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요엘1:3
요절: 요엘1:3
현 세대를 정보 혁명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지식의 격차가 삶의 격차를 낳는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열과 성을 다해 자녀들을 공부시키려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행복 지수는 돈에 있지 않다고 인정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자녀 교육 방법은 독특하다!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법’이란 책은 많이도 보아왔지만 ‘기독교인들의 자녀 교육법’, ‘기독교인들의 학습법’과 같은 책은 어디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자녀 교육법이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동화되어 있으며 오히려 한 걸음 앞서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일치하지 말고, 사랑하지 말고, 친구가 되지 말라고 하실 때 [자녀의 교육]은 예외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식 공부시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배우고, 그들과 똑같이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과 반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세상과 동화되지 말고 일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가운데 세상과 반대로 교육시키는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까?
미국의 몇몇 기독교 가정에서는 Home Schooling을 합니다. 몇 몇 교회에서는 교회 학교를 운영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녀를 거의 포기한 사람들, 가령 ‘자식의 장래나 출세는 포기하고 잘 자라기만 해다오.’라는 사람이 아니면 여기에 보낼 수도 없습니다. 이곳을 졸업해서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명문대를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교회 학교를 졸업하려면 세상이 말하는 명문대는 포기해야 합니다. 명문대를 포기하고 오직 성경적 교육만을 받게 할 생각으로 교회 학교에 보낸다면 정말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일치하지 않은 채 거슬러 사는 믿음을 보인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성경 암송이 자녀 교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말씀해 보겠습니다. 특히 이곳 이민 사회에서 한인들이 겪는 언어 문제, 문화 문제를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소위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법이라고 말하는 핵심은 성경암송입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과 탈무드를 어릴 때부터 암송하게 합니다. 이들이 법에 능하고 머리가 좋은 것은 모두 성경 암송에 기인합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행하면 ‘지혜와 명철’은 보장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것들을 지켜 행하라. 그 까닭은 그것이 민족들의 눈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명철(明哲)이기 때문이라. 그 민족들이 이 모든 법규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민족은 참으로 지혜와 명철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4:6). 성경 암송보다 더 훌륭한 교육의 밑거름은 없습니다. 중동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지혜와 명철을 지닌 민족’으로 평가받는 유일한 민족은 유대인들뿐입니다. 이유는 성경 암송에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암송함으로 ‘참으로 지혜와 명철이 있는 백성이로다’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지혜와 명철을 얻습니다. 성경을 암송하게 하면 자녀들 역시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민 사회에서는 언어 문제로 인해 자녀들에게 성경을 암송하게 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가 쓰는 성경과 자녀가 쓰는 성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하나님이 친히 나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따라서 언어를 나누신 것이 아니라 언어를 흩으신 대로, 언어에 따라 민족을 나누셨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지구상의 민족의 경계는 1차적으로 언어 문제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 민족들에게 그들의 상속을 나누어 주실 때에, 그분께서 아담의 아들들을 가르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사람들의 경계를 정하셨나니](신32:8). 바벨탑 사건 때에는 이스라엘이 민족이 되기도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언어를 마음대로 흩으신 것이 아니라 장차 형성될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서 사람들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언어의 분리는 민족의 분리요, 땅의 분리입니다. 언어의 통합은 모든 것의 통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옵니다. [그때에 내가 그 백성에게 순수한 말을 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한 마음으로 섬기게 하리니](습3:9).
