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22:17-31
요절: 에스겔 22:30
하나님의 관심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언제나 주님의 뜻을 행할 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사람보다 일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본질보다는 현상, 동기보다는 결과, 과정보다는 목적,
사람보다는 업적이 중심입니다. 어떤 사람의 전기나 프로필을 보면 어떤 일을 했는가? 어떤 성취를 했는가?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가? 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17-18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집이 내게 찌꺼기가 되었나니 그들은 다 용광로 한가운데 있는 놋과 주석과 쇠와 납이며 은의 찌꺼기로다.](17-18).
이스라엘의 집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찌꺼기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께서 자신을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보배로 택하셨음이로다.](시135:4). 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모두하나님의 특별한
보배입니다. 그러나 보배가 보배로서 빛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참으로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보배가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출19:5).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언약을 지킬 때 보배로 남게 되지 불순종하고 언약을 버릴 때 찌꺼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배였던 이스라엘이 용광로 한 가운데서 녹아
나는 제철소의 금속이요, 찌꺼기가 되어 버린 것은 그들이 행한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금속 찌기에서 질그릇 항아리와 같이 되었습니다. [정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하여 토기장이의 손으로 만든 질항아리같이 여겨지게 되었는가!](애4:2). 이는 보배로움이
자신들의 인격의 변화나 성숙함으로 인한 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보배가 된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보배로우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 같은 항아리에도 내용물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가치는 천차만별입니다. 금을 담은 그릇과 똥이 담긴 그릇이 같을 수
없습니다. 그릇의 재질이나 품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릇 안에 담긴 내용물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이방 민족보다 민족성이 탁월하고,
교육 수준이 높고, 사람들의 인품이 좋아서 보배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보배로운 율법이 있고, 거룩한 성전과 대언자들,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보배가 되었습니다. 금을 담은 그릇에 금을 비우면 그 그릇은 평범한 그릇이 됩니다. 만약 거기다 쓸모없는 다른
것을 담으면 쓸모없는 그릇이 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들을 자신들 안에 세우고, 그것을 따랐기에 찌꺼기 같이 된
것입니다.
용광로 한가운데 있는 놋과 주석과 쇠와 납은 어느 나라에서도
특별한 보배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것들은 녹여서 연장을 만드는데 사용될 뿐입니다. 은의 찌꺼기는 녹여서 제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대환란의 용광로를 거쳐서 순수한 은으로 제련되어야 합니다. 찌꺼기는 그 자체로는 버림받을 뿐 어디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마찬 가지로 모두 주님의 특별한
보배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탁월한 인격의 성숙을 이루었다거나 놀라볼 만큼 사람이 변했다거나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삶을
살거나 종교에 미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이나 기독교를 택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순간 주님이 우리 안에 두신 보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전과 다름없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담겨진 내용물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이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은 우리 자신의
성결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특별한 보배가 된 것은 우리 안에 ‘주님이란 보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쓰러져 가는
장막일지라도 거기에 왕이 거하면 그곳이 가장 권위 있는 곳이며, 위엄이 있는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장막 속에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주님이 거하시면 우리 몸은 거룩한 성전이요, 특별한 보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왜 특별한 보배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들이 또한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것들을 합친 것이 어찌 그리 큰지요!](시139:17).
주님의 생각은 보배롭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주님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6). The mind of Christ. 사람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그는 참으로 특별한 보배입니다. 몸은 비록 흙덩어리이지만 그 생각(mind)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빌2:5). 주님은 우리의 정신 세계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다름 아닌 ‘자신을 낮추는 겸손’입니다.
우리는 왜 특별한 보배인가? 주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배들을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잠2:4). 주의 말씀은 보배로운 말씀입니다. 영롱한 빛을
내는 어떤 보석보다 더 맑고 투명하면서도 강력한 빛을 내는 보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보배는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보배를 어디에 둡니까? 안전한 금고나 은행에 맡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배로운 말씀은 어디에 보관해야 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보배 창고입니다.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로 하여금 재산을 상속하게 하며 자기의 보배창고들을 채우게 하고자 함이라.](잠8:21).
