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23:22-35
요절: 에스겔 23:35
인과응보(因果應報)는 고전 문학의 주제 뿐 아니라 인간 심성
속에 깊이 박혀 있는 본능입니다. 이는 범죄한 인간들이 장차 받게 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논리는 점차 깨어지고 있습니다. [악한 일에 대한 판결이 속히 집행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의
아들들이 마음 속에서 악을 행하기로 완전히 작정하였도다.](전8:11). 오늘날 사람들은 심판이 없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일부러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악한 일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집행됩니다. 이 땅에서건 다가오는 세상에서건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습니다. [이제
내가 속히 내 격노를 네 위에 붓고 내 분노를 네 위에 이루어 네 길들에 따라 너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게 보응하리라.](겔7:8).
주님은 보응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심판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오 아홀리바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네 마음이 네 사랑하던 자들에게서 멀어졌나니 내가 그들을 일으켜 너를 치게 하리라. 내가 그들을
데려다가 사방에서 너를 치게 하리니](22).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질되어 우상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가 사랑했던 우상들을 통해
그를 치게 하십니다. 이집트를 사랑하면 이집트가 그의 원수가 되고, 아시리아를 사랑하면 아시리아가 그의 원수가 됩니다. 이는 성도의 영적
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을 일으켜 우리의 죄악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이 그 사람을 찌릅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쾌락을 사랑하면 쾌락이 그 사람을 찌릅니다.[대낮에 방탕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므로 불의의 대가를 받으리라.](벧후2:13a). 그
사람이 하나님 외에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것과 멀어지게 하시며, 그것을 들어 심판하십니다.
23절입니다. [/그들은/ 바빌론 사람들과 모든 갈대아
사람들과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한 모든 아시리아 사람들 곧 다 호감이 가는 청년들이요, 대장들과 치리자들이며 큰 군주들과
유명한 자들이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23). 예루살렘이 홀딱 반했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빌론 사람들, 모든 갈대아 사람들,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 아시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외모에서 출중했고, 권세가 있고, 기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반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박살납니다. 이는 성도들이 깊이 명심해야 할 말씀들입니다.
24절입니다. [그들이 병거와 마차와 수레와 백성의 무리
곧 큰 방패와 작은 방패와 투구를 배치하여 사방에서 너를 치는 자들을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라. 내가 심판을 그들 앞에 놓을 것인즉 그들이
자기들의 판단대로 너를 심판하리라.](24). 바빌론은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바빌론의 호위대장이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호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붙잡아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포로가 되어 끌려가던 사람들 곧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두고 사슬로 묶었다가 라마에서 풀어 준 뒤에 주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3이제 주께서 이
재난을 가져오사 친히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주께 범죄하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렘40:1,3).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침략당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이는 너희가 주께 범죄하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라”(렘40:3).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심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예루살렘이 망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장 훈계를 듣고 있습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교회 성도들에게 “평소에
부지런히 기도하고, 말씀 읽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왜 죄를 지어서 이런 험한 꼴을 당하느냐?”는 설교를 듣는 꼴입니다.
25-26절입니다. [또 내가 너를 향하여 내 질투를
일으키리니 그들이 분을 내어 너를 대하고 네 코와 네 귀를 가져갈 것이며 네 남은 자들을 칼로 쓰러뜨리고 네 아들딸들을 빼앗으며 네 남은 자들을
불로 삼키고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아름다운 보석들을 빼앗아 가리라.](25-26).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질투의 불을 일으켜 심판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길 때 주님은 질투하십니다. 어떤 이방 신들도 질투를 알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감정도 이성도 없고, 호흡도 말도 없는 돌과 나무 막대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지니 이는 [주]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출34:14).
질투는 거룩한 사랑의 분노한 모습입니다. [이는 [주] 네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요, 심지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라.](신4:24).