우리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분리되어야 할 것이 통합되는 것이며,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분리되고 단절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가족 역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 분리되고 단절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곳 미국에 사는 한국의 크리스찬 성도들은 언어 문제로 인한 가족 간의 단절과 분리가 있습니다. 저는 주한 미군과 결혼한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 심적 고통을 겪는지 고백하는 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의 의미는 통하지만 말 속에 들어있는 정서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에 와서 한국인 가정의 세대 간 단절이 있음을 보고 듣습니다. 언어 문제로 인한 정서가 공유 되지 않습니다. 이는 이민 1세대가 아무리 영어를 배워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전에 이곳에서 자식들이 영어를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집에서도 한국어를 쓰지 못하게 한 한국인 부모들이 채 10년도 지나기 전에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맺힌 영어의 한(恨)을 이곳 미국에서 자기 자식을 통해 푸는 경우인데, 그런 사람은 몸뚱이만 자기 자식이지 속은 자기 자식이 아닌 자녀를 키우는 고통과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유명 대학도 보내고, 할 일은 다했지만 차라리 그냥 한국에 있을 것을 하며 후회하는 분도 만나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장성해서 분가해 버린 아들, 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접어 두고 성경을 통해 그 예를 보겠습니다. 신앙은 복음 전파를 통해 수평적 확산이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은 반드시 수직적 전파가 있어야 합니다. [generation to generation/ generation after generation] 이 성경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성경 교육, 신앙 문제를 회당이나 학교나 교회가 아니라 가정에서 부모에게 하도록 맡겼습니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들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하며 그들의 자녀들은 다른 세대에게 말할 것이니라.](욜1:3).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에게 성경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또 자기의 자녀들에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세대 간 단절이 없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하지 않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능통하지 못한 영어로 진리를 말해 줍니까? 아닙니다. 자기가 현재 쓰는 말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한국어로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민 사회에 적응하라는 의미로 한국어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영어는 이민 1세대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자녀를 일주일에 한 두 번 한글 학교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르치는 성경 말씀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전수 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말을 가르침으로 부모와 나와 그 자식의 세대 간 단절을 막아야 합니다. 마귀는 이 링크를 깨뜨립니다. 교회는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절호의 장소이며, 기회입니다. 우리 말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듣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영어권 교육을 위해 포기하는 자들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온 세상, 온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하셨지만 집에 가시면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오늘날 한국 부모들의 사고방식이었다면 그들은 ‘구약 성경을 절대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2,000년 동안 이민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나라에 잘 정착하기 위해서 모국어 히브리어를 포기했다면 그들은 땅을 주어도 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본토에 다시 모여 나라를 세워도 말이 통하지 않는 바벨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녀들에게 이민국의 말이 아닌 히브리어로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2,000년 동안 성경과 신앙과 조국을 모두 지킬 수 있었습니다.
마귀는 유대인들의 땅과 나라를 빼앗았지만 그들의 세대별로 전수되는 언어를 결코 빼앗지 못했습니다. 언어를 빼앗지 못하면 전수되는 신앙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언어는 혼과 얼이란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요셉은 유대인 중에서는 이집트에서 가장 성공하고, 출세한 이민자였습니다. 그는 우리 나이로 하면 고등학교 3학년 나이(17세)에 이집트로 팔려 왔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오늘날 이곳 미국과 같이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지닌 세계 최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히브리 말을 했습니다. 이민 2세였고, 자기 어머니가 이집트 여자였지만 요셉은 아들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습니다. 이민 3세, 4세가 계속되고 400년이나 이집트에서 살았지만 이들은 모두 여전히 히브리어를 구사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태어난 지 100일 뒤부터 이집트의 왕궁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유모로 들어온 친모 요게벳을 통해 히브리어를 배웠습니다. 그는 나이 40이 되어 이집트어를 쓴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를 썼습니다. generation to generation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론이나 미리암이 히브리어를 쓸 때 이집트어로 대답하는 이상한 짓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임은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사는 한국인 부모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자녀에게 그토록 쉽게 한국어를 포기하도록 하는 일을 그저 경이롭게(?) 쳐다 볼 뿐입니다. 속으로는 어리석은 놈들!, 한심한 사람들! 하지만 차마 말로 하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한국말을 겨우 알아듣는 아이는 영어로 대답하고, 아이가 영어로 말하면 부모는 한글과 영어가 뒤섞여 대답하는 이상한 광경을 보면서 부모가 저 아이에게 모아 놓은 재산을 주는 것 외에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세대 간 단절은 마귀의 작품입니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이 날 내가 하는 것같이 주를 찬양할 것이오며 주의 진리를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알게 하리이다.](사38:19). 여러분이 가진 신앙은 어느 누가 대신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영어로 알릴 겁니까? 아닙니다. 한국말로 알리십시오. 그러면 자녀들은 학교에서, 사회에서 사용하는 영어로 그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각인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는 영어에 비해 훨씬 뛰어난 정감(情感)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깊은 정서를 한국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영어는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정확한 개념을 이성에 심어 줍니다. 한국어는 정감(情感)과 직관(直觀)의 언어입니다. 이 점은 히브리어와 가장 유사한 언어입니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이 날 내가 하는 것같이 주를 찬양할 것이오며 주의 진리를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알게 하리이다.](사38:19). 우리 교회의 아버지들은 자기는 주를 찬양하는데, 뒷부분이 전혀 안되어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즐겁고도 유용한 자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돈과 시간과 정열을 바쳐 외국어에 매진해도 어릴 때 부모를 통해 배우는 것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뉘앙스를 배우는 일은 학원 교육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배워야 할 것들은 학원이나 학교에서 결코 배울 수 없습니다. 저희 교회 2세 교육은 영어가 아니라 전부 한국어가 되어야 합니다. 이곳에 오는 자녀들은 한글을 배우고, 한글 성경을 배우고, 한글 찬양을 배우고, 한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어로 성경을 암송해서 가르쳐 줄 정도가 아니면 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십시오.