주의 말씀들을 마음 속에 가득 채우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이럴 때에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묻는 자들에게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가 있고, 성도들 간에 영적 교제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함으로 우리는 특별한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보물 창고에 보배가 없는 것은 이스라엘이 성전에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것과 같습니다. [그가 [주]의 집의 모든 보물과
왕의 집의 보물을 가져가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주]의 /성/전의 금 그릇을 다 산산조각 내었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왕하24:13). 이스라엘은 공물을 바칠 때 모조리 성전 보물 창고에 있는 것을 다 바칠 뿐 아니라 기둥들에 있던 금까지 다
벗겨서 바쳐야 했습니다. 보물 창고에 보물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듯이 여러분 안에 주의 말씀이 없으면 텅빈 보물 창고요, 은 찌꺼기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이에 히스기야가 [주]의 집과 왕의 집의 보고(寶庫)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주]의
/성/전의 문들과 자기가 금을 입힌 모든 기둥에서 금을 벗겨 아시리아 왕에게 주었더라.](왕하18:15-16). 성도들이 세상에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는 꼭 이와같습니다.
우리는 왜 특별한 보배인가? 주의 보배로운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우리와 더불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얻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1:1).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짐으로 특별한 보배가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불로
단련한 정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금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믿음보다 더 가치있는 보배는 아닙니다. 은메달이 100개여도 금메달 한
개의 가치가 안되듯이 지상에 있는 모든 귀한 정금이 있다해도 성도가 지닌 믿음의 가치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1:7).
저와 여러분이 지닌 믿음의 보배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배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을 져버린다면 보배가 아니라 찌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왜 특별한 보배인가? 주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네 시대에 확고해지며 구원의 힘이 되고 [주]를 두려워함이 그의 보배가 되리라.](사33:6). 주님을 두려워함은 우리의 보배가
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은 악을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긍휼과 진리로 불법이 정결하게 되며 [주]를 두려워함으로 사람들이 악을
떠나느니라.](잠16:6).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보십시오. [[주]를 두려워함이 생명에 이르게 하나니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는 흡족히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잠19:23). 저는 이미 전에 [주를 두려워할 때 얻는 복]에 대해서
설교했기 때문에 오늘은 따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성도가 주님을 두려워 할 때 하나님의 특별한 보배가 되지만 주님을 멸시할 때 그는 은 찌꺼기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왜 특별한 보배인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귀한 보배인 것은 우리의 재능, 인품, 소유, 학력, 지혜 등과 같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어떤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것들로 인해 우리는 특별한 보배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보배로운 피(precious
blood)라고 합니다(벧전1:19). 주님은 보배로우신 산돌이십니다(베전2:6). 주님의 약속들은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입니다(벧후1:4).
[곧 /주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벧후1:4).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것을 주심으로 우리는
세상의 정욕을 피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divine nature)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는 이미 이
땅에서 저 하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성품 대신 육신의 성품대로 살면 그는 짐승같은 자에 불과하며, 보배가 아니라 찌꺼기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다 찌꺼기가 되었나니 그런즉, 보라,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한가운데로 모으며 사람들이 은과 놋과 쇠와 납과 주석을 모아 용광로
한가운데 넣고 그 위에 불을 내뿜어 녹이는 것같이 친히 분노하고 격노하는 중에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19-20). 주님이
찌꺼기를 녹이시는 것은 그들이 받을 불같은 격노를 말합니다. 잠언 25:4에 이르기를, [은에서 찌꺼기를 제거하라. 그리하면 정련공을 위한
그릇이 나오리라.](잠25:4)고 했습니다. 욥 역시 말하기를,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고 했습니다. 찌꺼기는 용광로를 통해 녹아서 정련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릴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심판은 정련을 위한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멸시받는 찌꺼기가 되는 것은 상급을 위한 것입니다. [비방을 당하나 간절히
권면하니 우리가 이 날까지 세상의 오물같이 되고 모든 것의 찌꺼기가 되었노라.](고전4:13). 진노로 인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유업의 상속을 받게 하시며, 영광의 유업을 얻게 하십니다.
