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에스겔 23:1-21

요절: 에스겔 23:


주님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를 두 처녀 자매에
비유하시고, 이들이 행한 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십니다. 이들은 음행하는 처녀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도시와 민족을 주로 여자로 비유하시며
음녀라고 하시는데 에스겔 16장, 잠언5, 7장과 연관하여 읽으면 영적 교훈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부자(父子) 관계로 묘사될 때가 있고, 부부(夫婦) 관계로 묘사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너를
만드신 이가 네 남편이기 때문이니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주]시니라. 그분은 네
구속자(救贖者)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시리라.
](사54:5).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인 동시에 배우자에 대한 정조에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을지라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렘31:32).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으셨는데 이는 이들의 영적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영적 음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음행했을 때 이혼을 선언하셨습니다. [너희 어머니와 변론하고 변론할지니 이는 그녀가 내 아내가 아니요,
나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런즉 그녀로 하여금 자기 눈앞에서 행음(行淫)을 버리고 자기 젖가슴에서 간음(姦淫)을 버리게 할지니라.
](호2:2).
음행은 합법적으로 이혼 사유가 되며, 결혼의 계약 관계를 자동적으로 파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교한 이스라엘에게 이혼장을 주셨듯이 세상과 음행하는
배교한 교회를 향해 역시 이혼장을 주십니다. 배교한 교회에게 주시는 이혼 증서가 바로 배교한 학자들이 만든 성경입니다. 제롬이 만든 라틴
벌게이트의 마태복음 19:7의 "이혼 증서"란 단어의 헬라어는 "비블리온 아포스타이온"(Biblion Apostasion)으로 "배교한 성서"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배교한 교회, 세상과 결혼해 버린 음녀인 로마 캐톨릭 교회에게 이혼 증서인 배교한 ‘라틴 벌게이트 성서’를 주셨고 이에
곧바로 암흑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현재 로마 캐톨릭 성경을 그대로 사용하는 개신교도들은 주님이 주신 이혼 증서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음행이란 정해진 상대가 아닌 다른 상대와 놀아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스라엘은 한 분 하나님 외에 주변 민족들의 신들을 받아 들였습니다. 남자는 신의, 여자는 정조(지조)란 말이 있듯이 ‘정조 관념’이 없는
여자는 모두 음녀입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때이며, 노아와 롯의 시대인고로 극도로 음행이 난무합니다. 소설, 영화, 연극, T.V, 잡지,
인터넷 등이 음행을 사랑으로 둔갑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음행은 마귀의 영이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일입니다. 노아의 홍수의 원인은 음행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망한 것도 원인은 음행이었습니다. 육체적 음행의 배후에는 영적 음행이
있습니다.


1-2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두 여자가 있었는데 한 어머니의 딸들이라.
](1-2).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모두 한 민족입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을 거쳐 이들은 둘로 분리되었고 북 왕국은 아시리아에게 망하고 남 왕국 유다는 바빌론에게 망했습니다. 한 어머니의 딸들이란 말에서
두 자매의 운명이 비슷할 것이며, 이들이 가는 길이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우리 속담에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하지만 이곳에는
‘Like mother, like daughter’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같다는 것은 보고 배운 것이 같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위인들을 살펴보면 훌륭한 아버지 밑에는 훌륭한 자식이 없지만 훌륭한 어머니 밑에는 훌륭한 자식이 있습니다. 모세, 사무엘을 보십시오. 이들은
모두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반면 이들의 자식들을 보십시오.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지만 훌륭한 어머니가 없었습니다. 디모데는 훌륭한 아버지가
아니라 훌륭한 할머니, 어머니를 통해서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매들은 더욱 깨어서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형제가 자매를
통제하고, 자매가 자녀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정상적인 가정입니다.