[특히 네가 호렙에서 [주] 네 하나님 앞에 섰던 날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함께 모으라. 내가 그들로 하여금 내 말들을 듣게 하여 그들이 땅에서 사는 모든 날 동안 나 두려워하기를 배우게 하며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신4:10). 자기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부모가 배운 언어로 족합니다. 누가 가르칩니까? 부모가 가르칩니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언어로 인해 세대 간의 단절이 되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한국어로 성경을 배운 2세는 자기 자녀인 3세에게 영어로 성경을 가르쳐도 세대간 단절이 되지 않습니다. 3세와 4세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1대부터 4대까지 거치면서 언어가 완전히 뒤바뀌어도 신앙의 전수는 완벽하게 됩니다. 그러나 1세가 2세에게 자기 말로 신앙을 전수하지 않으면 2세는 3세에게 영어로도 한국어로도 전수할 신앙이 없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말씀하십니다. 남의 자녀를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녀입니다. 성도들이 안고 있는 진정한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안에 [가르칠 능력과 가르칠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대충 들은 정도에 그친 사람은 해 줄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영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안에 내용이 있으면 해 줄 말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도 내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유독 자식 걱정은 유난히 합니다. 자녀 교육을 학교와 교회에 떠넘기려 하지 말고 책임지고 자신이 가르치십시오. 야무지게 가르치면 성인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는 일이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3-4대가 함께 같은 예배를 드리는 일을 꿈꾸십시오.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걸어갈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들을 말할 것이며](신6:7). 자녀들에게 언제 말씀을 가르칩니까? 방학동안 열리는 ‘여름 성경학교’를 통해 가르칩니까? 수련회나 캠프를 통해 가르칩니까? 어디서 언제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까? 한국인 크리스찬 부모님들은 교회에 오래 다녀도 성경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자녀들에게 구원 교리 하나도 가르치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인지라 가정 예배는 엄두도 못 내고, 무작정 아이 등을 교회로 밀어뜨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여러분은 집에 앉았을 때 함께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길을 걸어갈 때에든지- 함께 동행하는 동안에 여러분은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함께 차를 타고 먼 길을 오고 갈 때 자녀들에게 해야 할 일이 바로 성경 가르치는 것입니다. 함께 침대에 누웠을 때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일어났을 때 역시 해야 할 일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장소는 ‘어디서든지’이며, 시간은 ‘아무 때든지’ 입니다. 저 역시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자식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또 그것들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서 걸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에 관하여 말하고](신11:19).
