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요4:23-24
요절: 요4:23-24 성경 암송의 큰 유익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데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기억하고, 암송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디서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의 빛이 마음에 들어오면 주님의 위대하심과 놀라우심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찬양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합당한 영적 반응을 보이면 그것이 바로 경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떠하시다는 데 대한 정확한 반응을 바른 예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특별 계시가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기록된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고, 그것을 믿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경이로움에 대해 우리 마음이 반응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대해서도 경이로워 합니다. 하늘의 별이나 달이나 자연 세계를 통해서도 매우 경이롭게 생각합니다. 그 경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거기에 절을 하고 경배를 합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곧 하늘의 모든 천체(天體)를 보고 끌려가 그것들에게 경배하며 섬길까 하나니 이것들은 [주] 네 하나님께서 온 천하 민족들을 위하여 나누어 놓으신 것이라.](신4:19).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나오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눈을 들어...보고 끌려가 그것들에 경배하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훌륭한 조각품을 보고 놀랐습니다. 보고 또 보다가 그는 절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 경이로움에 반해서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 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존경하는 나머지 절을 하고, 목숨을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교적 전통과 행실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남에게는 절을 받지 못해도 자식에게만 이라도 절을 받고, 경배를 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타락하고 더러운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에 대해 잘 교육시키고 세배를 받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어떤 신(神)이나 형상이나 천체나 천사나 같은 사람에게 경배하는 것을 엄히 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무엇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경의를 표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과 경이로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참된 경배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고,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때 주를 경배하는 일은 매우 쉽습니다. 아브라함이 주를 경배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권능과 표적을 볼 때 주님께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경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잊어버릴 때 그들은 경배는 고사하고 마음이 타락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행위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배를 드리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잊어버린 것임을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경배를 드리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던 것이나 성도들이 하나님과 말씀을 잊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동일한 우상 숭배의 죄입니다. 어떤 이는 돈 벌이 때문에, 어떤 이는 가족들의 모임 때문에, 어떤 이는 육신의 쉼과 오락을 구하느라 예배를 소홀히 합니다. 예배를 대신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우상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우상과 하나님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림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라면 예배를 대신하는 무엇에 마음이 기울 때 성령께서 죄를 지적하시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반드시 무엇인가 마음에 걸림이 오던가? 찔림이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대신 다른 곳으로 핸들을 트는 것은 성령의 음성을 묵살해 버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역하고, 대적하고, 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너무나 완악하여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대적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암송할 때 주님의 음성은 선명하고, 크게 들리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으면 하나님을 잊지 않습니다. 주님이 염려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는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네 [주] 네 하나님께서 금하신 새긴 형상이나 어떤 것의 모습을 만들까 염려함이라.](신4:23).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에 말씀을 잊어 버리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립니다. 주님과의 단절을 막는 방법은 마음 속에 말씀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점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명령과 법도와 법규를 지키지 아니함으로써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할지어다.](신8:11).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그 이름조차 잊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을 잊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잊어 버리는 자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아, 이제 너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할지어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갈기갈기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으리라.](시50:22).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며,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바를 알고, 아는 바를 믿습니다. 우리는 경배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시며,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경탄해 마지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놀랄 일입니다. 자식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도 놀라고 경이로워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 성도들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경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와 조명으로 내 마음에 들어올 때 그에 따라 반응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여러분은 예배 보조 도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묵주일 수도 있고, 어떤 형상이나 장식품일 수도 있습니다. 성화나 성물(聖物)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의 보조 도구는 교회라는 건물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단체나 모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면 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은 아주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예배의 보조 도구나 수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효과적인 경배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가운데 없을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예배의 보조 도구와 형식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이라도 암송해 두어야 마음이 편하고, 눈에 보이는 무엇을 손에 잡고 있어야 경배를 드릴 줄 압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면 어디서나 언제라도 주님을 경배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암송해 두면 예배는 풍성해 집니다. 