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부흥 90 - 57. 주께 물어 보라
말씀: 시27:4


위기의 순간에, 답답한 순간에, 아니면 어떤 순간에 물어 볼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전화해서 물어 보기도 하고, 만나서 물어볼 수도 있고, 일부러 멀리 찾아가서라도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복된 일입니다. 주님은 하늘의 왕국은 어린 아이와 같아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마18:3). 어린 아이의 특징 중 하나는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질릴 정도로 계속 묻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묻는 것을 창피해 하거나, 자신의 체면이나 권위를 갉아 먹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 관계, 친구 관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묻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자존심을 긁는 일도 아닙니다.

묻는다는 것은 몰라서 조언과 지식을 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허가를 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일 때도 있습니다. 며느리가 어머니에게 무엇을 물어 가며 부엌일을 하는 것은 어머니의 권위 아래 자신이 놓여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다 큰 어른이 노인이 된 아버지에게 무엇이든지 물어보고 일을 하는데 이는 꼭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존재감을 인정해 드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권위 아래 있음을 밝혀 드리는 것입니다. 선택권, 결정권을 아버지에게 드림으로써 부모님이 여전히 의사 결정권자(decision maker)란 사실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묻는 것은 이와는 차원이 다른 예입니다만 묻는다는 자체가 아버지의 권위를 온전히 인정해 드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알아서 해야 할 일이 있고, 배워서 해야 할 일이 있고, 물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물어서 뜻을 구하고, 조언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고, 허락을 구하는 것은 성도들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통해서 ‘주께 묻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묻고 답을 얻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을 수 있고 답을 얻는 존재들입니다. 사울 왕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핵심은 주님께 물어야 할 때 물을 줄 몰랐던 것입니다. [[주]께 여쭙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분께서 그를 죽이시고 왕국을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대상10:14). 주님께 묻지 않는 것을 주님이 얼마나 노엽게 여기시는지 보여 주는 예는 또 있습니다. 북 왕국의 이스라엘 왕 중에 아히시야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격자창에 떨어져 다쳤는데 하나님께 묻는 대신 신하들을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가서 묻게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엘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왕하1:3). 주께 구하지 않는 것, 주께 묻지 않고 다른 신, 다른 누군가에게 묻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이번 휴가에 여행을 어디로 갈까 생각하면서도 부모에게는 묻지 않고 남의 부모에게 묻거나 엉뚱한 사람에게 가서 조언을 구하고 다니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무시 받는 기분일 것입니다. 가족 중의 누가 진로를 결정할 때 마땅히 물어야 할 부모나 가족들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 결정한다면 섭섭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의 뜻을 따라가면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마치 먼 친척 아저씨나 옆집 아저씨 취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은 사울 시대 40년 역사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다시 옮겨오자. 이는 사울 시대에 우리가 그 궤 앞에서 여쭙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매](대상13:3). 이 말씀은 사울의 시대는 경제가 엉망이었다, 인권이 없었다, 민주화가 되지 않았다는 식의 평가가 아닙니다. 사울 왕의 통치 40년은 언약궤[말씀] 앞에서 무엇을 묻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말이 신정 국가이지 하나님의 통치를 배척하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구하고 있습니까? 그분이 인도해 주시고, 역사해 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까? 다윗은 사울과 달리 무엇이나 주님께 묻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소원은 주님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께 바라던 한 가지 일 바로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하여금 평생토록 [주]의 집에 거하여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의 /성/전에서 여쭙게 하는 것이라.](시27:4). 주께 여쭙게 하는 것이 다윗의 한 가지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일에 하나님 아버지께 먼저 물어 보았습니다. [다윗이 [주]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리이까? 내가 이들을 따라 잡으리이까? 하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이는 네가 반드시 그들을 따라잡고 틀림없이 모든 것을 도로 찾을 것임이라, 하시니] (삼상30:8). 작전을 세울 때도 그러했고, 적을 추격할 때도 했습니다. 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묻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서 일을 시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랬을 때 주님은 답을 주셨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주]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하니 [주]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삼상23:2). 다윗은 물었고,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계획해도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많은 수가 아니지만 저마다 자신의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주님께 묻고 답을 얻기를 원합니다. 직장 문제든지, 가정 문제든지 자신의 일신에 관한 문제든지 교회 문제든지 주님께 물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윗은 전쟁이란 위기 상황에서만 주님께 매달리고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일상 진로에 대해서도 주님께 물었고 어디로 가야할지 인도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이 일 후에 다윗이 [주]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유다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올라가리이까? 하매 [주]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하시니 다윗이 이르되,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 하니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하시니라.](삼하2:1). 우리는 늘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물어 보십시오. 어느 직장, 어느 학교, 어느 동네로 이사 가야 할지 물어 보십시오. 정해 놓고 묻는 것이 아니라 미리 물어 보십시오. 다윗은 이전에 답을 얻은 경험이 있다고 해도 같은 일이 터지면 또 물었습니다. 예를 들어 블레셋과의 전쟁은 이미 전에 묻고 응답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동일한 일이 터졌을 때 주께 또 물었습니다. [다윗이 [주]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주시겠나이까? 하니 [주]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올라가라. 이는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겨줄 것임이라, 하시므로](삼하5:19). 자신의 경험에 의존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 싸우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물을 때마다 응답해주셨습니다. 다윗은 세세한 부분까지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세세하게 응답하셨습니다. [다윗이 [주]께 여쭈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습격하되](삼하5:23).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는 일을 하더라도 이렇게 세세하게 물어 보고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재심 시절에 삼년 기근이 있었을 때 이 문제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에 연달아 삼 년 동안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주]께 여쭈었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이것은 사울과 피를 흘린 사울의 집으로 인한 것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느니라, 하시니라.](삼하21:1). 주님은 다윗이 물을 때마다 대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 안될 때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교회가 잘 부흥이 되지 않으면 물어야 합니다. 누구를 탓하고 원인을 분석하기 전에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마음에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다면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자꾸 물어 보십시오. 그 때 답을 얻습니다.

