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부흥 90 - 51. 우리의 친구가 되신 주님
말씀: 요15:13-14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목자와 양, 왕과 백성, 주인과 종, 창조주와 피조물, 심판자와 죄인,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 머리와 몸, 뿌리와 가지 등 다양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친구의 관계로 묘사한 것입니다. 친구란 최소한 대등의 관계를 전제로 성립됩니다. 주님은 성도들과 친구의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시며, 실제로 친구라고 부르셨고, 그렇게 인정하셨습니다. 이런 예는 구약에도 있었고, 신약에도 있습니다. 한국적 정서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는 말은 너무나 어색하고 민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을 양자로 입양하시고, 아들로 부르시기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가장 먼저 세우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부부 관계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관계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는 영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척도가 되며, 좋은 본보기들입니다. 부부는 애정으로 맺어진 관계요, 가족은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주종 관계는 계약으로 맺어지거나, 힘이나 돈으로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친구는 순전히 신뢰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상호 신뢰 속에서만 친구의 관계는 유지되고 깊어지고 발전합니다. 가족은 신뢰가 깨어져도 그 관계를 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친구의 깊은 우정을 나눈 대표적인 예는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성경에는 우정이란 말이 나올까요? 의리란 말이 나옵니까? 우정이란 말은 없습니다. *형제 우애-벧후1: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친구 관계가 아니라 형제 관계이기 때문에 우정이니 의리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합니다.

친구는 형제에 비해서는 강한 밀착의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형제의 관계와 달리 유전적으로, 혈통에 의해 저절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는 것은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벗이요, 친구라 불린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이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말씀하시는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을 받았느니라.](약2:23). 이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방법은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친히 하신 말씀을 믿는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종의 신분에서 친구 관계로 급상승한 것입니다. 친구는 가슴 속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나눌 수 있는 관계입니다. 상호 관심을 말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행하려 하는 바를 아브라함에게 숨기리요?] (창18:17). 이것이 바로 친구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는 것은 자신의 말씀을 미리 알려 주시고, 계획을 일러 주시는 관계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행하고자 하는 계획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흔히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라고 하는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자신의 강력한 의견의 개진이나 다름없었습니다(창18장 참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소돔을 향해 하는 기도를 다 들으시며 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에게 답변하듯 묻는 대로 다 답변해 주셨습니다.

구약 성도들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로 인정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는 우리의 하나님 곧 전에 이 땅의 거주민들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이 땅을 주의 벗 아브라함의 씨에게 영원히 주신 분이 아니니이까?](대하20:7). 대언자 이사야의 글에도 주님께서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씨야,](사41:8)란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벗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씨요, 자녀들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을 얻습니다.