주님과 깊은 영적 친교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암송해 둘 때 그는 주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요4:23-24).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양하고, 영으로 경배한다는 말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오순절 교회나 은사주의 교회에 다니는 분들 가운데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방언으로 통성 기도를 하면서 시작하는데 이는 바른 경배가 아닙니다. 영과 진리란 말씀에서 ‘영’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듭난 영을 말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이 아닌 성령에게서 태어난 영, 말씀의 씨앗으로 태어난 거듭난 영으로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죽은 영의 소유자가 영으로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드리는 경배는 종교 의식일 뿐입니다. 모든 형식에 맞추어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기도하고, 노래하고, 설교를 듣지만 그것은 참된 경배가 아닙니다.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신 영이란 거듭난 영을 지닌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교제와 도우심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 함을 말합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은 정직한 영, 거룩한 영, 신실한 영(잠11:13), 겸손한 영(시57:15, 잠16:19), 참는 영(전7:8), 온유의 영, 상한 영(시51:17), 주를 두려워하는 영, 건전한 생각의 영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영을 지닌 사람들을 돌보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그 예배를 받아 주십니다. 거듭난 영의 소유자라고 해서 모두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성도라 해도 거만한 영, 악한 영, 교만한 영, 부정한 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경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무슨 예물을 들고 왔던 간에 주님은 절대로 받지 않으시며, 오히려 질려 하십니다. 저는 이런 영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하려면 회개하여 변화를 받거나 흔적없이 빨리 떠나 주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판단자가 되어 판단하고 설교자나 욕하면서 어떻게 바른 경배를 드립니까? 그런 사람들은 안 보이는 것이 본인에게나 교회에게나 하나님에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 예가 이사야 1 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정기적으로 정한 때에 율법이 정한대로 예물을 들고 나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주님은 그들과 그들의 예물을 받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괴로워 하셨습니다. 지쳤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이 바로 거짓 경배요, 헛된 예배입니다. [너희 소돔의 치리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의 번제(燔祭) 헌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불렀으며 나는 수소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올 때에 누가 너희 손에 이것을 요구하였느냐? /단지/ 내 뜰을 밟을 뿐이니라.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焚香)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月朔)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 (사1:10~14). 이들은 분명히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주님이 정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주님이 정한 예물도 가져와서 바쳤습니다. 주님이 정한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예배를 통해 이들과 교제하거나 받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영으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종교 의식, 행위로만 경배했기 때문입니다. 상한 영도, 회개하는 영도, 주를 두려워하는 영도 없이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들의 위선적인 집회는 그 모임 자체가 불법이며, 주님을 괴롭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각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집회가 예배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이 집회 가운데 어떤 집회는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예배이긴 하겠지만 하나님은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라고 하십니다. 미워한다고 하십니다. 그것들이 내게는 괴롭다고 하십니다. 지쳤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어느 하나 긍정적인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 각 교회에서 하나님도 없고, 말씀도 없고, 성령도 없이 화려한 건물과 조명, 멋진 성가대로 참된 경배를 대신하는 현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립니까? 만약 많은 예물과 헌금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다윗은 즉시 자신이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못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을 천 마리 아니라 만 마리라도 다윗은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배는 형식과 물질이 아니란 것입니다. 주님이 찾으시고 받으시는 경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경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여러분은 지금 어떤 영을 지닌 채 이곳에 와 있습니까? 거듭났다고 해서 모두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상한 마음, 통회하는 영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같이 하나님 앞에 거만하게 와서 헌물을 드리고 기도할 때 주님은 그를 받지 않으십니다. [[주]는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가까이 하시며 통회(痛悔)하는 영을 가진 자들을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거듭난 영을 소유한 성도가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신 성령을 통하여, 정직하고 온유하고 겸손하며, 주를 두려워하는 영으로 경배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영을 거스르지 않고, 거역하지 않고, 반역하지 않고, 제한하지 않고, 슬프시게 하지 않고,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대적하면서 주님을 경배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영은 어떤 영입니까? 갈렙은 광야의 모든 백성과 다른 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속에 다른 영을 지녀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민14:24a). 갈렙은 주님을 따르는 영을 지녔던 반면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영을 지녔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암송하는 것은 그 말씀을 따르는 영을 소유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믿고 따르는 영이 갈렙이 지닌 영이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어떤 영을 지니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질투와 시기, 분노로 인해 살인과 파멸의 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눅9:55). 이것은 마귀의 영입니다. 이런 영에 속한 자는 주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 중에 양심과 마음이 더럽혀져 있고, 성령을 거역하는 영을 지니고 있다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리십시오. 