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렘 15:16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성경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성경을 암송하는 일이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갓 거듭난 자들에게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며, 어른들에게는 단단한 고기이며, 달콤한 꿀과 버터이며, 사과입니다. 성경 암송은 말씀을 먹는 일입니다. 우리의 몸은 위(胃)에서 입으로 들어온 음식을 소화시키고, 모든 영양을 취하여 온 몸으로 보내듯이, 우리의 영은 눈으로 귀로 들어온 말씀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써 소화를 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으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교훈과 훈계와 책망과 은혜와 위로와 힘을 온 몸으로 보냅니다. 이렇게 할 때 마음은 은혜로써 강건해지고 믿음은 점점 자라나며 영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속에서 글자로 존재하지만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써 강력하게 자라납니다. 말씀이 있어야 할 곳은 우리의 마음속입니다.
씨앗으로서의 말씀은 마음이란 밭에 심어지고, 뿌려져야만 자랍니다. 음식으로서의 말씀은 마음속에 들어가야만 온 몸과 혼과 영에 힘을 주고, 성장을 이룹니다. 말씀은 그 무엇으로 비유되든 간에 있어야 할 정확한 위치는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풍부히 거하게 하여]라고 하십니다. 몸 밖에 있는 음식은 아무리 영양이 풍부하고, 맛있고, 비싸고, 좋은 것이라도 입을 통해 내 뱃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 식탁에 있는 음식은 내가 먹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음식이지 내가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내 안에 들어와 있지 않고, 내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안에 들어 온 음식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먹은 음식이 위나 장에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배탈이 나고, 온 몸은 파리해지고 맙니다. 차라리 먹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소화되지 않는 음식은 몸을 병들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듣고, 읽고, 암기한 말씀들이 믿음과 결합하지 않고, 묵상을 통해 소화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영혼의 저작(咀嚼) 운동을 거쳐서 온 몸에 골고루 전달되어야 합니다. 피가 순환하듯이, 호흡이 순환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사람을 완전히 한 바퀴 돌고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서 ‘성경을 암송하라.’고 하는 대신 ‘내 말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먹는 것은 참으로 잘 아는 단어입니다. 먹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먹는다는 말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식사에서만 사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많은 돈을 혼자 다 먹었다./ 함께 먹었다./ 꿀꺽 삼켰다./ 먹지 못했다.’ 등등 먹는다는 말은 차지하다, 소유하다 등의 의미로 언어적 확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잃어버리는 것도 ‘먹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 많던 재산 다 까먹었다.’ 먹어서 없애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먹으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벌지는 않고 먹기만 한다.’고 할 때 먹는다는 것은 [소비하다, 낭비하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 사이에 쓰는 용어 중의 하나가 ‘먹는다.’입니다. 그 아이는 ‘가르쳐 주는 것을 잘 받아먹어!’ 라고 하면 잘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좋고, 수용성이 매우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이 크고 지적 욕구가 왕성한 사람일수록 이런 식성이 좋습니다. 잘 먹고, 잘 소화합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왕성한 식욕을 느끼고,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요,](마5:6). 주린 자들이 먹습니다. 목마른 자들이 마실 물을 찾습니다.
배가 부른 자들은 주를 찾지 않습니다. 먹고 살만하면 사람들은 교만해지고, 마음이 높아집니다. 이스라엘은 가난해서 멸망한 적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파탄이 나고, 무역 수지가 악화되고, 국력이 약화되면 이웃 나라에게 망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반대로 잘 먹고 잘 살 때, 먹을 것이 많을 때 망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초장이 내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매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서 그런 까닭에 그들이 나를 잊었느니라.](호13:6).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고, 여러 가지 환란이 오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습니다. 잠자던 혼들도 깨어납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게 되면 주님을 잊어버리고, 말씀도 잊어버립니다.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명령과 판단의 법도와 법규를 지키지 아니함으로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할지어다. 네가 먹어 배부르게 되고 좋은 집을 짓고 그 안에 거하며 또 네 소 떼와 양 떼가 번성하고 네 은금이 크게 늘어나며 네 모든 소유가 크게 늘어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가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8:11-14a).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말씀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대부분 잘 살 때입니다. 이런 예는 허다합니다. [그러나 여수룬이 기름지게 되매 발로 찼도다. 네가 기름지고 비대하고 기름으로 덮이매 그때에 그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구원의 [반석]을 소홀히 여겼도다.](신32:15).
