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노라.]
오늘은 성경을 암송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말씀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이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고, 말씀을 보내셔서 행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누구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거듭남이 진리이듯이 말씀을 통한 거듭남 역시 진리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영적 생명의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만 사람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구령하고 싶은 소원이 있는 성도들이라면 말씀을 많이 암송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말씀을 간직하고 있으면 그 말씀이 입으로 나오게 됩니다. 입으로 나온 말씀은 곧 씨앗이 됩니다. 여러분이 손에 잡고 있는 성경은 31,102절이며 성경 정 중앙에 해당하는 구절은 시편 103:1-2절입니다. (어떤 분들은 킹제임스 성경은 31,175절에 시편118:8절이 한 중앙이라고 설교하는데 거짓말이다).
우리가 가진 킹제임스 성경은 신, 구약 66권이며, 1,189장(구약929/신약260장)으로 되어 있고, 절수는 31,102절이며, 성경 중에서 가장 양이 많은 책은 시편이고 가장 짧은 책은 절수로는 요한이서요, 단어로는 요한 삼서입니다. 성경의 중간 장은 시편 117편이고 가장 긴 장은 시편 119편이며, 가장 짧은 장은 시편 117편입니다. 가장 긴 절은 에스더 8:9절이며, 가장 짧은 절은 요한복음 11:35절입니다. 주님께서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말씀은 단어(word)를 말합니다. 이 말씀이란 곧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경 어휘들을 말하는데 788,258 단어입니다. 이 말씀이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썩지 않을 씨 즉 우리의 영적 생명의 탄생을 위한 씨앗이란 것입니다.
농부는 밭에 씨를 뿌릴 때 밭을 갈고 흙을 부수어 부드럽게 하는 작업을 하는 것 못지않게 종자를 고르는 안목이 중요합니다. 볍씨를 파종할 때도 좋은 씨와 나쁜 씨를 구분하기 위해서 물에 볍씨를 담가 둡니다. 물에 뜨는 씨앗은 못 쓰는 씨앗입니다. 그런 씨앗은 모판에 뿌리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철학자들의 말이나 그들이 정립한 용어를 사용해서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화려한 말재주를 자랑한다 해도 영혼을 구령하지 못하는 것은 그 말이 영적 생명의 씨앗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고전2:13). 학교에서 배운 학술 용어나 철학 용어, 책에서 배운 어떤 용어들을 다 동원해서 말을 해봐야 상대방의 지적 동의나 얻을 수 있지 그 사람의 혼을 회심시키지 못합니다. 혼의 회심은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어휘, words)로만 가능합니다.
오늘날 이곳 강단의 목사님들이 성도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애써 얻으려는 박사 학위는 주로 철학 박사, 목회학 박사, 교육학 박사, 신학 박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애써 공부해서 얻은 지식과 거기서 배운 어려운 전문 용어를 설교나 성경 공부에 꼭 써먹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성령의 능력과 영적 생명을 막아 버리는 일임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말들이 유식해 보이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높임을 받는 데는 유익이 있을지 몰라도 혼을 회심시키는 일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시19:7a)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나 성경 공부는 오직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성경 어휘들만을 사용하십시오. 바울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음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지 아니하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거니와 이 일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 말을 못하는 것은 복음 전도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가서 [하나님]의 증언을 밝히 말할 때에 말이나 지혜의 뛰어난 것을 가지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나니](고전2:1). [또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를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권능을 실증(實證)함으로 하였으니](고전2:4).
그럼 핵심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성경 말씀들을 읽고, 암송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말씀을 통해서만 옵니다.
성경을 암송하지 않고, 말씀을 마음속에 두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부흥이란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는 것이요, 그 말씀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내 마음 속에서 자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믿음도 열매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가시나무들 사이에 씨를 받은 자 또한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가 말씀을 숨 막히게 하므로 열매 맺지 못하는 자니라.](마13:22). 말씀이 숨이 막혔습니다. 그럼 그 사람의 믿음 역시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건 말건 그 사람은 변화나 성장이나 부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생명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십시오. 말씀이 자라는 것이 곧 교회의 성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고 크게 불어나더라.](행12:2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자라고 세력을 얻으니라.](행19:20).
