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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부흥 90 - 54.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
말씀: 롬8:28-29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形像)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1:26-27).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이 짐승보다 귀한 이유는 힘이 세거나 말을 할 줄 알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권위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음이니라.](창9:6).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이 가장 기초이며, 근본입니다. 이보다 인간을 더 존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무시하거나 학대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의 창조주요, 지으신 분이시란 점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이를 모욕하는 자요, 재앙들을 즐거워하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17:5). 가난한 자라고, 병자라고, 약자라고 사람을 조롱하고 놀리는 것은 주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을 멸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귀머거리, 눈먼 자 등 모든 장애인들을 만드신 분도 역시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귀먹은 자나 보는 자나 눈먼 자를 만들었느냐? 나 [주]가 아니냐?] (출4:11). 장애인들은 창조주의 실패작이 아닙니다. 주님은 병자들도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도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조롱하거나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람의 혀가 하는 짓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또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저주하느니라.](약3:9).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멸시하는 일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무시하는 행위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자신의 거룩한 영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니라.](살전4:8). 이런 점에서 우리는 누구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저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격함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안정된 사회 생활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임을 늘 기억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신 목적, 구원의 궁극적 완성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주시는데 있습니다. 영·혼·몸이 온전히 거룩하고 완전한 그런 모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죄로 물들지 않고, 의와 거룩함으로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의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아담을 지은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인간이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해 왔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불쌍히 여기신 적이 있고, 믿음과 순종을 보일 때 기뻐하신 적이 있지만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하고, 우리 안에 주님이 사시며, 열매를 맺으시며, 향기를 품어내시고, 빛을 비추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지음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히1:3a).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나신 분이시니](골1:15). 주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4:4b).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거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럼 이것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는 분명히 새로워졌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10). 우리는 분명히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졌습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지만 영은 온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혼입니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따라 살고,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따라 살면 우리는 점점 주님을 닮게 됩니다. 주님의 모습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이것은 성장이라고 하기도 하고, 변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후3:18).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고 그대로 살아가는데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의 역할입니다. 영적 스승을 넘어서는 그런 영적 아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갓 태어난 아이들을 유모처럼 기르고 돌보아 줄 그런 영적 어미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매우 고통스럽고, 쓰라린 경험을 동반합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 우리 속에 아들의 형상이 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누군가 기도로 수고하고, 말씀을 먹이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성도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돌보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살전2:7~8). 바울은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했다고 말합니다. 다정하게 사모했다고 합니다. 복음만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혼까지도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구령한 혼들을 ‘우리에게 소중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심정은 언제나 같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식을 가져본 부모들이라면 다 알 것입니다. 아이는 태어나면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양육해 주어야 합니다. 성장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절대적으로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들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자라는 줄로 알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저절로 자라는 줄 알면 안 됩니다. 모태에서 난 아이는 어쨌든 사람입니다. 그 점은 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영접할 때 누구라도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이요, 어린 아이입니다. 젖을 필요로 합니다. 먹여 주어야 합니다.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영적 갓난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은 육신의 아이를 먹이고 돌보는 일보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밖에 있는 일들 외에도 날마다 내게 닥치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고후11:28~29). 이것이 아이를 기르는 유모의 심정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어미는 더 아픕니다. 아이가 자빠지면 부모는 가슴이 무너집니다.

바울은 유모로서 양육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또한 아비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언정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그는 단지 성경 교사가 아니라 영적 아버지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 아비였고(딤후1:2), 빌레몬의 영적 아비였습니다. [결박 중에 낳은 나의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청하노라.](몬1:10).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식이 자라서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을 때까지 가르치고, 보호하고, 이끌어 주며, 때로는 강하게 징계합니다. 매질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이는 {주}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라, 하셨으니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아들로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누구나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히12:6-8). 징계를 하는 이유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요, 받아들이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돌봄, 징계, 양육이 없이 복음만 들었다고 해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9). 이 일은 영적 아버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목자는 어미와 아비의 모든 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8-29).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은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일들, 실수들, 허물들, 범죄 등등을 바꾸어서 선(善)이 되게 하신다.”는 식으로 해석해 버리면 안 됩니다.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는데 쓰거나 변명을 하는데 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일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나가시는데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은 결론, 결과가 Happy ending으로 끝난다, 결국은 그 일이 인생 역전,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성경을 헛 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바로‘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게,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풍성한 생명을 얻는 것(요10:10), 가지가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요15:8) 등이 신앙 성장과 성숙을 통해 우리를 평안하고 행복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건들을 아들의 형상과 일치시키는데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고, 세상을 환히 비출 수 있는 빛이 되게 하고, 소금과 같이 맛이 나게 하며, 누구도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서신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단련되려면 누구나 불같은 시련이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터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과 기도로만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기적보다는 사람을 사용하시며, 환경을 사용하십니다. 용광로 속에 던져 놓으시고 불 가운데 주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시며, 물을 통과하며 주님을 찬양하게 하시고, 불같은 시련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하게 하시고, 매를 맞고 수치를 당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당하는 수치로 인해 기뻐하게 하십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아들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욕과 수치를 기쁨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고, 사람들로부터도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일들을 [아들의 형상]으로 빚으시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매일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조용하고 온유한 영’을 지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드러나는 기회로 만들어 주십니다. 통제 불가능한 일,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연속으로 터질 때면 주님은 그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믿음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두려움 없이 평안하게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게 하십니다.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빚어 가시고, 그리스도의 성품, 능력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나를 다스리도록 하십니다. 염려를 맡기도록 하십니다. 이런 것이 바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적 의미입니다. 성령의 사역 역시 이런 것입니다. 환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8~9). 사람들은 고난이 없고, 괴로움이 없고, 난처한 일이 없고, 핍박이 없고, 거꾸러뜨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입니다.

☜ 암송할 말씀: 롬8:28-29

☜ 생각해 볼 문제:

-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의미를 말해 보시오.
- 아들의 형상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말해 보시오.
-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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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