그래서 주님은 굶주림을 보내십니다. 낮추어 버리십니다. 말씀을 찾아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는 이유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주릴 때 겸손해 지고, 말씀을 귀히 여기고, 양식으로 삼는 자들은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그 암송한 말씀을 계속 되새김질 하는 사람들은 결코 허기짐을 모릅니다. 영적 주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을 공부해도 그 때 뿐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씨앗이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금방 빼앗겨 버리고, 숨이 막혀 버리고, 수분이 없어 말라 버립니다. 단단히 박힌 못처럼 박혀 있으면 뽑으려고 해도 잘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 없이 그냥 나돌아 다니는 말씀은 참새 한 마리가 간단히 주워 갑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이 사람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셔서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게 하십니다. 성경을 암송하면 그 암송한 구절로 시를 짓기도 하고, 노래로 만들기도 하고, 서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말씀이 암송되어 있지 않다면 여러분이 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좋은 일을 읊으리라. 내가 왕에 관하여 지은 것들을 말하리니 내 혀는 능숙한 문장가의 펜이로다. 왕은 사람들의 자녀들보다 더욱 아름다우시니 왕의 입술에 은혜가 넘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왕을 영원히 복되게 하셨나이다.](시45:1-2). 시편 기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능했습니다. 그래서 ‘내 혀는 능숙한 문장가의 펜이로다.’고 할 만큼 입에서 말씀이 흘러 나왔습니다.
신약 성도들인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실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너희 자신에게 말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주]께 노래하고 선율을 만들며](엡5:19). 이것은 음악적 재능이나 싯적(詩的) 소양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마음속에 있는가?’란 문제입니다. 우리는 침례인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나 주의 모친 마리아가 즉석에서 메시아의 탄생과 그의 사역에 대해서 구약을 인용하며 찬송시를 읊어나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이 암송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씀을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를 하였던 것입니다. 작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성경을 암송하면 여러분의 혀는 ‘능숙한 문장가의 펜’이 될 것입니다. 시인이 되고, 찬송가의 노랫말을 쓰는 작사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지금 이 구절을 순종하여 실천하는 성도들이 몇이나 됩니까? 저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최근에 들어서 집중적으로 성경을 암송하면서 이 말씀이 눈에 들어왔고, 시와 찬송가를 쓰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몇 편 써 보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은 시와 찬송가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바탕으로 시와 찬송가를 쓰면 성경 암송이 더욱 용이해집니다. 그리고 깊이 새겨집니다.
몇 주 전에 ‘나를 믿는 자는’이란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련 구절들을 집의 화장실, 세면대, 부엌, 마루 그리고 컴퓨터 옆에 붙여 놓고 외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간단히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아니하고(사28:16),
나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으며(요3:15)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요3:16)
이는 주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고(요3:18),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으며(요6:35)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요7:38).
주님이 주신 물이
내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요4:13-14).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며(요11:25),
결코 죽지도 아니하리라(요11:26).
이는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어둠에 거하지 않으리라(요12:46).
이는 주님이 생명의 빛이시요,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행한 일을 하고 더 큰 일도 하리라(요14:12).
이는 주님께서 우리가 믿을 때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요일5:1).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요11:40), 구한 것을 받고(막11:23), 죄들의 사면을 받으리라(행10:43).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믿고 확신하는 것은 자기 안에 증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요일5:10).