때로는 가슴을 치며, 통회하며 눈물로 드리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예배의 감격, 예배의 회복, 예배의 경이로움을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은 주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경배’가 삶의 목적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형식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입니다. 교회의 모든 힘은 어떻게 예배를 드렸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를 받으셨고, 누구에게 복을 주셨는가? 이것이 부흥의 핵심입니다. 바른 경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은혜롭고(graceful), 경이롭고(wonderful), 능력 있고(powerful), 거룩하신 분으로 두려움 가운데 떨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경배는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양심과 지각과 영이 전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가 드리는 경배에 합당한 반응을 하시는데 그것을 응답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불로 응답하시거나 영광의 구름이 임함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응답하십니다. 은혜와 평안과 기쁨을 가득 채움으로서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에 차에서 또는 집에 도착해서 말다툼이나 하고, 짜증이나 내고, 성질이나 부리는 일이 다반사라면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희생제를 바치고 돌아간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기쁨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 능력 충만 이런 충만함이 성령의 역사요, 응답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교통 법규를 위반하고, 손님들에게는 거짓말이나 한다면 역시 헛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라면 여러분 안에 성령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 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합니다.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최소한 일요일 오후 시간, 저녁만이라도 그러해야 합니다. 통회하고 회개했다면 용서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이 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받으신 예배입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육신적인 무엇으로 주님을 경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예배의 수단이 아닙니다. 육신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즉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한 마디로 육신으로 주님을 경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이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롬7:18).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없음을 깨닫고, 영으로 경배 드려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성경 암송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말씀은 영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보이지도 않는 영을 어떻게 소유합니까? 어떻게 붙잡습니까? 어떻게 영을 간직하고,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 암송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을 소유하고, 충만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이요, 생명인 말씀, 눈에 보이고 읽혀지고 귀에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암송해 두고, 그 말씀을 기억함으로 하나님께 바른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영이요, 생명인 말씀으로 내 영을 정직하고, 거룩하고, 신실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하며, 의에 주리고 상한 채로 경배를 드릴 때 주님은 그 경배를 받으십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경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가 진정한 할례자입니다. [이는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이기 때문이라.](빌3:3). 육신으로, 율법으로, 의식으로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배가 아닙니다. 겉치레나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 역시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경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를 붙들던 율법 안에서 우리가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롬7:6).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신 두 번째 요소인 진리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고 하신 그대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누구도 바른 경배드릴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진리로 경배를 드리는 최고, 최선, 최상의 방법입니다. 진리로 경배 드리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의지대로, 자기 마음대로 경배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경배여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에는 의지 경배가 성행했습니다. [참으로 이런 것들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리며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골2:23). 금욕주의는 진리로 드리는 경배가 아니라 의지대로 드리는 경배입니다. 율법주의 역시 진리로 드리는 경배가 아닙니다. 아벨은 진리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고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반면 가인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주님은 아벨과 그 희생물은 받아 들였지만 가인과 그 희생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자기 생각대로 좋은 것은 남겨 두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희생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진리로 드리지 않는 기도, 찬양, 경배, 희생물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진리로 경배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경배는 말씀의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멋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악한 생각을 넣어 줍니다. 생각을 사로잡아 오지 못하면 여러분들의 생각은 마음대로 날아 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절대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주]가 말하노라.](사55:8). 사람의 생각은 생각일 뿐입니다. 말씀만이 경배의 기초입니다. 오늘날 몇몇 교회에서 흔히 행해지는 찬양과 경배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생각과 철학이 바탕이 된 예가 흔합니다. 성경적 진리대신 실용주의, 합리주의, 상대주의, 인본주의와 같은 철학의 바탕 위에서 예배가 드려집니다. 아간이나 게하시나 사울이나 아나니야, 삽비라 등은 모두 실용주의자요, 합리주의자요, 상대주의자요,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진리의 말씀, 선포된 말씀보다는 자기 생각에 기초해서 물건을 취하고, 숨기고, 아껴두고, 바쳤던 자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룟 유다는 단연 으뜸입니다. 그는 옥합을 깨어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여인의 경배를 심하게 질책하고 방해하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향유를 허비하는 것을 기뻐하시겠느냐?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을 더 기뻐하지 않겠느냐? 는 것이 당시 가룟 유다의 논리였습니다. 얼마나 그럴 듯 해 보입니까? 이런 생각을 우리는 합리주의, 실용주의, 인본주의, 마지막으로 상대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 성경이란 절대 기준이 없는 사람은 항상 상대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적 기준인 성경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는 판단, 생각, 가치관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연약함, 인간의 더러운 본성 등을 생각해서 동정해 주고, 이해해 줄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경배 드리기 위해서 성경을 암송해야 합니다. 