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14. 말씀 암송의 결과
말씀: 시 19:7-11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 {주}의 증언은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주}의 법규들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주}의 두려움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전적으로 의로우니 그것들은 금보다, 참으로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들이며 또 꿀과 벌집보다 더 달도다. 주의 종이 또한 그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그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이 있나이다.]

 성경을 암송할 때 누리는 8가지 은혜를 증언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매 시간마다 성경 암송이 주는 복과 혜택, 유익에 대해서 줄기차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암송하는 이유와 목적을 선명하게 알려 주고, 실질적으로 말씀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간직하며, 말씀의 인도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말씀은 등(燈)입니다. 말씀은 삶의 원칙이요, 원리요, 법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암송하는 일은 최대, 최상, 최고의 보화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어진 것이며, 더 많이 취하면 취할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욕심이 아니며, 아무리 갈증을 느껴도 탐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 인생의 가는 길에서 말씀이란 빛과 등을 분명하게 보며, 기쁘게 걷고 있는 성도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대부분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 응답 없는 메아리로 울리는 기도를 하며 결국은 몇몇 아는 사람들의 조언과 자기 생각대로 진로를 결정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무늬는 기독교인이요, 입술로는 믿음이지만 실제로 기도와 말씀이란 강력한 영적 도구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말씀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고, 사랑해야 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믿고 확신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누가 말하기를 “당신이 그토록 소중하고 귀하다고 말하는 성경을 당신은 왜 그렇게 거의 읽지 않고, 외우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기도했습니다. 성경 읽었습니다.”라고 항변하듯 하며 제 멋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과 언행을 보면 기도와 말씀이 저들의 종교심을 고양해 주고, 양심의 가책을 덜어 주는 약간의 진통제나 마취제 역할 외에 무엇을 더 해 주었는가? 란 생각이 자주 듭니다. 자신들의 소원과 뜻을 정해 둔 후 기도란 요식 행위를 거침으로 종교적 양심에 변명 거리를 제공해주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믿음의 고뇌요 결단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소위 경건의 모양을 갖춘 자들의 신앙입니다. 