3절입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행음(行淫)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 젖가슴이 짓눌렸으며 거기서 사람들이 그들의 처녀 때의 젖꼭지를 상하게 하였느니라.
](3). 두 여자는 어렸을 때에
행음했습니다. 이들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음행에 노출되었고, 젖가슴이 짓눌렸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예의 바르게, 양가집 규수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죽은 이후로 이들의 배교는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들의 역사는 음행의 역사요, 배교로 점철된 역사입니다.
이집트의 신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종교를 받아 들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증언을 들어 보면 이들이 이집트에서 했던 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길지니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너희는 주를 섬기라.
](수24:14).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분리된 삶을 살지 않았고, 이집트에 완전히
동화되어 살았습니다. 문제는 이후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광야에서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나 여전히 이집트의 우상들로 자기들을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각 사람은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고 이집트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각 사람이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이집트의 우상들을 버리지도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이집트 땅 한가운데서
그들에게 내 격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분노를 다 이루리라, 하였노라.
](겔20:7-8). 이는 마치 결혼한 여자가 결혼 전의 사귀던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집트에서의 기억은 처절한 것입니다. 갖은 모욕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살해당하기도 했고, 고된 노역으로 울부짖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삶은 마치 나이 어린 여자 애들이 난폭한 어른들에게 성 폭행을 당한 것과 같은
악몽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집트에서의 생활, 그때의 풍습, 그들의 문화, 그들이 섬기던 바알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4절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언니는 아홀라요, 동생은
아홀리바라. 그들은 내 것이더니 그들이 아들딸들을 낳으니라. 그들의 이름은 이와 같은즉 곧 사마리아는 아홀라요, 예루살렘은 아홀리바니라.
](4).
사마리아를 언니로, 예루살렘을 동생으로 묘사했는데 사마리아를 아홀라, 예루살렘을 아홀리바가 한 것은 마치 한국인들이 돌림자를 써서 이름을 짓는
것과 흡사합니다. 아홀라는 ‘그녀의 성막’이란 뜻입니다. 북 왕국은 벧엘과 단에다 자신들의 성막을 만들고 제사장들을 세우고 금송아지를 섬겼는데
이것이 배교로 향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아홀리바는 ‘내 성막이 그녀 안에 있다’는 뜻인데 주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입니다. 아홀라와 아홀리바는 본래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5절입니다. [아홀라가 내 것이었을 때에 창녀 짓을 행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 곧 자기 이웃 아시리아 사람들과 사랑에 빠졌나니
](5). 이들이 언제 창녀 짓을 했습니까? 주님의 것이었을 때, 즉
주님과 혼인 관계였을 때입니다. 북 왕국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와 군사적, 정치적으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끊임없이 이들을 공격했고,
삼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남 왕국 유다와 외교 관계를 맺어서 이들을 공격한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창녀 짓을 행하고,
이들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는 마치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미워하면서도 일제라면 환장을 하고, 일본 문화를
받아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마리아는 아시리아는 원수 관계이면서도 아시리아의 문물, 문화, 종교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였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섬기던 신들을 받아들인 것을 말합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보다 아시리아인들이 섬기는 신들이 더 위대해 보이고, 그들의 종교가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느라 배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들은 탐심이란 우상을 숭배합니다. 물질을 숭배합니다. 교육을 우상화합니다. 자아를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아홀라의 이웃이 아시리아
사람들이었다면 오늘날 성도들의 이웃은 세상입니다. 세상 가치관을 그대로 교회로 끌어 들여서 행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말하는 지식과 교육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로 달려갑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급격히 세속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세상과 완전히
동화되고 일치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봅니다. 교회의 성도들의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봅니다. 이것이 창녀 짓이요, 세상과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5). 이 현 세상은 악한 현 세상이요(갈1:4), 불로 심판 받을
세상이며, 이 세상의 임금은 마귀(사탄)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성공하고, 잘 나 보이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 것은
세상과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들이 ‘승리하자’는 말은 세상의 정욕,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에 내가 못 박힌다는 의미이지 세상에서 성공하고, 특출 나게 뛰어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몇 몇 얼빠진 성도들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고, 권세를 잡은 것을 신앙으로
승리했다고 간증하는 꼴은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이나 다니엘, 느헤미야, 모르드개가 총리가 된
것을 승리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승리한 것은 감옥에 던져지고,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였지 총리가 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모세가 승리한
것은 언제입니까?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때 승리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승리한 것은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란 일컬음을 거절했을 때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기를 거절하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음이라.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이는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기 때문이며
](히11:24~27). 모세는 이집트를 거부하고 버렸습니다.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거절하고, 버렸을 때가 바로 승리한 때입니다. 이집트는 세상을 예표합니다. 성도들 역시 세상을 거절하고
버릴 때 승리자가 되고, 세상과 연합하고 동화되며 일치할 때 음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총리에 올랐던
사람보다 헐벗고, 주리고, 매 맞고, 광야와 토굴에서 유리하며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런 것을 승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거절하고, 버린 적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성취를 이룬 것이 승리가 아니라 세상을 거절하고, 버린 것이 승리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거절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딛2:11-12). 세상과 자신의 야망과 부와 성취에 대한 탐욕을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거절할 것을 거절하고 버릴 것을 버리고 주님이 주신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가 버터와 꿀을 먹음으로 악을
거절하며 선을 택할 줄 알게 되리니
](사7:15). 아홀라와 아홀리바의 비극은 버릴 것을 끌어안고 사랑하며, 택해야 할 것을 버린데
있습니다.


