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과 영, 혼, 몸
말씀: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성경을 암송하라! 이 말씀을 하기 위해 참으로 오랫동안 여러 가지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 마디로 “외우라” 해 버리면 될 것들을 몇 개월에 걸쳐서 성경 암송의 유익과 결과와 이유 등을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또 선포했습니다. 성경을 암송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계속해서 성경 암송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머리나 손이나 입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외우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그러하지만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전에 학교에서 커피를 한 잔 먹으려고 동전을 넣고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판기에는 학생들이 그려 놓은 그림, 글귀들이 참으로 많았는데,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별 미친놈이 쓴 글귀구나 생각하며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았는데 그 글귀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참으로 명언 중의 명언이었습니다. 무엇인가 미치도록 전념하고 열정을 쏟아 붓지 않으면 어떤 목표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을 한국말의 독특한 소리에 맞추어 간결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 암송 역시 취미삼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전에 제가 성경 암송 일곱 번째 시간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란 제목으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이미 설교했습니다. 성경 암송을 위해 어떤 사람은 12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첫째, 사랑하는 마음 둘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셋째,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마음 넷째, 성령님을 의지하는 마음 다섯째, 신실한 마음 여섯째, 깨끗한 마음 일곱째, 겸손한 마음 여덟째, 지혜로운 마음 아홉째, 믿는 마음 열 번째, 최선을 다하는 마음 열한 번째, 실천하는 마음 열두 번째, 인내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잘 인식한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생각입니다. 마음은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상하면 몸도 상합니다. 마음이 악하면 눈도 악합니다. 마음이 더러우면 몸도 더럽습니다. 마음의 문제는 곧 신체의 문제이며, 그 사람 전체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기쁘면 몸도 기쁘고 힘이 납니다. 별 다른 음식을 섭취하지 않았는데도 몸의 상태가 훨씬 좋아집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즐거움 자체가 골수의 양약이 됩니다. 이것은 현대 의학에서 최근 들어 속속 증명하고 있는 문제들이지만 성경은 이미 3500년 전부터 이 사실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속이 뜨거우면 몸도 뜨겁게 불타오릅니다. 눈에서 눈물이 나고, 입은 열변을 토해 내거나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우므로 내가 생각에 잠길 때에 불이 붙으니 이에 내가 내 혀로 말하기를, {주}여, 나로 하여금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시39:3-4). 시편 기자는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자 생각도 불이 붙었고, 그 혀는 주를 향해 기도를 쏟아 내었습니다.

마음이 시들면 몸도 시듭니다. [내 마음이 얻어맞아 풀같이 시들었으므로 내가 빵 먹는 것도 잊고 있나이다.](시102:4). 마음이 떠나면 몸도 떠납니다. 마음이 갈라지면 몸도 갈라집니다. 마음이 확정되면 입은 노래가 나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 영광으로 찬양을 드리리이다.](시108:1). 마음이 어리석으면 몸은 고생합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몸을 망칩니다. 마음의 상태는 우리의 몸과 일상의 삶과 너무나 밀접한 관계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그가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듯이 실제도 그러한즉](잠23:7a)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됨됨이 즉 그 사람의 어떠함은 그 사람의 소유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을 다 잡는다. 마음을 닦는다.”는 등 마음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마음만 통제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몸을 자신이 마음대로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외부적 환경을 바꾸어 줌으로써 마음에 변화를 주거나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내부로 무엇인가를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람들이 쓰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여행을 한다. 운동을 한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 먹는 것을 조절한다, 취미 생활을 한다, 뭔가에 몰두해 본다... 등등입니다. 외부의 무엇을 가지고 내부를 고치려는 이런 일은 일시적으로 약간의 변화를 주고,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나병환자에게 옷을 바꾸어 입히는 정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데는 외부적인 일과 환경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더 깊은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靈)입니다. 영과 마음의 관계는 마음과 몸의 관계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내 영이 내 속에서 짓눌리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황폐하나이다.](시143:4). 영이 눌리면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마음이 황폐해지면 눈도 충혈 되고 혈색이 검어지거나 누렇게 뜨거나 사색이 됩니다. 먹어도 음식 맛을 모릅니다. 재미있는 것을 보아도 즐겁지 않습니다. 영이 짓눌리기 때문입니다. 영은 몸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으로 인해 그들에게 물을 주사](느9:20). 주님은 선한 영을 주셔서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되면 입은 결코 주리지 않고, 목은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해결책은 영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한 새 영을 넣어 주며 그들의 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로 된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겔11:19). 몸은 병원의 의사들도 찢고, 꿰매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부족한 것은 약물을 투여해서 보충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것들은 도려내어 버리고, 죽여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영은 손도 대지 못합니다. 주님의 해결책은 언제나 영입니다. 선한 영을 주시고, 새로운 영을 넣어 주심으로 마음을 바꾸십니다.

