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잠15:28
주님은 상담자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위로자이십니다. 오늘날 상담자이신 주님, 위로자 성령을 만나지 못한 성도들이 상담 심리학과나 Christian Counselling이니 하면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암송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 말씀으로 답변을 주고, 위로를 주고, 조언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지닌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을 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정신과에 찾아가고, 소위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돈만 쓰고, 시간 낭비만 합니다. 그들은 결코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제안을 줍니다.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마치 고상한 철학자 흉내를 내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며 산다면 그는 고상한 것이 아니라 등신입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의 참된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등등의 철학적 질문은 이미 초신자 시절에 모두 해결 받아야 합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우리는 그런 질문을 쏟아내는 혼들에게 명쾌한 답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어린 시절에 성전에서 묻는 질문에 모두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듣는 자가 다 그분께서 깨닫고 답변하시는 것들로 인하여 깜짝 놀라더라.](눅2:47). 주님은 답변자이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정답만을 말하셨습니다. 한번도 모르겠다고 하지 않으셨고, “글쎄다, 어려운 질문이로다, 난감하구나, 그것을 누가 알랴? 아마도...”와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에게는 Maybe(아마도)란 말이 없으셨습니다. 언제나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진리의 말씀으로 답변해 주셨습니다. 사복음서를 읽어 보십시오. 항상 [대답하여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면에서 이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꼭 성경 문제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면 인생, 결혼이면 결혼, 자녀 양육이면 자녀 양육, 사업이면 사업 등 어디에나 거침없이 확고하게 답변해 줄 수 있는 답변자(Answer Man)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성경 암송을 통한 지식과 지혜가 넘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이 먼저 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답을 아는 사람에게는 어떤 시험도 어렵지 않습니다. 시험 시간이 두렵지 않습니다. 미리 답을 알려 주고 시험을 본다면 그것은 시험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통해 답변을 지닌 인생들은 인생이 고해(苦海)의 바다가 아니라 단지 단련장이며, 체험의 현장일 뿐입니다.
이미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문제를 내 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마귀도 시험할 맛을 잃어 버립니다. 여러분에게 해답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주님이 답입니다. 주님이 방법(WAY-길)입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듯이, 모든 문제의 해답은 길이신 주님께로 통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How(어떻게)?로 시작되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주님 자신이란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자가 주님 자신이란 것입니다. 사람들은 난감할 때 There is no way(길이 없다)고 합니다. 방법(way)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길을 알고 있다. 나는 길이 있다”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십니다. 하늘로 가는 길입니다. 승리하는 길입니다. 복을 얻는 길입니다. 은혜를 얻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앞에 무슨 말을 넣어도 주님은 *** 의 길이 되십니다. 이것이 “나는 길이요”(요14:6)의 의미입니다. [나는 해답이다. 나는 방법이다. 나는 해결자다. 나를 통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란 의미입니다. 누구와 화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릅니까? 주님이 방법(way)입니다. 정말 잘 하고 싶은데, 성공하고 싶은데, 형통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습니까? 주님이 방법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길(방법/해답)이요”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 답변을 얻은 사람이라면 인생의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답을 가지고 대입해 보고 검증해 보는 실습 터입니다. 만능열쇠를 가지고 우리 앞에 놓인 이 문, 저 문들을 열어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 안에는 저 문을 열 수 있는 Key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길이요 진리이신 주님, 우리의 열쇠가 되시는 주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암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답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 암송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靈感)이 사람들에게 명철(明哲)을 주시나니](욥32:8). 전능자의 영감이 명철을 준다면 전능자의 영감으로 넘쳐나는 한 권의 책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딤후3:16).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명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암송해야 하는 이유는 명철을 얻기 위함입니다. 답을 몰라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전능자의 영감으로 가득찬 성경을 암송하는 것은 명철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성경의 역할은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19:7). 말씀이 들어가면 어둠 속에 거하던 자도 보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암송하는 이유는 지혜롭게 되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사람들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 암송은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명령들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주께서 그것들을 통해 나를 내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하셨나이다.](시119:98).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되어 버리면 원수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말로도 글로도 힘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습니다. 명철과 지혜를 소유하게 되면 인생의 미로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주의 빛 가운데 걷게 되며, 사람들이 쳐 놓은 올무를 비웃으며 화평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암송하지 않음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명철과 지혜를 얻지 못하고 여전히 단순한 자요, 원수들의 지혜에 번번이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역시 세상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지혜롭다는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 변명하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에게 훈계를 주라. 그러면 그가 더욱 지혜롭게 되리라. 의로운 자를 가르치라. 그러면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잠9:9). 저는 매주 설교를 통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훈계를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혜로운 자라면 지혜롭게 되고 있을 것이며, 의로운 자라면 학식이 더해질 것입니다. 