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에스겔 20:1-12

요절: 에스겔 20:8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얻기를 원하지만 때로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할 때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도 있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자신이 결국 파멸에 이르고,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청소를 하거나 이사를 할 때 우리는 쓸데없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었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머리 속에, 마음 속에는 쓸데없는 것들이 공간을 가득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정작 소중한 것들을 전혀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가득 찬 공간에 무엇을 새로 넣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에스겔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이미 포로로 잡혀 온지 칠년이 지났습니다. 제 1장에서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 온지 오년이 지나면서 에스겔서가 시작되었습니다(겔1:2).
에스겔서에는 계속해서 햇수가 기록되어 있는데(1:2,8:1,20:1,24:1,26:1,29:1 등등), 이는 포로로 잡혀 있는 세월들이 얼마나
길고 지루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마치 교도소에 잡혀간 죄수가 나갈 날을 기다리는 것이나 군대에 간 군인이 제대 날짜나 휴가 갈 날을 기다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제칠년 오월 곧 그 달 십일에 이스라엘
장로들 가운데 몇 사람이 [주]께 여쭈려고 와서 내 앞에 앉으니
](1). 이들은 무엇을 묻고 싶어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묻는
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물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묻고 답을 얻는 것이 최선입니다. 주께 여쭙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사울의 죄가
많고 많지만 가장 결정적인 죄는 주님께 묻지 않는 것입니다. [[주]께 여쭙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분께서 그를 죽이시고 왕국을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대상10:14). 사울은 다급한 마음에 접신하는 여자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묻는 대신
카운슬러를 찾아가거나 전문가를 찾거나 친구나 친척들에게 묻습니다. 이는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다윗은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다시 옮겨오자. 이는 사울 시대에 우리가 그 궤 앞에서 여쭙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매
](대상13:3).
주님께 묻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앞에 두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2-3절입니다. [그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2-3).
주님은 에스겔에게 대답할 말씀을 주셨는데,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그들이 불법에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주님께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아무나 언제나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묻기
위해서는 먼저 불법의 걸림돌, 마음 속에 세워둔 자기 우상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었으니 과연 그들이 내게 물을 수 있겠느냐?
](겔14:3).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고 불평하고, 답답해 합니다. 주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다고 한 숨을 짓습니다. 이는 그들이 불법을 세워두고 주님 앞에 나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묻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불법의
걸림돌을 치우고, 마음 속 우상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묵상과 경건: 주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참조할 것] 우리는 사울 왕을 통해 이 일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주님께 물었지만 주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시겠나이까? 하였으나 그분께서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삼상14:37). [사울이
[주]께 여쭈었으나 [주]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대언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
](삼상28:6). 주님은 사울이 마음 속에
불법을 회개하지 않고 나아왔을 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 속에 불법을
중히 여기면 주님은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는 기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내가 마음 속으로 불법을
중히 여기면 {주}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66:18). 이것은 영적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자신이 스스로
불법을 중히 여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경우에 불법을 매우 중히 여깁니다. 아간은 불법을 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저주받은 물건을 자기 장막 안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불법을 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엘리사 몰래 나아만 장군을 쫓아가 은 이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문둥병이 걸렸습니다(왕하5). 아나니야와
삽비라는 불법을 중히 여겼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즉사했습니다(행5). 사람들은 탐욕으로 인해 불법을 중히 여깁니다.


