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90 - 63
말씀: 암3:3
사람들은 흔히 부부를 일컬어 ‘인생의 동반자’라고 합니다. 함께 걷는다는 뜻입니다. 때로 혼자인 것을 즐기고 자연을 벗 삼아 살며, 개 한 마리 끌고 산책을 다니는 것이 자유요, 평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도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모든 것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버려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뜻이라.](마1:23).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걸으시는 길을 따라 걸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걷는 대신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고 연합을 합니다. 지금 세계를 보십시오. 종교 통합, 경제 통합, 언어 통합, 인종 통합, 온통 통합과 연합의 시대입니다. 연합이 선이요, 절대 가치인 것 같고 연합과 통합을 반대하는 자는 암적 존재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일치하지 않고, 친구가 되지 말아야 하며, 동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이상한 목표를 내걸고 세상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신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켜서 급격히 부패시키고,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주님과 연합하고 주님과 동행하면 세상과 연합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 백성아, 너희가 서로 연합할지라도 산산조각이 나리라. 먼 나라들에서 온 자들아, 너희가 다 허리를 동여맬지라도 산산조각이 나리라. 너희가 허리를 동여맬지라도 산산조각이 나리라. /너희가/ 함께 의논할지라도 그 일이 실패할 것이요, /너희가/ 말을 할지라도 그 말이 서지 못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라.] (사8:9~10). 우리가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이기기 위함입니다. 주님과 함께 걸었던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됩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다윗 등 주님과 함께 걸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이웃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연합을 했을 때는 망했습니다. 대신 주님과 함께 걸었을 때는 적을 이겼습니다. [이 백성이 /어떤 사람들에게/, 동맹을 맺자, 할지라도 너희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동맹을 맺자, 하지 말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도 말며 무서워하지도 말고 만군의 [주] 그분을 거룩히 구별하고 그분을 너희가 두려워 할 분으로 삼으며 너희가 무서워 할 분으로 삼으라.] (사8:12~13).
우리는 광야나 사막, 바닥이나 강에 혼자 버려진 방랑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광야를 떠돌았지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이는 내가 주와 함께하는 나그네요, 내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는 자이기 때문이니이다.](시39:12).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 주님이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믿음의 초석입니다. 다윗은 광야를 떠돌았지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이는 내가 주와 함께하는 나그네요, 내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는 자이기 때문이니이다.](시39:12).
구약 성도들의 하나같은 믿음의 고백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식이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우리의 빵이기 때문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14:9). 주와 함께 하면 두려울 것이 없어집니다.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조국과 민족의 운명이 끝날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용기를 내고 아시리아 왕이나 그와 함께한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이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께서 그와 함께하는 자들보다 위대하시기 때문이라. 그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는 [주]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대하32:7-8).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20b)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물체로, 육신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분명히 하늘로 가셨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지식이나 논리로 설명이나 이해가 불가능한 관계로 성경은 그냥 신비라고 합니다(골1:27).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 우리는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을 뿐 아니라 친히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알고 믿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그래서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주님은 내가 있는 그곳에 계십니다. 내 안에 거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언제나 항상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주님과 동행하고 있지 못한가? 동행의 조건은 무엇인가? 함께 걷기 위해서는 같은 방향, 같은 목적이어야 합니다. 의견이 일치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함께 걷겠느냐?](암3:3). 출발할 때 잠깐 기분 좋게 인사하고 목적지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걸어가는 그런 불편한 일행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늘 주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인도함을 받고, 보호를 받고, 도움을 받으며 그렇게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계신지도 모른 채 걷다가 위기에 봉착하면 ‘주여, 나를 도우소서, 제 말이 들리거든 저를 건져 주소서’하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함께 걷기 위해서는 주님과 합의해야 하며, 일치해야 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은 넓은 세상으로 가자고 합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은 넓은 길이 좋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도저히 함께 동행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툼과 싸움만 있습니다. 그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임이라.](요14:16-17)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성령의 생각을 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과 성령은 함께 걸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5:17). 우리는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만 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처리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함께 걷자고 요구하십니다. [오 사람아, 그분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6:8).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요, 희망사항이기 전에 우리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요구 사항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의 요구 사항은 이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모든 길 안에서 걷고 그분을 사랑하며 또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섬기고 내가 이 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령하는 [주]의 명령과 그분의 법규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신10:12-13). 주님이 이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네 행복을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걸으라, 주님의 모든 길 안에서 걸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는 요구 사항이란 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기도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요구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응답해야 할 것이란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 “주님 저와 동행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응답을 살핍니다. 