진리로 경배하는 것은 주의 진리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 [주]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으므로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정하신 계획들은 신실과 진리이니이다.](사25:1).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신격과 권능을 깨닫고, 그 이름을 높일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요, 진리로 주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거룩한 전(殿)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仁慈)와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음이니이다.](시138:2). 예배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시간적 희생이 있습니다. 기회비용이란 측면에서 보면 경제적 희생도 따릅니다. 희생 없이 경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모여야 했습니다. 모임에는 자신의 생활이 그 시간만큼 포기되어야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교회가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반드시 상당한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내가 값을 치르지 아니한 것으로는 [주] 내 하나님께 번제 헌물을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들을 사고] (삼하24:24). 값을 치르지 아니한 것으로 번제 헌물을 드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를 나오는데 저마다 상당한 값을 치를 것입니다. 만약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가거나 다른 교회를 가면 치르지 않아도 될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값을 치르기 싫으면 여기에 나올 수 없습니다. 교회를 나오는 것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장사하는 집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장사치들이 아닙니다.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릴지어다. 헌물을 가지고 그분 앞에 들어갈지어다. 거룩함의 그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대상16:29). 우리는 모두 영적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푼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보다 몇 백배 더 중요한 것이 영적 희생물입니다. 감사의 희생물, 찬양의 희생물, 나누어 주는 구제의 희생물 등을 드려야 합니다. 이 시간 잠깐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희생물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잘 기억하시고, 늘 이런 희생물을 주님께 드리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2). 둘째, 기도의 희생물입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기도는 저 하늘에 하나님의 향로에 올라가는 희생물입니다. [사악한 자의 희생물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곧바른 자의 기도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니라.](잠15:8).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감사의 희생물입니다. 주님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의 희생물로 희생물을 드리며 기뻐함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밝히 보일지어다.](시107:22). 주께 감사할 때 그것이 감사의 희생물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 둘이 빨치산 대원에게 죽었을 때도 아홉 가지 감사 제목을 찾아 감사했습니다. 1948년 12월 27일 두 아들 장례식에서 주님께 드린 9가지 감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1.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3.삼남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4. 또한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든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나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9. 이같은 역경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합니다. 믿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를 드리는 것이 희생물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을 때마다 감사의 제목을 찾아 감사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누가 떠나면 며칠을 굶고,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래서 위경련이 일어나 발작을 한 두 번 합니다. 이것이 보통 정해진 수순입니다. 그러다 마음이 추슬러지면 완전히 마음을 끊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런 때 감사를 해야 합니다. 전에는 제대로 감사를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 감사 제목을 찾아 감사했습니다. 형제들이 교회를 떠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교회에서 적당히 배워도 다른 교회에 가면 집사나 교사는 너끈히 할 수 있을 정도가 됨을 인해 감사합니다. 잠깐 와서 배우고, 떠나가서 주님이 세운 다른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일조하게 해 주시고, 그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힘이 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떠난 만큼 새로운 어린 형제들을 보내 주셔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떠난 형제들이 이 교회에서 더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알아서 떠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더 있다 사고 쳤으면 저는 위경련이 아니라 위장병과 위암이 걸려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미리 저의 건강을 지켜 주심을 감사, 감사합니다. 이런 일로 인해 저의 신앙 인격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변화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빨리 부흥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옵고, 누군가로부터 욕설과 비난을 받음으로 주님 앞에 받을 상급이 있음을 감사하옵니다. 쓰라린 연단을 받게 해 주시고, 기도회를 열어 부흥과 성령 충만을 통해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제목을 찾자면 끝이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들어오는 사람이 있음을 감사하고, 나가는 사람이 있음도 감사합니다. 감사할 수 있음을 인해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그냥 넘어가지고 않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시험에 승리했음을 더욱 감사합니다. 기준이 성경 말씀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모든 일에 결코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의 희생을 드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116:17). 우리 모두 어떤 일에서도 감사의 희생물을 드립시다. 말씀을 암송해 두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떠오릅니다. 거기에 순종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넷째, 찬양의 희생입니다. [내가 주께 자원하여 희생물을 드리리이다. 오 [주]여,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시54:6).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다섯째, 기쁨의 희생입니다. [이제 /주께서/ 나를 둘러싼 내 원수들 위로 내 머리를 드시리니 그런즉 내가 그분의 장막에서 기쁨의 희생을 드리며 노래하여 참으로 [주]께 찬양을 드리리로다.](시27:6). 주님 앞에서 기뻐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도 기쁨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여섯째,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16).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런 희생물을 가지고 와서 경배를 드리면 여러분은 바른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전한 말씀들을 마음에 받으시고, 필요한 구절들을 외우십시오. 