우리가 불법을 행할
때 주님은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손을 내밀 때에 내가 내 눈을 돌려 너희에게 숨기겠으며 참으로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너희 손에는 피가 가득하니라.
](사1:15).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기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도둑놈이 도둑질을 계속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과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 직업을 버려야 합니다. 환자를 등쳐먹는 의사, 사건 의뢰인의 돈을 뜯어먹는 변호사, 탈세와 부정을 저지는 세무사나 회계사
등은 자신이 하던 짓을 그만두던가 아니면 수입이 반으로 확 줄더라도 부정을 버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전히 이전에 하던 짓을 계속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하십니다. 이사야 59:3에 이르기를, [이는 너희 손이 피로, 너희
손가락이 불법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이며 너희 입술이 거짓을 말하고 너희 혀가 사악한 것을 내기 때문이니라.
](사59:3)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정과 불법에 내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악한 행위를 그대로 간직한 채 기도할 때 주님은 얼굴을 돌리시고 맙니다. 미가서 3:4에,
[그때에 그들이 [주]께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겠고 그들이 자기 행위로 악하게 행한 것같이 그때에 그분께서
자신의 얼굴을 돌려 그들에게 숨기시리라.
](믹3:4)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불법을 버리고, 죄를 버리고, 죄에 연루된
일들을 처리해야만 합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은 급한 마음에 금식하고, 성전 예배를 드리고, 희생물과 봉헌물을 바쳤지만 주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기도보다, 희생물보다, 예배보다 더 급한 것이 회개이며, 죄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번제 헌물과 봉헌물을 바칠지라도 내가 그것들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칼과 기근과 역병으로
그들을 진멸하리라, 하시니라.
](렘14:12). 여러분이 만약 고난과 슬픔의 때에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고 막연히 금식을 선포하고,
십일조를 내고, 주일 예배에 잘 참석한다고 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향을 바꾸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어떤 경우에도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터이나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아침 일찍 나를 찾을 터이나 그래도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주 두려워하기를 택하지 아니하며
내 권고를 원치 아니하고 내 모든 책망을 멸시하였음이니라.
](잠1:28-30).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므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일찍부터 일어나 말하고 말하였어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고 내가 너희를 불렀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였도다.
](렘7:13).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한 것에 대해 철저한 회개없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은 주님께 가증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거주민을 향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그들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라.
](렘35:17).


4절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그들을 심판하고자 하며
네가 그들을 심판하고자 하느냐? /너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 조상들의 가증한 것들을 알게 하라.
](4). 심판한다는 말은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의 심판은 그들의 죄악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증한 일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대언자들이 해야 할 일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전에 그들의 죄악을 보여 주고,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도저히 백성들의 인기를 얻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자기의 가증한 일들을 알게 하여](겔16:2), [너 사람의 아들아,
이제 네가 저 피흘린 도시를 심판하고자 하며 네가 심판하고자 하느냐? 참으로 너는 그녀에게 그녀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보여 주며
](겔22:2).
사람들은 이런 일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침례인 요한은 복음 선포이전에 백성들의 죄를 선포했습니다. 주님 역시 백성들의 죄를 선포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죄를 알게 해 주는 일은 매우 껄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5절입니다. [또 /너는/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전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택한 날에-KJV) 야곱의 집 씨를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며 이집트 땅에서
그들에게 나 자신을 알려 주었고 그 날에 내가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며 이르기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노라.
](5).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역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15:16a)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약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셨음을 아노라.
](살전1:4). 주님은 [여호와]란 이름을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출6:1-4).


사람이 하나님 앞에 손을 들면 기도를 하거나 경배의 자세입니다.
몇 가지 성경적 예를 보겠습니다. [에스라가 [주] 곧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매 온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머리를 숙여
얼굴을 땅에 대고 [주]께 경배하였느니라.
](느8:6). 우리는 경배의 행위로서 손을 드는 것을 봅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을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28:2). 기도의 자세로서 손을 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평생에 주를 찬송하고 주의 이름으로 나의 손을 들리니](시63:4). 이 역시 기도의 자세입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
](시141:2). 주를 향해
손을 들었다는 것은 기도하고, 찬양하고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밤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밤의/ 경점(更點)들이 시작되는 때에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같이 쏟을지어다. 굶주림으로 인해 모든 거리의 높은 곳에서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해 네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애2:19). 사도 바울은 모든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딤전2:8). 여러분이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입니다. 손을 드는 가장 보편적인 예가 기도의 자세입니다. 찬양의 행위로 손을 듭니다. [성소에서 너희
손을 들고 [주]를 찬송하라.
](시134:2).