태어나기는 했지만 자라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자폐아들을 보십시오. 지능이 자라지 않습니다. 특히 언어성과 사회성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몸은 점점 커지지만 그의 혼은 어린 아이 상태로 머뭅니다. 그 부모는 속이 타 들어갑니다. 다운 증후군을 앓는 아이를 보십시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다가 몸의 성장도 멈춥니다.
제가 아는 한 교회의 자매는 정말 유명한 아버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똑똑했습니다. 그러나 첫 결혼에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결혼했는데 또 이혼을 했습니다. 그 자매는 독한 마음을 먹고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와서 공부를 했습니다.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름대로 성취를 이루고 한국으로 돌아가 교수가 되었는데 아이를 돌아보니 뭔가 이상했습니다. 자폐였습니다.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하던 터라 아이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자매가 간증하기를 이혼을 할 때 속이 뒤집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지만 그래도 아이가 자폐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느꼈던 절망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자폐보다 자신을 더 처절하게 무너뜨린 것은 자신의 처지를 누구에겐가 공개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워낙 자아가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자매인지라 누구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자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열도록 환경을 몰아갔습니다. 결국 아이 문제로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열었습니다. 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이혼했고, 어떻게 미국에 가서 공부했고, 이 아이가 어떻게 자폐가 되었는가를 계속 말해야 했습니다. 입을 연다는 것은 마음을 연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아이를 치유하기 시작하셨는데 지금은 거의 정상이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이 자매는 자폐인 아이를 통해 영적 자폐가 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고 자라기 시작하자 환경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아이를 보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없습니다.
저는 제 아들이 유사 자폐를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능이나 언어적 인지력, 사회적 적응력이 매우 낮습니다. 몸은 정상인데 제대로 자라지를 못합니다. 저는 제 아이를 보면서 우리 교회의 모든 문제를 보았습니다. 성도들이 대부분 영적 유사 자폐를 앓고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이 교회에 온지 일 년, 이년, 삼 년이 지났는데 영적 깨달음이나 생각하는 것은 거의 제자리걸음입니다. 성장이 전혀 없었습니다. 열매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유치하고 말하는 것도 유치합니다(고전13:11). 그분들이 성격이 못돼 먹었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참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거의 바보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폐란 병을 앓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유일한 해결책은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것뿐입니다. 이곳에 갓 오신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계셨던 분들은 제 말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낙오되지 않으려면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십시오. 그 비결은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저녁에 기도 모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도태됩니다. 이 교회는 그런 교회입니다. 모여서 말씀 듣고, 모여서 기도합시다. 말씀이 자라나면 나도 자랍니다. 자라면 열매를 맺고 부흥과 변화를 경험합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말씀을 내 마음에 두지 않으면 깨끗함이 없습니다.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일러 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요15:3). 영적 순결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는 비결 역시 말씀 암송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죄악을 씻어 줍니다. 교회의 순수성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유지됩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엡5:26). 이곳 말씀 침례교회는 말씀의 은혜와 권능이 풍성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90일 부흥 기도회를 합니다. 매일 저녁 말씀이 선포됩니다. 일단 양적으로 넘쳐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들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기도하고 또 암송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나 90일이 끝날 때쯤이면 자신의 변화를 남이 먼저 알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변화, 가정의 변화, 교회의 변화’란 주제로 이 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회에 나오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바꾸어 주실 겁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몇몇 시건방진 성도들 가운데 말씀을 많이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설교를 많이 듣는 것보다 뭐가 어쩌고저쩌고 중얼 중얼댑니다. 그 때 여러분은 그런 사람의 눈을 똑 바로 쳐다보면서 간단히 말하십시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들의 논리는 아무리 그럴듯해도 내 사랑하는 이의 음성이 아닙니다. 말씀은 샘솟는 우물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넘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더러워집니다. 말씀이 내 안에 더 많이 암송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묵상을 통해 깨달음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시119:9). 마음속에 말씀을 간직한 사람만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씻기는 물입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이 어떻게 몸이 깨끗해졌습니까? [이에 그가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르단 속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 그의 살이 다시 나와 어린아이의 살같이 되고 그가 정결하게 되었더라.](왕하5:14). 우리는 King James 성경 속에 몸을 담가야 합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담그십시오. 모든 더러움이 깨끗하게 씻어지고 새 마음의 살이 돋아 날 것입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서 마음속에 질서가 잡힙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마음의 혼란이 정리되고, 질서가 잡히는 체험을 합니다. 교리적 용어의 혼란이 없습니다. 음부와 지옥이란 말이 교차되어 사용되지 않습니다. 