6절입니다. [그들은 곧 청색 옷을 입은 대장들과 치리자들이요,
다 호감이 가는 청년들이며 말 타는 기병들이라
.](6). 북왕국 이스라엘이 볼 때 철기 문명으로 무장한 기병대로 조직된 당대 최강의 아시리아는
적국이었지만 홀딱 반할만한 상대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원수이면서도 매력 있고, 능력 있는 남자들로 보였습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 얼빠진 그리스도인
자매들이 같은 믿음, 같은 가치관을 소유한 교회 형제들보다 믿음이 다르고, 믿음이 전혀 없더라도 인물 좋고 돈 잘 버는 남자를 능력 있는
남자라며 호감을 가지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크리스천 어머니가 자기 딸을 시집 보내는데 ‘같은 믿음의 청년’ 대신에 돈 많고, 직장 번듯하고,
학벌 있는 남자를 찾거나 중매가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은 완전히 맛이 간 상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시리아 종교의 특징은 포용성,
다양성입니다. 이들은 유일신 신앙이 아니었던지라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방 종교의 특징은 죄에 대한 관용적입니다. 이는 교회를 다니면
하지 말아야 할 금지 규정이 많은데, 캐톨릭이나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기 때문에 좀 더 매력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7절입니다. [그녀가 이와 같이 그들 곧 아시리아에서 선택받은
모든 자들과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더럽혔으며
](7). 음행하는 여자의 특징은 처음에는
상대를 가리지만 음행을 시작하면 더 이상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아시리아는 자신들을 짓밟은 원수 국가인데 오히려 더 잘 놀아났습니다. 42절을
보면 이들이 누구와도 가리지 않고 음행을 저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락하게 지내는 무리들의 소리와 함께하고 광야에서 평범한 부류의 사람들과
사바 사람들을 데려오매 사람들이 그들의 손에 팔찌를 끼우며 머리에 아름다운 왕관을 씌웠도다
.](42). 사마리아는 이런 음행으로 인해 혈통의
순수성만 잃어 버린 것이 아니라 종교적 민족성, 영적 특권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8절입니다. [이집트에서 들여온 행음(行淫)을 버리지도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어렸을 때에 그들이 그녀와 더불어 누웠음이라. 그들이 그녀의 처녀 때 젖가슴을 상하게 하며 자기들의 행음을 그녀에게
쏟았느니라
.](8). 이집트에서 들여온 행음이란 ‘바알 숭배’를 말합니다. 북 왕국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 제단에 두고 섬겼는데 여로보암이
시작해서 아합 때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를 모조리 죽이고 아합의 대언자들로 대신 채웠습니다. 엘리야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과 바알 중에 누가 참 하나님인지를 두고 갈멜산에서 결투를 할 정도였습니다.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려니와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왕상18:21). 백성들은 엘리야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어렸을 때에 나쁜 버릇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들여온 음행이란 오늘날 교회에 적용하면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제도, 세상의 철학을 교회 내에 들여 온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를 발람의 길, 발람의 잘못, 발람의 교리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발람의 길이란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바른 길을 저버린 것을 말합니다. [이들이 바른 길을 저버리고 보솔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며
길을 잃었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으나
](벧후2:15). 교회와 성도들이 돈 때문에 진리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이 발람의 길입니다.
발람의 잘못이란 탐욕을 말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약한 부분이 이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이는 이들이 가인의 길로 갔으며 대가를
바라고 발람의 잘못을 따라 탐욕을 내며 달려갔으며 고라의 반역 가운데서 멸망하였음이라
.](유1:11). 교회와 성도들이 탐욕을 종교적 위선으로
포장할 때 발람의 잘못을 하게 됩니다. 발람의 교리는 우상 숭배와 음행입니다. [그러나 네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거기에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네게 있기 때문이로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고
또 음행하게 하였느니라.
](계2:14). 교회 내에는 은밀히 세상적 가치관을 마치 성경적 가르침인양 교리화 되고 있으며 그것을 가르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인본주의를 붙잡은 사람은 발람의 교리를 붙잡은 것입니다. 자본주의 역시 발람의 교리입니다. 인간을 신격화하고 자아를 숭상하는 가치관
역시 발람의 교리입니다. 기복주의, 은사주의는 발람의 교리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영적 음행입니다.