21-22절입니다. [참으로 내가 너희를 모아 내 진노의
불 속에서 너희 위에 /불을/ 내뿜으리니 너희가 그 한가운데서 녹되 은이 용광로 한가운데서 녹는 것같이 너희가 그 한가운데서 녹으리니 나
[주]가 내 격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21-22).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노의 불이란 문자 그대로 진노의 불입니다.
이것은 바빌론의 포로가 된 정도나 나치의 가스 수용실 정도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8:7-10, 9:13,17,18을 보십시오. 온통 불입니다.
요한계시록 16:8,9을 보십시오. 역시 불입니다. 문자 그대로 불입니다. 온 세상이 불로 타는데 이들은 용광로 가운데서 녹게 됩니다. 이들은
이런 심판의 와중에서 주님께서 내리신 격노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됩니다.
23-24절입니다. [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그녀에게 이르기를, /너는/ 깨끗하게 되지 못한 땅이요, 격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한 땅이로다, 하라.](23-24).
주님이 평하신 예루살렘이 현재는 깨끗하게 되지 못한 땅입니다.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씻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속죄의 헌물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회개와 속죄대신 우상을 세우고, 거기에 헌물을 드렸습니다.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 불법을 고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정결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죄를 고하고
용서받지 않을 때 누구도 불법으로부터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만군의 [주]께서 내 귀에 계시하여 /이르시되/, 참으로 너희가 죽기까지
이 불법으로부터 깨끗하게 되지 못하리라. {주} 만군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하셨느니라.](사22:14). 주를 두려워 할 때 깨끗하게
됩니다. [[주]의 두려우심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로우니](시19:9).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진노의 불에 타야 합니다. 이것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격노의 날에 비를 얻지 못한 땅’이란 온 세상에 불이 나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는 주님이 명령하셔야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헛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것이 있나이까? 하늘들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그리하실 이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런즉 우리가 주를
바라오리니 이는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렘14:22). 대 환란 때에 예루살렘에는 비도 내리지 않습니다.
25절입니다. [그 한가운데에는 그녀의 대언자들의 음모가
있으니 곧 울부짖는 사자가 먹이를 약탈하는 것 같도다. 그들이 혼들을 삼키며 보물과 귀중한 것들을 탈취하고 그 한가운데에 과부를 많이 만들었으며](25).
어느 사회나 심판과 저주를 앞당기는데는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과 죄악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먼저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했습니다.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을 가르쳐 주는 대신 음모를 꾸며서 울부짖는 사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울부짖는 사자'의 정체를 알 것입니다.
성도들을 삼키려고 찾아 다니는 울부짖는 사자(벧전5:8)는 다름 아닌 마귀입니다. 대언자들이 마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혼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삼킵니다. 혼들을 삼키면 그 후에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캐톨릭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의 혼을 삼킨 후에
정치권력을 잡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수시로 전쟁을 일으켜서 남자들은 전쟁에서 죽고 과부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는 과부들의 재산을
헌납 받아 또 부를 챙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역시 이런 짓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죄목을 지적하실 때 이 대목이
포함되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런즉 너희가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마23:14).-[개역 성경에는 없음]. 이런 예는 역사적으로나 예언적으로 모두
적용됩니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란 공산주의자들의 지적은 이 점에서 정확한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을 죽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사람을 살립니다.
[화 있을진저, 불결하고 더러운 곳, 학대하는 그 도시여! 그녀가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징계하는 것을 받지 아니하고 주를 신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그녀 안에 있는 통치자들은 울부짖는 사자요, 그녀의 재판관들은 뼈를 갉아먹되 이튿날까지
기다리지 아니하는 저녁때의 이리요, 그녀의 대언자들은 경솔하고 속이는 자들이요, 그녀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침해(侵害)한
자들이로다.](습3:1-4). 이런 현상이 정작 과거에만 있고, 현재와 미래에는 없는 일들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심할 것입니다.