음부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 우주에는 음부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귀신이란 말도 없습니다. 귀신이란 없습니다. 마귀만이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나 다른 여타 진리들도 성경을 통해 명쾌하게 정리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지 않는 자들은 모든 것이 짙은 회색이요, 뿌연 안개 속을 헤매는 듯이 애매모호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뜻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해석이 제 각각이기 때문입니다. 아예 성경은 알 수 없는 책이라고 단정 짓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주위에서 만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어떤 책이냐고 물어 보십시오. 진리의 성경(단10:21)이 아니라 도무지 알 수 없는 비유와 은유와 각종 알레고리로 가득한 애매모호한 책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함부로 해석할 수 없는 책, 아무나 읽고 알 수 없는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읽어도 좀처럼 자신이 제대로 믿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심이 갈 지경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눈을 밝혀 주는 책입니다. 미래를 알게 해주고 내 마음속을 비춰주는 그런 등이요, 빛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은 삶의 원리요, 원칙이요, 모든 생각과 행동의 근거요, 기준입니다. 성경은 나의 혼란을 정리해 주는 잣대요, 틀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려 주는 법전입니다. 성경을 통해 경고를 받고, 성경을 통해 보상이 무엇인지 압니다. 어느 누가 말하기를, “자주 그리고 천천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성경을 읽으라. 성경이 네 기억 속에 박히게 하고 마음을 지배하게 하며 발걸음을 인도하게 하라. ... 네가 살아 있을 때에 주께서 이 성경을 주셨으니 또한 심판 때에 이것을 펴시고 영원토록 너를 기억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암송해 두면 우리는 이리 저리 헤매지 않습니다. 즉시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일깨워주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마음에 암송해 두면 성령의 검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암송이 되어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무기를 찾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나마 제대로 잘 찾으면 좋지만 못 찾을 때는 찾다가 시간을 다 보냅니다. 에베소서 6:17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를 모두 다 입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진리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의(義)의 흉갑을 입고, 화평의 복음을 예비한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손에 잡았습니다(엡6:14-16). 그러나 이렇게 중무장한 멋진 갑옷을 입었다고 해서 원수들이 겁을 먹지는 않습니다. 갑옷만 입고 공격 무기인 칼이 없는 군사를 누가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입술로 예리한 검이 나올 것입니다. [내 입을 예리한 칼같이 만드시고](사49:2a). 마음에 암송된 말씀, 충분히 묵상이 된 말씀은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骨髓)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니](히4:12).
성령의 검을 잡지 않고 마귀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탄을 대적하실 때,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늘 “기록되었으되”란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he will flee from you. - 약4:7)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말씀을 검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번번이 실패하고 넘어지고 결심을 굳게 해도 또 넘어지는 분들은 내가 말씀을 검으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인가? 사용해 보았는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열매를 맺는 비결, 더 많이 맺는 비결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요15:4).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 기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그 말씀을 기초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일은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고(성경 암송), 그 거하는 말씀으로 원하는 바를 주님께 구하고(*기도) 주님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없이 기도할 수 없고, 기도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 없이 하는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고 이미 여러 차례 선포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잠28:9). 이 말씀을 마음속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말씀 없이는 기도 사역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기도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해 여러분이 취하는 태도에 따라 하나님 역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터이나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일찍 나를 찾아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주} 두려워하기를 택하지 아니하며 내 권고를 전혀 원치 아니하고 내 모든 책망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니라.](잠1:28-30). 새벽 기도를 해도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기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기록된 말씀들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영적인 양식이요, 음료이며 생명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영적인 생명은 말씀에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다면, 그들의 내면에는 사랑도 기쁨도 오래 참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젖/빵/고기/꿀/사과를 골고루 먹어야 합니다. 육신은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육신은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설령 준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일시적이며, 환경에 따라 급변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런 열매들을 풍성이 맺게 해 주시며,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더욱 강렬한 빛과 향기를 발하게 합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우리는 걱정, 근심, 불안, 염려,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걱정, 근심은 모두 믿음의 결여에서 옵니다. 불안, 염려 역시 주를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안전히 거하며 재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하리로다.](잠1:33).