지금 매주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 교훈을 받고, 필요한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무엇인가 얻은 바를 붙들고 있다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도록 성장하고 변화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노트에 기록을 하든 성경에 표시를 하든 테잎을 반복해서 듣든지 이 말씀을 흘려듣지 않고 간직한다면 분명히 성장과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선포할 때 대적하지 않고, 저항하지 말고 받는다면 지혜롭게 됩니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나중에 지혜롭게 되리라.](잠19:20).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어려움 자체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환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적인 성도이든 육신적인 성도이든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해답을 알고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해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좀 귀찮을 수는 있지만 큰 부담이나 염려나 걱정은 안됩니다. 그러나 해답이 없는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고, 편법을 쓰고, 불법과 탈법을 자행하고 속임수를 쓰는 등 별별 짓을 다합니다. 답이 없기 때문에 답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암송한 성도들은 성경을 통해 해답을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답을 얻고, 답을 주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성경을 공부합니다. [의로운 자의 마음은 대답을 얻으려고 연구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입은 악한 것들을 쏟아내느니라.](잠15:28). 성경을 통해 얻은 답은 완전한 정답입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공부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인생의 곤고함을 느낀 어떤 사람이 친구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와 무슨 조언을 들으려고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답변할 말씀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조언을 줄 수 있습니까? “언제든지 내게 물으라, 내가 대답해 주리라.”는 정도로 단련되어 있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나 누가 묻는 것이 부담스럽고, 누가 물으려면 ‘저는 아무 것도 아는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만다면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수치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 지식을 자랑하라는것이 아닙니다. 다만 분명히 대답을 얻으려고 공부하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해 두라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모략과 지식에서 심히 뛰어난 것들을 네게 기록함은 너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들의 확실함을 알게 하며 또 너에게 /사람을/ 보내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 (잠22:20~21).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신문이나 T.V,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 학교에서 배운 이야기 등을 쏟아내는데는 열심인데 성경으로 답변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러하고, 가정에서도 그러합니다. 자식들이 묻는 질문에 성경적 답변을 하지 못하고, ‘크면 다 알게 돼’라고 하거나, ‘학교에서 가서 선생님에게 물어봐’하고 맙니다. 우리 자녀들은 자연 과학적 지식을 여러분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주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크면 알아서 그런 질문들은 부모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 대신 인생에 대해서 묻고, 하나님에 대해서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주일에 교회를 오는지 답변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선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며, 왜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하며, 왜 예배를 드리며, 왜 기도를 해야 하며, 왜 악을 행해서는 안 되는지를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야 한다는 사실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다르고, 자녀는 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집에서 배워야 합니다. 왜 이스터 명절이 가짜인지, 크리스마스는 왜 거짓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어떻게 자백을 하고 회개하는지 해결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해야 할 일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많은 세대의 연수(年數)를 깊이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보여 줄 것이요, 네 장로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해 주리라.](신32:7).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자녀는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내 역시 남편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을 외워두지 않고 바로 대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여자 아이가 신학교에 가서 졸업 후에 목사가 되겠다고 하자 그 아버지가 왜 여자는 목사를 해서는 안 되는지를 성경을 펴서 조목조목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성경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세히 알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 무슨 문제든지 아버지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물어도 답을 해 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묻지도 않았다가 아버지를 새로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할 때 여러분은 훌륭한 상담자가 되고, 답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성경을 공부할 때 훌륭한 목자를 만났습니다. 저와 1:1로 성경을 공부하며 가르치시던 목자는 제가 하는 질문의 거의 대부분을 답변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지혜롭고도 명쾌한 답변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 같은 신앙을 결코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 후로 늘 ‘답변자’(Answer man)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제가 말을 너무 단정적으로 한다고 충고를 해 주기도 했습니다. 설교도 너무 강하고 단정적이라며 주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답변은 애매모호한 법이 없습니다. Yes, No가 전부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여러분을 변론가나 논쟁에서 이기는 말싸움의 달인(達人)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확인된 진리, 이미 배우고 확신 가운데 거하는 진리를 말해 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벧전3:15). 우리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해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난해 구절을 항상 제때 바로 바로 대답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족보나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 연대기 등은 상당히 난해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죄, 구원, 예수 그리스도, 심판, 지옥 등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묻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 암송이 된 사람들은 성령께서 그때마다 적절한 구절이 생각나게 하심으로 답변을 하게 하십니다.