은혜요 사랑만 외치는 현대 교회에서 주님이 공의와 거룩함으로 질투하시며,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의 질투를 일으켰을 때 코와 귀가 잘려지고, 칼에 쓰러지고, 아들 딸들이 빼앗깁니다. 불에 타서 죽고, 여자들은 옷을 벗기고, 보석들이
빼앗깁니다. 전쟁의 참상이 참혹하다 해도 이와 같은 참혹함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질투를 일으킨 결과입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5:9). 우상 숭배는 주님의 질투를 유발하는 가장 심각한 죄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 계신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주] 네 하나님의 분노가 너를 향해 /불같이/ 타올라 너를 지면에서
멸하실까 염려하노라.](신6:15). 주님의 질투는 범죄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임하는 불길입니다. [[주]께서는 이런 자를
용서하지 아니하실 뿐 아니라 [주]의 분노와 그분의 질투가 그 사람을 대적하여 연기를 뿜으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에게 임하리라.
[주]께서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시되](신29:20).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 질투를 일으키신 것은 성경에 미리 기록된 말씀대로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를 자극하여
질투하게 하며 자기들의 헛된 것으로 내 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움직여 질투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라.](신32:21).
27절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네 음탕함과 이집트 땅에서
들여온 네 행음을 네게서 그치게 하여 너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 못하게 하며 이집트를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27).
이 말씀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 이스라엘은 바빌론의 포로기를 거치면서 다시는 ‘우상 숭배’의 죄를 생각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상들의 본
고장인 바빌론에 가서 온갖 우상이란 우상을 몸소 다 보고 들었습니다. 우상들의 허무함과 우상 숭배의 허망함을 몸소 체험한 후에 이들은 고레스의
칙령을 통해 귀환했는데 더 이상 누구도 우상을 섬기거나 만드는 일 따위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유일신을 섬기는 민족으로 전 세계
모든 나라들에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도 역시 그러합니다. 어느 나라도 유대인들을 우상 숭배나 다신주의 민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 우상 숭배를 일소하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순수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8-29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내가 너를 네가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곧 네 마음이 멀어진 자들의 손에 넘겨주리니 그들이 미워함으로 너를 대하며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아 가고 너를 벌거벗기고 알몸으로 두어 네 행음의 벌거벗음 곧 네 음탕함과 네 행음을 드러내리라.](28-29). 한
때는 사랑했지만 이제는 마음이 멀어지고, 미워하는 상대에게 넘겨지는 일은 비참함을 넘어서 수치스런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들을 그런
수치 가운데 넘겨주십니다.
주님은 언제 사람들을 수치에 넘겨주는가?
첫째,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더 경배할 때입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들 마음의
정욕대로 부정함에 내어 주사 자기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음이라.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이시로다. 아멘.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런 애정에 내어 주셨으니 이는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롬1:24-26). 동성애는 성 정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동성애 문제를 가지고 학설을 펼치며, 인권을 운운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신체적, 유전적, 심리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음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대신 피조물을 더 경배한 결과로 주어진 심판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사회 문제를 단순히 사회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항상 성경으로
그것들을 판단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시대의 사회 병리학적인 문제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길 때 하나님은 그를 수치스런 애정에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 높일 때입니다. [너와 그를 초대한 자가 네게 와서 이르기를,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수치를 당하며 가장 낮은 자리를 잡게 될까 염려하노라.](눅14:9). 자기를 높이는 자들은 누구나 수치를 면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낮출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임이니라.](눅14:11). 자기를 높이는 것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일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입니다.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라.](갈6:3).
셋째, 성도가
구령하지 않을 때입니다.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잠자는 자는 수치를 끼치는 아들이니라.](잠10:5).
주님은 지금이 밭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시기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은 한시라도 더 바삐, 더 부지런히 밭으로 나가 영혼들을 거두어야 합니다. 밭에
곡식은 익으면 황금색이 되고, 그때를 넘기면 희게 됩니다. 희게 된 곡식을 거두지 않으면 땅으로 쓰러지고 곧 썩어 버립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희게 되어
추수하게 되었도다.](요4:35). 주님은 [추수하게 되었도다!] 외치시는데, 이 때 일을 하지 않고 잠을 자는 아들이라면 어떤
아들이겠습니까? 추수할 때 잠자는 아들은 수치를 끼치는 아들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아들입니까? 수치를 끼치는 아들입니까?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 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로운 자니라.](잠11:30). 혼을 얻는 자는 밭에 나가 추수하는 자입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수치는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얻게 될 수치입니다.
