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20:13-49
요절: 에스겔 20:
세상에는 법이 있습니다. 많은 법이 있지만 모든 법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사람이 살게 될 법과 살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성경은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행하면 살게 되는 법이 있고,
행해도 살지 못하는 법이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의 법입니다. 복음은 자유의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고 했습니다. 생명의 법과 성령의 법이 하나이고, 죄의
법과 사망의 법이 하나입니다. 주님은 사람들 앞에 두 가지를 놓고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이 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며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며 또 그분을 굳게 붙들라. 이는 그분이 네 생명이시요, 또 네 날들을 길게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니 이로써 네가 [주]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거하리라.](신30:19-20). 성도들이 이런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생명의 법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대로 행하면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들이 행한 일을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13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집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법도를 멸시하고 내 안식일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격노를 쏟아 그들을 소멸시키리라, 하였느니라.](13). 첫째, 반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 반역했습니다. 그들은 순종하는 대신 반역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인 반역하는 민족이요, 반역자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열 명의 정탐꾼이 그들에게 악한 보고를 했을 때 그들은 모두 반역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우리의 빵이기 때문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14:9).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하는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주]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막대기는 증거/판/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하는 자들을 대적하는 증표가 되게 하며 또 너는 그들로 하여금 나에 대한 불평을 그치게 하고 이로써 그들이 죽지 않게 할지니라,
하시니](민17:10). 모세는 40년을 백성들의 목자로 신실하게 일하면서 그들을 향해 내린 결론은 반역자들이란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 반석 앞으로 회중을 함께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반역자들아, 이제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야만 하랴? 하고](민20:10). 주께 반역하는 백성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본 모습이었으며 역사를 통해 입증된 그들의 민족성이요,
전통이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통해 반복적으로 증거된 말씀은 “너희들이 주께 반역했다!”는 죄악의 선포요, 그에 대한 심판의
선포입니다. 죄인은 누구나 하나님께 반역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하기 때문입니다. 반역자에 대한 주님의 치리는 잔인한 사자를 보내시거나
직접 원수가 되셔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를 치려고 /주께서/ 잔인한 사자(使者)를 보내시리라.](잠17:11).
[그러나 그들이 반역하여 그분의 거룩한 영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돌이키사 그들의 원수가 되어 친히 그들과 싸우셨느니라.](사63:10).
이스라엘은 반역의 역사였기에 이들의 역사는 징계와 심판이란 수난의 역사였습니다.
둘째, 주님의 법규 안에서 걷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법규를 지키는 대신 주님의 법도를 멸시했습니다. 십계명을 제대로 지킨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반드시 지킬 것을 맹세하고 받은 법규들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주의 법규를 멸시할 때 그들은 영토를 잃게 됩니다. [그들이 내 법도를 멸시하며 그들의 혼이 내 법규를 몹시 싫어하였으므로
그들이 그 땅을 떠났을 때에 그 땅도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받으리라.](레26:43). 뿐만
아니라 일곱 배의 재앙, 벌, 징계를 내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레26:18,21,24,28 참조). 주님은 순종에 대한 복에 대한 말씀도 확실히
집행하시지만 불순종과 반역에 대한 벌 역시 확실하게 집행하십니다.
셋째, 주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안식일을 이스라엘에게 표적으로 주셨습니다. 이는 야곱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힌 것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보배로 삼으신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는 말씀은 율법의 계명이기도 합니다.
