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갈5:6
요절: 갈5:6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에서 납니다. 성경은 ‘믿음은 볼 때 난다고 하지 않고, 들을 때 난다’고 말합니다. 양들은 시력이 아니라 청력으로 사는 동물들입니다. 양들의 믿음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들을 때 납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주시고, 동시에 그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칠 목자를 세우셔서 외치게 하십니다. 양들 각자에게 성경을 한권씩 주어서 읽고 스스로 공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고 외치게 하여 듣게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귀를 기울이고 내 말을 들으라.](사28:23). 주님의 목소리를 어떻게 듣습니까? 환상이나 환청으로 듣습니까? 천사가 말해줍니까?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은 주님이 말씀하도록 세우신 설교자의 음성을 통해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려 하다가는 죽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듣다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죽어야 할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는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임이니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더 들으면 죽을 것이니이다. 육신을 가진 자가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처럼 살아 남은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 [주] 우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주]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말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주]께서 너희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들이 말한 것이 다 옳도다.] (신5:25~28). 장로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기를 중단하고 중보자 모세를 통해 듣기로 결정한 것은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었으며, 주님께서 “그들이 말한 것이 다 옳도다.”라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때부터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통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가 죽은 후에는 여호수아에게 듣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주] 너희 하나님의 말씀들을 들으라, 하고](수3:9). 주님의 말씀은 주님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받은 자들에게 듣습니다. 이것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일관된 진리입니다. 성경은 읽기 만큼이나 듣기가 중요합니다. ‘주의 말씀을 보라, 읽으라’는 기록보다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이 훨씬 많이 나옵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성경 읽기와 묵상, 암송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듣는 것에 실패한 사람은 보고 읽는 것에도 실패합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흘려듣는 사람이 기록된 말씀을 주의 깊게 보고 깨닫는 법은 없습니다. 주님은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사람에게 눈을 열어 보여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옵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보고 듣는 것이 순서가 아닙니다. 항상 듣는 것이 보는 것보다 앞섭니다. 어떤 사람이 혼자서 평생토록 성경을 읽기만 할 뿐 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이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자신을 예외적이고, 특별한 경우에 대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어떤 예외적이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이 그렇게 다루어 주시도록 구하는 자들은 대개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지키는 것이 성경 암송의 정상적인 순서입니다. 선천성 귀머거리는 모두 벙어리가 되듯이, 영적으로 볼 때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며, 귀가 먹은 사람은 짖지 못하는 개처럼 되고 맙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는 사람일수록 말씀을 선포해 줄 목자와 교사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고 찾는 법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보면 볼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공부하면 할수록, 외우면 외울수록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 줄 목자가 그립고, 그런 음성이 간절히 그리워집니다. 말씀을 들으러 오기 싫어하는 사람은 보기도 싫어합니다. 듣는데 게으른 사람은 읽는데도 게으르며, 묵상은 더욱 요원한 일이요, 암송은 기대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닌 척하고, 아니라고 우겨봐야 그것은 일생의 한 순간 아닌 적이 있을 뿐 장기적으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아니다.’고 우겨 봐야 위선과 거짓말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분들일지라도 잠시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한 번 살펴보시고, 관찰해 보십시오. 나는 언제 성경을 가장 많이 읽었는가? 설교를 잘 들을 때입니다. 설교 테잎을 틀어서라도 많이 들을 때 그는 성경을 많이 볼 수 있음을 자신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체험을 통해서 충분히 잘 알 것입니다. “듣기 싫습니다. 저는 집에서 조용히 성경이나 읽으렵니다.”란 사람들이 있다면 말해 주십시오. 성경이 당신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은 읽어 보지 못했습니까?

듣고,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이 나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계속해서 울어댑니다. 소리로 서로의 존재를 계속해서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꼭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함께 모여서 은혜 받은 말씀, 체험으로 깨달은 말씀, 기도 응답을 받은 말씀을 나누며 서로 권면하고 가르칠 때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은 믿음이 생깁니다. 형제의 체험이나 간증, 받은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깁니다.