넷째, 거짓 대언을
할 때 수치를 당합니다. 거짓 대언자들의 종말은 수치 가운데 넘겨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언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대언하지 말라, 하니 대언자들은 그들에게 대언하지 말 것이며 이로써 수치를 당하지 말 것이니라.](미2:6). 오늘날 성경이 아닌
것으로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이들이 거짓 목사, 거짓 교사들은 모두 수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유다서에는 거짓 대언자요, 거짓
교사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있습니다.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어내는 바다의 성난 물결이요, 떠돌아다니는 별들이니 이들을 위하여 칠흑 같은
어둠이 영원토록 예비되어 있느니라.](유1:13).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거나 가감(加減)하거나 사사로이 해석해서
가르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어 이 사역을 맡았은즉 힘을 잃지 아니하며 오히려 감추어 둔 정직하지 못한 일들을
버리고 간교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게 우리
자신을 추천하노라.] (고후4:1~2).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는 자들은 설령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그의 몫은 다 제하여 질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많은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함에서 난 것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기 때문이니라.](고후2:17). 이것이 말씀을 대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백성이 주의 분노를 일으킬 때입니다. [에브라임이 극심하게 주의 분노를 일으켰으므로 주께서 그의 피를 그의 위에 남겨
두실 것이요, 그의 {주}께서 그의 수치를 그에게 돌리시리라.](호12:14).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때 주님은 분노하십니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 주님이 분노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온유하신 주님이 분노하신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그런 일보다 더욱 주님을 근심하게 하고 분노케 한 일은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할 때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頑惡)하므로
그분께서 근심하사 분노하시며 그들을 둘러보시고..](막3:5a). 마음의 완악함, 완고함은 우상 숭배와 동일한 죄이며, 주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죄악입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기 때문이니이다.](삼상15:23a).
여섯째,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할 때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다. [오직 주께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시44:7). 시편에 보면 다윗은 계속해서 자신의 원수들과 대적들에게 수치를 가득하게 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와 주의 사역자들을 비방하고 욕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다. 오늘날처럼 교회와 목회자들이 성도들은
물론이요, 불신자들에게 미움과 비방을 받는 예가 없을 것입니다. 목사들을 씹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얼마나 많이 들립니까? 성도들마저 “나도 교회에
다니지만...” 하면서 적극 동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성경적인 교회와 목회자들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욕하고 backbiting하는
것을 잘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애정에서 나오는 비판과 욕을 하며 비방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가 교회에게 썼으나 그들 가운데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가
행하는 행위들을 기억하리라. 그가 악한 말들로 우리를 헐뜯고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며 자기 자신도 형제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들도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요삼1:9~10).
일곱째, 훈계를
거절할 때 수치가 옵니다. [훈계를 거절하는 자에게는 가난과 수치가 있거니와 책망을 중히 여기는 자는 존경을 받느니라.](잠13:18).
성경은 훈계의 책입니다. [이것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明哲)의 말씀들을 파악하게 하고 지혜와 정의와 공의와 공평의 훈계를 받게
하며](잠1:2-3). 잠언의 기록 목적 가운데 하나가 훈계를 알게 하고 훈계를 받게 하는데 있습니다. 훈계의 가치를 보십시오. [훈계는
네 생명인즉 그것을 굳게 붙잡으며 그것을 놓치지 말고 지키라.](잠4:13). 훈계는 생명입니다. [/너희는/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최상의 금보다 지식을 받을지니](잠8:10). 훈계는 금은보다 뛰어난 보배입니다. 이런 것을 거절할 때 수치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훈계를 거절하는 자는 자기 혼을 멸시하는 자이거니와 책망을 듣는 자는 명철을 얻느니라.](잠15:32).
여덟째, 죄는
언제나 수치를 가져옵니다. [의는 한 민족을 높이거니와 죄는 어느 백성에게나 수치거리가 되느니라.](잠14:34).
여러분의 성경적 죄의 정의를 잘 알 것입니다. 죄(sin)란 율법을 범하는 것(요일3:4)이요, 모든 불의가 죄요(요일5:17),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것(약4:17)이 죄입니다. 잠언에서는 거만한 눈빛, 교만한 마음, 사악한 자의 쟁기질도 죄라고 하며(잠21:4),
어리석은 생각(잠24:9)도 죄라고 합니다. 믿음에서 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죄입니다(롬14:23). 이런 죄는 어느 백성에게나 수치거리가
됩니다.