이것은 완벽한 말씀의 암송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암송할 때, 성경이 말하는 대로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마음속에서 은혜로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암송은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광야를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순례의 길을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주면 더욱 좋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들의 바위에서 나오는 레바논의 눈을 버리고 떠나겠느냐? 다른 곳에서 나오는 흐르는 찬물을 버리겠느냐?](렘18:14). 이교도들은 여행할 때 레바논의 눈(snow)을 버리고 떠나지 않습니다. 흐르는 찬물도 버리지 않습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들,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들의 바위에서 나오는 레바논의 눈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흐르는 찬물은 깨끗하며, 마시기에 적합합니다. 누가 이것을 버리겠습니까? 그러나 유다는 어리석게도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렸습니다(렘17:13). 한 모금의 물도 버리지 말고, 눈도 물도 버리지 말아야 할 터인데 이들은 생수의 샘인 주를 버리고 스스로 물 저장고들을 팠습니다(렘2:13). 이는 오늘날 배교한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복의 근원,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버리고 스스로 잘난 체하며 자기 생각과 철학을 가지고 삽니다.
그들은 타는 갈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대신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를 좇아갑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함으로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대신 독특한 해석이나 새로운 교리나 자신의 가려운 귀를 긁어 줄 그 무엇을 찾아 떠납니다. 이들은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하며,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문제는 진실한 성도들입니다. 진실한 성도들 가운데 갈증을 지닌 사람들은 많습니다. 바른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 교회를 찾고, 참된 헌신의 의미와 감격이 있는 예배를 찾습니다. 이런 갈증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갈증을 가지고 있는 자는 주를 찾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물 시내를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니 내가 어느 때에 가서 [하나님] 앞에 보이리요?](시42:1,2). 속에 진리에 대한 갈증이 없는 자들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무릇 성도라면 말씀에서 더 깊은 진리를 얻고자 하는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구원을 받은 후에 늘 타는 목마름과 갈증이 있었습니다. 좀 더 깊은 진리를 찾아서 헤매었습니다. 저는 이 갈증을 사람들에게서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한 걸음씩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내리게 하시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건져 올리게 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저는 영적으로는 만족을 몰랐습니다. 늘 주리고 목마름이 있었는데 이것은 매우 힘든 기간이기도 했지만 놀라운 은혜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성경을 계속해서 통독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스토리를 요약하기도 하고, 요절들을 적어 가면서 전체의 맥을 잡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결국 든든한 저의 영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저는 갈증이 있는 그 자체가 잘못된 문제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말씀 묵상에 전념한 사람입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늘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내가 일찍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내 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사모하오니](시63:1). 다윗이 영적으로 만족하고 안주했다면 그는 단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메마름을 주시는 것은 주를 더욱 찾고, 갈망하고, 사모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그 속에서 어떤 진리를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더욱 기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 혼이 {주}의 뜰을 사모하여 참으로 쇠약하게 되었사오니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구하며 부르짖나이다.](시84:2). 주님께서 이런 메마름을 주시는 것은 죄악의 결과만은 아닙니다. 죄악이 생수의 강을 막고, 솟아나는 샘물을 막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주님을 신뢰하고 말씀으로 단련하는 기간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목마른 자를 부르십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고, 배부른 자가 아니라 주린 자를 부르시며, 목마른 자를 부르십니다.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와서 마시라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마시라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주님을 찾고 주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 그들의 혀가 갈증으로 인하여 힘을 잃을 때에 나 {주}가 그들의 말을 듣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라.](사41:17).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계시를 풍부히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부분에서 그는 결코 만족하거나 그 자리에서 자족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말하지 아니하며 이미 완전한 것처럼 말하지도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따라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노라.](빌3:12-14). 그는 먹고 사는 육신적인 문제에 관한한 만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계속해서 앞을 향해 달렸습니다. ‘나는 도달하지 못했다. 완전하지 않다. 나는 아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달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읽고 공부한 사람들에게도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보통 결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장난이나 취미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암송을 하는 것은 진리를 토대로 살겠다는 결심이 서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주려 본 사람, 타는 목마름으로 헤매어 본 사람만이 성경의 진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기 위해 외우려고 합니다. 