26절입니다. [그녀의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고 내
거룩한 것들을 더럽히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차이를 전혀 보이지 아니하며 자기 눈을 가려 내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느니라.](26). 주님은 제사장들의 죄악을 지적하셨습니다. 매일 주님의 성전에서
희생물을 드리고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일을 해야 할 제사장들이 율법을 범합니다. 성전을 더럽힙니다. 이들에게 성속의 구분이 없습니다. 이들이
안식일을 지켰을 리가 만무합니다.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았고, 더럽혀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 특히
제사장들로 인해 더럽혀진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죄목은 성경 곳곳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걸려 넘어지게 하였도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썩게 하였느니라.](말2:8).
제사장들의 타락은 곧 바로 백성들의 타락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목사들의 입을 통해 성도들이 실족하게 되는 일과 흡사합니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리는 것같이 제사장들의 무리가 한 마음이 되어 길에서 살인을 행하니 이는 그들이 음탕한 짓을 행하기 때문이로다.](호6:9).
이들의 죄목은 일반인들 보다 훨씬 더 심하지만 이들은 늘 경건한 종교심과 위선으로 슬며시 행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팔아먹습니다.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주님을 모독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도다, 함과 같으니라.](롬2:24)고 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율법을 믿고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이름은 그들로 인하여 더럽혀지고 모독을 받습니다.
27절입니다. [그 한가운데 있는 그녀의 통치자들은 먹이를
약탈하는 이리들 같아서 정직하지 못한 이득을 얻기 위하여 피를 흘리며 혼들을 멸하거늘](27). 대언자들은 울부짖는 사자들이라면
통치자들은 약탈하는 이리들입니다. 이들은 정직하지 못한 이득을 얻기 위해 피를 흘렸는데 이는 정경 유착, 부정부패가 만연한 유대 사회를 보여
줍니다. 부패지수가 높은 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회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정직하지 못한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사회가 먼 이방 사회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서 공공연히 일어나는 일들이었다면 이곳은 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치자들은 공의를
아는 것이 본분인데, 공의대신 부정부패를 본분으로 삼은 것입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오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의 집 통치자들아,
청하건대 너희는 들을지어다. 공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마땅한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여 그들의 몸에서 가죽을 벗겨 내고
그들의 뼈에서 살을 뜯어내며 또 내 백성의 살을 먹고 그들의 몸에서 가죽을 벗겨 내며 그들의 뼈들을 꺾어 조각조각 자르기를 냄비와 솥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때에 그들이 주께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겠고 그들이 자기 행위로 악하게 행한 것같이 그때에
그분께서 자신의 얼굴을 돌려 그들에게 숨기시리라.](믹3:1-4). 멸망을 앞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십시오.
28절입니다. [그녀의 대언자들은 제대로 섞지 않은
회반죽으로 그들을 칠해 주고 헛된 것을 보며 그들을 위하여 거짓을 점치면서 [주]가 말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하였으며](28). 이 부분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데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대언자들과
제사장들의 죄는 늘 위선으로 드러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기
때문이니 그 겉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마23:27). 겉과 속이
다릅니다. 위선보다 사람을 질리게 하는 죄가 없고, 하나님 앞에 가증스런 죄가 없습니다. ‘척’하고, ‘체’하는 것을 주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를 향해 가장 핏대를 세우며 비판하는 죄는 성도들과 교회들이 행하는 ‘위선’의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대언자들은 위선자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헛된 것, 거짓을 점치면서 대언을 했습니다. 이는 교회 내에서 성경과 상관없는 진리를 성경 말씀인 것처럼 선포하는
강단을 생각나게 합니다.