저는 간략하게 주님께서 언제 우리를 수치 가운데 넘겨
주시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주 앞에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 할 성도가 이런 죄에 연루됨으로써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0-31절입니다. [내가 이 일들을 네게 행하리니 이는 네가 이교도들을 따라 음행의 길을 가고 그들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혀졌음이라.
네가 네 언니의 길로 걸었은즉 내가 그녀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30-31).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음행과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혀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러하겠지만 더럽혀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누가 여러분의 방이나 옷이나 음식을 더럽히면 심히 불쾌할 것입니다. 누가 나의 자식이나 아내를 더럽힌다면 거의 살인(殺人)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더럽히는 일, 남을 더럽히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무신경한 것이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남이 자기 발이나 옷에 구토(嘔吐)를 했다? 이 뒤의 일은 묻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신이 자기 자신을 그보다 더 더럽히는 일이
허다함에도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유대인들은 잔과 대접은 물론이요, 손과 발을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음식을 정결하게 먹었습니다. 누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날에는 눈을 부라리며 엄중하게 꾸짖고 혼을 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을 정말 더럽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지(無知)했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닫지 못하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은 그것이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뱃속으로 들어가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하고 뒤로 나가기 때문이니라.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色慾), 악한 눈, 신성
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기 때문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18~23).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속에서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란 점입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또 한 가지는 우리의 혀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법의
세계라. 이와 같이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자기도 지옥 불로 불타느니라.](약3:6).
혀를 잘못 쓰면 그는 온 몸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또 한 가지는 쓴 뿌리입니다. [/너희는/
부지런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할지니](히12:15). 쓴 뿌리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모두 더럽히는 강한 전이성(轉移性)을 띠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약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음행입니다. [결혼은
모든 것 가운데 존귀한 것이요, 잠자리는 더럽히지 말아야 하거니와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히13:4).
구약 성도들에게 금, 은, 돌, 나무로 만든 우상 숭배만큼 흔한 죄가 신약 성도들에게는 음행입니다. 영화, 잡지, 인터넷, 신문, 소설, 만화
등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음행이야 말로 몸과 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단순히 영혼을 담는 빈 그릇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고전3:17).
우상과 음행으로 더럽혀진 예루살렘을 보면서 여러분은 지금
무엇으로 자신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들을 더럽히고 있지 않는지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더럽혀진 예루살렘에게 그녀의 언니 사마리아에게 주신
잔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네 언니의 잔”이란 치욕과 수치가 가득한 심판의 잔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잔이 나옵니다. 구원의
잔(시116:13), 분노의 잔(사51:17), 진노의 잔, 격노의 잔(사51:22), 위로의 잔(렘16:7) 등 참으로 다양하게 나옵니다.
다윗은 [[주]는 나의 상속과 나의 잔의 몫이오니 주께서 나의 몫을 지키시나이다.](시16:5)라고 주님이 자신의 잔의 몫이라고
하셨습니다. 잔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제자들과 잔을 드셨습니다.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그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눅22:20). 이 잔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잔을 축복의 잔, 주의 잔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나누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냐?](고전10:16),
[너희가 {주}의 잔과 마귀들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으며 {주}의 상과 마귀들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없느니라.](고전10:21).
오늘날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한 잔”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마시는 것은 모두 마귀들의 잔입니다. 그 속에는 용의 독이 가득합니다. [그들의
포도즙은 용들의 독이요, 독사의 지독한 독이라.](신32:33). 술을 마시는 일은 단순히 사업상, 인간 관계상 마신다고 타협할 일이
아닙니다. 그 술은 마귀들의 잔이요, 용들의 독이요, 독사의 지독한 독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정한 날에 함께 드리는 주의 잔, 축복의 잔을
마시는 거룩한 성도들입니다.