말씀을 들으러 가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마귀는 일을 주고, 사업을 주고, 염려를 주고, 놀 거리를 주고, 유희를 주고, 병을 주고, 하여튼 무엇인가를 주어서 말씀을 들으러 가는 기회를 빼앗고, 막아 버립니다. 몸에 질병을 주거나 돌보아 주어야 할 사람이 생기는 것은 차라리 약과입니다. 교회를 가야 할 시간이 되면 갑자기 전화가 오고, 친구가 찾아오고, 친척들이 오고, 사고가 터지고 기타 등등의 일들은 그냥 우연히 생기는 현상이 아니라 마귀의 활발한 역사란 사실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한두 번만 이런 일을 해 주면 다음에는 성도가 자동적으로 알아서 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데 게으른 사람은 말씀을 보고 읽는데도 게으른 사람임은 달리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모임에 오지 않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시간에 더 열심히 기도를 할 수도 있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역시 오래 가지 않습니다. 듣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 거짓말입니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나는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고 주장하는 자는 ‘성경이 틀리고 자신이 맞다’고 우기는 위선자들입니다. 그럴 때는 과감히 말씀을 들으러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정리하십시오.

주님은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안타깝게 말씀하셨습니다. [오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오 이스라엘이여,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면 /얼마나 좋을까/.](시81:8).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교회를 주시고, 거기에 설교자를 세우시는 것은 여러분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제대로 들어야 읽을 때 깨달음이 있습니다. 깨닫게 되면 그대로 행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으며, 이것을 방해받으면 자유의 쟁취를 위해 투쟁하게 됩니다. 비록 개똥철학의 수준이라 해도 사람은 자신이 깨닫고, 믿는 바를 즐거이 말하고, 전파하고, 실천하려 합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깨닫고, 믿게 되면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영적 본능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제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함이 없는 성도란 마음속에 깨달은 말씀, 믿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암송하기에 가장 좋은 말씀은 가장 잘 들은 말씀입니다. 잘 들은 말씀, 잘 깨달은 말씀은 평생토록 잊혀 지지 않고 오랫동안 갑니다. 잘 들으면 잘 읽혀지고, 잘 들으면 잘 외워지며, 잘 들으면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되며, 묵상이 됩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적으로 듣거나, 씹으면서 듣거나, 저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판단하거나, 욕하면서 듣거나, 설교는 설교일 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들을 때 그렇게 듣는 사람들의 생각, 가치관, 삶은 좋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악화일로(惡化一路)를 치닫게 됩니다. 처음에 교회에 왔을 때 참 괜찮아 보이고, 좋아보였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믿음이 성장하여 장성한 어른이 되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급격이 악화되어 악한 눈을 뜨고 입에서는 삐딱한 말을 쏟아내는 것을 자주 보는데 이는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는 수준과 그 이해력이 어린 아이만도 못한 어른들이 수두룩합니다. 제가 어렵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일 때가 훨씬 많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전하면서 “이 말은 어렵도다”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이 “어렵도다”를 연발했습니다. 주님이 어렵다고 하지 않으신 말씀을 그들이 어렵다고 한 것은 들을 수 있는 귀, 깨닫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오늘 말씀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거부하는 가장 확실한 변명이요,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자기 양심을 안심시키고, 진정시키는 확실한 진통제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설교, 나와 상관없는 본문’인데 왜 믿고 순종하겠습니까? 교회 성장 연구소란 단체에서 서울의 대형 교회 성도들이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 ‘오늘 설교가 당신과 상관이 있었습니까?’란 설문 조사를 했는데 85% 이상의 응답자들이 나와 상관없는 설교였다고 응답했습니다. 이 설문 결과를 두고 ‘목회자들의 설교가 변해야 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설교여야 한다’고 외치며 설교 갱신 프로그램, 설교 클리닉, 설교 학교까지 만들어졌지만 이는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85%의 교인들이 들을 귀가 전혀 없는 가짜란 결론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어느 부분을 설교해도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성경에 입각한 말씀 선포라면 듣는 이가 누구이든 간에 100% 그 사람의 현재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모든 성경 기록”이란 말 그대로 모든 성경 기록입니다.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면 사람이 틀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a). “무엇이든지”란 말은 문자 그대로 무엇이든지입니다.