그리고 성경 암송을 통해 영과 진리로,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경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의 문제는 ‘경배해야 할 하나님은 무시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은 이용하고, 사용해야 할 물질은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요절: 요4:23-24 성경 암송의 큰 유익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데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기억하고, 암송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디서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의 빛이 마음에 들어오면 주님의 위대하심과 놀라우심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찬양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합당한 영적 반응을 보이면 그것이 바로 경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떠하시다는 데 대한 정확한 반응을 바른 예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특별 계시가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기록된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고, 그것을 믿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경이로움에 대해 우리 마음이 반응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대해서도 경이로워 합니다. 하늘의 별이나 달이나 자연 세계를 통해서도 매우 경이롭게 생각합니다. 그 경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거기에 절을 하고 경배를 합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곧 하늘의 모든 천체(天體)를 보고 끌려가 그것들에게 경배하며 섬길까 하나니 이것들은 [주] 네 하나님께서 온 천하 민족들을 위하여 나누어 놓으신 것이라.](신4:19).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나오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눈을 들어...보고 끌려가 그것들에 경배하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훌륭한 조각품을 보고 놀랐습니다. 보고 또 보다가 그는 절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 경이로움에 반해서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 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존경하는 나머지 절을 하고, 목숨을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교적 전통과 행실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남에게는 절을 받지 못해도 자식에게만 이라도 절을 받고, 경배를 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타락하고 더러운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에 대해 잘 교육시키고 세배를 받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어떤 신(神)이나 형상이나 천체나 천사나 같은 사람에게 경배하는 것을 엄히 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무엇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경의를 표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과 경이로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참된 경배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고,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때 주를 경배하는 일은 매우 쉽습니다. 아브라함이 주를 경배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권능과 표적을 볼 때 주님께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경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잊어버릴 때 그들은 경배는 고사하고 마음이 타락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행위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배를 드리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잊어버린 것임을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경배를 드리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던 것이나 성도들이 하나님과 말씀을 잊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동일한 우상 숭배의 죄입니다. 어떤 이는 돈 벌이 때문에, 어떤 이는 가족들의 모임 때문에, 어떤 이는 육신의 쉼과 오락을 구하느라 예배를 소홀히 합니다. 예배를 대신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우상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우상과 하나님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림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라면 예배를 대신하는 무엇에 마음이 기울 때 성령께서 죄를 지적하시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반드시 무엇인가 마음에 걸림이 오던가? 찔림이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대신 다른 곳으로 핸들을 트는 것은 성령의 음성을 묵살해 버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역하고, 대적하고, 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너무나 완악하여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대적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암송할 때 주님의 음성은 선명하고, 크게 들리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으면 하나님을 잊지 않습니다. 주님이 염려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는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네 [주] 네 하나님께서 금하신 새긴 형상이나 어떤 것의 모습을 만들까 염려함이라.](신4:23).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에 말씀을 잊어 버리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립니다. 주님과의 단절을 막는 방법은 마음 속에 말씀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점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명령과 법도와 법규를 지키지 아니함으로써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할지어다.](신8:11).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그 이름조차 잊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을 잊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잊어 버리는 자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아, 이제 너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할지어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갈기갈기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으리라.](시50:22).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며,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바를 알고, 아는 바를 믿습니다. 우리는 경배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시며,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경탄해 마지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놀랄 일입니다. 자식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도 놀라고 경이로워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 성도들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경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와 조명으로 내 마음에 들어올 때 그에 따라 반응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여러분은 예배 보조 도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묵주일 수도 있고, 어떤 형상이나 장식품일 수도 있습니다. 성화나 성물(聖物)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의 보조 도구는 교회라는 건물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단체나 모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면 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은 아주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예배의 보조 도구나 수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효과적인 경배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가운데 없을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예배의 보조 도구와 형식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이라도 암송해 두어야 마음이 편하고, 눈에 보이는 무엇을 손에 잡고 있어야 경배를 드릴 줄 압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면 어디서나 언제라도 주님을 경배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암송해 두면 예배는 풍성해 집니다. 