주님께서 답변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성목아, 나는 너에게 나와 함께 걸으라고 요구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주와 함께 하시는 일은 주님께서 이미 신자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문제는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으며 이르되, 아사와 유다와 베냐민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만일 [주]와 함께하면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너희가 만일 그분을 구하면 그분을 만나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15:2). 주와 함께 하는 일은 주님께 구할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링컨은 남북 전쟁 때 북군이 수세에 몰리자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승리를 확신하느냐? 고 물었을 때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기자는 “어떻게 주님이 항상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느냐?”는 질문했습니다. 링컨은 “제가 언제나 주님의 편에 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의논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가까이 오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24:15~16).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혼자 인줄 알고 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있는 곳에 언제나 동행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 사역을 위해 어디로 갈 때 그들은 혼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매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로 말씀을 확증해 주시니라. 아멘.] (막16:20). 이 은혜를 사도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 누구에게나 있는 은혜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기 때문이라.](고전3:9). 사도 바울은 자신이 혼자 일했다고 하거나 자신들끼리 일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고후6:1a). 주님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정하신 길을 가십시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대표적인 사람은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 이삭 등입니다. 에녹은 주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무려 300년을 주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년을 살면서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며 아들딸들을 낳았으며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 (창5:21~24).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요, 에녹은 훌륭하게 응답했던 것입니다. 노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자기 세대에서 완전한 자더니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6:9).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노아는 주님이 “함께 걷자”는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믿음으로 동행했던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역시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축복하며 이르되,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동행하던 하나님, 이 날까지 나의 전 생애 동안 나를 먹이신 하나님](창48:15).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언제나 항상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동행(同行)하려면 기본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일단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우리는 종교나 교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도록 마음을 열고 받아 들였기 때문에(요1:12)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생명이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주님과 동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고 확신하게 된다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주님께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내어 드리면 그만입니다(롬12:1-2). 구원받기 위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진리와 의와 올바른 마음으로. 마음이 주님과 합해져야 합니다. [솔로몬이 아뢰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진리와 의와 올바른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걸은 대로 주께서 그에게 큰 긍휼을 베푸셨고](왕상3:6a). 다윗은 주와 함께 주 앞에서 걸었는데 마음이 주님과 합했기 때문입니다(행13:22).
둘째, 악을 버리라. [이는 주께서 사악한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니 악이 주와 함께 거하지 못하리이다.](시5:4).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끊어야 할 것은 끊어 버리고 주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이제 너희는 각각 자기의 악한 길과 악한 행위를 버리고 돌아오며 [주]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무궁토록 주신 땅에 거하고](렘25:5). 회개는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선행되는 조건입니다.
셋째, 주님의 함께 하심을 믿으라.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 주 앞에 짐승 같사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73:22-23). 주님은 내가 있는 그곳에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멀리 있어 보여도, 감지할 수 없을지라도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며, 함께 계심을 확신하십시오. 욥을 보십시오. 그는 주님의 임재를 완전히 놓쳐 버렸습니다. [보라, 그분께서 내 곁을 지나가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분께서 계속 나아가셔도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는도다](욥9:11). [보라, 내가 앞으로 나아가나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지 아니하고 뒤로 나아가도 그분을 감지하지 못하며 그분께서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그분을 바라볼 수 없고 오른쪽에 숨으시나 내가 그분을 볼 수 없구나.](욥23:8-9).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주님을 알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느낌은 어떠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우리는 느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삽니다. 그래서 점점 믿음이 자라나면 느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넷째,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십시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법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공평으로 나와 함께 걸었고 많은 사람을 돌이켜 불법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2: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골3:16a). 말씀이 없는 삶은 영적인 삶이 아니며, 마치 좌표를 잃고 표류하는 부초(浮草)의 삶입니다.
다섯째, 주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들이 또한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것들을 합친 것이 어찌 그리 큰지요! 내가 그것들을 세려할진대 그 수가 모래보다 많나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139:17~18). 언제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임재의식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옵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3:17).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주님을 깊이 묵상하는 삶입니다.
☜ 암송할 말씀: 암3:3, 믹6:8
☜ 생각해 볼 문제:
- 주님과 동행하는데
필요한 선결 조건은 무엇인가?
-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말해 보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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