나는 파산을 당했는데 목사는 지옥에 대해 설교를 하고, 나는 병들었는데 목사는 성막에 대해 설교하고, 나는 아이 교육 문제로 고민하는데 목사는 레위기의 제사법에 대해 설교한다고 해서 ‘현재의 나와 상관없는 말씀/설교’란 생각을 하는 성도는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요, 마귀에게 사로잡힌 악한 생각입니다. 파산 당한 사람에게는 파산에 관한 설교를 하고, 병든 사람에게는 병자의 회복을 위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은 인본주의적 사고의 극치입니다. 대부분의 현대 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왔다가 들을 것이 없었다, 유익이 없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주 설교 제목을 성도들에게 미리 물어보고, 설문 조사를 해서 우선순위대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미친 짓입니다. 그런데 이런 85%의 부류가 지금 이 교회에는 없습니까? 창세기 1:1은 언제나 나의 현재적 삶과 상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22:21절 역시 언제나 현재 나의 현재적 삶과 직접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every word)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집에 파이프가 동파되어 물이 나오지를 않아 고생한 형제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을 해야 하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치려면 몇 일이 걸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주에 들은 말씀이 ‘하늘을 두루마리처럼 마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 말씀을 가지고, ‘하늘들을 두루마리처럼 마시고, 옷처럼 말아 버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시라면 얼어버린 파이프 를 녹이는 일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물이 나오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수돗물을 틀자 분명히 얼어 있었던 수도관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장면에서 섬뜩했다고 했습니다.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말씀이 바로 가장 필요한 때에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이 아니라 그것은 자신의 현재적 삶과 가장 연관이 있었던 말씀입니다. 저는 그의 간증을 듣고 "하늘을 두루마리처럼 마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큰 은혜와 영감을 얻고, 믿음을 배웠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여러분은 기록된 말씀 뿐 아니라 그 기록된 말씀이 선포될 때 그 선포된 말씀을 권위와 신뢰를 가지고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암송하게 되면 설교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없는 사람은 들어도 귀먹은 사람마냥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이게 누구의 음성인지 구분을 못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설교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요, 위선자들입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록된 말씀이나 선포되는 말씀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도 말씀을 전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게 전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꿈이나 환상으로 어제, 아니면 오늘 천사가 나타나 말씀을 전한다면 그 전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일 것 같습니까? 그 예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가 천사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하니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올라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었나니 지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부르라. 그가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와 함께 묵고 있으니 그의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가 말하여 주리라, 하더라.] (행10:4~6). 말씀을 전해줄 사람 누구를 찾아서 그에게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 ‘수요일과 일요일에 말씀 침례교회를 찾아가 그에게서 말씀을 들으라.’입니다. 여러분에게 천사가 나타났다면 주님은 저에게도 누구에게 이렇게 말해 주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이요, 여러분이 주의 음성, 주의 말씀을 듣는 방법입니다.

믿음은 기록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그것을 듣는 사람들 안에 생기고, 자랍니다. 교회사의 부흥은 기록된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의 ‘선포된 말씀’으로 되었음을 주목하십시오. D.L 무디,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 잔 웨슬리, 찰스 스펄전 등등의 입에서 선포된 말씀을 통해 영적 각성이 일어났지 그들이 들고 있던 성경으로 부흥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청중들은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기록된 말씀처럼 믿고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경을 읽음으로 들었던 말씀을 이해하고 확신하게 되고, 사랑하고, 묵상하며, 암송한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부흥의 역사입니다. 베뢰아 사람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바울과 실라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 말은 잘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말씀을 기록된 성경을 찾아 확인했습니다. [베레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므로] (행17:11). 우리 주님 역시 말씀을 전하신 후에는 성경을 찾아보라(요10:35)고 하셨습니다. 입술의 말과 기록된 말씀을 일치시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치하면 동등한 권위와 신뢰를 가지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록된 말씀을 누군가의 입을 통해 선포하시고, 그 선포된 말씀을 헛되이 받지 않고, 믿음으로 받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여러분 역시 말씀을 헛되이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곳에 두신 것은 여기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으로 인해 믿음이 자라나고, 믿음에 순종해 살라는 것입니다. 괜히 나서서 우쭐대거나 목사에게 한 수 가르쳐 주려고 하지 말고 겸손이 배우십시오. 여러분은 저의 목자가 아니라 저의 양입니다. 이곳을 떠난 형제들 대부분은 저를 가르치려고 드는 비공식, 비공인 자칭 목자들이었습니다. 잘 난 것도 없으면서 뭘 그리 가르치려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좀 더 많다, 미국에 좀 더 일찍 왔다. 좋습니다. 그래도 말씀은 잘 듣고 겸손히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하고 떨지 않는 사람들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우습게 압니다. 고넬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그런즉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여기 하나님 앞에 다 있나이다, 하니라.] (행10:33). 이것이 설교를 듣는 자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입니다. 혹시 제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한다고 오해하거나 곡해하지 마십시오. 저도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설교가 완전무결(完全無缺)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세는 늘 이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마귀는 교회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거짓 성경으로 바꾸어 줌으로써 신자들 중 어느 누구도 성경이 완전하고, 정확(正確) 무오하고, 순수하고, 오류없이 보존되었으며,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믿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번역상의 약간의 오류는 있겠지, 세월이 흐르면서 피할 수 없는 에러는 있겠지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믿는 것이 자연스런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뿐만 아니라 일점일획까지 모두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 신자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또 한 가지 마귀의 위대한 업적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신 윤리적인 이야기나 기독교 철학이나 사상을 논함으로써 설교를 듣는 누구도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 버렸습니다. 지금 성도들 가운데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는 믿음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 어디서도 믿음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작품입니다.

