터로 나가서 밤늦게야 들어오게 되는 피곤한 그런 세상이요, 일에 치이는 세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 때문에 교회를 못 나온다고 말합니다. 일이 바빠서 주님을 섬기지도 못하고, 성경을 읽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늙어서 은퇴를 해야 한 숨 돌리지 그 전에는 어림없다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해야 할 일만 하느라 바쁜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같이 함으로써 더욱 지치고 힘듭니다. 옳은 일도 하지만 옳지 않는 일도 하며, 자기 일도 하지만 남의 일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마다 일이란 말을 붙입니다. 먹는 일, 노는 일, 자는 일, 놀러 가는 일....그런 것에도 일이라고 합니다. 자기 일 때문에 주님의 일을 못하고, 세상 일 때문에 영적인 일을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사람은 주님이 맡겨 주시는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말씀을 맡기십니다. 화해의 직분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짐을 그대로 지고 있는 사람에게 주님이 일을 맡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일들을 주님께 맡기시면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을 주님께 맡기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여섯째, 원수 갚는 것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갚는 일이 내게 속하였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롬12:19). 이 일을 주님께 맡기지 않고 분냄과 성냄, 쓴 뿌리가 마음에 있으면 그는 결코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분노로 인생이 얼룩진 아내가 있고,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로 인해 쓴 뿌리가 있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불만, 사장이나 상관에 대한 섭섭함, 동료 직원이나 부하 직원에 대한 배신감, 우정을 저버린 친구에 대한 원망, 함께 믿음 생활을 하는 형제들에 대한 원망이나 쓴 뿌리 등은 말씀 묵상과 암송을 완전히 망쳐 놓은 작은 포도원의 여우와 같습니다. 이들은 결코 말씀 묵상과 암송에 전념하지 못합니다. 누구에 대한 원한이나 미움 등이 있다면 주님께 맡기십시오. 애인이 떠났다고 탈영하는 군인들이나 자살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떠난 애인 잡으려다 인생 망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비슷한 예로 떠난 교인 잡으려다 목회 망치고, 교회 망치는 사역자들은 바보들입니다. 변심한 애인이나 변심한 성도(교인)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떠난 동료들을 잡으려고 한번도 애를 써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지만 그는 그들을 잡는데 시간을 조금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자신을 떠나는 제자들을 붙잡는데 단 1분도 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아 있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도 떠나려느냐?” 이것이 전부입니다. 떠난 교인 1-2명 잡을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성경 한 줄 더 보고, 전도지 한 장 더 돌리는 것이 백배 낫습니다. 전화하고, 심방하고, 사정하고, 애걸복걸하고 그게 뭐하는 짓입니까? 그러다가 떠난 사람을 원망하고 욕이나 퍼붓는 목사들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떠난 사람 원망하다가는 기도, 설교, 성경 공부 다 망칩니다. 주의 진노하심에 맡기는 것이 가장 큰 보복이요, 가장 큰 사랑입니다. 교회를 비방하고 다니고, 목사를 욕하고 다닌다고 해서 전화를 걸어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그런 일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일로 신경을 쓰느라 말씀 묵상을 못한다면 그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벧전2:23). 주님께 맡기면 그만입니다. 주님이 그의 혀를 끊어 주시든지, 회개의 영을 주시든지, 그의 그런 입을 통해 나를 겸손하게 하시며, 돌아보게 하십니다. 이는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마음속에 누구로 인해 불평, 원망, 분노, 원한, 원수 갚음 따위로 인생을 조금도 허비하지 마십시오. 이런 모든 일들은 다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일곱째,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벧전5:7).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재물에 대한 염려, 입고 먹을 것에 대한 염려, 내일에 대한 염려 등 어떤 염려가 있다면 회개하고 즉시 주님께 염려를 맡기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염려가 있습니까? 목사들은 교회 성장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 수가 적으면 이러다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합니다. 주님의 교회, 주님이 돌보신다고 말하고 믿지만 어딘가 마음속에는 은근히 염려를 합니다. 성도들이 모두 떠나 버릴까봐 염려합니다. 그나마 좀 믿음이 있어 보이던 성도가 떠나면 더 속병을 앓습니다. 이것은 한 때 저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염려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지니 이는 내일이 자기 일들을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악은 그 날에 족하기 때문이니라.](마6:31,34).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통계에 따르면 사람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은 4%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요,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이며,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이고,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진짜 사건에 대한 걱정은 4% 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걱정 가운데 96%는 아무 쓸모없는 염려요, 근심이요, 걱정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96%가 아니라 100%입니다. 성경에는 PROBLEM(문제)란 단어가 없습니다. 주님은 염려하지 말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먹고, 입을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내일 일을 맡기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사정을 맡기고, 길을 맡기고, 일을 맡기고, 염려를 맡기고, 짐을 맡기고, 원수 갚는 것을 맡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영까지도 주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사역, 말씀을 맡기십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굳게 붙잡고 지켜야 할 것은 우리의 일과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기록에는 문제란 단어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에는 문제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주님께 아뢰고 맡기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삶의 영역이요, 생활입니다. 염려하는 것들로 인해 정작 해야 할 말씀 묵상과 암송을 못한다면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맡아 주시고 대신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며 사람들의 범법을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해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느니라.](고후5:19).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셨습니까?