다윗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숨겼다가 혼과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운동이나 음식이나 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마음과 영의 문제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떠받쳐 주소서.](시51:10-12). 영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집중적으로 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몸이 아니라 영이었습니다. 성도의 삶은 영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영과 혼과 몸의 관계를 잠깐만 살펴보겠습니다. [즐거운 마음은 얼굴을 기쁘게 하나 마음의 슬픔은 영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이 구절은 영, 혼, 몸의 상관관계를 잘 말해 줍니다. 즐거운 마음(혼)➠ 얼굴을 밝게 하나(육). 혼의 상태가 육(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칩니다. [즐거운 마음은 약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말리느니라.](잠17:22). 상한 영(영)➠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몸). 영이 몸에게 미치는 영향입니다. 영, 혼, 몸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몸이 괴로우면 마음도 짜증나고 괴로운 것은 이미 다 경험하는 사실들입니다. [사람의 영이 그의 병약(病弱)함을 지탱하려니와 상처 입은 영은 누가 감당하리요?](잠18:14). 영➠ 병약(몸). 영이 몸을 지탱합니다. 영적이란 말은 영이 혼(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혼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질서가 잡힌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되면 그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몸의 권한이나 능력이 너무나 강한 사람을 우리는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혼이 몸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짐승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영적인 힘이 너무나 미약합니다.

핵심은 언제나 영입니다.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핵심은 영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너희의 모든 범법을 너희에게서 떨쳐 버리라. 그것들로 너희가 범법하였느니라. 너희를 위하여 새 마음과 새 영을 만들지어다.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18:31). 주님은 새 마음, 새 영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내게 임하면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그는 대언을 했고, 거룩한 분노로 홀연히 일어나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 했을 때 주의 영은 떠나고 악한 영이 임함으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는 극심한 편두통이나 간질과 같은 발작 증세를 보인 것 같습니다. 영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실 때 그의 영을 움직이십니다. [이제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제일년에 {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靈)을 움직이시매 그가 자기의 온 왕국에 두루 선포하고 또 그것을 글로도 기록하여 이르되,](스1:1). 이렇게 영을 움직이면 그는 변화됩니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로서 배 속의 모든 부분을 살피느니라.](잠20:27).

사람은 모두 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상태의 사람들은 영이 죽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죽음이 아닙니다. 소멸도 아닙니다. 역할, 기능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영적 상태를 한번 점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자신이 어떤 영을 지녔는지 모르고 있다면 곤란합니다. 사도 요한과 야고보는 자신들이 어떤 영을 지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 다.]/But he turned, and rebuked them, and said, Ye know not what manner of spirit ye are of./(눅9:55). 1. 상한 영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상한 영이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는 그런 영을 말합니다. 악한 생각을 하든, 말을 하든, 마음에 즉시 환란과 곤고함이 임한다면 영이 상했음을 보여 줍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한국 사람들은 주로 ‘속이 상한다/답답하다’고 하는데 그보다 좀 더 깊은 의미입니다. 상한 영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무엇으로 상했는지 고하십시오. 기름 부어 주시고, 싸매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이는 자신의 죄 문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의 불신과 육신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서도 마음과 영이 상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보면서 기쁨과 힘과 위로를 얻고, 타락과 실족함을 보면서 영이 상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상한 영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희생물입니다. 상한 영은 뼈를 마르게 합니다. [즐거운 마음은 약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말리느니라.](잠17:22).