주님이 범죄한 예루살렘에게 주실 “네 언니의 잔”은 무엇인지
32-33절에 나옵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깊고 크고 많이 담긴 네 언니의 잔을 마시고 비웃음을 당하며
조롱을 당하겠고 술 취함과 슬픔으로 가득하겠으며 네 언니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황폐함의 잔으로 가득하리라.](겔23:32-33). 이
잔은 깊고, 크고, 많이 담긴 잔인데 마치 슈퍼보울 트로피에 사용되는 잔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것은 우승 트로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놀람과 황폐함의 잔으로 가득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심판의 잔은 입을 다물고 안 마실 수 있는 잔이 아닙니다. 마치 환자의 입을 열고 강제로
음식물을 넣는 것보다 더 강한 힘으로 입 속으로, 뱃속으로 들어 마시게 되어 있습니다.
34절입니다. [네가 그 잔을 마시되 들이마시고 그 잔의
조각들을 부수며 네 가슴을 잡아뜯으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말하였음이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34). 마치 사형수가 독배를
들이 마시듯이 마신 다음에는 잔의 조각을 부수며 가슴을 잡아 뜯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심판을 받아 그 잔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자들이 확실히 마셨거늘 네가 전혀 벌을 받지 아니한 채 지나가겠느냐?
네가 벌을 받지 아니한 채 지나가지 못하겠으며 반드시 그 잔을 마시리니](렘49:12).
35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뒤로 버렸은즉 너 또한 네 음탕함과 네 행음을 담당할지니라.](35). 주님은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이 행한 죄에 대한 합당한 보응을 하신 것이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말씀에 기록된 대로, 미리 주신 말씀에
근거해서 형을 집행하시는 철저히 ‘죄형 법정주의’를 고수하십니다. 감정대로, 기분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이들이 행한 많은 죄의
근본적인 문제점 두 가지를 짚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잊어 버린 것과 주님을 등 뒤로 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잊었습니다. [처녀가 어찌 자기 패물을
잊겠으며 신부가 어찌 자기 의복을 잊겠느냐? 그러나 내 백성은 나를 잊어 그 날 수를 셀 수 없도다.](렘2:32). 사람은 잊어야 할
것이 있고,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집 전화 번호, 부인의 생일, 결혼 기념일 등을 다 잊어 버리더라도 결코 주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를 잊지 말고](신6:12). 주님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광야에서 [주] 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이집트 땅을 떠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주]를 거역하였으되](신9:7), [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고](왕하17:38),
[오 내 혼아, [주]를 찬송하며 그분의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시103:2), [내 아들아, 내 법을 잊지
말고 네 마음으로 하여금 내 명령들을 지키게 할지어다.](잠3:1),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그것을 잊지 말며 내 입의
말들에서 벗어나지 말라.](잠4:5). 잊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계속해서 잊어 버렸습니다. 잊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잊는 것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마음에 두는 것은 잊으려 해도 잊혀 지지 않는 법입니다. 왜 잊습니까? 성경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초장이 내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매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서 나를 잊었느니라.](호13:6). “배가 부르고, 마음이 높아져서”-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배가 고픈 것은 영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한 것은 저주가 아니라 배가 부르고 마음이
높아져서 주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주님의 섬세한 배려요, 조처임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냥 버린 정도가 아니라 등 뒤로
버렸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역사는 이들이 하나님을 반복적으로 버린 역사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그들이 주를 버렸음을 증거합니다. 이들은
여호수아 앞에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주]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하리니](수24:16). 주를 버릴 경우에 그들이 받을 벌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주]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신 뒤에라도 돌이키사 너희를 해하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수24:20). 그러나
사사기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서는 이들이 주님을 버리고, 주의 집을 버리고, 주의 율법을 버린 이야기가 100회 이상 언급되어 있습니다. [네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네가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들을 만들며 부어 만든 형상들을 만들어 내 분노를 일으키고 나를 네
등 뒤로 버렸음이로다.](왕상14:9). 이것이 역사가들의 증언입니다.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렘17:13). 대언자
예레미야의 증언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주님은 그들의 음탕함과 행음을 담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를 잊고, 주님을
버릴 때 우리가 행한 모든 범죄를 우리 스스로 담당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죄를 시인하고, 회개할 때 우리의 모든 불법과
죄는 주님이 담당하십니다. 주님을 믿을 때,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담당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옵소서, 평안을 얻으려고 내가 큰 쓰라림을 받았거니와 주께서 내 혼을 사랑하사 부패의 구덩이에서 건져 내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로 던지셨음이니이다.](사38:17).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의
등 뒤로 던지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