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24:1-27
요절: 에스겔 24:21
시드기야 재위 9년 10월 10일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3차 침공했습니다(왕하25:1-3,렘39:1-2). 바빌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1년 반 동안이나 포위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기근으로
인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전쟁, 기근, 역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3대 단골 메뉴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스라엘은 역병이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내 명령들을 귀담아
들으며 내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출15:26). 이스라엘은 질병이 없을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병을 제거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또 [주]께서 모든 병을 네게서 제거하사 너희가 알고 있는 이집트의 그 악한 질병을 네게 두지 아니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두시리라.](신7:15). 그러나 이들이 반역하고 불순종하면 이스라엘은 전체가 병동이 되고 맙니다. 역병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몸의 상태로 보여 주는 시험대와 같았습니다. [[주]께서 네가 당할 재앙과 네 씨가 당할 재앙을 놀라운 것으로 만드시리니 그 재앙이
심히 크고 오래가며 질병이 심하고 오래가리라. 또한 그분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이집트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붙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 책에 기록하지 않은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주]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마침내 네가 멸망하리로다.](신28:59-61).
그들의 몸의 상태는 곧 영적 상태의 잣대였습니다. 기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흉작이 들고, 가뭄이 오고, 메뚜기나 황충이 출현하고, 병충해가
많을 때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 상태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기근이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무엇이든지
우리 입에서 나간 것을 반드시 이행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행하던 대로 곧 우리와 우리 조상들과 우리 왕들과 우리 통치자들이 유다의 도시들과
예루살렘의 거리들에서 행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여왕에게 음료 헌물을 부으리라. 이는 그때에는 우리에게 양식이 풍부하고 넉넉하여
아무 재난도 보지 아니하였으나](렘44:17). 하나님이 주신 심판을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던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는 진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복통이 이는데 두통이라고 말하는 돌팔이 의사보다 더 한심한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죄는 영적 무지와 암흑을 가져오며, 건전한
사고력과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법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패배 역시 중요한 영적 시험대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단지 무기체계,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무장과 부흥이 필요한 시기임을 말해주는 선언서와
같은 것입니다. 이들이 영적 상태가 좋으면 주님께서 친히 싸우시기에 패전(敗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네 원수들이 일어나서 너를 치려
하면 [주]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28:7).
이것이 영적 상태가 좋을 때입니다. 그러나 영적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이와는 정반대로 이들이 연전연패를 합니다. [[주]께서 너로 하여금
네 원수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또 네가 땅의 모든 왕국으로 흩어지고](신28:25).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여러모로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방법을 주셨고, 그 때마다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평안과
기쁨이 사라지면 영적 상태가 안 좋은 것입니다. 쓴 뿌리가 일어나고 설교가 귀에 들리는 대신 삐딱하게 들릴 때 여러분은 영적 상태는 재앙입니다.
강단의 설교가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고 자꾸 입과 귀에 씹힐 때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은혜로 강건한 것이 아니라 깊이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예배 시간에 늦고, 모임이 귀찮아지고, 성경이 읽히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따분하며 무미건조해지고, 형제들과 영적 친교가
서먹해지고, 입에서는 험한 소리와 짜증과 욕설이 자연스럽게 나올 때 여러분은 이미 영적 상태가 패배한 것입니다. 구약에 비해 오늘날 신약
성도들은 훨씬 더 민감하게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다양한 싸인들을 보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때 마귀의 올무에 단단히 걸려서 반쯤 죽어 나는 법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때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재위
9년 10월 10일입니다. 1,2절입니다. [제구년 시월 곧 그 달 십일에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 날 즉 바로 이 날의 이름을 기록하라. 바빌론 왕이 바로 이 날에 예루살렘을 치기로 하였느니라.](1-2). 하나님은 여호야긴
왕과 함께 이미 포로로 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을 통해 예루살렘의 일을 실시간으로 대언해 주고 계십니다. 이 대언은 실제 상황보다
약간 앞선 시간이므로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미리 내다 보고 정확히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임한 대언자들 뿐입니다.