그렇다면 이것의 치료법은 무엇입니까? 성경 암송입니다. [그것이 네 배꼽에 건강이 되며 네 뼈에 골수가 되리라.](잠3:8). 말씀이 결국 성도의 건강을 책임집니다. [내 아들아, 내 말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들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한가운데 간직하라. 그것들은 그것들을 찾는 자들에게 생명이 되며 그들 모두의 육체에 건강이 되느니라.](잠4:20-22). 계속해서 말씀이 육체를 얼마나 건강하게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6:63).

2. 신실한 영 - [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은밀한 일들을 드러내나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문제를 숨기느니라.](잠11:13).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그 입도 신실하고 무겁습니다. 영이 몸에 미치는 결과입니다.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신실하신 그리스도의 신실한 대사가 됩니다. 신실한 대사는 복음의 좋은 소식을 들고 나아갑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영·혼·몸을 건강하게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사악한 사자(使者)는 해악에 빠져도 신실한 대사(大使)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3:17). 신실한 영을 지닌 사람은 신실한 사자입니다. 이들은 혼을 시원하게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신실한 사자(使者)는 그를 보낸 자들에게 마치 수확 때에 내린 차가운 눈 같으니 그는 자기 주인들의 혼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25:13). 우리가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내 자신에게만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몸의 건강을 증진시켜 주는 일입니다.
3. 거만한 영 - [멸망에 앞서 교만이 나가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잠16:18). 거만한 영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합니다. 교회 내로 들어와 보면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형제, 자매들이 유난히 거만한 영의 소유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세대주의 신학과 전천년 재림, 환란 전 휴거와 같은 몇 가지 교리를 가지고 나머지 모든 교회 교인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지금도 젊지만 제가 지금 보다 더 젊은 그리스도인시절 그러니까 아내도, 아이도 없었고 목사도 되기 전, 거리에서 열심히 전도하던 시절, 저는 실로 아주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의 차이,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 성경의 차이, 세대별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 영혼육의 3분법 등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어린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대를 바르게 나누어 올바른 세대에 알맞게 합당한 성경구절을 제시해서 성경을 해석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신자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지극히 영적이고 성경적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보니 저보다 한 수 더 뜨는 성도들을 교인으로 맞게 되었습니다. 목사 앞에서 목사 욕하는 것을 즐기는데다 교회를 욕하는 것이 아주 습관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늘 설교만 끝나면 모여 앉아 비방과 험담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을 몇 년간 보냈습니다. 성경을 아주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출판사에서 나온 한 분 저자의 책을 몇 권 읽은 것이 밑천의 전부인 성도들이었습니다. 모두 거만한 영으로 교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해결은 둘 중 하나입니다. 회개하고 변화를 받든가? 교회를 떠나든가?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모습을 바르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저와 같은 동류의 사람들을 앉혀 놓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결코 거만한 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기꾼 야곱이 자신 보다 한 수 더 뜨는 외삼촌 라반을 만남으로 징계와 훈련을 받은 것처럼 거만한 영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보다 교만한 사람들을 만나 부서지는 것입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계속 반복하십니다. 회개하고 겸손한 영을 소유할 때까지, 변화를 받을 때까지, 새롭게 될 때까지 점점 강도를 높이십니다. 거만한 영은 바위를 부수는 망치 같은 말씀으로 완전히 부수어 버리십니다. [{주}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는 쇠망치 같지 아니하냐?](렘23:29).


제가 이 교회를 담임한 후에 자꾸 성도들이 떨어져 나가고 갈라지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육신과 육신이 부딪히고, 거만한 영의 소유자들이 함께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육신적인 성도들과 별로 거룩하지도 경건하지도 않는 목사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육신적이란 것은 성령의 은사와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의 권능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신학적 지식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그들 속에 있는 거만한 영, 교만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4. 겸손한 영 - [자기를 낮추는 자와 함께 겸손한 영을 갖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노략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19). 겸손한 영을 소유한 자는 자신을 낮춥니다. 남을 고쳐 주려고 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살피고 변화 받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들보를 찾아내어 없앤 후에 남을 돌아봅니다. 겸손한 영을 소유한 사람은 겸손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습니다.