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은 믿음과 확신,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내 마음속에 간직할 때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환란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터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주님이 주신 말씀들로 인해 평안을 누리고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냅니다. 이 평안이 어떤 평안입니까? 주님 자신의 평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말씀을 통한 위로가 아니라면 참된 위로가 아닙니다. 성령은 위로자(요14:16)이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시고 싸매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눅4:18). 오늘날 교회를 둘러보면 “마음이 상했다, 상처받았다.”는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위로 받았다, 주님이 치유해 주셨다, 기름 부어 주셨다, 싸매어 주셨다.”는 간증은 거의 없습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말씀이 마음속에 거의 들어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설교를 듣고도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고 입이 샐쭉해져 가고 오랫동안 토라져 있습니다. 그리고는 설교에서 이런 것 저런 것은 좀 빼 주고, 이런 저런 것 좀 넣어 달라고 합니다. 언제부터 강단의 설교가 주님이 주시는 말씀 대신 성도가 요구하는 주문형 식단이 되었습니까? 설교는 주님이 전하라는 말씀만 전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걸림돌이 되어 자빠지든, 교회가 쪼개지든, 성도가 기분 나빠하든 그런 결과를 예측해 가면서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성도의 반응이나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씀만 전할 때 결국 듣는 사람들도 복을 얻고, 영적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분이 없겠지만 앞으로도 이곳에 누구라도 주문형 설교를 요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귀를 열어주시기를 구하고, 깨닫는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얻기를 구함으로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런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상처가 아무리 크게 나도 다 고침을 받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대해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의 말씀입니다.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를 심판하는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말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12:48).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경고를 받고, 책망을 받고, 바로 잡혀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섰을 때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상급들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요, 꿀과 벌집처럼 달고, 선한 말씀이지만 동시에 두려워 떨어야 할 심판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에 떠는 자들아,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를 미워하고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를 쫓아낸 너희 형제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영광 받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서 너희의 기쁨이 될 것이요,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리라.](사66:5).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형제"로부터 "미움"을 받고, "쫓겨남"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순간, 주의 말씀에 두려워 떨었던 사람들은 주님이 그들의 기쁨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았던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만약 우리 중에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목 베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환란 시대에 다가 올 일의 전조라는 사실임을 아십시오. 환란 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하더라."(계20:4)는 말씀대로 말씀으로 인해 참수형을 당합니다(계6:9). 말씀을 우리 속에 담아 두면 우리는 형제들이라 불리는 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나기도 하고, 목 베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이 우리를 심판한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말씀에 두려워 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만 보아도 과연 성도들이 말씀에 두려움을 가지고 대하는지 심히 의심스런 징후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솔직히 하나님의 말씀이 두렵고 떨립니까? 어떤 형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해,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완전한 사랑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없어서 공포 가운데 있습니다. 성도가 갖는 두려움은 경건한 두려움입니다(히12:28). 반면 어떤 형제는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라며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반쯤 죽도록 맞아 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주님께 맞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아직 주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거나 사생아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히12:8). *사생아: 법률적으로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버지의 인지(認知)를 얻으면 서자가 된다. ≒사생자‧사자(私子).
사생아도 아들처럼 보이지만 합법적인 아들이 아닙니다. 교회 내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많은 신자들 중에 사생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가인이 아벨을 핍박하고 죽이듯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듯이,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듯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말씀에 떠는 자들을 이상한 크리스천이라며 조롱합니다. 광신자들이라며 매도합니다. 에서가 아버지를 두려워했습니까? 멋대로 여자들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고, 첩을 삼았듯이 오늘날 신자라 불리는 많은 자들이 가인과 이스마엘과 에서처럼 행동합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아들, 받아 주시는 아들은 모두 단단히 매질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주님께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야무지게 맞아 본 사람은 한 마디 말에도 달달 떨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의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통치자들이 까닭 없이 나를 핍박하였으나 내 마음은 주의 말씀의 두려움 가운데 서 있나이다.](시119:161).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멸망하려니와 명령을 두려워하는 자는 보상을 받으리라.](잠13:13).