주님과 깊은 영적 친교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암송해 둘 때 그는 주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요4:23-24).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양하고, 영으로 경배한다는 말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오순절 교회나 은사주의 교회에 다니는 분들 가운데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방언으로 통성 기도를 하면서 시작하는데 이는 바른 경배가 아닙니다. 영과 진리란 말씀에서 ‘영’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듭난 영을 말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이 아닌 성령에게서 태어난 영, 말씀의 씨앗으로 태어난 거듭난 영으로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죽은 영의 소유자가 영으로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드리는 경배는 종교 의식일 뿐입니다. 모든 형식에 맞추어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기도하고, 노래하고, 설교를 듣지만 그것은 참된 경배가 아닙니다.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신 영이란 거듭난 영을 지닌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교제와 도우심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 함을 말합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은 정직한 영, 거룩한 영, 신실한 영(잠11:13), 겸손한 영(시57:15, 잠16:19), 참는 영(전7:8), 온유의 영, 상한 영(시51:17), 주를 두려워하는 영, 건전한 생각의 영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영을 지닌 사람들을 돌보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그 예배를 받아 주십니다. 거듭난 영의 소유자라고 해서 모두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성도라 해도 거만한 영, 악한 영, 교만한 영, 부정한 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경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무슨 예물을 들고 왔던 간에 주님은 절대로 받지 않으시며, 오히려 질려 하십니다. 저는 이런 영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하려면 회개하여 변화를 받거나 흔적없이 빨리 떠나 주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판단자가 되어 판단하고 설교자나 욕하면서 어떻게 바른 경배를 드립니까? 그런 사람들은 안 보이는 것이 본인에게나 교회에게나 하나님에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 예가 이사야 1 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정기적으로 정한 때에 율법이 정한대로 예물을 들고 나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주님은 그들과 그들의 예물을 받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괴로워 하셨습니다. 지쳤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이 바로 거짓 경배요, 헛된 예배입니다. [너희 소돔의 치리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의 번제(燔祭) 헌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불렀으며 나는 수소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올 때에 누가 너희 손에 이것을 요구하였느냐? /단지/ 내 뜰을 밟을 뿐이니라.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焚香)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月朔)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 (사1:10~14). 이들은 분명히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주님이 정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주님이 정한 예물도 가져와서 바쳤습니다. 주님이 정한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예배를 통해 이들과 교제하거나 받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영으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종교 의식, 행위로만 경배했기 때문입니다. 상한 영도, 회개하는 영도, 주를 두려워하는 영도 없이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들의 위선적인 집회는 그 모임 자체가 불법이며, 주님을 괴롭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각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집회가 예배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이 집회 가운데 어떤 집회는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예배이긴 하겠지만 하나님은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라고 하십니다. 미워한다고 하십니다. 그것들이 내게는 괴롭다고 하십니다. 지쳤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어느 하나 긍정적인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 각 교회에서 하나님도 없고, 말씀도 없고, 성령도 없이 화려한 건물과 조명, 멋진 성가대로 참된 경배를 대신하는 현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립니까? 만약 많은 예물과 헌금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다윗은 즉시 자신이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못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을 천 마리 아니라 만 마리라도 다윗은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배는 형식과 물질이 아니란 것입니다. 주님이 찾으시고 받으시는 경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경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여러분은 지금 어떤 영을 지닌 채 이곳에 와 있습니까? 거듭났다고 해서 모두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상한 마음, 통회하는 영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같이 하나님 앞에 거만하게 와서 헌물을 드리고 기도할 때 주님은 그를 받지 않으십니다. [[주]는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가까이 하시며 통회(痛悔)하는 영을 가진 자들을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거듭난 영을 소유한 성도가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신 성령을 통하여, 정직하고 온유하고 겸손하며, 주를 두려워하는 영으로 경배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영을 거스르지 않고, 거역하지 않고, 반역하지 않고, 제한하지 않고, 슬프시게 하지 않고,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대적하면서 주님을 경배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영은 어떤 영입니까? 갈렙은 광야의 모든 백성과 다른 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속에 다른 영을 지녀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민14:24a). 갈렙은 주님을 따르는 영을 지녔던 반면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영을 지녔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암송하는 것은 그 말씀을 따르는 영을 소유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믿고 따르는 영이 갈렙이 지닌 영이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어떤 영을 지니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질투와 시기, 분노로 인해 살인과 파멸의 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눅9:55). 이것은 마귀의 영입니다. 이런 영에 속한 자는 주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 중에 양심과 마음이 더럽혀져 있고, 성령을 거역하는 영을 지니고 있다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리십시오. 때로는 가슴을 치며, 통회하며 눈물로 드리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예배의 감격, 예배의 회복, 예배의 경이로움을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은 주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경배’가 삶의 목적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형식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입니다. 