5. 참는 영, 조급한 영 - [일의 끝이 일의 시작보다 낫고 영 안에서 참는 자가 영 안에서 교만한 자보다 나으니 네 영이 조급하여 분노하지 말라. 분노는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머무르니라.]](전7:8-9). 성질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말을 참지 못합니다. 형제들의 그런 점은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매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이것은 정말 가관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자매는 자신이 100 마디를 하면서 상대방은 한두 마디도 제대로 못하도록 쏟아냅니다. 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생각이 끊기기 전에 말을 다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듣지도 않고 다시 200 마디를 합니다. 이런 것은 타고난 성격의 문제일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만 현재 그 사람 안에는 참는 영이 없고, 영이 조급한 것이 문제입니다. 영이 조급한 것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도 아닙니다.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않습니다(사28:16). 성령은 인내와 오래 참음, 절제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믿은 지 몇 년이 지났든지, 내가 어떤 교회를 다니든지, 성경을 몇 독을 했든지 여전히 영이 조급하다면 그는 아직 말씀이 내 안에 제대로 묵상이 되고, 암송이 된 상태가 아닙니다. 자아가 상하는 것, 자존심이 약간이라도 손상되거나 폄하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아의 상함, 모욕, 비난, 폄훼, 오해, 모순됨, 억누름 등에 대해서는 일체 죽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반응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모습을 제대로 알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용서하는 마음, 오래 참는 마음, 절제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영이 조급한 것은 심각한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진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큰 명철(明哲)이 있으나 영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높이느니라](잠14:29).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시14:1)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영이 조급한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를 높이는 것과 같은 자란 사실입니다.

참는 영은 누구나 소유해야 하지만 특별히 자매들이 소유해야 할 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하고 조용한 영입니다.
6. 온유하고 조용한 영 - [오직 마음의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즉 온유하고 조용한 영(靈)의 장식으로 할지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벧전3:4). 베드로는 특별히 아내들에게 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외모를 꾸미기보다 마음을 꾸미십시오. 자매들은 형제들보다 언어적 감각이 발달해서 남편들의 입을 막고, 꺾어 놓는데 탁월한 재주들을 타고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선천성이든 후천성이든 대부분 그런 것을 봅니다. “나는 남편에게 말로는 못 당해.”라는 자매들을 본 적도 들은 적도 거의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든 집에서든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장식으로 자신을 단장하십시오. 이것이 안 되어서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고, 마귀에게 틈을 주고, 빌미를 주는 예가 허다합니다. 사탄이 에덴에서 여자를 통해 에덴을 뒤집어 놓았듯이, 오늘날 교회 역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조용히 배울지니라.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딤전2:11-12). 이 말씀은 여성을 비하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저의 자매에게 교회에서 거의 말을 못하게 합니다. 교회에서 사모들은 벙어리가 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한 번의 사건으로 깊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교회 회의를 할 때 자매들은 제외합니다. [너희의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느니라.](고전14:34). 이 말씀은 저의 말이나 견해가 아니며, 특정 교단의 보수적 신학이 아닙니다. 해석도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이라고 틀어서 해석하여 불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암송해 두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덕 있는 자매, 지혜로운 자매란 찬사가 뒤따를 것이며, 믿음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7. 올바른(정직한) 영 -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올바른 영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최고의 덕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지 못한 예는 자주 있습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란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숨기기 위해서 얼버무리거나 숨기거나 침묵합니다. 그것도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privacy를 중히 여기는 사람일수록 정직과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비밀을 공유할 수 없다면 그는 참된 친구가 아니며, 형제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친구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려는 일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왜?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숨기지 않으시고 모두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직하지 못합니다.

제가 겪은 어떤 형제님은 성경도 많이 읽고, 열성도 있어 보였습니다. 말도 잘합니다. 그런데 형제가 하는 말이 틀리고, 그 자매가 하는 말이 틀리고,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틀리고, 그 자녀가 하는 말이 틀립니다. 도무지 정직함이 없다 보니 이름 석 자 빼고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한두 번은 이해하려고 하고 덮어 두었는데,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더 드러나고 커지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며 회개하고 솔직히 털어 놓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해야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자주 하는 거짓말 중에 하나는 성도의 수, 교회 헌금 액수 등을 부풀려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입에 베여 있습니다. 무슨 서류를 꾸미는데도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씁니다. 이민 변호사의 말을 빌면 목회자들의 이민 서류는 거의 가짜가 태반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연소득이 40,000불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정부나 학교나 시의 어떤 혜택을 받기 위해서 제시된 기준은 연소득이 35,000불이라고 합시다. 5,000불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꺼이 연소득 35,000불이라고 고쳐 써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교회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예외가 거의 없습니다. 아예 생각도 말아야 하는데 몇 백 불 밖에 차이가 안 나면 거리낌 없이 고쳐 버립니다.