한 마디 말씀이라도 좀 더 외워두려고 합니다. 암송되지 않는 말씀은 영적 주림과 목마름을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먹으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먹는 것입니다. 성경이 영혼의 양식임을 인식하고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저는 육신의 식사는 몇 끼를 걸러도 별로 배고픔을 못 느끼지만 성경 읽기를 쉬거나 빼 먹으면 영적 허기를 많이 느낍니다. 이것은 특별한 영적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것을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채 살아 왔다면 여러분의 지금 신앙은 가짜입니다. 성경을 며칠을 읽지 않았음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여러분의 영은 감각을 상실했거나 깊이 병들었거나 잠이 들었거나 죽은 것입니다. 곤고함을 느끼고, 메마름을 느껴야 합니다. 허기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혼만 감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도 감각이 있습니다. 영도 지성이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도 마음속 깊은 곳에 울림도 없고, 격정도 없고, 슬픔도 없고, 기쁨도 없다면 여러분의 영적 상태에 대해 건강 검진을 받아 보셔야 합니다. 죽었거나 잠들었거나 병들었거나 셋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계3:1b)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몸으로는 일을 합니다. 종교적 지성과 신앙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동의하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영은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이런 예는 우리 교회에서도 자주 발견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도전이 올 때, 어떤 문제가 터질 때 심한 부담감과 압박을 느끼다가 도망을 갑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잠자는 자들도 일어나고, 죽은 자들도 일어나라고 하십니다(엡5:14, 사60:1).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일어나 먹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로뎀나무 아래서 잠자던 도망자 엘리야, 실족한 엘리야를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배 밑창에서 잠자던 도망자 요나, 주님께 불순종한 요나를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감옥에서 잠자던 베드로를 깨우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깨어나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먹어야 기운을 씁니다. 먹어야 일을 합니다. 먹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잘 먹어야 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렘15:16). 여러분은 성경을 먹어야 합니다. 어떤 것은 먹을 때 그냥 넘기는 것이 있지만 어떤 것은 오랫동안 씹어야 합니다. 먹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랍스터처럼 뼈만 보이는 것은 그 속에 부드러운 살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익혀야 하고, 어떤 것은 삶아야 하고, 어떤 것은 구워야 합니다. 성경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읽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듣고 대화하고, 주님께 묻고 기도하며 말씀을 완전히 내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먹을 때 먹는 입에서 질감을 느끼고, 배가 불러오는 포만감과 만족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배가 고파오면 또 먹어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먹어야 합니다. 어떤 날은 작심을 하고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적게 먹었을 때는 간식이라도 챙겨서 먹어야 하듯이, 성경을 덜 읽었을 때는 다른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발견하는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의 집에게 말하라, 하시기에](겔3:1). 주님은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가서 말하라. 이것이 순서입니다. 먹지 않고 가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에스겔은 입을 벌렸습니다. [내가 입을 벌리니 그분께서 나로 하여금 그 두루마리를 먹게 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 배로 하여금 먹게 하고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창자를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그것을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꿀같이 달더라.](겔3:2-3). 우리 모두 이런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단맛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읽고 또 읽어도 더 읽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예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은 욕구가 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란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명령은 명령권자의 권위에 따라 그 강도가 다릅니다. 부모의 명령보다는 국가의 명령이 큽니다. 국가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훨씬 더 크고 강합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오늘날 성도들은 ‘명령’이란 말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명령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으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먹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말씀을 먹지 않음으로 인해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오직 너는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반역하는 집같이 반역하지 말며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니라.](겔2:8). 말씀을 받아먹지 않는 일은 주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먹으라는 것을 먹지 않는 것은 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불순종이요, 거역이며, 반역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반역 가운데 살아왔다면 이 시간 깊이 회개하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무지로 인한 반역이었다 할지라도 용서를 구하고 이후로부터 말씀을 매일 받아먹겠다는 결단을 하십시오.