 세대가 이런 때에 우리는 더욱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철저히 암송함으로써 그 말씀이 비추어 주는 빛에 이끌림을 받고, 말씀이 주는 권능에 구속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도 저는 변함없이 말씀을 증언하고 가르치며 선포하고 있지만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고, 힘이 되고, 지혜와 판단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를 단지 목사의 견해나 의견이나 권고 정도로 듣고 있다면 저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진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너희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그것들을 자기 발밑에서 짓밟고 다시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하노라.](마7:6). 저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님으로부터 전해야 할 말씀을 받아 강단에 설 때면 가끔은 이런 거룩하고, 귀한 말씀을 개나 돼지에게 던져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개는 구원받지 못한 남자를 말하고 돼지는 구원받지 못한 여자를 말하는데(벧후2:22-KJV/인칭 대명사 참조), 구원 받은 양 떼라고 앉아 있긴 한데 하는 짓은 꼭 개, 돼지처럼 말씀을 자기 발밑에 짓밟고 다시 돌이켜 덤벼든 예들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사인 저를 공격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선포된 말씀을 공격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면 감독을 받고 말씀을 제대로 받아먹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볼품없는 공장 건물 2층 다락방에 와서 앉아 있지만 실상은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고넬료처럼 [그런즉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들으려고 여기 [하나님] 앞에 다 있나이다, 하니라.](행10:33b)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성경 암송 시리즈에 포함된 말씀이긴 하지만 실상은 [설교를 제대로 들을 때 나타나는 결과]에 관한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아2:8)를 알아듣지 못하면 그는 주님의 양이 아닙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주님께 들을 귀를 열어 주시도록 구해야합니다. 저는 언젠가 어떤 형제로부터 ‘오늘 목사님 설교는 자기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한 저의 설교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강해한 성경 강해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아 가며 전한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사람은 들으면서 느끼는 대로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설교 시간에 자기변명을 하는 것으로 듣거나 들린 사람이라면 조용히 교회를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은 설교자의 변명을 듣기 위해 먼 길에 아까운 시간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여기는 놀이터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기분 전환을 위한 Recreation의 장소가 아닙니다. 멋진 시설과 좋은 음악과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 곳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원한다면 이곳에 올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는 학원도 학교도 아닙니다. 여기는 주님이 주신 것을 받아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곳이요,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말씀이 주는 유익을 현재적으로 소유할 것이며,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암송하고, 설교를 제대로 들었을 때 말씀이 내게 주는 효과, 결과에 대해서 선포하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강력하게 말씀해 주시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믿음으로 결합하여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성경 읽기를 하고, 필사(筆寫)를 하고, 매주 설교를 듣고, 복음 방송을 듣는 그런 사람들이 열매도 없고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는 것을 볼 때면 우리는 그가 말씀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과 모세오경을 암송했던 바리새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책망을 들었던 것을 보면 단순한 신학적 지식으로서의 성경 암송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봅니다. 다윗과 같은 묵상의 사람이 죄로 쓰러지고 자빠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육신과 마귀의 권세가 얼마나 집요하고 강한가를 봅니다. 솔로몬이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명철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3편이나 되는 성경을 썼습니다. [그가 삼천 개의 잠언(箴言)을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 다섯 편이었으며](왕상4:32). 뿐만 아닙니다. 자연과학적 지식에도 능했습니다. 지질학, 광물학, 생물학, 조류, 어류, 식물학, 야생 동물들에 관해 모두 논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또 나무에 관하여 말하되 레바논에 있는 백향목으로부터 담에서 솟아나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날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관하여 말하였으므로](왕상4:33). 그런 그가 말년에 타락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성령의 은사를 소유했다고 해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으며, 허물 가운데 살 수 있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스스로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를 입증하고, 열매가 있는가?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말씀 안에 거하고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가? 이런 몇 가지 기본 사항을 표로 만들어 두고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즉 스스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고전10:12).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판단해 보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려 하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11:31). 여기서 자신을 판단하라는 말은 성령으로, 말씀으로 자신을 깊이 성찰하라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신앙이 성장하고 있는가? 나는 제대로 믿음이 자라고 있는가? 나는 현재 열매를 맺고 있는가? 판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 읽기, 묵상, 암송을 제대로 할 때 여러분은 분명히 자신 안에 변화를 스스로 감지할 수 있으며,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증거와 양심의 증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변명과 합리화가 아니라 변화가 보이며, 열매로 입증됩니다. 믿음으로 마음속에 말씀을 암송할 때 말씀이 우리 안에 주는 영적 유익과 드러나는 결과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첫째, 혼의 회심이 있습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시19:7a). 말씀은 혼을 회심시킵니다. 마음의 변화를 유발합니다. 생각의 변화 즉 가치관의 분명한 전환을 이루어 줍니다. 내 안에 이런 회심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읽은 성경 말씀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평생 처음 간 교회에서 평생 처음 들어본 설교를 통해 회심했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롬3:10-12). 무려 여섯 번에 걸쳐 [없나니, 없으며, 없고, 없으며, 없나니, 없도다]란 말씀에 저는 의인이 아니라 완전한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누구에게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신학적 설명을 들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혼을 회심케 했던 것입니다. 