안식교도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이 말씀은 신약의 교회에게 주신 계명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이요,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안식일 준수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이방 민족과 구별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방 민족도 안식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요일에 예배를 봅니다. 휴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구별이 됩니다.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채 이런 유대인들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안식교도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 까닭은 이것이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출31:13). 안식일 준수를 통해 이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안식하시고 복주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하기만 해도 우상 숭배, 일월성신 숭배는 끼어들 틈이 없게 됩니다. 주님은 이들이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일을 했고, 오락을 구했고, 유희를 즐겼습니다. 안식일은 육신의 쉼이 아니라 영혼을 새롭게 하는 영적 안식이 본래의 의미입니다.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음이니라, 하라.](출31:17). 주님은 안식하심으로 상쾌하게(refresh) 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이 백성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안식이니 너희가 피곤한 자로 하여금 이 안식으로 안식하게 하라. 이것이 상쾌함이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고자 하지
아니하므로](사28:12). 현대인들은 누구나 에너지 재충전을 위해서 평안한 휴식 기간을 필요로 합니다. 휴가를 떠나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참된 안식은 누구를 통해서 옵니까? 참된 예배를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옵니다. 형제들과의 영적 교제를 통해서 옵니다. 주님은 자신의 안식을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각자의 처소에서 주님의 안식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로되 오직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안식일이니 곧
거룩한 집회라. 너희는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 이것은 너희 모든 처소에서 [주]의 안식일이니라.](레23:3). 이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영적 의미입니다. 안식일의 영적 본질은 이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느 곳에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자신의 모든 일을 떠나 안식하셨느니라, 하셨으며 또 다시 이 대목에서,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려면 /믿어야 하리라/, 하셨기
때문이니](히4:4-5). 주님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안식일 준수를 통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다는 것은 안식일을 통해 진정한 안식을 주시려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였나니 곧 내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고 그 이교도들의 눈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었느니라.](14). 주님이
법규를 주시고, 안식일을 주신 것,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목적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고”
-주님이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5절입니다. [또 내가 광야에서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고 내가 그들에게 이미 준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영광이 되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고자 하지 아니하였으니](15).
여기서 우리는 시제에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미 준 땅”이라고 하십니다. 줄 땅이 아니라 준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주셨습니까?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원칙을 배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체(히11:1)라는 말 그대로 미래가 현재가 되고, 이미 소유한 것이 됩니다.성도는 주님이 주신 것을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아 보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받아 소유해야 합니다. 그들이 이집트에 있을 때나 광야에 있을 때나 이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소유였습니다. 차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믿음과 현실의 괴리를 느낀다고 합니다. 신앙은 마음속이요, 관념이요, 말 그대로 믿음의 문제이지
실제와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언제 약속의 땅을 받았습니까? 여호수아를 통해 정복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언제 받았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미 이집트를 나올 때부터, 광야에서도 그 땅을 받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광야 길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접수하러 가는 것이요, 차지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받으러 가는 길이 아니라 받은 땅을 소유하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약속의 말씀을 받는 순간 이미 그것은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며, 차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곧바로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곧 바로 얻을
땅을 불신과 불순종으로 반역하여 무려 40년이나 광야를 돌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믿음에만 머물고 현실이 되지 못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할 것을 받을 줄로 믿고, 이미 받은 것들을 아직 받지 못한 채 받아야 할 것들로 잘못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을 원하든지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막11:24).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받은 것으로 믿지 않고, 받을 수 없다고 믿는 것이 불신이요, 반역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받은 것도 빼앗기게 됩니다.
16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마음으로 자기 우상들을
따라가며 내 법도를 멸시하고 내 법규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라.](16).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즉각 누릴 수
없게 하신 이유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순례의 길에서 우상들을 따를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들을 결코 소유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왜 성도들이 주님이 이미 주신 평안을 마치 받지 못한 것처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대신 마음으로 자기
우상들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법규인 말씀을 멸시하고 성경대로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이 주신 기쁨을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사는
것 역시 마음으로 자기 우상들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17-18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이 그들을
아껴 그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그들을 끝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조상들의 법규 안에서
걷지 말며 그들의 법도를 지키지 말고 그들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17-18). 주님은 다시 한 번 그들의
살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주의해야 할 주의 사항은 “조상들의 법규대로 하지 말라”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깨부수고, 버려야 할 것들이지 고히 간직하고 따라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조상들의 전통, 장로들의 전통을 더 추종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그들이 빵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또한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느냐?](마15:2-3).
