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고후4:16
‘낙심하다’란 말은 faint로써 ‘지치다.’, ‘쇠약하다.’ ‘힘을 잃다’, ‘기진하다’ 등으로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었지만 모두 같은 말입니다.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 ‘도저히 못해먹겠어!’, ‘힘들어 죽겠어!’ 어떤 사람은 교회 생활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어떤 사람은 직장이, 어떤 사람은 자기가 접하는 환경이 모두 지긋지긋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낙심하기 시작하면 결국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낙담은 영적인 힘이 떨어진 결과입니다. 말씀의 권능, 성령의 권능이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몸에 병이 찾아오고, 각종 증상이 나타나듯이 영적인 힘이 떨어지면 낙담이 찾아옵니다. 평안대신 근심, 염려, 불안, 두려움이 찾아오고, 기쁨 대신 짜증이, 만족대신 불평이 찾아옵니다. 이런 것은 영적인 힘이 떨어졌음을 보여 주는 증상들입니다. 여러분이 코피를 흘리고, 입이 헐고, 눈이 아프고, 잠이 쏟아지고, 밥맛이 없고, 몸이 곤하고 기타 등등의 현상이 나타날 때 내 몸은 끄덕 없어, 지금은 정상이야! 라고 하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도 역경의 날에, 힘든 일이 닥치면 자신의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경의 날에 나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하고, 내가 기도하고 성경 읽고, 교회 다니는 등의 모습이 얼마나 가짜였으며, 거짓이었는지 낱낱이 드러납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해 교회를 바꾸어 보기도 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무엇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진단이 잘못 내려진 잘못된 처방입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낙담, 낙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역경을 당하는 날에 네가 낙담하면 네 힘이 적은 것이니라.](잠24:10). 우리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독수리가 날개치고 올라가는 듯한 그런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낙담하면 힘이 없어집니다. 몸에 힘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혼에 힘이 없고, 영에 힘이 없으면 더욱 난감합니다. [사람의 영이 그의 병약(病弱)한 것을 지탱하려니와 상처 입은 영은 누가 감당하리요?](잠18:14). 영의 문제는 곧바로 혼과 육신에 균형과 평안을 모두 깨어 버립니다.
우리를 낙심하게는 하는 것들은 무엇이며, 왜 낙심합니까?
첫째, 영의 양식을 제대로 먹고 마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것으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아니요,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하리라.](아모스8:11-13). 말씀이 없기 때문에 낙심합니다. 영적 양식을 먹지 못한 기갈입니다. 이 시대의 주림과 갈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말씀이 없는데서 옵니다.
둘째,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통을 가지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물이 물통에서 나온다고 믿지 않습니다. 물은 샘에서 긷고, 강에서 길어 올립니다. 누가 물이 물통에서 나오는 줄 알고 물통만 귀히 여기고 샘을 버린다면 누구나 다 웃을 것입니다. 바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사에서 흔히 벌어진 배교의 현장입니다. 샘을 버리고 물통만 귀히 여기는 일이 실제로 발생합니다.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렘17:13). 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버리고 생명을 조금 담고 있는 어떤 것들에 매달리고 집착합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 주께 있으므로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빛을 볼 것임이니이다.](시36:9). 뿌리를 잘라 버리면 가지와 잎은 곧 시들어 버립니다. 뿌리가 가지를 지탱하듯이 머리가 몸을 지탱하듯이 주님이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 주시는 근원이십니다.
셋째,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할 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함께 순례의 길을 가는 형제들이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고 낙심케 할 때가 있습니다. 힘을 주어야 할 형제들이 불신의 보고와 평가로 인해 나의 믿음을 절망케 하고, 낙심케 한 성경적 예를 보십시오. [우리가 어디로 올라가랴? 우리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강하고 키가 크며 그 도시들은 크고 성곽이 하늘에까지 닿았고 또한 우리가 거기서 아낙 족속의 아들들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에](신1:28).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더럽힙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성경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내에서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다 끼리끼리 놉니다. 모세는 후에 이 사건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여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음이니라.](민32:9). 낙심하게 하여...이것이 이들이 행한 가장 큰 죄였습니다. 불신의 형제들은 자신만 은혜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누릴 수 있는 영적 은혜와 복을 모두 막아 버립니다. 그들을 덩달아 죄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짐을 나누어주고, 서로 섬겨 주며, 서로를 돌아보아(빌2:4) 믿음의 길을 달려야 합니다. [/너희는/ 부지런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할지니](히12:15).
넷째, 우리의 성장하지 않는 모습, 열매 없는 모습이 우리를 낙심케 합니다. 오늘도 넘어지고 자빠지는 그런 죄와 허물, 불법이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내가 짓는 죄와 허물, 불법이야 말로 가장 나를 낙담케 하는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라는 절망이 듭니다. [이는 셀 수 없이 많은 재앙들이 나를 에워싸고 내 불법들이 나를 붙들므로 내가 위를 볼 수도 없사오며 그것들이 내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시40:12). 나의 양심이 나를 정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나의 증인이 되시고, 나의 양심이 밝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기만 할 뿐 언젠가는 자신이 거짓이요, 가짜라는 사실이 밝히 드러납니다.