성경 암송의 첫 걸음은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성경 암송은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간직하고, 쌓아 두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 암송은 얼마나 많은 구절을 외웠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어서 새끼를 부화하듯이, 내 마음에 말씀을 품고 있으면 그것이 자라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말씀 암송은 말씀이 마음에 확실히 뿌리 내리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말씀 중심이 되고,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몸으로 표현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불평하는 일이 어렵습니까? 아주 쉽습니다. 마음에 짜증이 있는 사람이 짜증내고, 성질내는 일이 어렵습니까? 자동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말씀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 감사와 찬양을 하는 일이 어렵습니까? 자동입니다. 말씀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 힘듭니까? 쉽습니다. 개스 차가 기름 없이 차를 달리는 일은 힘든 것이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때로 생각 없이 말할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있지만, 성도는 그 마음속에 말씀 없이 믿음의 신비를 간직할 수 없고, 믿음의 문이 열리거나 믿음의 진보와 믿음의 희생과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 없습니다. 마음 속에 말씀 없이 믿음의 방패로 원수의 불화살을 끌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수 없고, 믿음의 경주를 경주할 수도 없으며, 믿음에 굳게 설 수도 없고, 믿음의 보상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믿음의 결과도 없고, 믿음의 증거도 없습니다. 마음 속에 말씀없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약1:3, 벧전1:7). 말씀이 없으면 믿음의 기도를 할 수도 없습니다(약5:15). 이 모든 일은 마음 속에 말씀을 간직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 믿음의 선한 고백을 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더욱 유능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영과 몸의 관계로 규정했는데 이는 참으로 위대한 진리요, 성경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구분해 주는 잣대입니다. [이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위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약2:26). 영이 없는 몸은 죽었다는 말씀이 진리라면,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도 진리요, 사실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 몸, 심장이 뛰지 않는 몸은 죽은 몸입니다. 몸에 어떤 움직임(행위)이 없기 때문입니다. 숨이나 피는 일생동안 쉬지 않고 우리 몸에서 순환을 하며 일을 합니다. 이런 행위가 없고, 중지되었다면 의사는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설령 살아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몸이 반응을 하지 못하고, 움직임이 없을 때 우리는 식물인간이라고 합니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활동력이 있습니다. 이는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고 활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quick) 권능이 있어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骨髓)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히4:12). 말씀이 '살아 있고'(quick)란 말은 살리는 운동력, 활동력, 생명력을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다면 믿음 역시 살아 있으며, 믿음이 살아 있다면 믿음의 활동은 필연적입니다. 살아 있으면서 움직임이 없고, 활동이 없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는 심장이 뛰면 피가 도는 것과 같습니다. 몸의 신체 기관 중에 암이 걸리지 않는 유일한 부분이 심장이라고 합니다. 심장은 평생토록 쉬지 않고 활동합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하나님,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서 생겨난 믿음은 평생토록 쉬지 않고 활동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의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활동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믿음이거나 죽은 믿음입니다. 생명이란 생명은 모두 활동이 있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광합성 운동을 합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 역시 살아 있는 한 믿음의 활동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때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행위가 전혀 뒤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죽은 아이는 울지 않습니다. 숨을 쉬지도 않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사산(死産)한 아이를 받아낼 때 아이는 이미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떤 반응이 없습니다. 설교에 반응이 없다는 것은 죽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장터에 앉아 서로를 부르며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고 우리가 너희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하는 아이들과 같도다.](눅7:32). 반응이 없습니다. 죽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해도 반응이 없는 사람들!! 이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만연한 전형적인 죽은 믿음의 소유자들의 모습입니다. 아침부터 조는 사람들은 대체 뭡니까? 믿음이 죽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영이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 믿음이 죽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외운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시체에 옷을 입히는 것이나 화장을 해 주면서 예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아무리 좋은 유리관에 넣어 두고, 꽃으로 가득 덮어 주어도 시체는 시체일 뿐입니다. 시체는 활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장의사에게 매일 시체를 만지는 일이 무섭지 않느냐? 고 질문하자 그 장의사가 ‘죽은 사람이 뭐가 무서운가? 산 사람들이 무섭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손발이 있어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죽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꼭 그러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하니 가증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요, 모든 선한 일에 버림받은 자들이니라.](딛1:16).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하나님의 존재를 압니다. 