9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녀를 그녀의 사랑하는 자들의 손에
곧 그녀가 사랑하던 아시리아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었더니
](9).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사랑의 대상을 잘못 선택한데 있습니다. 음행하는 여자의
운명은 자신이 사랑하는 음행의 대상에게 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음행하는 여자는 몸은 몸대로 버리고, 돈은 돈대로 뜯기고, 폭행을 당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이는 마치 북 왕국 이스라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음행하는 여자는 그런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할 곳도 없습니다. 북 왕국
역시 처음에는 돈을 뜯깁니다. [아시리아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었으니 이것은 그의 손으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하게 하여 왕국을 자기 손에서 굳게 세우고자 함이었더라. 므나헴이 이스라엘에서 돈을 억지로 거두어들이되 재산이 많은 강한 자들에게서
사람마다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아시리아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아시리아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 (왕하15:19-20).
다음에는 땅을 빼앗기고 포로가 됩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의 시대에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아시리아로 데리고 가니라.
] (왕하15:29). 다음에는 완전히
멸망당합니다. 범죄하는 자는 범죄자의 손에 망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범죄자를 더 악한 악인에게 넘겨주어 심판하시는 법입니다.


10절입니다. [이들이 그녀의 벌거벗음을 드러내고 그녀의
아들딸들을 빼앗으며 칼로 그녀를 죽여 여자들 가운데서 이름이 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녀에게 심판을 집행하였음이라.
](10). ‘여자들
가운데서’란 말은 민족들 가운데서란 말입니다. 주변 이방 민족들을 모두 여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완전히 멸망당했고 아시리아는 이들을
점령해서 이주 정책을 펼쳤습니다. 인종, 언어, 종교 등 모든 부분이 혼합되기 시작했습니다.