29절입니다. [이 땅의 백성은 학대를 행하고 강탈을
행하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괴롭히고 참으로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도다.](29). 백성들 역시 죄악의 물결에 동참했습니다. 이들
역시 보고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가운데 있는 힘없는 자, 약한 자들들 괴롭히고 강탈하기 시작했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했습니다. 고아들, 과부들, 가난한 자들, 이민자들은 완전히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회는 이미 주님의
심판 앞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0절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내 앞에서 울타리를 세우며
무너진 곳에 서서 나로 하여금 그곳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찾았으나 아무도 찾지 못하였나니](30).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타리를 세우면 무너진
곳에 서서 주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멸하지 못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택한 자 모세가 그 불화(不和)
속에서 내 앞에 서서 내 진노를 돌이켜 그들을 멸하지 않게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그들을 멸하였으리라 하셨도다](시106:23).
모세는 주님 앞에서 울타리를 세웠고, 무너진 곳에 서서 주님이 그곳을 멸하지 못하게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그의 재위 13년 째에
당대 세계 최강이었던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쳐들어왔습니다. 사마리아는 멸망당했고, 그 다음해인 14년 째 유다의 대부분의 도시는
점령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이 때 주님 앞에서 울타리를 세우고, 무너진 곳에 섰던 사람이 히스기야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이 말을 듣고는 자기 옷을 찢고 스스로 굵은 베를 입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집을 감독하는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들 중에서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입히고 아모스의 아들 대언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가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 날은 고난과
책망과 모독의 날이니 이는 아이들이 태어나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기 때문이로다. 랍사게가 자기 주(主) 아시리아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꾸짖었으니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그의 말들을 들으셨을 것이라.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그 들으신 말들을 꾸짖으실 터이니
그러므로 /당신은/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기도를 올리소서, 하더이다, 하니라.] (왕하19:1~4). 이 때 하나님은 주의
천사를 보내어 하루 밤 만에 십팔만 오천명을 죽여 버리심으로써 이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히스기야가 주님 앞에 서서 이곳을 멸하지 못하게 했을 때
하나님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예는 수두룩 합니다. 엘리야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너진 제단을 세우며, 그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이리저리 예루살렘 거리를 뛰어다니며 이제 보고 알며 그 넓은 곳에서
찾아보라. 만일 너희가 공의를 집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거나 혹은 거기에 그런 자가 있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렘5:1).
주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 한 명만 있다면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로 인해 예루살렘을 멸하지 못하실까보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명하신 후에 예루살렘을 심판하셨습니다(렘11:14). 한 사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은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중보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십니다. [그분께서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보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하여 구원을 가져오고
그분의 의가 그분을 지탱하였으니](사59:16). 어느 시대나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그곳은 안전합니다. 아무리 불안정해 보여도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다. 말과 기병이 나라를 지키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 나라를 지키는 것은 군대가 아니라 기도하는
성도들의 무릎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타리를 세우며,
무너진 곳에서 서서 주님의 진노의 팔을 거두시도록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교회는 많은데 이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에겐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대언자들, 제사장들이 해야 할 본연의 의무가 바로 무너진 곳에 올라가서 그 틈을 메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가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집을 위하여 [주]의 날에 전쟁 중에 서게 하려고 울타리를 치지도 아니하였느니라.](겔13:5).
이들은 전쟁의 날에도 평화를 외치며, 조찬 기도회를 개최할지언정
주님 앞에 통회하며 기도하는 진정한중보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틈이 갈라져 곧 무너질 곳이란 사실을 알면서 백성들 앞에서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나 되자’와 같은 소리만 했습니다.
3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격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그들을 소멸시켜 그들의 길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22:17~31).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망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중보 기도를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없는 도시를 멸하십니다.
앗시리아의 대군을 맞았을 때는 히스기야가 있었지만 바빌론의 침략 때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시대에 저희 교회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주님 앞에서 울타리를 치며 무너진 곳에 서서 주님의 팔을 붙잡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