교회의 모든 힘은 어떻게 예배를 드렸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를 받으셨고, 누구에게 복을 주셨는가? 이것이 부흥의 핵심입니다. 바른 경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은혜롭고(graceful), 경이롭고(wonderful), 능력 있고(powerful), 거룩하신 분으로 두려움 가운데 떨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경배는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양심과 지각과 영이 전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가 드리는 경배에 합당한 반응을 하시는데 그것을 응답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불로 응답하시거나 영광의 구름이 임함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응답하십니다. 은혜와 평안과 기쁨을 가득 채움으로서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에 차에서 또는 집에 도착해서 말다툼이나 하고, 짜증이나 내고, 성질이나 부리는 일이 다반사라면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희생제를 바치고 돌아간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기쁨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 능력 충만 이런 충만함이 성령의 역사요, 응답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교통 법규를 위반하고, 손님들에게는 거짓말이나 한다면 역시 헛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라면 여러분 안에 성령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 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합니다.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최소한 일요일 오후 시간, 저녁만이라도 그러해야 합니다. 통회하고 회개했다면 용서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이 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받으신 예배입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육신적인 무엇으로 주님을 경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예배의 수단이 아닙니다. 육신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즉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한 마디로 육신으로 주님을 경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이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롬7:18).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없음을 깨닫고, 영으로 경배 드려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성경 암송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말씀은 영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보이지도 않는 영을 어떻게 소유합니까? 어떻게 붙잡습니까? 어떻게 영을 간직하고,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 암송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을 소유하고, 충만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이요, 생명인 말씀, 눈에 보이고 읽혀지고 귀에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암송해 두고, 그 말씀을 기억함으로 하나님께 바른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영이요, 생명인 말씀으로 내 영을 정직하고, 거룩하고, 신실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하며, 의에 주리고 상한 채로 경배를 드릴 때 주님은 그 경배를 받으십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경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가 진정한 할례자입니다. [이는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이기 때문이라.](빌3:3). 육신으로, 율법으로, 의식으로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배가 아닙니다. 겉치레나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 역시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경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를 붙들던 율법 안에서 우리가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롬7:6).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고 말씀하신 두 번째 요소인 진리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고 하신 그대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누구도 바른 경배드릴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진리로 경배를 드리는 최고, 최선, 최상의 방법입니다. 진리로 경배 드리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의지대로, 자기 마음대로 경배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경배여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에는 의지 경배가 성행했습니다. [참으로 이런 것들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리며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골2:23). 금욕주의는 진리로 드리는 경배가 아니라 의지대로 드리는 경배입니다. 율법주의 역시 진리로 드리는 경배가 아닙니다. 아벨은 진리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고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반면 가인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주님은 아벨과 그 희생물은 받아 들였지만 가인과 그 희생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자기 생각대로 좋은 것은 남겨 두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희생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진리로 드리지 않는 기도, 찬양, 경배, 희생물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진리로 경배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경배는 말씀의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멋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악한 생각을 넣어 줍니다. 생각을 사로잡아 오지 못하면 여러분들의 생각은 마음대로 날아 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절대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주]가 말하노라.](사55:8). 사람의 생각은 생각일 뿐입니다. 말씀만이 경배의 기초입니다. 오늘날 몇몇 교회에서 흔히 행해지는 찬양과 경배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생각과 철학이 바탕이 된 예가 흔합니다. 성경적 진리대신 실용주의, 합리주의, 상대주의, 인본주의와 같은 철학의 바탕 위에서 예배가 드려집니다. 아간이나 게하시나 사울이나 아나니야, 삽비라 등은 모두 실용주의자요, 합리주의자요, 상대주의자요,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진리의 말씀, 선포된 말씀보다는 자기 생각에 기초해서 물건을 취하고, 숨기고, 아껴두고, 바쳤던 자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룟 유다는 단연 으뜸입니다. 그는 옥합을 깨어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여인의 경배를 심하게 질책하고 방해하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향유를 허비하는 것을 기뻐하시겠느냐?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을 더 기뻐하지 않겠느냐? 는 것이 당시 가룟 유다의 논리였습니다. 얼마나 그럴 듯 해 보입니까? 이런 생각을 우리는 합리주의, 실용주의, 인본주의, 마지막으로 상대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 성경이란 절대 기준이 없는 사람은 항상 상대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적 기준인 성경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는 판단, 생각, 가치관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연약함, 인간의 더러운 본성 등을 생각해서 동정해 주고, 이해해 줄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경배 드리기 위해서 성경을 암송해야 합니다. 진리로 경배하는 것은 주의 진리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 [주]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으므로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정하신 계획들은 신실과 진리이니이다.](사25:1).