주님은 세대 간 말씀 전수를 세계 선교보다 더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왜 꼭 영어로, 남의 교회나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자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영어를 못하는 부모는 영어 때문에 이곳 미국에서는 이 말씀에 순종하지도 못하는 것입니까? 저는 한국어만 알고 부모의 좋은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이 영어만 알고 아무렇게나 자란 아이들보다 100배는 더 훌륭하다고 믿습니다. 영어를 가르치지 말고 성경을 가르칩시오. 여러분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언어로 가르치십시오. 늦기 전에 하십시오. 여러분은 자녀를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알파벳을 배운 이후로 지금까지 영어를 읽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읽은 내용은 영어로 읽었는지, 한국어로 읽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영어로 들었는지 한국어로 들었는지 잘 모릅니다. 머리나 마음에는 정보만이 저장되지 언어가 저장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마음 속에는 습득된 지식과 정보만 남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한국어로 이런 모든 영적 진리를 배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는 영어를 하고, 아버지는 한국말을 하기 때문에 먹고 노는 기본적인 대화 외에는 말이 되지 않았다.” 이게 어느 집안 쌍놈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까? 부모에게 성경을 배우지 않는 집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최고, 최상의 교육은 인생을 사는 법, 돈을 잘 버는 법 따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언제나 제게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 자녀에게 주는 최상, 최고의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말씀을 마음에 두십시오. 성경을 읽고, 자녀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내용을 외우십시오. 말씀을 암송해야 가르칠 말이 있고, 해 줄 수 있는 말이 있고, 명령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내용이 있으면 떠듬거리면서도 말할 수 있지만 내용이 없으면 아예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 날 너희 가운데서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들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신32: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 있는 말씀을 여러분 외에 다른 누가 더 잘 전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에 있는 말을 나의 자녀들보다 더 잘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자녀의 부모를 자녀의 교사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런 영광스런 직분을 왜 스스로 포기합니까? 왜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란 위대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영어란 이유 하나로 빼앗아 버립니까? 억지로라도 쥐어 주어야 할 진리들을 스스로 묻어 버립니까?
우리는 땅 끝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기 전에 먼저 나의 가정에서 자녀에게, 손자에게 말씀을 전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찬양과 그분의 능력과 그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앞으로 올 세대에게 전하리로다.](시78:4). 여러분은 이런 결심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 뿐 아니라 속 깊은 정서까지 마음으로 마음에 전달되면 그것을 배운 아이는 이제 영어로 자기 자녀와 그런 교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 링크만 제대로 연결되면 다음 세대는 언어의 장벽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출발은 자신의 모국어에서 시작됩니다. 출발을 못하면 중간도 결과도 없습니다. 시작이 없으면 과정도 열매도 없습니다. 여러분, 언어를 핑계대지 말고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두 가지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언어만을 구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엄청난 유익과 특권이 있습니다.
얼굴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 말을 할 줄 모르는 것보다 우스운 일도 없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코메디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신앙 교육에 관한 한 최고의 모델을 꼽으라면 구약의 사무엘, 신약의 디모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를 두었기에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모두 구사했습니다. 그 당시 헬라어는 오늘날 영어처럼 만국 공용어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헬라어에 능통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 성경은 놀랍게도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어 구약 성경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외조모는 디모데에게 헬라어가 아닌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히브리어를 통해 그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디모데는 헬라어 문화 속에서도 소수 민족 언어인 히브리어를 꾸준히 배운 것입니다. 그것도 부모 두 분이 다 히브리어를 쓰는 가정도 아닌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외할머니가 쓰는 말을 배웠고, 어머니가 쓰는 말을 배웠는데 히브리어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이는 네가 이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딤후3:14~15). 디모데가 어린 아이 때부터 어떻게 성경을 알았습니까? 학교에서 쓰는 말, 사회에서는 쓰는 말이 아니라 집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쓰는 말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generation to generation이란 주님의 명령을 실천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자식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지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는 신약 성경의 선택 언어요, 지성의 언어요, 당대 최고의 언어였지만 어린 시절 디모데가 배운 성경은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사용하는 말인 히브리어요, 그들 안에 있던 믿음을 전수 받았던 것입니다. [내가 네 속에 거짓 없는 믿음이 있음을 회상(回想)하노니 이 믿음은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으며 /이제/ 네 속에도 있는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딤후1:5). 여러분이 이런 말씀을 통해 아무 것도 깨닫는 것이 없다면 정말 바보들입니다. 믿음도 없는 미련 곰탱이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70년간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 간 적이 있습니다. 70년이란 세월은 이민 역사로 보면 3세 4세까지 나올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바빌론은 현재 미국을 능가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갈대아의 학문 역시 최고였습니다. 