반면 하나님이 손을 든 것은 능력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리셔서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셨고,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이 손을 드신 것은 원수를 무찌르시는 전쟁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자신의 손을 들어 그들을 치사 광야에서 그들을 거꾸러뜨리시고](시106:26). 주님께서
손을 드셨을 때 이집트는 망했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방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백성을 향하여 내
군기를 세우리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팔로 안아 데려올 것이요,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사49:22). [그분께서
원수같이 자신의 활을 당기시고 대적같이 자신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시온의 딸의 장막에서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모든 것을 죽이시고 자신의 분노를
불같이 쏟으셨도다.
](애2:4). 주님께서 손을 드실 때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6절입니다. [또 그 날에 내가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며 또 내가 그들을 위하여 찾아 놓은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영광이 되는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였으니
](6). 이것은 출애굽기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행한 일을 말씀하심으로 역사의 하나님을 계시해
주십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현재와 미래가 없습니다. 주님이 가장 신경 쓰시는 부분 중 하나는 역사 교육입니다. 역사의 현장을 체험한 성도들은
반드시 후대에 말씀을 증거 해 주어야 하며, 믿음을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출애굽의 역사를 후대에 모두 전해 주셨지만 그들은 과거는
과거로만 알았던지라 조금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징착했던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찾아 놓은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영광이 되는 곳“입니다. 이곳은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 땅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잊지 말라”, “기억하라”는 말씀은 수없이 반복됩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를 잊지 말고
](신6:12), [너는 광야에서 [주] 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신9:7a). 저와 여러분 역시 동일합니다. 구원받은 은혜, 첫 사랑(계2:4)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주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혼에게 이렇게 명령해야 합니다. [오 내
혼아, [주]를 찬송하며 그분의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
](시103:20).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믿음도 소망도
없습니다.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린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주님은 그들의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 이것들을 알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내 아들아, 내 법을 잊지 말고 네 마음으로 하여금 내 명령들을 지키게 할지어다.](잠3:1).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그것을 잊지 말며 내 입의 말들에서 벗어나지 말라.
](잠4:5).


7절입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각
사람은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고 이집트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노라
.](7).
주님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면서 이들이 이집트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모두 버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자기 눈의 가증한 것”이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입니다. “버리라.” 버리지 않으면 새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새 것을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먼저
버려야만 합니다. 이집트는 세상을 예표합니다. 세상을 버리지 않으면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고” - 이것은
새로운 삶의 첫 걸음입니다. 야곱이 상수리 나무 아래에 모든 우상 조각들을 다 묻어 버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벧엘’로 올라가 경배를 드렸듯이
우리는 이전에 소유한 것들을 귀히 여기지 말고 과감히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고 묻어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가지고 있어도 자신만을 더럽힐
뿐입니다.


1. 우리는 먼저 어둠의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더러운 옷을
벗듯이 버려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귀한 옷, 새 옷을 입으려면 더러운 옷을 먼저 벗어 버려야 하듯이 주님을 믿는 백성은 필히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2. 묵은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고전5:7).


3. 정직하지 못한 일들을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감추어
둔 정직하지 못한 일들을 버리고 간교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게 우리 자신을 추천하노라.
](고후4:2).


4.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4:22).


5. 거짓말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즉 거짓말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肢體)이기 때문이니라.
](엡4:25).


6. 모든 더러움가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1:21).


7. 모든 악의와 교활함, 위선, 시기,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악의와 모든 교활함과 위선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2:1).