 저의 이런 체험은 먼 훗날 성경과 많은 선배 신앙인들의 체험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 1: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이 들어왔을 때 회심했습니다. 요한 웨슬레 역시 그러했습니다. 신앙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하나같이 말씀을 통한 강력한 회심에 대해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는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저는 선교 단체에서 수많은 죄인들이 말씀을 받고 회심하는 사건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들의 변화된 삶을 보았습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시키고](시19:7a)란 말씀은 성경적 진리입니다. 회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회개를 늦추고 있거나 헌신을 늦추고 있거나 회피하는 혼들이 있다면, 이 시간 회개하고 회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은 했고, 교회는 다녔지만 진정한 회심을 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는 기독교란 종교를 하나 가진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내가 믿은 것이 몇 년인데...”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위로하지 마십시오. 회심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나중에는 회개할 기회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서에 주님이 반복적으로 증언 하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더라.](요12:40). 말씀을 보고 들어도 마음이 강퍅하면 깨달아 회심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도 반복해서 증언 했던 말씀입니다(행15:3, 행28:27). 마음이 강퍅할 때 말씀이 선포되어도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지] 못하게 되어 주님의 고침을 받지 못합니다. 말씀을 선포한 후에 사도 베드로는 청중들을 향해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抹消)될 것이요,](행3:19)라고 설파 했습니다. 말씀을 통한 회개와 회심이 없었던 분들은 이 시간 회개하고 회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지혜롭게 됩니다. [{주}의 증언은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19:7b). 이미 지난 시간에 성경 암송과 지혜에 대해서 증언 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아무리 우둔한 자라도 지혜롭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혼의 회심과 더불어 지성의 변화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십시오. 그들은 갈릴리 어부 출신의 학문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은혜롭고도 권세가 있었고, 구약 성경의 예언들을 관통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이제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그들이 학문 없는 무식한 사람들인 줄로 알았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또 그들에 대해 즉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것을 알게 되고](행4:13). 주님의 말씀을 읽고,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은 누구나 지혜롭게 됩니다. 여러분은 인류 역사에 빛을 남긴 사람들이 대부분 성경을 읽고 묵상한 기독교인들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반면 성경을 무시한 자들 중에 위대한 사람이라 칭송받는 자들은 대부분 지혜를 혼잡 시킨 사람들입니다. 공산주의 선언을 했던 마르크스는 유물론과 계급 투쟁이론으로 수많은 혼들을 지옥으로 인도했으며, 살상과 전쟁의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정신 분석학으로 유명한 프로이드는 성도착증 환자에 불과한 정신병자였으며, 무의식과 잠재의식, 초자아란 용어로 혼들을 지옥으로 인도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세기의 천재로 칭송받지만 그는 상대성 이론으로 진리의 절대성과 가치관에 일대 혼란을 야기하며 정신세계를 혼란으로 몰고 갔습니다. 천부인권론을 주장한 루소나 인류에 빛을 주었다고 자부하며 “계몽주의”라 일컬음을 받던 자들의 언행은 지혜를 혼잡케 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 배움이 짧은 사람들도 말씀을 접한 후로 놀라운 지혜와 명철을 얻었던 예는 허다합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0). 선교사들이 성경을 들고 학교도 없는 나라와 민족에게 복음을 들고 가서 교회를 세웁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들은 학교가 세워지고, 병원이 세워집니다. 여자들은 자유를 얻게 되고, 인권이 향상됩니다. 지식 산업이 번창합니다. 이 세계에 지식 산업을 주도하는 나라들은 모두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들입니다. 가난과 문맹을 벗어난 나라들은 모두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우는데 관대한 나라들입니다. 이는 국가뿐이 아닙니다. 가정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믿고 암송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놀랍도록 지혜와 명철이 열립니다. 솔로몬은 잠언이란 성경 기록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자에게 민감함을 주고 젊은 자에게 지식과 분별을 주기 위한 것이니](잠1:4).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암송할 때 수용성 감각이 민감해 집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머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분별력이 생겨서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셋째,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주}의 법규들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시19:8a). 말씀은 마음에 기쁨을 줍니다. 성경을 읽을 때 마음에 아무런 감흥도 없다면 여러분은 말씀 읽기나 묵상이나 암송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설교를 듣는데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짜증이 나고 불만이 쌓이는 사람은 그날 가인의 예배를 드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주님이 받지 않으신 예배이기 때문에 짜증이 납니다. 분노가 일고 짜증이 납니다. 주의 법규들은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주의 증언들은 또한 나의 기쁨이요, 나의 조언자이니이다.](시119:24). [주의 친절한 긍휼이 내 위에 임하게 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기쁨이니이다.](시119:77). 이 기쁨이 없다면 성도들은 이 죄악된 세상, 음란한 세상, 악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지 못합니다. [주의 법이 나의 기쁨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나의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119:92). 근심과 고통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근심과 고통이 나를 붙잡았사오나 주의 명령들은 나의 기쁨이니이다.](시119:143).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평안을 주셨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성경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의 삶은 참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렘15:16).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대언자)로 불릴 만큼 슬픔과 애곡의 눈물을 흘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한 대부분의 대언은 조국과 동족들의 멸망이요, 심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 흐르는 눈물만큼이나 그 마음속에는 흐르는 기쁨의 강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대언자 하박국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고의 열매가 없고 밭이 먹을 것을 내지 아니하며 우리에서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로다.](합3:17-18). 그는 사람들이 울어야 할 상황에서 기뻐하며 또 기뻐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쁨 가운데 충만한 성도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진정으로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기쁨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의 어떠함이 그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 항상 기뻐하며 간구했습니다. [너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뻐하며 간구함은](빌1:4). 복음이 선포되는 것으로 기뻐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바울을 괴롭힐 목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에게 더 큰 형벌을 주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복음을 증언 했지만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참으로 기뻐하리라.](빌1:18).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며 이제 얼마 후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며 또 너희의 믿음의 희생과 섬김 위에 내가 헌물로 드려질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로 이런 까닭에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그는 죽으면서 유언장과 같은 서신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권면은 유언입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를 기뻐하라.](빌3:1a).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죽으면서 하는 그의 말은 [나의 형제들아 항상 [주]를 기뻐하라]입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기쁨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 속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포도즙이 불어날 때의 기쁨 보다 더 크니이다.](시4:7). 우리가 평소에 아무리 못해도 급여가 오르고 연봉이 오를 때보다는 더 큰 기쁨이 내 속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기쁨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주께서 생명의 행로를 내게 보이시리니 주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토록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이 말씀은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이 구절을 주님의 부활에 인용했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들을 내게 알려 주셨으니 주의 얼굴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이다, 하느니라.](행2:28).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성령 충만은 기쁨 충만입니다. [그 도시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8),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님]으로 충만하더라.](행13:52). 복음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기쁨을 얻지 못하면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이 비정상이거나 영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넷째, 성경 암송을 통해 말씀을 마음속에 두게 되면 눈이 밝게 됩니다.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시19:8b). 눈이 열린다는 것은 영적 지각의 눈을 말합니다(엡1:18). 이 눈이 열리면 주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주님 안에 있는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엡1:18). 주님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엡1:19). 성경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되면 자신이 비참한 죄인이란 사실과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사64:6),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렘17:9)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겉모습은 의롭고 부족한 것이 없고, 부유해 보일지라도 ‘가련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계3:17)을 보고 알게 됩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지각의 눈이 열리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밝히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남의 눈에 있는 티가 보였으나 이제는 자신 안에 있는 들보가 보입니다(마7:4-5).