하나님과 친구 같았던 또 한 명의 인물은 모세입니다. [[주]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니라. 모세는 다시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그를 섬기는 자 곧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성막 밖으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처럼 대하셨고, 친구와 이야기하듯 마주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가득한 사람들과 친구 관계를 맺는 일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친구요, 아들이요, 형제로 부르시는 것은 놀랍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계획을 모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린 명령들이 사실은 모세와 나눈 대화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친구처럼 말씀해 주시고, 일러 주시며, 깨닫게 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묻는 것을 듣고 대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는 이유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자신을 버리고 모두 도망갈 제자들을 향해서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내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인이 하는 것을 종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오히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3-15). 주님은 제자들을 그냥 제자들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 한명은 제자들이며, 친구들이며, 동시에 형제들입니다.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자들이 종이라면 주인이 하는 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친구라 부르심으로 그들과 비밀을 공유하십니다. 자신의 뜻과 계획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에게 절친한 친구가 있습니까? 그런데 도무지 여러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마음을 터놓지도 않는다면 진정한 친구라 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려울 때 손만 벌리고, 도움을 구하기는 하는데 비밀이 너무 많고, 숨기는 것이 너무 많으면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열어서 공유하는 관계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와서 먹고 마시매 그들이 말하기를, 보라, 음식을 탐하는 자요, 포도즙을 많이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 하기 때문이로다. 그러나 지혜는 자기 자녀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1:19). 이는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스스럼없이 지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들으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오늘날 목사가 죄인들과 창기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같이 식사를 하는 장면이 성도들에게 포착되면 그 지역에서 목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죄인들의 친구요, 전과자의 친구요, 조폭들의 친구라고 한다면 그는 즉시 은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과 함께 걷고,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들의 행위에 동조하거나 정당화해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만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배반하고 팔아 버렸던 가룟 유다에게도 친구여! 하고 부르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하시매 무리가 와서 예수님께 손을 대어 붙잡거늘](마26:50). 주님은 가룟 유다를 언제나 경계하고 다른 제자들과 차별하거나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3년 반 동안 공생애 기간 동안에 자신을 배신할 유다를 따돌린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동일한 애정으로 대하셨고, 신뢰하셨습니다. 시편에 보면 주님은 가룟 유다를 신뢰하던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내가 신뢰하던 나의 친한 친구 곧 내 빵을 먹은 나의 친구가 자기 발꿈치를 들어 나를 대적하였나이다.](시41:9). 사실 배반자는 가룟 유다만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배반할 제자들의 행동을 미리 다 아셨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도 아셨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로 부인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 때가 이르러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배반할 사람, 나를 떠날 사람, 나를 버릴 사람, 나를 욕할 사람, 나를 저주할 사람이라고 해서 주님이 미리 알아서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큰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늘 동료로 대하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인 너희에게 이르노니, 몸을 죽이고 그 뒤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12:4). 주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범죄했을 때도, 흠잡힐 일들을 했을 때도 언제나 내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친구로서 대해 주셨습니다. 친구로 대해 주셨다는 말은 언제나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친구는 언제나 사랑하며 형제는 어려운 때를 위하여 태어났느니라.](잠17:17).

주님은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대하십니다. 나사로를 보십시오. 주님은 나사로와 그 누이들을 사랑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그녀의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11:5). 그런데 그런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어 버렸습니다. 친구가 병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일단 병문안을 갈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를 합니다. 슬퍼하기도 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좋은 병원이나 의사를 소개해 주기도 합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친구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 말씀들을 하신 뒤에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하시니](요11:11). 주님은 잠든 친구를 잠에서 깨우러 가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깨우러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잠든 성도들을 깨우러 주님은 오십니다. [일어나라. 깨어나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영적으로 잠든 성도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재림 때에 무덤을 갈라 일으키시는 모습을 예표합니다. 주님께서는 친구들을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고, 잠든 친구를 깨우러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나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침례인 요한이 말한 친구와는 격이 좀 다릅니다. 침례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라고 소개했습니다. [신부를 얻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그 음성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나니 그런즉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신부를 얻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신의 기쁨을 노래했지만 우리는 신랑의 신부로서 신랑을 친구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입은 지극히 달콤하니 참으로 그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도다. 오 예루살렘의 딸들아, 이분이 나의 사랑하는 이시요, 이분이 나의 친구시로다.](아5:16). 신부는 주님을 자신의 사랑이요, 친구라 부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는 진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친구이십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애정의 관계입니다. 한 몸입니다. 친구는 신뢰의 관계입니다. 대등한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신 결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친구가 된 것인가? 첫째, 입술의 은혜로. [마음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자는 그 입술의 은혜로 인하여 왕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22:11).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감사와 찬양과 기도의 희생물을 드림으로 주님의 친구가 됩니다. 둘째, 주의 명령을 지킴으로.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주님께서 친구라고 불러 주시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친구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 암송할 말씀: 요15:13-14, 아5:16

☜ 생각해 볼 문제:

- 주님께서 사람을 친구라 부르신 예는?
- 주님의 친구가 되는 방법은?
- 성경이 말하는 친구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