마귀도 하나님을 믿고 떱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든 조화(造花)를 보십시오. 생화(生花)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꽃이 피지 않고, 자라지도 않고, 열매를 맺지도 않습니다. 가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비슷해 보여서 속을 정도이지만 믿음의 활동이 없습니다. 믿음의 증거, 믿음의 결과, 믿음의 보상이 없습니다. [내 형제들아,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말하면서 행위가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약2:14). 물론 없습니다. 이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을 헛된 믿음,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믿음의 소유자는 아무런 활동도, 행위도 없으며, 성장도 열매도 없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선포한 것을 기억하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또한 그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느니라.](고전15:2). 바울은 구원의 조건을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고 합니다. 헛되이 믿었으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진리요, 생명의 말씀일지라도 헛되이 믿고, 헛되이 받을 때 그의 삶은 종교적일 수는 있어도 성령의 열매를 맺고, 진정한 변화된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믿음이 옵니다. 잘 듣지 않았는데 믿음이 약하고, 적고, 없는 것을 탓하는 것은 굶으면서 왜 힘이 없는지, 왜 배가 고픈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사람만큼 한심한 사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믿음은 절로 생깁니다. 믿음이 오면 행함이 옵니다. 믿음은 믿음의 활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에서 온 믿음은 크고 강한 힘이 있고, 활동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교인들과 교회들의 위선에 질린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정확히 짚어 내고, 진단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말씀을 잘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성도의 책임입니다. 물론 말씀을 전하지 않고 사상이나 철학이나 세상 이야기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기에 바쁜 강단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성경에 근거해서, 성경에 입각해서 전함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삶과 행위가 개판이라는 것은 그에게 믿음이 없고, 잘 듣지 않는다가 핵심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의 신자가 되고 싶으면 일단 말씀을 잘 들음으로써 거의 해결됩니다. 강단의 설교를 듣지 않고 믿음 있게 행동하는 것은 강의를 듣지 않는 학생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겠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입니다. 학생이 강의 시간에 강의를 듣지 않고, 오직 텍스트만 읽고 보면서 점수를 잘 받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처음부터 학교에 갈 필요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학생이 학원에서, 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것보다 더 엉망으로 들으면서 믿음이 생기기를 기대하고, 믿음의 보상과 믿음의 결말을 기대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혼자 읽고 공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족하다면 지역 교회나 목자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왜 세우시고, 왜 목자와 교사를 세웁니까? 그에게서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믿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할 때 교회는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고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와 성경 공부를 통해 가르치고 선포되는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이 교회에서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성경 암송에 대해 선포할 때 여러분이 이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제가 선포한 말씀은 여러분에게 무익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이 지역에 세우시고, 여러분을 이 교회에 나오게 하신 것은 “불쌍한 윤 목사에게 힘이 되어 주라. 교회 개척기에 도움을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윤 목사의 입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잘 듣고, 믿고, 순종하며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받아 전하는 모든 설교와 성경 공부는 킹제임스 성경의 바탕 위에서 몸으로 실행하라는 것이지 비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인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비평하고 비판하고 수군거리고 씹다가 도태되어 나가지만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영적 유익과 성장과 열매가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몇 몇 형제들이 몇 개월이 지나지도 않았지만 놀랍도록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모습을 보며 한없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이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일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도들은 믿음의 고백과는 달리 선한 행위, 경건한 행위, 거룩한 행위가 뒷받침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마음 안에 쌓아둔 말씀을 통해서만 횃불처럼 타오를 수 있고, 선한 행위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읽어도 믿지 않고, 믿어도 순종하지 않고, 순종해도 기쁨으로 행하지 않으며, 암송하지 않을 때 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은 될 수 있을지라도 믿음의 활동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믿음의 행위를 위한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으되 오직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뿐이기 때문이라.](갈5:6).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활동하지 않는 믿음이라면 죽은 믿음이거나 헛된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 내 믿음의 씨앗이라면 내 믿음은 말씀이 활동하는 만큼 활동할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정적(靜的)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살아 역사하는 동적인 능력과 생명력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의 축에 끼어 들 수 없습니다. ‘믿음의 활동’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눈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바 너희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하기 때문이니](살전1:3).