버려야 할 것들을 안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버리시라고 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음식을 버리지 않고 먹으면 몸에 병이 나듯이 버려야 할 생각, 행동, 생활 습관 등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금방 상하고 맙니다.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몸의 행실로 우리 자신을 가장 더럽히는 것은 음행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행하는 모든 죄는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느니라.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18~20).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더 성행하는 죄악이 음행입니다. 먹고 살 것이 풍족할수록 넘치는 죄악이 음행입니다. 특히 동성연애와 같은 범죄는 극도로
몸을 더럽히는 행위요, 그 땅을 더럽게 하는 행위입니다. [음행을 일삼는 자와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는 자와 사람을 납치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위증하는 자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를 거스르는 것 때문이니
](딤전1:10). 이런 부류의 죄는 문화 현상이나
시대적 흐름이 아니라 엄중한 죄악의 증가로 보아야 하며, 이런 죄악의 범람을 대적하여 싸워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의 정신을 완전히
장악하는 범죄는 음란 문화인데, 문화가 아니라 죄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
](고전3:17). 몸을 더럽히는 일은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또/ 낮에와 같이 정직하게 행하며 흥청거리거나 술 취하지 말고 침실을 더럽히거나 방탕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자.](롬13:13).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우리를 더럽힙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色慾), 악한 눈, 신성 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기 때문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7:15-16, 20-23). 버리고, 더럽히지 말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더럽혀져 있는 상태입니다. [순수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순수한 것이 없고 오히려 그들의
생각과 양심마저도 더럽혀져 있느니라.
](딛1:15).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피를 통해 양심이 정결해지고, 말씀으로 씻음 받지 않으면
더러움을 씻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종교와 철학, 선행으로는 결코 더러움을 씻을 수 없습니다. 다만 조금 가려 줄 뿐입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각 사람이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이집트의 우상들을 버리지도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이집트 땅
한가운데서 그들에게 내 격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분노를 다 이루리라, 하였노라
.](8). 이스라엘은 주님이 ‘버리라. 더럽히지 말라’고
명령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의 가증한 것들, 이집트의 우상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끌어 안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주님의 격노와 분노를 받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고, 갖고 싶어
탐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간을 보십시오. 태워서 묻어야 할 것들을 보물처럼 장막 밑에 숨겨 두었습니다. 저주받은 물건이지만 그는 탐이
났고,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버리지 못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21세기의 교회가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단연 우상 숭배입니다. 돌이나 나무나 해, 달, 별에게 절하는 우상
숭배는 줄어들었지만 마음 속은 온갖 우상들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탐욕이란 우상, 맘몬이란 신이 성도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 잡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우상이 되고, 교육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이익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우상 숭배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즉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를 피하라.
] (고전10:14).


오늘날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단연 첫 번째 이유를
꼽으라면 우상 숭배의 죄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버리지 못했고,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우상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宴會)와 가증한 우상 숭배 속에서 걸어 이방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한 것이
우리 삶의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이라.
](벧전4:3),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하라. 아멘.](요일5:21).


9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였나니 곧 내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고 그들과 함께 거하는 그 이교도들의 눈앞에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내 자신을 그들에게 알렸노라.
](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시려고 인도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 자존심이나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 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일하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곧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리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히리요?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48:11).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면 멸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거든 헛짓이라도 하지
말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에 관하여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아니하면 가서 각각 자기 우상들을 섬기고 이후에도 그리할 것이며 다시는 너희 예물들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겔20:39). 우상을 숭배하려면 철저히 우상만 계속 숭배할 것이지 왜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냐?
는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다니면서 아무 곳에서나 주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그들이 이교도들에게로 들어갔을 때에 자기들이 다니는 곳에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나니 이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들은 [주]의 백성이지만 주의 땅에서 떠나간 자들이라, 하였음이라.
](겔36:20).
이제 주님은 더 이상 이들이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이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심지어 모독을 받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2:24) 고 했습니다. 이는 율법을 지닌 자가 율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가장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모독하는 일은 더러운 대화입니다. [이제는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내어 버리라.
곧 분노와 진노와 악의와 신성 모독과 너희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대화라.
](골3:8). 그리스도인이 되면 눈에 띄게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은 말투입니다. 말이 이전과 완전히 바뀌면 사람들이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더러운 대화, 농담, 헛소리 등이 그 입에서 나올 때 주님의 이름은
더럽혀지고 모독을 받게 됩니다.