말씀을 암송하는 일은 이 모든 일을 용이하게 하는 일이며, 확실하고 안전하게 하는 일입니다. 흔히 성도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경대로 다 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물론 사람이 모든 말씀을 다 믿고 순종하면서 100% 완전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진리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일은 더욱 바보스런 일입니다. 저는 성경을 제대로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배운 이후로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훨씬 쉬웠습니다. 믿기가 쉽습니까? 안 믿는 것이 쉽습니까? 믿는 것이 쉽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암송하고 깨닫고 묵상하는 삶을 산 이후로 성경대로 사는 것이 성경을 거슬러 사는 것보다 분명히 더 쉬웠습니다. 저도 한 때는 마태복음 11:28-30절 말씀을 보면서 분통을 터뜨린 일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마11:28-30). 제게는 전혀 쉽고 가볍지 않았습니다. 특히 요한일서 5:3은 제게는 난해 구절 중의 난해 구절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요일5:3). 제게는 주님의 명령들이 다 무거웠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쉽고 가벼운 것이 없었습니다. 늘 죄 가운데 있었고,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는 회개를 필요로 하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성경을 읽지만 정확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전도를 하지만 열매가 별로 없었습니다. 책을 읽었지만 인격의 성숙이나 성장,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문제는 성경 읽기에 이어 묵상과 암송을 통해 해결되었습니다. 묵상을 할 때 말씀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깨닫고 나니 쉬웠습니다. [깨닫는 자에게는 그것들이 다 명백하며(plain:*똑똑히 보이는/들리는, 평이한) 지식을 얻는 자들에게는 올바르도다.](잠8:9). [지식은 깨닫는 자에게 쉬우(easy)니라.](잠14:6b). 그렇습니다. 암송과 묵상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똑똑하게 보이고 들리게 하며, 쉽게 해 주십니다. 이때부터는 성경대로 사는 것이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보다 쉽게 되었습니다.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이 어렵지 성경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 곳 미국 생활에서 저는 몇 번의 시험과 연단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하나는 체류 신분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직장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월 천불을 받았는데 이것으로는 생활비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일을 해야 하는데 제가 일을 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그런데 저의 동료 목사들은 불법이라고 말해 주어도 일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모라도 일을 해야 한다고 불평불만이 엄청났습니다. 불법이라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불법이란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지라 불법과 합법의 차이가 없는 삶을 영위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살고자 결단을 했기 때문에 주님이 여러 마리의 까마귀들을 통해 먹을 것을 날라 주셨습니다. 이 교회는 매주 헌금이 50불 미만인 적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한 번도 월세 밀린 적이 없습니다. 세금 다 해결했습니다. 파산할 지경이면 하루도 틀림없이 어디선가 돈이 날아 왔습니다.
또 하나는 설교에 관한 것입니다. 저의 설교는 꾸며낸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화로 드는 것은 전부 현장에서 몸소 배우고 익힌 것들입니다. 이런 설교는 누가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살아있는 생생한 예가 될 수도 있고, 누구를 비난하는 듯한 욕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가장 흔들릴 때 제가 내린 결단은 이것이었습니다. “단 한 사람이 남아도 주시는 말씀만 전하겠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주의 뜻대로만 살고 싶습니다! 저를 연단하시되 야무지게 연단해 주옵소서!” 결국 시험에서 이겼고 통과했습니다. 이곳을 떠난 사람들이 이 교회 곧 망한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오늘도 설교를 하고 있고 망하기는커녕 점점 부흥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마 그들이 볼 때는 윤 목사는 용케 운이 좋다고 하겠지만 성도는 운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신8:2,16).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환경이나 교회의 외적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모두 다 통과했습니다.
저는 너무 감사하고 기쁩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성경 읽기와 묵상과 암송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길 수도 통과할 수도 없는 그런 시험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확신 가운데 단언컨대 “성경대로 믿고 순종해서 사는 것이 성경을 거슬러 사는 것보다 쉽습니다.” 이것은 저의 체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파(說破)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노라.](고후13:8). 진리를 거슬러서 사는 것은 마치 역풍을 만난 배가 노를 저어 가려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만 사는 것은 순풍에 돛을 단 배와 같습니다. 힘들어 보여도 살아보면 그것이 쉽습니다. 성경을 알면 믿는 것이 쉽고, 성경을 암송하고 나면 진리를 위해서 사는 것이 쉽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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