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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부흥 90 - 89. 주님과의 교제
말씀: 고전1:9



구원받은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깊은 [친교](fellowship)입니다. 이는 거듭난 성도들이 누구나 절감하며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없는 영적 생활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화가 단절된 부자지간이나 부부 지간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교제가 없는 친구 사이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성도는 대화하며, 깊은 친교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부르는 신부이며, 주님은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제를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친교는 어떤 일보다 더 우선하며 중요합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고전1:9).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부르신 목적 중에 하나는 교제(fellowship)입니다. 주님은 친구를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은 사랑과 우정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친구라고 부르기가 이상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내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인이 하는 것을 종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오히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5).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실 뿐 아니라 자신의 은밀한 일들까지 다 알려 주신다고 하십니다. (*창18:17 참조). [(부흥90)-51번 ‘우리의 친구가 되신 주님’을 참고할 것]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친구로 불린 사람이 이 지상에 존재했다는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친구라고 세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씨야,](사41:8). 주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 부르시며 교제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를 친구로 삼으시며, 자신을 계시하시고, 교제를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참조-대하20:7, 약2:23).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셔서 교제를 갖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이 영적 교제를 갖고 있는가 없는가?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 역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자기 친구 대하듯 하셨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니라. ](출33:11a). 다윗은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행13:22)이란 말을 들었고, 에녹은 주님과 동행하다 마침내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우리의 관계만큼 깊은 영적 친교를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보좌 앞에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선포한 장소요, 증거한 곳입니다. 십자가는 화해와 용서의 장소요, 죄인들의 죄를 씻으심으로 새롭게 한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우리의 죄와 저주가 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들을 부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역시 은혜의 보좌 앞에 언제라도 나아가 필요를 아뢰고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주종 관계, 부자 관계, 목양 관계, 부부 관계 등 다양하게 파악하고 이해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친구 관계’ 란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주와 교제하게 하기 위함이란 이 한 가지 진리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고전1:9). 주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이든 가에 친밀한 교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교제가 아니라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사귐을 갖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요일1:3).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란 점에 주목해서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듯이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고 친밀한 교제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형제와 형제의 사귐 역시 주님과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사귐의 근거는 빛 가운데 걷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 발에 등이요, 빛입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주님과의 사귐의 근거가 됩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 우리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근거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 역시[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빛 가운데 걸으면 사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생활을 하는 가운데 반드시 생각해야 할 가중 중요한 사항은 '나의 영혼은 과연 복된 상태에 있는가?', '나의 속사람은 얼마나 강건한 상태에 있는가?', '나는 형통한 사람인가?'와 같은 기본적인 물음에 대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점검하는 표를 가지고 검사해 보십시오. 저는 열매 없는 삶, 빛도 없는 삶, 맛도 나지 않고, 향기도 없는 그런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너무나 오랫동안 하면서도 ‘성경을 읽고 있다’, ‘교회에 나가고 있다.’, ‘남들이 하는 일은 열심히 한다’고 스스로 위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게는 주님의 평안이 없었고, 영혼은 메말랐으며, 속사람은 날마다 힘을 얻지 못했는데, 이 모두는 제 영혼이 주님과 깊은 교제가 없이 혼자 일방적인 종교 생활로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체험적인 교제를 갖는 일이야말로 물댄 동산 같고, 기름이 넘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길임을 잘 알지 못할 때 저는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혼이 메마르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말씀을 통한 주님의 위로와 훈계와 책망과 교훈을 받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일방적인 나 홀로 신앙이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를 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아뢰고, 듣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과의 체험적인 교제(사귐)를 가짐으로써 황폐함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그다지 아름답지도, 위대하지도 않는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람의 문제는 대부분 거기서 거기이며, 내가 겪는 문제는 형제들도 겪는 문제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앙 위인들의 전기를 읽을 때면 그들의 문제나 저의 문제나 저희 교회 형제들의 문제나 다를 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거의 동일한 문제이며, 해결 방법 역시 같습니다. 