가끔 형제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간증이라고 하는 말들인데도 불구하고 묻는 질문과 답변이 전혀 짝이 맞지 않거나 엉뚱한 답변을 해 주는 것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 성경에 없는 말을 마치 성경에 있는 말처럼 지어내어서 답변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때에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성경을 암송하고, 성령의 조명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암송된 말씀을 통해 때에 적절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 말은 놀라운 능력과 가치가 있습니다. [/때에/ 적절한 말은 은 그림들에 있는 금 사과들 같으니라.](잠25:11). 우리는 모두 알맞은 말을 할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이것이야 말로 대화의 기본입니다. 때에 맞는 말,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은 상담의 abc 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암송해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입의 대답으로 기쁨을 누리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잠15:23). 그렇습니다. 변죽을 울리는 소리, 알맹이 없는 대답, 영양가없는 상담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그러나 성경 암송을 통해 우리가 때에 맞는 말을 하는 입이 되고, 적절한 말을 하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입을 맞출 것입니다. [바른 대답을 내는 자의 입술에는 모든 사람이 입을 맞추리라.](잠24:26).
변론은 사람을 다투게 합니다. 다툼은 분냄과 쓴 뿌리를 맺게 하고, 원수 맺음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진리의 말씀, 적절한 말씀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전도자요, 구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암송하고 성경 공부를 많이 했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말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우리의 상식과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대답은 듣는 이의 영을 살리지 못합니다. 우리 입술은 성령이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예비하는 것과 혀로 대답하는 것은 [주]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16:1)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나오는 대답이 바른 대답입니다.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몸을 도구로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답변이 아니라 주님의 답변을 듣게 만들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 중의 하나가 바로 이점입니다. 자신이 배운 신앙 철학을 전파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맙니다. 자신이 배운 신학 지식, 교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나의 혀를 주장해 주시고, 말씀해 주시기를 구할 때 우리의 입은 적절한 말씀을 쏟아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
◇ 주를 신뢰함으로 말하라. 상담자요, 답변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요소는 항상 주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말 재주를 의지하면 말쟁이밖에 되지 않습니다. 열매가 전혀 없습니다. 상대가 잘 들은 것 같은데도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전도를 할 때든지 상담을 할 때든지 대화를 할 때든지 항상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대답할 말씀을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아무도 그의 답변하는 것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신뢰할 때 주님은 우리 입술을 사용하셔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점을 한 시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모욕하는 자에게 그것으로 대답하리니 이는 내가 주의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 내가 주의 판단들에 소망을 두었사오니 진리의 말씀을 내 입에서 아주 빼내지 마소서.] (시119:42~43). 원수들 앞에서 답변할 때 더욱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서에도 여러번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 속으로 정하여 무슨 대답을 할까 미리 궁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대적들이 능히 반박하거나 대항하지 못할 입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줄 것임이라.] (눅21:14~15). 주님은 우리의 입을 사용하십니다. 가르쳐 주십니다. [이는 너희가 마땅히 무슨 말을 할지 성령님께서 그 시각에 너희에게 가르치실 것임이라, 하시니라.] (눅12:12). 이 원리는 대 환란이나 재판정에 붙들리지 않더라도 현재 여러분이 전도를 하든지 대적들을 만날 때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무엇에나 언제나 주님을 신뢰해야 하겠지만 특히 상담이나 답변을 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 온유함으로 말하라. [자기 자신을 대적하여 행동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그리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딤후2:25). 온유함으로 답변할 것을 준비해야 하듯이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성질을 내보아야 아무 덕이 되지 않습니다. 부드럽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며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논리적인 면보다는 감성적인 면이 강합니다. 대화의 태도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딛3:2). 온유함을 보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먼저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말씀을 듣는 자세를 보면 그가 말하는 태도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듣기에 주의하는 사람은 말하는데도 주의합니다.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은 말하는데도 온유합니다.