사람들은 주님께 전통을 제시했고, 주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했습니다. 이 둘이 부딪히고 있습니다. 유대교적 전통이든 기독교적
전통이든 민속 고유의 전통이든 우리 가문에 내려 오는 전통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무조건 부수고 새롭게 말씀 중심의 가치관과 틀[교리의
틀]을 세워야 합니다. 주님은 전통들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바로 잡으시고, 전통의 폐해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저버리는도다.](막7:9), [너희의 전해 내려온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더라.](막7:13). ‘너희의 전통, 너희의 전해 내려온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시키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조상들의 전통이 있고, 여전히 그 안에서 걷고 그것을 지키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추석, 설, 토정비결, 사주팔자, 궁합, 길일(吉日)을 택하는 것 등이 모두전해 내려온 전통들입니다. 복음은
전통으로부터의 구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전통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대속(代贖)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1:18). 한국인들이 가장 얽매이는
조상들의 전통은 ‘가족주의’입니다.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은 가족주의란 전통을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정(情)과 혈연의 끈을 십자가로 끊어
버리고 말씀을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혈연, 학연, 지연등의 끈은 모두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입니다. 한국 사회는
정직보다는 의리를 중시하는 문화입니다. 이 역시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연줄에 따라
의리를 중시합니다. 주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것과 동일한 말씀을 저희에게 주십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의 법규 안에서 걷지
말며 그들의 법도를 지키지 말고 그들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18).
19-20절입니다.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 너희는
내 법규 안에서 걸으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고 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니라. 안식일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이 되리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노라.](19-20). 주님은 특히 안식일 준수를 매우 강조하시는데 안식일 준수야
말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첩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일상의 업무, 일로부터 벗어나는 하루입니다. 육신의
일을 쉼으로써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줍니다. 하나님을 찾게 해 줍니다.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할 시간이요, 예배를 통해 주님과 친교를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의 철저한 준수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느끼는 성도들이 많이 있지만 일주일에 하루 특별히 주님과의 시간으로 떼어 놓는다는데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평일보다 주일이 더 바쁩니다. 평일에 처리하지 못했던 일을 주일에 해야 하고,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주일에 만나야 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등 이런 저런 일을 하다 보면 더 피곤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주님과의 영적 교제 시간을 위해 구별해 놓은 날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 잡무를 처리하는 시간이 되고 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특정한 시간을 따로 떼어 놓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일 예배 시간,
주중의 기도 모임 시간, 여러분만이 가질 수 있는 골방의 기도 시간 등은 주님을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시간들입니다. 마귀는 늘 바쁘게 합니다.
몸도 마음도 분주하게 함으로 주님과의 영적 교제를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손들이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 안에서 걷지 아니하고 내 법도를 지켜 행하지도 아니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격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분노를 다 이루리라, 하였노라.](21). 이스라엘이 광야 사십년 동안,
그리고 이후에 보여준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격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생명대신 죽음을 복되신 재앙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22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손을 억제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였나니 곧 내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고 그 이교도들의 눈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었느니라.](22).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반역한 이스라엘을 전멸시키지 않으시고 참으셨습니다.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님의 명예, 영광을 위해서 용서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민족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이들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이 없으므로 그들을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민14:15~16). 백성을 모두
법대로, 죄악대로 심판하면 주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사이에 모독을 받고, 영광이 가려질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이름이 이교도들 앞에서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무엇을 하시는가?
첫째,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23:3).
목자이신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인도하십니다. 예전에 저희들의 학교 교육에 맨 처음은 늘 국위선양이었습니다. 국가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을
하며 가문의 명예가 되고, 결국 자기 일신의 영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국을 위해서! 란 애국심의 고취가 우리의 진로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다 어느덧 그런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보다는 개인의 영예를 소중히 여기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국가와 사회와 단체와
가문과 우리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도록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은 하나님의 이름[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인도받는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이시기 때문이오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인도하고
지도하소서.](시31:3).