올바른(정직한) 영이 실종된 성도들의 모임이 이곳 한인 교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몇 몇 안 그런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것 같지만 그만큼 정직의 영이 없는 것은 가슴 아프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서 정직하게 살고자 하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히13:18). 어떤 사람은 죽도록 공부해서 명문대를 나오고 변호사, 의사, 회계사가 되었습니다. 하는 일은 매일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부정과 불법을 자행하며 삽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안 된다고 말하며,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고 하면서 마음을 위로하고 변명하며 그렇게 삽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요, 직업상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위치에 있다면 직종을 바꾸어야 합니다. 변호사라면 변호사를 그만두고, 의사라면 의사를 그만두고 정직하게 일해서 살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9. 생각의 영 - [너희의 생각의 영 속에서 새롭게 되라.](엡4:23). 생각의 영이란 우리의 마음이 생각하게 하는 힘을 주는 영을 말합니다. 생각은 육체적 생물학적 활동 결과가 아니라 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은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영역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이 있고, 자기도 모르게 솟아나는 생각도 있습니다. 생각의 영을 통해서만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영 속에서 새롭게 되라.]란 말은 거듭난 영, 새롭게 창조된 영을 통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의 생각의 근원은 죽은 영이요, 세상의 영이요, 더러운 영이요, 마귀의 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강은 우리의 생각을 지켜 주시며 가르치고,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은혜 역시 그렇습니다.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지 않고는 누구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란 갑옷을 하나 걸치고, 성경을 손에 들고, 크리스천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살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것이 거듭나기 이전과 똑같지는 않습니까?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지 않았다면 구원받기 전에는 육신적인 생각을 하며 지옥으로 향해 걸어갔고, 구원받은 후에는 육신적인 생각을 하며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걸어가는 방향은 바뀌었는데 풍기는 냄새도 같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같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행동하는 것도 같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성령의 열매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도 없습니다. 마음에는 읽혀질 그리스도의 서신도 없습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열정이나 뜨거움도 없습니다. 믿음의 활동도 없어서 죽었는지 잠들었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빛은 너무나 미미하고 약해서 비추어지고 있는지 아예 꺼져 있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아무리 많이 넣어도 맛이 나지 않는 소금처럼 교회가 아무리 많고 성도가 아무리 많아도 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 킹제임스 성경을 잡았다는 것, 성경에 나오는 용어를 읊을 줄 알고, 찬송가를 부를 줄 알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바뀐 것이 없습니다. 성장, 성숙, 변화, 부흥이란 말이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나에게는 나의 남편과 아내, 나의 부모와 자식들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줄 알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타고난 육신의 성품은 개혁되거나 개조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랜 교회 생활로도 되지 않습니다. 좋은 설교를 듣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을 연발해도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다투고 싸우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다 보니 저절로 해결된 것이라면 성장도 성숙도 변화도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신성한 권능(divine power)을 받아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해야 합니다(벧후1:3-4). 이 사이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벧후1:4a). 말씀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암송과 묵상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변화된 삶이란 개혁된 삶, 개조된 삶이 아닙니다. 변화는 변장이나 변질이나 가장이나 위장이 아닙니다. 변화란 교환된 삶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성령,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고 살아가시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완전히 뒤바뀐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영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생각의 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딤후1:7).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땅은 영적인 삶의 체험 현장입니다.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아보며 그 권능을 체험해 보는 그런 삶의 터전입니다.

몸은 이전과 그대로이지만 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서 살아 보는 것입니다. 마치 겉껍데기는 그대로이지만 엔진을 갈아 끼운 차량이나 시스템을 바꾸어 버린 컴퓨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중 모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 옛 성품, 옛 마음, 옛 사람의 모든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살 수도 있고, 새 성품, 새 마음, 새 영, 새 사람의 것을 받아서 살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이 하는 것입니다.

영을 새롭게 하는 일은 영이신 하나님,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성경을 영이요 생명으로 알고 믿고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만 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