해답은 언제나 [길되신 그리스도, 진리되신 그리스도,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하십시오. 첫째, 죄와 불법은 주님과의 친교를 막습니다. [법을 힘입어 해악을 꾸미는 불법의 왕좌가 어찌 주와 교제를 갖겠나이까?](시94:20). 죄를 시인하고 고백하십시오(요일1:9). [오직 너희 불법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분의 얼굴을 돌려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고자 하지 아니하시느니라.](사59:2). 죄의 선결적인 처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불신자와 함께 메는 멍에는 주님과의 친교를 막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고후6:14). 본문의 일차적인 의미는 불신자와의 결혼을 말하지만 광범위하게 적용됩니다. 의와 불의, 빛과 어둠은 친교가 불가능합니다. 셋째, 악한 사귐이 주님과의 친교를 막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주를 부르는 거룩한 형제들과의 사귐을 가지고, 모임에 힘쓰십시오. 사업상, 직업상, 무엇 무엇 때문에 이유를 대면서 자주 불신자들과 어울리는 일을 즐길 때 여러분은 주님과의 교제를 결코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넷째, 마귀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마귀와 교제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이방인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은 마귀들에게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이런 것들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죠지 뮬러는 이런 글을 써서 영적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전에는 일어나자마자 가능한 빨리 기도하려고 했으며,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기도에 전념하려고 했습니다. 제 영혼이 심하게 황폐되어 있던 때를 빼고는,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기도로 시작했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서 제 영혼의 양식과 회복, 속사람이 부흥되고 새로워질 필요가 있을 때에만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저는 종종 영혼의 위로와 격려와 겸손의 필요 등을 깨닫기도 전에 무릎을 꿇은 채 15분이나 30분, 혹은 한 시간 가량을 허비했던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어지러운 마음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겨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식으로 고통을 당하는 데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먼저 진리의 말씀으로 꼴을 얻고, 하나님의 귀하신 말씀을 통해 제게 비추어주신 것들에 대해, 그분과의 체험적인 교제 가운데서 저의 아버지이자 친구되신 주님께(물론 나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하나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뮬러의 일기에서). 뮬러는 주님과 교제하고 자신의 영혼이 영적 양식을 섭취하는 법을 터득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이곳에 목자로 세우시고 몇 안 되지만 주님의 어린 양들을 먹이시고 돌보시게 하신 것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속사람이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오직 말씀과 기도란 상호 작용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주님과의 기도가 아니라 혼자 독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임을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대화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말하는 것이며, 말한 후에는 또 다시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와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생활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거의 힘을 쓸 수 없고 조금도 일할 수 없습니다. 며칠 굶은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속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읽기와 묵상을 통해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런 영적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속사람의 양식은 아닙니다. 양식은 말씀입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것, 양식이 제대로 영양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우리 영혼이 이른 아침부터 상쾌하게 되고 행복감으로 가득해지는 것과, 이와 같은 영적인 준비도 없이 매일의 삶에 임하여 섬기거나 고난을 당하거나 시험을 겪는 것은 실로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사무엘 깊 형제는 매일 30페이지씩 성경을 읽었고, 틈만 나면 차 안에서나 어디에서나 성경을 읽었는데 그 결과 자신은 언제나 성령 충만했다고 간증했습니다. 자신이 성경을 읽기를 결심하고 실천하면 그 말씀을 양식으로 삼았을 때 그의 속사람은 놀랍게 변화되고 강건해졌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차를 많이 운전하시는 분들은 스티커나 성경 구절을 프린트를 해서 차여기 저기를 붙여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운전하면서도 읽고, 읊조리며, 암송하십시오. 기도를 통해 방금 읽고 묵상한 말씀들을 일깨워주시기를 진솔하게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읽고, 듣고, 묵상하고, 암송한 말씀을 통해 우리 속에 크게 말씀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며, 위로하시고 교훈하시며, 우리를 겸손케 하시며, 꾸짖으시고, 책망하시고, 바로 잡아 주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응답이 주어지고, 주님과 참된 영적 교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이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은 20분 30분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아뢰고 말하지만 시간 낭비를 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혼자 횡설수설하다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환경과 장소가 영적 체험 현장이요, 하나님의 사역터 임을 믿으십시오. 모든 일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주일 설교, 내 안에 있는 말씀이 오늘 현재 내가 겪는 이런 일들에 어떻게 일하시는지 깨닫게 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이제 성장과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일은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실 일입니다. 우리 안에 부흥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변화가 따르게 되며, 몰라보게 성장이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일을 저와 여러분 안에 이루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모두 주님과 깊은 친교를 날마다 나누는 성도들이 되기를 빕니다. 교제의 근거는 십자가의 피요, 교제의 방법은 빛 가운데 걷는 것이요,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과 대화가 통하지 않고 교제가 되지 않는 상태라면 너무 어려서 말을 못 배운 아이이거나 죄로 말미암아 교제가 단절된 것임을 아십시오. 이때는 주님께 고백하고 새롭게 회복케 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 암송할 말씀: 고전1:9, 요일1:3

☜ 생각해 볼 문제:

- 주님과의 친교를 나누는 방법은 무엇인가?
-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을 기도라 한다면 말씀을 듣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을 말해 보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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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