그리고 행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몰랐다, 잘 몰랐다, 생각하지 않았다 등은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확인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6). 모든 말씀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입니다. 모든 말씀은 단지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행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은밀한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거니와 계시된 그 일들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하나니 이것은 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신29:29). 성경 암송은 책에 기록된 말씀을 마음에 옮겨 적는 일입니다. 성경 암송은 암기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글대로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행하기 위해서 암송한 말씀이 아니라면 암송은 버스 노선이나 전화번호부를 암송한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좀 편리하다는 것 외에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말씀을 먹으면 마음은 기쁨이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육신에 빵이 필요하듯 영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책을 먹기를 소망했습니다.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그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그것이 네 배는 쓰게 할 터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니라. 내가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으나 내가 그것을 먹은 뒤에 즉시로 내 배가 쓰게 되었더라.](계10:9-10). 말씀을 먹는 일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님을 봅니다. 입에는 달았지만 배에는 썼습니다. 요한에게 책을 준 천사는 요한에게 주면서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터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요한은 그 책을 가져다가 먹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음식은 먹는데 너무 맛있고 달지만 배 속에서는 끓어오르고 쓰다면 아무도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음식은 보기 좋고, 맛있는 것일수록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당뇨를 일으키고, 합병증을 유발하는 등의 음식이 있습니다. 환각류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뒤탈이 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받아먹은 작은 책도 그런 종류입니까? 이 말씀을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과 설교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입에서 달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들을 때 깨닫는 기쁨, 은혜 등을 말하는 것이고, [배에서 쓰다]는 것은 듣고 깨달은 말씀을 실행하려면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적 적용으로서 매우 교훈적인 내용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환란 가운데 기뻐하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갈 때 기뻐했던 사람들은 말씀이 배에 썼던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주님의 계시를 받을 때는 기쁘고 감옥에서는 슬펐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그런 구절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받아먹으라.]는 말씀의 다음 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 앞에서 다시 대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10:11). 요한은 말씀을 먹는 대신 그 말씀을 반드시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 앞에서 다시 대언해야 했습니다. 이 일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포하는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선포할 내용이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기쁨과 은혜의 말씀도 있지만 저주와 화와 심판과 재앙의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에스겔이나 요한이 먹었던 말씀은 주님의 심판을 다룬 말씀들이었습니다. 복과 은혜를 선포하는 일은 너무 쉽고 좋습니다. 그러나 재앙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힘듭니다. 복음 선포자가 웃으면서 지옥과 심판을 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을 선포합니다. 믿으면 받게 될 은혜를 선포합니다. 정말 쉬운 일입니다.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곧 있게 될 심판과 저주와 재앙에 대해서 선포해야 한다면 이는 매우 힘든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재앙과 심판이 먼 미래의 일이거나 당장 내 앞에서 벌어질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있게 될 말씀이라면 그다지 힘들지 않겠지만 그러나 당장 눈앞에 펼쳐질 재앙과 심판을 전하는 일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입니다.
에스겔이 받아먹은 책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니, 보라, 그분께서 한 손을 내게 보내셨는데,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 한 권이 있더라.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셨는데 그것은 안팎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안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기록되어 있더라.](겔2:9,10). 우리가 보는 성경은 복과 은혜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만 재앙과 저주가 빽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우리가 전할 복음은 죄와 죄의 형벌과 지옥과 심판에 대한 내용이 3/4은 차지합니다. 이 일은 배에 쓴 일입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받게 될 심판에 대해 우리 입을 통해 경고하십니다. 우리 입은 배에 있는 것들을 쏟아 내는데 꿀처럼 단 말이 아니라 쓰디쓴 말들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에게 이런 쓰디쓴 말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입에는 달았지만 배에는 쓴 그런 말들을 죄인들에게 전하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경고의 나팔을 불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덕담만 하며 살 수 없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인 말들, 거북한 말들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고침 받고 주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버터와 꿀 송이 같은 말씀을 먹는 동시에 배에 쓴 말씀들도 받아먹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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