11절부터는 아홀리바 즉 남왕국 유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1절입니다. [그녀의 동생 아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자기
언니보다 더 지나치게 사랑하며 자기 언니의 행음보다 더 많이 행음하여 자기 언니보다 더 부패하게 되었느니라.
](11). 남 왕국 유다는 북
왕국의 멸망의 역사를 보면서도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북왕국이 망할 때 북왕국은 우상 숭배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받았다고 비난할 정도였지만
정작 자신들이 영적 음행자들이란 사실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북왕국의 멸망 후 히스기야 왕을 제외하고는 모든 왕들은 바알 숭배에 관한 한
사마리아보다 한 수 더 뜨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므낫세가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여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교도들의
가증한 일들을 본받았으니 이는 그가 자기 아버지 히스기야가 멸한 산당들을 다시 건축하고 또 이스라엘 왕 아합이 행한 것같이 바알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으며 작은 숲을 만들고 하늘의 모든 천체에게 경배하여 그것들을 섬겼음이라
.](왕하21:2,3).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바알을 숭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바알 숭배는 예루살렘의 국가 정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보다 더 부패했습니다.


12절입니다. [그녀가 자기 이웃 아시리아 사람들과 사랑에
빠졌나니 /그들은/ 심히 화려한 옷을 입은 대장들과 치리자들이요, 말을 타는 기병들이며 다 호감이 가는 청년들이라.
](12). 흔히 남자들이
여자의 외모에 빠진다고 말하지만 남자는 단지 여자의 신체적 외모에 국한됩니다. 반면 여자들은 남자보다 훨씬 더 외모를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직업, 장래성, 능력, 가문, 학벌 등 총체적으로 외모를 따집니다.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은 하나같이 아시리아 사람들과 사랑에 빠진 것이
이런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심히 화려한 옷을 입은 대장들과 치리자들이라면 능력과 지위를 갖추고 있습니다. 말을 타는 기병들이라면 용감하고 멋이
있습니다. 게다가 ‘다 호감이 가는 청년들’이라면 꽃미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정신을 못 차릴만한 상대임에 틀림없습니다.


13절입니다. [그때에 내가 이 두 여자들이 한 길을 택한 것과
그녀가 더럽게 된 것을 보았노라
.](13). 주님은 언니와 동생이 똑같이 같은 길을 택하고, 똑 같이 더럽게 되었음을 보셨습니다. 타락한
여자들의 가치관과 마음은 매 한가지인지라 그들의 선택 역시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14절입니다. [그녀가 자기의 행음을 많게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벽에 그린 사람들 곧 주홍색으로 그린 갈대아 사람들의 형상들을 보았음이니라.
](14). 아홀리바는 아시리아 사람들 외에 갈대아 사람들을 음행의
상대로 추가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네가 만족하지 아니하여 아시리아 사람들과도 음녀 짓을 행하였도다. 참으로 네가
그들과 창녀 짓을 행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또 가나안 땅에서 네 음행을 크게 더하여 갈대아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나 네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였느니라.
] (겔16:28~29). 음행은 영적 문제입니다. 이는 성격이 자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백성이 자기들의 나무토막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들의 막대기는 그들에게 밝히 말하나니 이는 행음(行淫)의 영(靈)이 그들로 하여금 잘못하게 하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 밑에서
떠나 음행의 길로 갔음이니라.
](호4:12). 한 번 바람 난 여자는 다시 잡아 둘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 문제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홍색으로 그린 갈대아 사람들의 벽화만 보고도 음행에 빠졌다는 것은 요즘 아이들이 영화나 신문, T.V 포스터만 보고도 열광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정신없는 아이들은 실물이 아니라 단지 가수들이나 배우들의 사진이나 스티커만 가지고도 미치도록 날뛰는데 아홀리바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15절입니다. [/이 형상들은/ 띠로 허리를 동이고 물들인
수건으로 머리를 엄청나게 쌌으며 그들은 다 바라볼 만한 통치자들로 /그 몸가짐은/ 그들이 출생한 땅 갈대아의 바빌론 사람들을
따랐더라.
](15). 갈대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기에 좀 특이했습니다. 머리에 물들인 수건으로 터번을 썼고, 허리를 동이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들이 이국적이란 차원을 넘어서 흉내 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16절입니다. [그녀가 눈으로 그들을 보고는 곧 그들과 사랑에
빠져 사자(使者)들을 갈대아에 있는 그들에게로 보내매
](16).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함이 없자 이들은 적극적으로 바빌론으로 사자들을
보내었습니다. 이는 창녀들이 오는 손님을 맞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찾아 나서는 꼴입니다. 요즘 젊은 애들이 화면으로 보는 것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아 공연장으로, 방송국으로 직접 찾아 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17-18절입니다. [바빌론 사람들이 그녀에게로 나아와 사랑의
침상으로 가서 자기들의 행음으로 그녀를 더럽혔으니 그녀가 그들로 인하여 더럽혀진 뒤에 그녀의 마음이 그들에게서 멀어지니라. 그녀가 이와 같이
자기의 행음을 드러내며 자기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었으므로 내 마음이 그녀의 언니에게서 멀어진 것같이 그녀에게서도 멀어졌느니라.
](17-18). 아홀리바는 이집트와 음행을 하다 이집트와 멀어졌고, 시리아와 음행에 빠졌다가 시리아와 멀어지고, 아시리아와 음행에 빠졌다가 아시리아와 멀어지고,
바빌론과 침상에서 뒹굴다가 바빌론에서 마음이 멀어졌습니다. 음녀들의 특징은 계속해서 음행의 상대를 바꾸면서도 어느 상대와도 깊은 사랑의 관계로
발전할 수 없고, 계속해서 멀어지고 나빠지기를 반복하면서 대상을 또 바꾸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빌론에게 더럽혀진 후에야 다시 다른 음행의 상대를
찾았는데 그 대상은 처음에 음행을 저질렀던 이집트였습니다. 음행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죄는 같은 죄인들마저 진정한 연합으로 묶어 주지
못합니다.