◇ 은혜가 있게 하라.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가 있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바를 알게 되리라.](골4:6). 말에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은혜로운 말을 잘 듣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은혜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은 은혜의 성령입니다. 주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고로 우리는 은혜롭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은혜의 말씀을 은혜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애곡해야 하는 장면에서 웃으며 말하는 것이나 웃으면 이야기해야 할 곳에서 울면서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것이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는 말을 할 때 대답할 바를 알게 된다고 합니다. 입술에 은혜가 있게 하란 말은 조용하고 다소곳한 말투, 여성스러운 말투를 사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는 일은 이런 것입니다. [마음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자는 그 입술의 은혜로 인하여 왕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22:11). 마음의 순수함을 사랑할 때 그 입에는 은혜가 나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전10:12a). 마음이 지혜로울 때 그 입의 말들은 은혜가 있게 됩니다.
◇ 말수를 적게 하라. [/너는/ 하나님의 집에 갈 때에 네 발을 지키고 어리석은 자들의 희생물을 드리는 것보다 듣는 것에 더 열중할지니 이는 그들이 자기가 악을 행하는 줄로 생각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네 입을 경솔히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어떤 것도 말하지 말지니 이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기 때문이니라. 그런즉 네 말 수를 적게 할지니라.] (전5:1~2). 우리는 모든 대화가 하나님이 경청하시고 계시며,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다는 임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허튼말, 농담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으시고 그 한 말을 심판하십니다.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니 이는 네 말로 네가 의롭게 되며 네 말로 네가 정죄받을 것임이라.] (마12:36~37). 우리가 이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성경에 있는 것처럼, 성경적 진리인 것처럼 말할 수도 없습니다. 말을 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주님 앞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말씀하시되, 진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 귀에 말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이들은 자신들끼리 한 대화였지만 주님은 ‘너희가 내 귀에 말한 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입에 파수꾼을 세워 주시기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감사와 찬양과 기도의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입술로서 흠이 없게 해 주시를 구해야 합니다.
◇ 말을 하기 전에 연구하라. [전도자는 애를 써서 받아들일 만한 말씀들을 찾았나니 /여기/ 기록된 것은 올바른 것이요, 곧 진리의 말씀들이로다.](전12:10). 사람들이 흔히 대화의 기술이라고 말하듯이 우리는 말을 하기 전에 애를 써서 ‘받아들일 만한 말씀들’(acceptable words)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가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잠언을 정리하고 성경 구절들을 정리하고 때로는 적절한 예화를 활용할 수 있도록 말씀들을 마음 속에 잘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가 전혀 받아 들일 수 없는 말을 쏟아내고는 말이 안 통한다고 해버리면 곤란합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아무리 쉬운 성경 용어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영접한다, 믿는다는 말조차 어려워합니다. 초신자들은 성경의 말씀들을 자꾸 육신적으로, 물리적으로, 땅에 속한 것으로 받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배우는 말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적절한 말들을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부터 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구원받았을 때 교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너무나 흔하게 쓰는 것을 듣고 보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무엇을 받아야 은혜를 받았다는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예는 지금도 교회 내에서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는 영을 주셔서 적절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또한 성경을 암송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또한 우리가 이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고전2:13)고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비교하려면 성경 여기저기를 펼칠 수 있어야 하고, 관주를 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 두고, 성경을 암송을 해둠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는 성경 암송을 통해서 어떻게 상담자가 되고, 답변자가 되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성경암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강. 말씀 암송의 결과 (1) | 2005.10.29 |
---|---|
13강. 말씀 암송과 지혜 (1) | 2005.10.27 |
11강. 말씀을 먹고 마시라, 렘15:16 (0) | 2005.10.24 |
하나님을 아는 지식 (1) | 2005.10.22 |
성경 암송과 자녀 교육 (2) | 2005.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