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신격과 권능을 깨닫고, 그 이름을 높일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요, 진리로 주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거룩한 전(殿)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仁慈)와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음이니이다.](시138:2). 예배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시간적 희생이 있습니다. 기회비용이란 측면에서 보면 경제적 희생도 따릅니다. 희생 없이 경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모여야 했습니다. 모임에는 자신의 생활이 그 시간만큼 포기되어야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교회가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반드시 상당한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내가 값을 치르지 아니한 것으로는 [주] 내 하나님께 번제 헌물을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들을 사고] (삼하24:24). 값을 치르지 아니한 것으로 번제 헌물을 드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를 나오는데 저마다 상당한 값을 치를 것입니다. 만약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가거나 다른 교회를 가면 치르지 않아도 될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값을 치르기 싫으면 여기에 나올 수 없습니다. 교회를 나오는 것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장사하는 집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장사치들이 아닙니다.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릴지어다. 헌물을 가지고 그분 앞에 들어갈지어다. 거룩함의 그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대상16:29). 우리는 모두 영적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푼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보다 몇 백배 더 중요한 것이 영적 희생물입니다. 감사의 희생물, 찬양의 희생물, 나누어 주는 구제의 희생물 등을 드려야 합니다. 이 시간 잠깐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희생물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잘 기억하시고, 늘 이런 희생물을 주님께 드리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2). 둘째, 기도의 희생물입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기도는 저 하늘에 하나님의 향로에 올라가는 희생물입니다. [사악한 자의 희생물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곧바른 자의 기도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니라.](잠15:8).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감사의 희생물입니다. 주님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의 희생물로 희생물을 드리며 기뻐함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밝히 보일지어다.](시107:22). 주께 감사할 때 그것이 감사의 희생물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 둘이 빨치산 대원에게 죽었을 때도 아홉 가지 감사 제목을 찾아 감사했습니다. 1948년 12월 27일 두 아들 장례식에서 주님께 드린 9가지 감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1.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3.삼남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4. 또한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든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나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9. 이같은 역경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합니다. 믿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를 드리는 것이 희생물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을 때마다 감사의 제목을 찾아 감사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누가 떠나면 며칠을 굶고,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래서 위경련이 일어나 발작을 한 두 번 합니다. 이것이 보통 정해진 수순입니다. 그러다 마음이 추슬러지면 완전히 마음을 끊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런 때 감사를 해야 합니다. 전에는 제대로 감사를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 감사 제목을 찾아 감사했습니다. 형제들이 교회를 떠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교회에서 적당히 배워도 다른 교회에 가면 집사나 교사는 너끈히 할 수 있을 정도가 됨을 인해 감사합니다. 잠깐 와서 배우고, 떠나가서 주님이 세운 다른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일조하게 해 주시고, 그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힘이 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떠난 만큼 새로운 어린 형제들을 보내 주셔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떠난 형제들이 이 교회에서 더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알아서 떠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더 있다 사고 쳤으면 저는 위경련이 아니라 위장병과 위암이 걸려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미리 저의 건강을 지켜 주심을 감사, 감사합니다. 이런 일로 인해 저의 신앙 인격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변화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빨리 부흥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옵고, 누군가로부터 욕설과 비난을 받음으로 주님 앞에 받을 상급이 있음을 감사하옵니다. 쓰라린 연단을 받게 해 주시고, 기도회를 열어 부흥과 성령 충만을 통해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제목을 찾자면 끝이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들어오는 사람이 있음을 감사하고, 나가는 사람이 있음도 감사합니다. 감사할 수 있음을 인해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그냥 넘어가지고 않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시험에 승리했음을 더욱 감사합니다. 기준이 성경 말씀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모든 일에 결코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의 희생을 드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116:17). 우리 모두 어떤 일에서도 감사의 희생물을 드립시다. 말씀을 암송해 두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떠오릅니다. 거기에 순종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넷째, 찬양의 희생입니다. [내가 주께 자원하여 희생물을 드리리이다. 오 [주]여,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시54:6).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다섯째, 기쁨의 희생입니다. [이제 /주께서/ 나를 둘러싼 내 원수들 위로 내 머리를 드시리니 그런즉 내가 그분의 장막에서 기쁨의 희생을 드리며 노래하여 참으로 [주]께 찬양을 드리리로다.](시27:6). 주님 앞에서 기뻐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도 기쁨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여섯째,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16).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런 희생물을 가지고 와서 경배를 드리면 여러분은 바른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전한 말씀들을 마음에 받으시고, 필요한 구절들을 외우십시오. 그리고 성경 암송을 통해 영과 진리로,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경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의 문제는 ‘경배해야 할 하나님은 무시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은 이용하고, 사용해야 할 물질은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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