 말씀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함으로 놀라운 것을 보게 합니다. 하갈의 눈을 열어 샘을 보게 하시고(창21:19), 게하시의 눈을 열어 불 말과 불 병거를 보게 하시며(왕하6:17), 소경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며, 우리의 눈을 열어 주사(행26:18)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엡1:18). 발람의 눈을 열어 주의 천사를 보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눈도 열어 주사 보게 하십니다. 욥은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음속에 들어 온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네가 믿고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라.](요11:40b). 우리는 눈을 들어들어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아야](히12:2)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께서 내 눈을 여사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내가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보화를 알아보는 눈, 보물을 찾아내는 눈이 진정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성경 암송을 통해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생깁니다. [{주}의 두려움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전적으로 의로우니 그것들은 금보다, 참으로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들이며](시19:9-10a). 말씀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성경 묵상과 암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암송하십시오. 말씀은 진정으로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할 때 최상의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의 금은보다 더 좋으니이다.](시119:72). 천천의 금은을 얻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노력과 열정과 마음의 절반만 말씀에 쏟으면 천천의 금은 이상을 내 마음속에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창고와 은행 계좌에는 쌓은 것이 없을지라도 마음속에는 이 땅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하늘의 보화가 쌓일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므로 내가 주의 명령들을 금보다 더 사랑하오며 참으로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119:127)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형제는 말씀을 배우기 위해 직장을 희생하고, 학교를 희생하고, 자신의 삶을 희생합니다. 이전에는 정금을 얻기 위한 삶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사랑하는 말씀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정금보다 더 사랑한 말씀을 얻게 됩니다. 

 여섯째, 말씀의 단 맛을 알게 됩니다. [또 꿀과 벌집보다 더 달도다.](시19:10b). 말씀의 단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지속적인 성경 읽기와 묵상이 매우 어렵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 사람들은 오히려 즐겁습니다. 성경 읽기와 암송은 어떤 일보다 가볍고 쉽습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신문을 읽는 일보다 TV를 보는 일보다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일이 힘들다면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지금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믿음은 가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미 이곳에 계신 분들은 거듭난 성도들이며, 거의 대부분 믿은 지 수년 또는 수십 년이 지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을 규칙적으로 통독하지도 않고 암송하지도 않고 그 단 맛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라면 회개를 필요로 합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다윗의 고백만이겠습니까? 신실한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같이 성경 읽기와 암송에 매진했습니다. 