갈대아어를 한다는 것은 현재 영어에 능통한 것만큼이나 유리한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히브리어를 모두 버리고, 자식들에게 갈대아어를 가르치게 하였다면 그들은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도 문제가 많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빌론에 잘 적응하고, 히브리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주님의 귀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대로 바빌론에 살았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현재 사는 바빌론이 좋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의 전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후에 바빌론에 대학을 세우고, 바빌론 탈무드를 만들어 출간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에게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가르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귀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70년이란 세월 동안 자녀들에게 신앙의 전수를 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이들이 진정 알곡입니다. 70년이란 세월은 어릴 때 잡혀갔으면 완전히 늙어서 돌아온 1세대 노인들을 비롯하여 아들, 손자를 끼고 온 사람들이요, 바빌론에서 윗대를 여의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 중에 신앙의 세대 간 전수가 단절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의 말을 할 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때에 또 내가 본즉 유대인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의 아내들과 결혼하였는데 그들의 자녀들이 아스돗 말은 절반쯤 하나 유대인들의 말은 하지 못하며 오직 각 백성의 말만을 하므로 내가 그들을 꾸짖고 저주하며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또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라, 하고] (느13:23~25).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유대인 아버지들이 히브리 말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히브리말을 배우지 않았기에 성경을 들어도 알 수 없었고, 성경을 배울 수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고 죄를 지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꾸짖고 저주했으며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습니다. 언어의 단절은 신앙 전수의 단절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예를 허다하게 봅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부모보다 더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 때부터 그 방면에 관한한 부모를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저는 재일 교포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한쪽만 한국인이라 완전한 한국인 후손이라 볼 수도 없는데 한국말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애쓴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한국말을 배우지 않고 일본말만 하는 후손들이 있습니다. 일본말을 하는 후손들은 한국에 와도 결코 한국인의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더듬거리면서라도 한국말을 해야 한국 사람의 후손으로 인정받습니다. 한국말을 배운 후손들만 한국을 찾고, 어머니의 나라 한국을 기억합니다. 고려인 2세 3세들의 이야기는 더욱 가슴을 저밉니다. 연해주를 거쳐 옛 소련의 여러 나라들에 흩어져 사는 그들은 1세대가 죽고 한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한글을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평생 한국에 올 일도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렇습니다. 반면 이곳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한국어를 못하는 일에 대해 수치를 모릅니다. 한인은 영어를 못하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한국말을 못하는 것이 수치입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입니다. 미국 회사에 취직했는데, 마지막 면접 시험이 전화를 받는 것입니다. 전화를 받았을 때 전화에서는 한국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거기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부터 시작해서 한국말로 계속 묻더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한국말을 익혔고, 한국말로 대답을 해 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취직이 되었고, 시간당 보수 역시 좀 더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말을 못했으면 떨어진 것입니다. 지금 한국인들이 공무원이 되고, 공직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한국말이 핸디캡이 아니라 엄청난 자산임을 스스로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저는 한국말을 합니다”란 조그마한 명패가 있습니다. 이들은 2 중 언어 구사자들입니다. 미국이 한인을 필요로 할 때는 영어 뿐 아니라 한국어를 잘 구사할 때입니다.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은 굳이 채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인력은 넘칩니다.
교회는 더 합니다. 시편 90: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나타내소서](시90:6).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자신의 행하신 일을 나타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듣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라틴어나 영어가 아니라 여러분이 사용하는 한국어로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는 방법입니다.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나타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부모들이 받아서 그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이 날 내가 하는 것같이 주를 찬양할 것이오며 주의 진리를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알게 하리이다.](사38:19).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저는 중국의 선교사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국 대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재직 중인 이 부부는 대학생들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칩니다. 대학생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성경을 배우다가 본격적으로 말씀을 배우기 시작하면 자기 부모나 친척을 데려 오는데 영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와는 반대로 대학생인 인텔리 자녀가 촌부나 학력이 짧은 늙은 부모를 가르치게 됩니다. 