저는 교회 형제들의 문제로 여러 번 주님께 묻고 답을 얻은 경험이 있습니다. 주님은 물었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신 적이 매우 많습니다. 저의 이런 말은 간증이나 신비적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것입니다[성령과 인도하심, 참조]. 사람들이 모두 다윗처럼 주님께 묻고 답하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시간을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이런 일이 없고, 간혹 있다는 사람들은 환청이나 신비한 어떤 체험을 이야기하는 줄로 압니다. 욥기에 이르기를, [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참으로 거듭 말씀하시되 사람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로다.](욥33:14/참조-시62:11)고 했는데 이는 듣기에 둔한 성도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진리입니다.

나도 하나님께 묻고 다윗처럼 답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답이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뜻과는 정반대로 답해 주시거나, 나의 육신이 정말 싫어하는 대답을 주실 때가 너무 많습니다. 어떨 때는 주님께 묻고 말씀하시는 대로 살다가 매를 맞기도 하고, 배척을 당하기도 하고,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아히멜렉을 아십니까? 그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온 다윗을 도왔습니다. 그는 의리상 도운 것이 아니라 주님께 물어 보고 도왔습니다.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주]께 묻고 그에게 양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하니라.](삼상22:10). 그 결과는 사울의 보복을 받아 집안이 멸문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대로 하는 것이 때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망하고, 말씀에 순종하다 죽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고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것이 모두 믿음의 삶을 산 사람들의 일생이었습니다. 말씀대로 살다가 용광로에도 던져지고, 사자 굴에도 던져지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으니] (히11:36~37)라고 합니다. 주님의 대답은 [맞으라. 옥에 갇혀라. 죽으라. 떠돌아다니라]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겁이 나서 묻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가 수태하지 못하자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창25:21). 그 때 주님은 쌍둥이를 주셨는데 이 아이들은 배 속에서부터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리브가는 이 문제로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가 물은 것이 아니라 주께 가서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그녀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므로 그녀가 이르되, 이와 같을진대 내가 어찌할까? 하고 가서 [주]께 여쭈었더니] (창25:22). 그리고 답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든지 다 듣고, 다 행하리라 결단하십시오. 그 때 주님은 무엇을 묻든지 답변을 주실 것입니다. 선별적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순종할 의사가 있고, 결단이 있으면 물속이나 불속에 던져져도 주님이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머리카락 한 올도 상하지 않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눅21:17~18). 걱정하지 말고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환경이 어떻게 돌아가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싶어 하고, 원하는 답을 해 줄 사람만 찾는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감과 조명, 세미한 음성은 포기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묻고 얻은 길과 스스로 생각한 길, 사람들이 충고해 주는 길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망할 것 같고, 끝장날 것 같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길을 가십시오. 주님이 응답해 주시는 길로 걸음을 정하십시오. 그때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주님께 묻는 일이야말로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말씀들로 인해 주께 여쭈어야 합니다.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해 이 발견한 책의 말씀들에 관하여 [주]께 여쭈라. 이는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들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우리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를 향해 /불같이/ 타오른 [주]의 진노가 크기 때문이라, 하니라.](왕하22:13). 주님은 대답해 주십니다. 말씀에 대해 물으십시오. 저는 요한복음 8:31-32, 4:14을 가지고 몇 년을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후에는 수시로 그 뜻을 물었습니다. 비유에 대해서 물었고(눅8:9),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도 물었고, 왕국은 언제 임할는지 물었고(막13:4,행1:6), 엘리야에 대해서 물었고(마17:10), 말세의 징조(눅21:7)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물었고, 그때마다 주님은 대답해 주셨습니다. 마귀를 내어 쫓지 못했을 때는 왜 자기들이 쫓아내지 못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막9:28).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막10:10). 논점은 이것입니다. 신자는 사사건건 날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시든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그것을 물어 보지 않고 멋대로 하다가는 망합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백 번을 여쭙고 천 번을 여쭈어도 하나님은 꾸짖지 않고 가르쳐 주십니다. 답을 얻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 들을 귀, 깨닫는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면 됩니다. 설교를 통해서도 답을 주시고, 성경 공부를 통해서도, 성경을 읽을 때에도 주시고, 기도하는 중에도, 묵상 중에도 주십니다. 때로는 누구와 대화하는 중에도 주십니다. 신비한 방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응답을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할 수 있지만 점점 성장하면서 분명히 알아듣게 됩니다. 주님과 친교가 깊어지면 주님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암송할 말씀: 시27:4, 욥33:14

☜ 생각해 볼 문제:

- 묻는 다는 것의 다양한 의미를 말해 보시오. - 주께 물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 최근에 내가 주께 묻고 답을 얻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