적은 믿음, 큰 믿음을 떠나 [살아 있는 믿음이냐? 죽은 믿음이냐?], [활동하는 믿음이냐, 가만히 정지되어 있는 믿음이냐?] 에 대한 선명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신념이나 자기 확신이나 종교적 도그마가 아니라 생명력 있게 활동하며, 열매를 맺는 믿음입니다. 말씀과 믿음과 행위는 뗄래야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심장의 박동과 피의 순환 관계만큼이나 말씀, 믿음, 행위는 동시적이며 연속적인 것입니다.

경 암송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 둠으로써 내 안에 항구적이며 견고한 믿음을 갖는 작은 출발입니다. 말씀의 활동력을 믿음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바로 성경 암송인 것입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믿음의 실행을 위한 것입니다. 몸이 없는 영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머리 속에는 천만가지 음률이 흘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노래할 수 없습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아무리 발달되어 있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대로 사장되고 맙니다. 건강한 몸은 아무리 중요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꼭 영이 없는 몸과 같습니다. 성경 암송은 영과 몸의 조화를 이루어줍니다. 성경을 암송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와 지식이 머리 속에만 머물러 있고, 몸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론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믿고 실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교리로서 성경을 읽고, 배우고, 공부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영으로 받은 말씀이 몸으로 활동하는 생활과 별개의 것이라면 그 진리는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보다 못한 것이거나 진리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란 영으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몸의 활동과 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한다는 것은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믿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내 몸의 행동 방식을 바꾸어 놓는데 있습니다. 생각하는 방향을 바꾸어 주는 가치관의 전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바뀌는 언어생활의 전환, 행동의 전환, 삶의 습관들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을 암송한다는 것은 기록된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옴으로써 그 말씀의 훈계를 즉각적으로 받아서 잘못된 생활방식을 버리고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암송하는 일이 없는 성도들은 일시적으로 감동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지속적인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속성, 항구성, 오래 참음, 인내와 같은 열매를 결코 보여 주지 못합니다. 귀에 들은 은혜로운 말, 어디서 듣지 못했던 몇 마디 말에 잠깐 열광하고, 기뻐하고, 흥분했다가 곧 식어 버립니다. 때로 많이 변화된 것 같아도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정체는 현상 유지가 아니라 부패(腐敗)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의 요새, 가치관의 요새, 행동하지 않는 머뭇거림을 책망하며, 촉구합니다. [(이는 우리의 전쟁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통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라.)](고후10:4).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잘못된 것들을 무너뜨리고 정복하지 않는 한 결코 멈춤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지가 굴복하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유와 핑계를 대서 교회를 떠나든지, 어디 구멍을 만들어 도망을 가든지, 비난을 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든지 간에 그들은 이 교회에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결코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선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진리를 선포하며 진리를 위해 살고, 단 한 명에게 말씀을 전하더라도 받은 바 그 말씀에 더하거나 뺄 수 없고, 물을 탈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제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고, 꾸짖고, 책망하고, 바로 잡으려 하고, 훈계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 교회에 온 어떤 성도와도 아무런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교리적으로만 강해하고, 사이사이에 성도들을 겨냥한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만인(萬人)이 좋아 할 것이며, 누구에게도 부담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일 때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말씀이 충돌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어떤 형태로든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회개를 하든지 반발을 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명색이 신자로서, 믿음 좋은 척 했던 사람들은 차마 말씀을 부정할 수 없고, 교리적으로 저의 잘못을 지적하고 따지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할 수 있었다면 물어뜯었을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욕하거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인격을 비방하거나, 말씀을 전하는 방식을 비난하고 비평하거나, 설교 스타일이나 어투나 어휘 선택을 꼬투리 잡아서 비방하거나, 목소리에 사랑이 느껴지지 않느니 매정하다는 등의 욕을 함으로써 말씀을 거부합니다. 