뭘로 가르칩니까? 중국어로 가르칩니다. 세대 간 단절이 없습니다. 선교사들은 중국어로 설교할 수 있는 제자를 양육하여 세웁니다. 영어로 선교사에게 영어 성경을 배웠지만 그들은 결혼해서 자기 자녀들에게 무엇으로 성경을 가르칩니까? 중국어로 가르칩니다. 이는 우리나라 초기 선교 사역에서도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치 영어를 배우지 못하면 곧 죽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영어를 쓸 일은 점점 넘쳐 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아집니다.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영어를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휘들은 고급 교양 어휘들입니다. 이 정도를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면 신문이나 책을 읽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세대 간 단절을 메우십시오. 끊어진 링크를 복원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일하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의 자녀 교육, 여러분이 책임지십시오. 교회는 여러분을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치십시오. 좀 더 커지면 교회가 그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세대 간 단절이 없도록 확실한 다리를 놓으십시오. 이 아이들이 완벽하게 한국어로 성경을 배우면 영어로는 더욱 완벽하게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전파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말을 이미 튼 아이들은 머리 속에, 마음 가운데 내용만 있으면 말로든, 글로든 표현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능숙한 영어 구사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아이들의 부모가 한국어를 구사한다면 그는 영어로 성경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로 가르쳐서 부모와 동일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의 전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가 한국에서 금방 왔느냐? 1.5세냐? 2세냐? 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가 어느 언어를 사용하는가? 에 따라 가르치는 것이 성경의 원칙입니다. 기준은 부모의 언어입니다. 아이의 부모가 완전히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아이는 영어로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성경적 원칙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다른 개똥철학으로 성경을 반박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반역의 영입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합니다. 교양 수준의 주워들은 교육학, 언어학 등의 검증되지 않는 논리로 성경의 가르침을 반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마법이나 우상 숭배와 동일한 죄악입니다. 외국어 습득에 대한 언어 인지론에 대한 이론은 학자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학자의 이론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곳에 부모들은 아무도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는 영어로 성경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로 배워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어로 성경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한글로 가르치십시오. 2중 언어가 아니라 언어는 많이 배울수록 좋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곳의 공용어인 스페인어나 독어, 불어, 중국어, 일본어 같은 것을 더 배워 두면 더욱 좋습니다. 이곳 캘리포니아만큼 여러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특혜가 있는 지역도 매우 드뭅니다. 최소한 두 개는 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모의 언어,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언어! 이 둘을 하되 교회는 전자를 따라서 한국어로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곳 이민 사회에 영어를 좀 하는 한국인 목사치고 영성이 있는 목사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상식적으로 영어를 배워서 이곳 미국의 신학교를 나오고, 교회를 다녔으면 영적 깊이와 신앙심이 더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왜 Fuller, 아주사, Golden Gate, Golden State, West Coast Baptist, Biola 등 많은 신학교를 나오고 신앙이 엉망입니까?. 한국어를 구사하는 유학생 목사, 선교사들은 이런 대학에서 뭔가를 배워서 목회를 잘 하지만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이곳에서도, 한국에서도 사역을 하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느 큰 교회에 가서 2세 교육 담당 목회를 하거나 청소년 사역을 하는 것이 최고로 잘 풀린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교회에서 아이들을 잘 양육해 냅니까? 전혀 못합니다. 이곳 큰 교회들에서 2세 목사라고 초빙해서 아이들을 맡기지만 거기서 성경 교육을 제대로 받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거의 돈 먹는 하마 역할만 합니다. 그나마 제대로 배운 청소년들이 있어서 살펴보면 한국어에 능통한 아이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세대 간 단절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우리 주변에 있는 한인 교회들을 통해서 늘 보고 듣고 있습니다. 이중 언어 구사자를 목회자로 불러서 청소년 목회를 하면 그는 한국어로 설교를 하고, 찬양을 가르친 후에 영어를 보충으로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앞으로 이 교회가 커져서 필요성이 생기면 한국어를 주(主)로 하고 영어를 종(從)으로 하는 예배, 성경 교육이 될 것입니다. 영어가 주(主)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신앙, 성경 학습이란 성경적 원칙을 단 하루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들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하며 그들의 자녀들은 다른 세대에게 말할 것이니라.](욜1:3). 2세대 3세대가 되면 원치 않더라도 이들은 이미 한국어를 잊어버리고, 영어만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2세대 3세대 4세대의 신앙은 어떻게 됩니까? 1세대, 1.5세대가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신앙의 뿌리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되지도 않는 이상한 영어로 말하지 말고, 한국어로 또박 또박 정확하게 말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이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지혜와 명철을 얻는 일은 영원히 요원한 일일 것입니다.
'주제별(글) > 성경암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강. 말씀을 먹고 마시라, 렘15:16 (0) | 2005.10.24 |
---|---|
하나님을 아는 지식 (1) | 2005.10.22 |
바른 예배를 위하여 (2) | 2005.10.19 |
우리가 지켜야 할 것 (1) | 2005.10.18 |
들음과 믿음 그리고 행위 (1) | 2005.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