다섯째, 원수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합니다. 마귀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악한 자요, 연약한 자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 것입니다. 아마 주님이 성경에서 말한 많은 진리들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바 우리의 본성의 부패함과 사악함과 육신의 연약함을 절절이 깨닫고 전적으로 동의하며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만 건전한 정신과 믿음의 소유자에게는 더욱 은혜를 구하고, 성령의 권능을 간구하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원수들은 어떻게 우리를 공격하는가? 먼저 낙망케 합니다. 이것은 교란 전술, 심리전으로 전쟁의 가장 기본적인 수칙입니다. 사자들은 사냥을 할 때 항상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거나 추격을 개시해서 제일 뒤에 쳐지는 약한 자들을 잡습니다. 우리의 원수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신명기 25:17,18에서 원수들의 작전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길에서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할지니 곧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길에서 너를 만나 네가 약하고 피곤할 때에 네 뒤를 치되 곧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신25:17,18). 낙심하면 울부짖는 사자 마귀(벧전5:8)에게 먹힙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여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영광의 찬양을 불러야 합니다. 이기고 난 후 부르는 함성이야말로 얼마나 달콤하고 긴 여운을 남깁니까?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환란이 닥치고, 시련이 닥치고, 시험에 빠질 때 왜 낙심하지 않는가? 우리가 초인이 되었거나 성인의 반열에 올랐거나 오욕(五慾)·칠정(七情)을 다 이긴 무감정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으로 초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영적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런 모든 일들로 인해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육신은 골병이 들고, 상처투성이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정결해지고, 거룩해지며, 강건해지는 그런 새로움을 맛보게 됩니다. 날마다 새롭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합니다. 겉을 보면 절망을 해도 모자랄 일들이 속사람을 보면 영광의 찬양,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속사람을 점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시켜 나가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롬5:3)라고 말합니다. 왜 환난을 기뻐합니까? 속사람이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약1:2). 시험은 우리를 낙심시키고 절망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니라 영을 더욱 새롭게 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 또한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13). 그냥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벧전1:8)합니다. 낙심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노니 너희를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들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 이것은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둘째, 기도의 응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복음송가). 우리는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 전에 구하는 것들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차를 사달라고 하면 먼저 운전 학원에 보내고 운전 연습을 충분히 시킨 다음에 차를 사줄 것입니다. 때가 되어서 필요한 것을 주기 전에는 반드시 그것을 합법적으로 유익하게 잘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훈련하고, 시험하고, 오래 참게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때로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받아 누릴 합당한 자세가 되어 있지 않고, 은혜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지 주님이 주시기 싫어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때가 되면 거둘 것이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더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때가 있고, 열매를 맺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지니 이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둘 것임이라.](갈6:9). 오래 참고 기다리면 다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낙망하지 말 것은 정하신 때에 거둘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우리는 더딜지라도 우리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을 기다릴 줄 알고, 소망가운데 거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넷째, 주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의 일상사에서 겪는 어떤 문제도 우리를 낙심케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모욕, 수치로 낙심합니까?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말도 끄집어 낼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는 이 나이가 되도록 집도 못 사고, 좋은 차도 없고, 번듯한 명함 한 장도 없다고 낙심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아니라 성경의 위인들, 아니면 교회사의 선배들만 생각해도 우리는 조금도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주님을 깊이 생각한다면 무엇이 낙심이 됩니까? [/너희는/ 죄인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이같이 거역한 것을 견디어 내신 분을 깊이 생각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히12:3).
다섯째,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하시는 권면의 말씀을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12:5). 이는 우리가 책망의 목적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책망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 받으시는 아들에게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0-11을 유념해서 읽어보면 책망의 목적이 선명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책망의 목적은 첫째,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요 둘째, 주님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함이요 셋째,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히12:10-11). 이런 까닭에 우리는 오히려 주님께 맞을 때 더욱 기쁩니다. 징계가 속히 임할 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로 인해 바로잡힐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낍니다(욥5:17).
여섯째, 보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참고 인내하며 수고하며,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칭찬이 있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또 네가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고 낙심하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3). 주님을 위해 하는 어떤 행위도 결코 헛되지 않기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고전15:58).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지금까지 성도들을 섬기며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히6:10). 그래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합니다.
일곱째,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는 그분의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내가 여전히 그분을 찬양할 것임이로다.](시42:5).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는 내 얼굴의 건강이시요, 내 하나님이신 그분을 내가 여전히 찬양할 것임이로다.](시42:11).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는 내 얼굴의 건강이시요, 내 하나님이신 그분을 내가 여전히 찬양할 것임이로다.](시43:5).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십니다(골1:27). 소망은 낙심의 천적이요, 낙심을 이기는 승리자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 암송할 말씀: 히12:3, 고후4:16
☜ 생각해 볼 문제:
- 우리를 낙심케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사람이 낙심하는 이유에 대해 말해 보시오. - 신자들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있는 대로 말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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