둘째, 우리의
불법을 용서하십니다. [오 [주]여, 내 불법이 크오니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것을 용서하소서.](시25:11).
누구나 불법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마땅하지만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불법을 용서하십니다. 회교도들은 가족 중에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가 있을 때 가문의 수치를 덜기 위해 가족 중에 누가 그를 죽여 버리는데 이것을 명예 살인이라고 합니다. 체면과 명예를 중시했던 우리
조상들 역시 가문에서 불법자가 나오면 파문을 하거나 호적에서 지워 버림으로써 문중의 이름을 지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이시고, 쫓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를
도우시고, 건지십니다. [오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의 죄들을 깨끗하게 하소서.](시79:9). 그리스도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도우시고 건지십니다. [그러나, 오 {주} [하나님]이여, 내게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소서. 주의 긍휼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시109:21). 여러분이 기도할 때 이점을 인식하고 믿음으로 기도한다면
효력있고 권능있는 기도의 힘을 맛볼 것입니다.
넷째,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이것은 자신의 강하신 권능을
알리고자 하심이로다.](시106:8).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나 잠재적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위해
주님이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름을 위해 일하셨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섯째, 우리를
살리십니다. [오 [주]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를 위하여 내 혼을 고난에서 이끌어 내소서.](시143:11).
술좌석에 가면 한국인들은 “--위하여”라고 건배를 외칩니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그러나 우리는 늘 “주의 이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시고, 살리시고, 매일의 삶을 도우시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여섯째, 우리를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몹시 싫어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왕좌를 욕되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와 맺은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깨뜨리지 마옵소서.](렘14:21).
일곱째,
돌이키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내가 이것을 행하는 것은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요, 너희가 이교도들에게로 들어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니라.](겔36:22).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지시고, 다시 땅을 주시고, 해방해 주시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사이에 더럽혀 놓은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덟째,
질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제 내가 야곱의 포로 된 것을 다시 데려오고
이스라엘의 온 집에게 긍휼을 베풀며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질투하리라.](겔39:25).
다윗이나 솔로몬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모세는 중보 기도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의 이름을 위해 우리는 고난을 받고, 인내하며, 사랑의 수고를 감당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23-24절입니다. [또 내가 광야에서 그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어올리고 그들을 이교도들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나라로 흩어 버리리라,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내 법도를 집행하지 아니하고 내 법규를
무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자기 눈으로 자기 조상들의 우상들을 따랐음이라.](23-24). 주님은 왜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잡혀
왔는지, 여러 나라로 흩어졌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멸시하고, 안식일은 더럽히고, 자기 조상들의 우상들을 따랐던 것입니다.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들에게 선하지 못한 법규와
그들이 /행하여도/ 살지 못할 법도를 주었느니라.](25). 이제 주님은 생명의 법규 대신 선하지 못한 법규, 살지 못할 법도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믿음을 주시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강한 미혹과 거짓말을 보내시듯(살후2:11), 주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우상들을 쫓는 그들에게 선하지 못한 법규와 살지 못할 법도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주로 마귀로부터 오는 것으로 알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거짓 대언자를 보내시기도 하시고(겔149, 믹2:11), 사람들이 악법을 만들어서 스스로 올무에
걸리게도 하십니다.
26절입니다. [또 그들이 태를 연 모든 자들로 하여금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예물로 그들을 더럽혔나니 이것은 그들을 황폐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내가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었노라.](26). 이스라엘은 주님이 금하신 인신 공양을 드림으로써 주님의 분노를 샀습니다. 이렇게 우상 숭배로 찌든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방법은 황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쟁, 기근, 질병을 통해서 완전히 황폐하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섬겼던 우상들의 무능함과
헛됨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이 그들을 황폐하게 하지 않으시면 그들은 계속해서 우상을 섬길 것이며, 우상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