여기에 덩달아 [맞다, 맞아]하는 인간들 역시 유유상종(類類相從)입니다. 마귀들이 불평분자들에게 쓰는 전형적인 수법은 ‘말씀을 거부하지 못하는 자들에겐 말씀을 전하는 자를 거부하게 하라!’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의 현재, 실제적인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진부한 진리 비슷한 것만을 말하고 설교한다면 여러분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교회의 집회에 기쁘게 참여하고 지원도 할 것입니다.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진리는 오랫동안 접하여 친숙해진 사랑스런 노래와 같고, 행복에 대한 편안한 감정을 제공하기 때문에 교인들로부터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다.’(A.W Tozer).

하나님은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역시 살아 활동하는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역시 활동적인 행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믿음의 활동을 권능으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자신의 선하심의 모든 참된 기쁨과 믿음의 활동을 권능으로 성취하사](살후1:11). 살아 있는 믿음, 활동하는 믿음은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는 말씀, 활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간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면 거할수록 주님은 더욱 강력하게 일을 하실 수 있으며,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자유로운 행로를 가지심으로 영광스럽게 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처럼 자유로운 행로를 가져 영광스럽게 되고](살후3:1). 하나님의 말씀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행악자처럼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딤후2:9). 그러나 사람이 마음으로 말씀을 믿지 않을 때 천지를 창조하는데도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권능의 말씀일지라도 아무런 힘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그 선포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결합되지 아니하였음이라.](히4:2).

오늘날 교회에는 믿음이 파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파산(破産-bankruptcy)이란 무엇입니까? 있어야 할 은행에 잔고가 없는 것입니다. 지불 의사가 분명하다 하더라도 지불해야 할 돈이 없고, 지불 능력이 없는 것을 파산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파산이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말씀이 바닥이 난 것입니다. 말씀이 없습니다. 믿음이 파산한 것입니다. 성경 암송이란 우리 안에 말씀을 둠으로써 믿음의 지불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의 파산자들이 나옵니다. ‘믿음에서 떠나...믿음에서 떠나...’라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파산 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없이도 일생을 희생과 사랑과 봉사로 생을 보낸 사람들이 있고, 믿음이 있지만 일생은 죄와 불법과 수치 속에 살며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없는 행위는 육신의 일입니다. 그런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반면 행위 없는 믿음은 사망 선고를 받은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라.] (약2:17).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의 행적을 볼 때 “믿음으로”란 말 뒤에는 그들이 무엇인가를 한 행위가 기록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믿음으로 바쳤든지, 걸었든지, 경고를 받아 방주를 예비했든지, 떠났든지, 머물렀든지, 경배했든지, 버렸든지, 거절했든지, 영접했든지 간에 그들은 “믿음으로”란 말 뒤에 무엇 무엇을 했다는 증거의 기록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무엇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라는 것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이신칭의’, ‘믿음으로 구원’ 등의 복되고 귀한 진리들은 게으르고 사악한 많은 형제들에 의해 그 의미가 악용되고 있으며, 교회의 순결과 경건의 능력을 급격히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받는 구원에 대한 진리가 선명하면 할수록 그들의 믿음은 더욱 뚜렷하게 행위로 드러나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생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요, 본적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의 생각과 믿음은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성경적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구분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이로써 진리의 영과 오류의 영을 아느니라.](요일4:6). 진리의 영, 오류의 영을 아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을 듣고 vs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매우 단순하고도 분명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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