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요일4:17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기준이 필요합니다. 성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이자 표준은 단연 성경입니다. 모든 것은 성경에 있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이 있는가?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실천하고 완수하신 완전한 모범이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표준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셨으며,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주인공이실 뿐 아니라 성경 자체가 그 분의 삶이었습니다. 성경은 어디를 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 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술합니다. 우리가 닮아야 하고, 따라야하고, 궁극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여야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롬8:28-29).
성경은 주님의 어떠하심이 바로 우리와 직결되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이로써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게 됨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이는 그분께서 어떠하신 것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요일4:17). 요한일서에는 열 번이나 “같이”(as)란 말씀이 나옵니다. 그 중 여덟 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성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참고: 요한일서 1:7, 2:6, 2:27, 3:2, 3:3, 3:7, 3:23, 4:17. "주님께서 어떠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다는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적 지위와 위치, 상태, 크리스천의 본질적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 때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준으로, 본으로, 모범으로 삼을 근거가 됩니다. *묵상과 경건- 그분의 어떠하심과 같이(참조할 것).
과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본이시며, 기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 역시 성령으로 출생했습니다(요1:13).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으신 것처럼(눅3:32), 우리 역시 성령의 인침을 받았습니다(엡1: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롬8: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기름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고후1: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능하신 일들을 행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행1:18).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하신 것같이 우리 역시 세상에서 그러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게 됨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이는 그분께서 어떠하신 것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서 자신을 죄를 위한 희생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히9:14).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요, 종으로서 하나님께 기쁨의 제물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롬12:2, 롬15: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날 것입니다(롬8:11).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나무의 뿌리와 가지의 관계요, 머리와 몸의 관계처럼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주님의 어떠하신 것 같이 우리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저희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우리는 주님의 어떠하심과 같아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 완전하심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5:48). 주님은 하나님을 따르는데서 완전했습니다. 신실함에서 완전했고, 순종에서 완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사람이니까 완전할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너는 [주] 네 하나님 앞에 완전할지니라.](신18:13)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완전은 ‘죄 없는 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데서 완전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창17:1), 욥(욥1:1), 노아(창6:9), 아사(왕상15:14) 등을 성경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행한 죄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을 지키고,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데 완전함을 보였기에 “주 앞에서 완전하였으며”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다윗 역시 완전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완전함은 그 마음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데서 믿음과 마음이 완전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긍휼을 베푸는 일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같이 너희도 긍휼을 베풀라.](눅6:36). 하나님은 풍성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렇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마땅히 보복을 하고, 원수를 갚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용서하는 마음이 긍휼입니다. [이는, {주}여, 주께서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며 주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이니이다.](시86:5). 주님의 성품이 얼마나 잘 드러나 있는지 보십시오. 죄인들에게 한 줄기 광채와 같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오 {주}여, 주는 동정심이 많으시며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긍휼과 진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86:15). 긍휼은 용서와 동정심, 오래 참음을 동반합니다. [[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시니](시103:8). 사람은 죄인이지만 무엇이든지 받은 대로 갚아 주고자 하는 보복 심리가 본성입니다. 그것이 육신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누구에게나 분냄이나 다툼이나 원수 갚음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주님께 모두 맡기고(롬12:19, 히10:30) 우리는 주님처럼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긍휼을 기억하고 그대로 베풀어야 합니다.
셋째, 사랑하는 일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내 명령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성도들은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진리인 성경을 위해, 남편들은 아내를 위해(엡5:25,30-31), 목자는 양을 위해(요10), 형제들을 위해(요일3:16). 주님께서 아내가 될 신부인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신 것같이 하라.](엡5:25). 주님께서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형제로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두루마리 책에 자신에 관해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넷째, 형제들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과 같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받아들이라.](롬15:7). 오늘날 교회는 시기와 다툼, 파당, 분열로 계속해서 쪼개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신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죽겠다는 사람들은 있어도 형제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너희를 더욱 넘치게 사랑할수록 내가 덜 사랑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위하여 /가진 것을/ 기꺼이 쓰고 또 나 자신까지도 쓰리라.](고후12:15).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한 자들이기 때문이라.](살전2:8).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교회 형제들을 위해 내어 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어떠합니까? [이는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으면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내게 주었을 것임이라.](갈4:15b). 바울을 위해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목양의 본입니다. 형제들을 이렇게 서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다섯째, 헌신에서 주님과 같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안에서 걸으라.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하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헌물과 희생물로 드리셨습니다. 세상을 위해서(요3:16), 교회를 위해서(엡5:25), 형제를 위해서(요일3:16), 우리를 위해서(엡5:2), 나를 위해서(갈2:20)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롬12:1-2).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까?
여섯째, 용서에서 주님과 같아야 합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엡 4:32).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누구에게 용서를 비는 일도 쉽지 않지만 용서를 해 주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경험해 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용서는 무제한입니다. 무조건입니다. 그리고 즉각적입니다. 이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1~22). 한두 번도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은 결코 적지 않는 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용서의 표준은 주님이십니다.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용서는 전부여야 합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오 악한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용서해 주었으니](마18:32). 주님의 용서는 제한적이지 않고 조건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한시적이지도 않습니다. 일부분만 용서하고 조건을 걸어 용서를 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굴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거룩함에서 주님과 같아야 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갖 행실에서 거룩할지니 이는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음이니라.](벧전1:15-16). 우리는 주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온갖 행실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거룩함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정함에 이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요,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셨음이니](살전4:7). 우리는 거룩함을 따라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를지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주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목적 역시 거룩함입니다(히12:10).
여덟째, 우리의 행실이 주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걸어야 합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요, 생명의 빛이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면 어둠 속에 거하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됩니다(요8:12). 빛 가운데 걸으라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 전혀 없으나](요일2:9-10). 빛 가운데 걸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 가운데 걸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홉째, 우리는 주님이 걸으신 것처럼 걸어야 합니다.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분께서 걸으신 것같이 자기도 그렇게 걸어야 할지니라.](요일2:6). 주님처럼 걷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후5:7). 지혜롭게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여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서 조심스럽게 걷고](엡5:15). [바깥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걷고 시간을 되찾으라.](골4:5). 같은 규칙에 따라 걷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도달한 곳에서는 같은 규칙에 따라 걷고 같은 것을 생각할지니라.](빌3:16). 주님은 의의 길, 화평의 길, 생명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열 번째, 순결함에서 주님과 같아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3: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마음과 양심의 더러움을 씻고, 날마다 말씀의 물로 자신을 정결케 함으로 주님이 순결하신 것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해야 합니다. 순수한 양심, 순수한 마음, 순수한 눈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열한 번째, 의로우심에서 주님과 같아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같이 의로우며](요일3:7). 성도들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에 이제는 의를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르기를,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언제나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 희생물을 /드리는 것/보다 [주]께서 더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잠21:3). 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의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불의와 불법에 연루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비교의 대상에 넣거나 목사나 교회의 누구를 기준으로 잡지 말고 오직 주님을 기준으로 삼아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준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어차피 큰 죄나 작은 죄나 모두 죄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없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불법을 행하고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이것은 율법주의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사악한 마귀의 교리를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몇 줄 배운 성경 지식이 이런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의에 대하여 깨어 있고 범죄하지 말지니 이는 어떤 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하노라.](고전15:34). 다시 한 번 우리의 기준을 분명히 잡고, 주님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도록 기도하고, 주님께 헌신합시다.
☜ 암송할 말씀: 요일4:17
☜ 생각해 볼 문제:
- 우리의 표준이신 주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 우리는 어떤 점에서 주님과 같아야 하는지 모두
정리하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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