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은 말씀으로 살고, 말씀으로 사역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이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주님께 맡기지 못함으로써 주님이 맡겨 주신 것을 맡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말씀을 맡기시고, 사역을 맡기십니다. [이 교리는 내게 맡기신 복음 곧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에 따른 것이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음이니](딤전1:11-12). 자신의 짐을 주님께 맡긴 사람은 주님이 맡긴 짐을 지게 되며, 자신의 길을 주님께 맡긴 사람은 주님이 주신 길을 걷게 되고, 자신의 염려를 주님께 맡긴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첫째, 영적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이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이 마음속에 거해야 합니다. 말씀은 성장을 위한 젖이요, 양식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벧전2:2). 영적 성장이 더디다, 성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예외 없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들어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마음속에 거하는 진리를 말함으로써 우리는 자라나게 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라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엡4:15). 둘째, 깨끗함을 볼 수 없습니다. 성도의 영적 순결은 오직 마음속에 거하는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이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요15:3). 말씀의 물로 씻음 받지 않았음에도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죄가 존재하지 않는 하늘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추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더럽다. 썩었다. 성도들이 모두 타락했다, 추잡하다 이런 욕을 하기 전에 내 자신이 말씀의 물로 씻음을 받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물도 없는데 깨끗하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주님은 말씀의 물로 우리를 씻기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엡5:26). 전에 유태인 포로수용소에 있는 포로들에게 씻을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흙먼지에 덮여 있는 사람들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라 인간의 몰골이었고, 포로수용소 군인들은 포로들을 짐승처럼 대했습니다. 그 때 유태인 목사 한 명이 아침에 나오는 한 잔의 커피를 마시지 않고 그 커피로 얼굴을 닦고,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포로들이 따라했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죽자! 포로수용소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커피를 물로 사용해서 깨끗이 얼굴을 씻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깨끗해집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성경 암송은 내 마음 속에 샘을 갖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셋째, 진리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오늘날 교회를 보면 진리는 없고 행사만 많습니다. 사람들도 많고, 돈도 많고,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는 어디에 갔습니까? 사람들은 성경 공부를 외면합니다. 삶이 중요하다. 실천이 중요하다면서 정작 삶과 실천의 바탕이 되는 진리를 팽개치고 있습니다. 이는 나무의 뿌리를 잘라내고 가지만 가지고 가서 심으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이 없이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삶, 영적인 삶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넷째, 강력한 무기를 잃어버립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우리는 강력한 성령의 검을 갖게 되지만 말씀이 없으면 무기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6:17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나머지 모든 것을 다 입고 있다 할지라도 마귀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뒤로 쫙 뻗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저희들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옷은 검을 잡아야만 전신 갑옷이 됩니다. 그 검을 잡고서야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로부터 도망가리라"(he will flee from you- 약4:7)하며 대적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주님께서 "기록되었으되"(눅4)라고 성령의 검을 사용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마음 속에 말씀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이단들이 다가와도 이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수치를 당합니다. 말씀을 마음 속에 담아 두시고, 외워 두시면 칼을 갈아 놓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입을 예리한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자신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아 윤나는 화살로 만드사 자신의 화살통에 숨기시고](사49:2). 다섯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성경의 기록된 말들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다면, 그들의 내면에는 사랑도 기쁨도 오래 참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빨아 먹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런 열매들을 맺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여섯째, 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한 후에도 왜 기도의 응답이 없는지 궁금해 합니다. 이는 마음 안에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요15:7).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계속해서 하고 또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걱정을 하며 위로가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성령의 위로가 없습니다. [이런 말들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고 하십니다. 성령은 위로자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시는 주님은 말씀으로 치유하십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으면 위로를 받을 수도, 위로를 줄 수도 없습니다. 여덟째,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대해 준비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만큼 말씀에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하는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요12:48). 하나님의 참된 말씀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상급들을 놓쳐 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주의하십시오. 말씀은 끊임없이 읽고, 그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때 말씀을 암송하게 되고, 암송된 말씀은 내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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