 여러분이 무인도로 간다거나 먼 여행을 가는데 단 한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슨 책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지도책이나 요리 책이 아닙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 책은 성경입니다. 

 일곱째 말씀으로 경고를 받습니다. [주의 종이 또한 그것들로 경고를 받나니](시19:11a). 성경은 엄중한 경고의 책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을 통해 엄중한 경고를 받습니다. 우리는 길을 여행하다보면 계속해서 경고 표지판을 보게 됩니다. 강이나 호수, 바다에는 수영 금지를 알리는 경고판이 있습니다. 도로에는 공사 중이란 경고판이 붙어 있고, 식당이나 건물 안에는 ‘미끄러짐 주의’란 경고문이 있고, 물건을 사면 ‘파손 주의’란 경고문이 있습니다. 약을 사도, 식품을 사도 거기에는 항상 경고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고와 주의를 받으며 삽니다. 경고를 해야 함에도 경고를 하지 않음으로 천문학적인 피해 보상을 한 사업주도 있고, 경고를 했음에도 무시했다가 큰 재앙을 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어떤 경고를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헛되이 읽은 것입니다. 성경은 엄중한 경고의 연속이며, 우리는 마땅히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고를 해 주어야 합니다. 침례인 요한은 경고자였습니다(마3:7). [그때에 그가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게 하더냐?](눅3:7). 노아는 하나님께 경고를 받아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두려움으로 움직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자기 집을 구원하였으니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설교자는 모두 경고자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선포하며 각 사람에게 경고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우리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자로 드리고자 함이니라.](골1:28). 경고를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 하는데 ‘겁준다, 공갈 협박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듣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마귀로부터 온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생각과 마음이 오작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경고자였습니다. [아무도 어떤 일에서든 도(度)를 넘어 자기 형제를 속여 빼앗지 말라. 우리가 또한 너희에게 미리 경고하고 증언한 것 같이 [주]께서는 그런 모든 자들에게 복수하는 분이시니라.](살전4:6). 바울은 주님이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미리 경고하고 증언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때, 죄를 짓는 형제들을 권면할 때 이와 같이 미리 경고하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오해를 받고, 욕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담대하게 책망하고 경고해도 됩니다. 경고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형제들아,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권면하노니 제멋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위로하며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에게 인내하라.](살전5:14). 괜히 겉멋 부리며, 인품이 있는 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은 강퍅한데 신사인척 흉내 내는 신자들이야말로 정말 위선자들입니다. 경고해야 할 때 이해한다며 동조하는 바보가 되지 마십시오. 책망해야 할 때 이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존경하고 친한 형제들이라도 그들이 죄를 범할 때, 결코 그들에게 동조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보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경고하십시오. 악한 사귐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십시오. 믿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경고하십시오. 듣지 않는 것은 당사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경고하지 않으면 우리의 책임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을 경고하십시오. 말씀이 들어오면 경고를 받고 경고를 해 주십시오.

 여덟째, 말씀을 지킴으로 보상을 얻습니다. [그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報償)이 있나이다.](시19:11b). 우리는 연초에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여덟 차례나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히11:6). 우리 각 사람은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습니다. [이제 심는 자와 물주는 자는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고전3:8).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말씀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이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큰 보상이란 무엇입니까? [이 일들 뒤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防牌)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報償)이니라, 하시니](창15:1). 주님 자신이 큰 보상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아내의 어떤 것보다 아내 자신이 큰 보상이요, 부모에게는 자녀들이 큰 보상이듯이 성도는 주님이 주시는 어떤 선물보다 주님 자신이 가장 큰 보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빌3:8-9)보다 더 큰 보상이 없습니다. 

 큰 보상을 얻는 방법은 첫째, 말씀을 지키는 것이요 둘째, 확신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확신을 버리지 말라. 그것이 큰 보상(報償)의 보응을 얻게 하느니라.](히10:35). 셋째, 의(義)를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보상(報償)이 크니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말씀을 믿고, 묵상하고, 암송할 때 주어지는 효과 및 결과는 [혼의 회심, 지혜롭게 됨, 마음의 기쁨, 눈의 밝음, 말씀에 대한 사랑, 말씀의 맛, 경고를 받고, 큰 보상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