19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기의 행음을 크게
더하여 자기의 어렸을 때 곧 이집트 땅에서 창녀 짓을 하던 때를 기억하였으니
](19). 예루살렘의 왕들은 끊임없이 이집트와 바빌론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는데, 이들은 얼마 전에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게 박살난 경험이 있었습니다. 여호아하스가 폐위되고 여호야김이 이집트에 의해
옹립된 왕입니다. 시드기야는 바빌론을 배반하고 이집트를 끌어들이려 하다가 눈이 뽑히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찾거나 부르지 않았는데 이는 음녀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20절입니다. [이는 그녀가 그들의 애인들과 사랑에 빠졌음이라.
그들의 육체는 나귀의 육체 같고 그들의 유출물은 말의 유출물 같으니라.
](20). 아홀리바는 애인이 많았지만 참된 남편이 없었습니다. 사랑에는
빠졌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홀리바의 애인들의 몸은 얼마나 건강했던지 나귀의 육체 같다고 합니다. 성경은 어찌나 직설적인지
에스겔 23장은 마치 미성년자들이 읽기에 관람 불가 정도로 생생한 묘사입니다. 주님은 결코 돌려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죄를 낭만으로 생각하게 하지 않으면 음행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하지 않으며, 간음을 행복이라고 여겨지게 하지 않으며, 죄악을 낭만이란 느낌이 들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순수한 책이며, 있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묘사하지 결코 애매모호하게 표현하시지않습니다.


2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네가 네 어렸을 때의 젖꼭지로 인해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네 젖꼭지를 상하게 하여 네 어렸을 때의 음탕함을 기억하였느니라.
](21). 주님은 아홀리바가 행하는 짓들을 모두 보실
뿐 아니라 아홀리바의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고 계시며,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에스겔에게 알려 주시고, 그들 앞에 선포하게
하십니다.


성경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음행의 영이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순수하게 지키는데 있습니다. [이제 이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1:5). 순수한 마음, 순수한 양심이 더럽혀질 때 우리는 어느덧 음행하는 여자와 같은 부류가 되고 맙니다. 다 같이 한 구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올바른 것과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런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그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
(빌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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