종의 자세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다 자기 주인들을 매우 존경할 자로 여길지니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교리가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딤전6:1). 우리는
멍애 아래 있는 종들입니다. 국가, 가정, 교회라는 조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회사에서 누군가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은 권위에 순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교리를 위한 것입니다. 특히 아내들, 자녀들은 남편과 부모에게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신중하며 정숙하고 가정을 지키며 선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2:5).
예수 믿는 여자들은 말이 많다. 드세다. 남편 알기를 우습게 안다. 이런 식의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정숙해지고, 순종적이
된다는 평을 받아야 합니다.


10-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나오게 하여 광야로 데리고 가서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를 그들에게 주며 내 법도를 보여 주었고
](10-11).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광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기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 살게 될 내 법규”란 생명의 법규를
말합니다. 구약 성도들은 믿음의 법이 제시된 것이 아니라 행위의 법입니다. 율법은 믿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행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내 법규와 내 법도를 지킬지니 사람이 이것들을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리라. 나는 [주]니라.
](레18:5).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에서 난 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율법에서 난 의와 믿음에서 난 의를 확연히 구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 모세가 율법에서 난 의를 묘사하되,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에서 난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에서부터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깊음 속으로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죽은 자들로부터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10:4-8).
하나님이 구약 성도들에게 주신 율법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습니다.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법규”란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통한 구원(겔18:5)인데, 신약의 구원과는 사뭇 의미가 다릅니다. [그 까닭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다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니 이는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 오직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또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오직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3:10-12). 구약과 신약은 사는 방법이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이 주신 법규를 지켜야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삽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육체가 없는데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 사느냐?는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주님은 지켜야 할 율법과 동시에 속죄제를 위한 규례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는 모세가 율법에 따라 온 백성에게 모든 훈계를 말한 뒤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물과 주홍색 양털과 우슬초와 함께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상속/ 언약의 피라, 하고
](히9:19-20). 주님은 이들이
지켜야 할 율법 속에 속죄를 포함해 주셨습니다. 피를 통한 속죄를 통해 이들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행한 율법은 속죄제와 짐승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을 행한다는 의미는 속죄제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피를 통해 이들은 정결함을 입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수소와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거든](히9:13).
주님은 이들이 행하면 살게 될 율법을 주셨습니다.


12절입니다. [또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었노라.
](12). 주님은
안식일도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지킨 율법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 이전에는 안식일에 대한 규례가 없습니다. 흔히
안식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안식일은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규례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주님이 쉬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안식일을 제정해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나 아벨, 에녹, 노아가 안식일을 지킨 적이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주어진 표적입니다. 안식일은 교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누구에게
줬습니까?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내 안식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그 날을 거룩하고 복되게 하셨기에 주님의 안식일입니다(신5:14). 왜 주셨습니까?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표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무지개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맺어진 표적이듯이, 안식일 역시 그런 표적입니다.


표적이란 말은 표(sign)를 나타낸 것으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기적, 이적, 기사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표적은 반드시 기적이나 이적으로 나타나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반지는
결혼했다는 표입니다. 이것은 다른 반지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결혼했다는 표를 나타내는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 표를 제거하거나 소홀히 하거나
팔아먹어 버리는 행위는 배우자에 대한 실례이며, 자신의 결혼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였습니다. 현재 우리는 주의 첫날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이 날 모이는 것은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로서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안식일을 이스라엘에게 줌으로써 각별한 애정을 나타내 보이셨고, 이스라엘은 그 날을 통해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주님을 경배하고
구속받은 존재임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복 주신 사실과 택함 받은 백성이란 정체성을 새롭게 할 수 있고,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파괴할 때 주님과의 관계성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교회와
성경을 주셨는데 이야말로 최대의 표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우리 안에 주셨는데 이 역시 최고의 표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시 하나님이 보여 주신 표적입니다. 이런 표적을 통해서 주님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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