예언이란 미리 기록된 역사입니다. 바빌론의 그발 강가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스겔을 통해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날짜까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대언(예언)의 영입니다. 믿고 안믿고는 그들의
자유이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장차 일어날 일들을 말씀해 주심으로 자신이 주요,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바빌론 왕의 공격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쓸데없는 전쟁이란 없습니다. 전쟁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든지 마귀가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마귀가 일으키는 전쟁은 믿음으로 승리하면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전쟁이라면 조용히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했으며,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할 것을 대언했습니다. 죄에 대한 징계는 받아 들여야 합니다. 아니면 금식하고 회개를 하며,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어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안전하다. 안전하다’고 외친 대언자들은 모두 거짓 대언자들입니다.
3-5절입니다. [/너는/ 반역하는 집에게 한 비유를
베풀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는/ 솥 하나를 걸지니 곧 그것을 걸고 거기에 물도 부으며 그것의
조각들 곧 모든 좋은 조각과 넓적다리와 어깨를 모아 그 안에 넣고 좋은 뼈들로 그것을 가득히 채우며 양떼에서 좋은 것을 취하고 또 그 뼈들을 솥
밑에 태워 그 솥이 잘 끓게 하며 또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의 뼈들을 그 안에서 삶게 할지어다.](3-5). 이스라엘은 반역하는 집입니다.
예루살렘은 가마 솥에 비유되었는데 이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주로 사용된 예입니다. 예레미야가 처음 본 환상이 끓는 가마솥이었습니다(렘1:13).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정 반대의 의미로 가마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우리가 집들을 짓자. 이
도시는 가마솥이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느니라.](겔11:3). 이들이 말하는 가마솥은 무쇠 솥의 견고함을 말하는 것이며, 부숴
지지 않고 튼튼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속에 음식을 넣어 두면 짐승들이 훔쳐 가지 못하는데 예루살렘은 절대 안전하다고 떠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빌론은 가마솥을 바로 때려 부수는 대신 거기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던 고기들, 뼈들은 모조리 푹 고여지고, 검게 타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위로는 왕과 고관들, 제사장들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민초들이 모두 그 속에서 푹 삶겨집니다.
대언자들은 회개와 영적 부흥을 촉구하는 대신 계속 ‘안전하다.
안전하다’며 거짓말만 함으로써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병원에서 소위 ‘선한/선의의 거짓말’이란 것을 합니다. 암 환자에게
죽음을 대비할 시간을 주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게 하는 대신 “당신은 곧 회복될 것이다. 안전하다. 건강하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지옥에
보내 버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라 최악의 거짓말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죄악을 범하는 형제들에게 날카롭게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고 꾸짖고, 바로 잡아 주는 대신 “사람은 다 그런 겁니다. 신앙 생활하다 보면 안 그런 사람 거의 없어요. 다 비슷해요.” 하면서 죄를
합리화해주고, 변명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은 거짓 목사요, 거짓 교사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를 꾸짖는 자들에게는 기쁨이 있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이 그들 위에 임하리라.](잠24:25).
[드러내어 꾸짖는 것이 은밀하게 사랑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27:5). [사람을 꾸짖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 많은 호의를 얻으리라.](잠28:23). 비록 당시에는 거북하고 껄끄럽더라도 죄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고, 꾸짖어야 합니다. 거짓
대언을 하는 일은 자신은 물론이요, 듣는 이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화 있을진저, 피 흘린 도시 곧 찌끼가 나가지 아니하여 그 안에 찌끼가 남아 있는 솥이여! 그것 위에 제비를 뽑을 것도 없이 조각
조각 그것을 내어올지니](6). 솥의 상태를 보십시오. 찌기가 나가지 아니하여 그 안에 찌끼가 남아 있는 솥입니다. 솥의 상태는 녹이
슬어서 형편없습니다. 깨끗하게 씻긴 솥이 아닙니다. 이런 솥은 먼저 달구어서 더러운 것을 다 태워버려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
뒤에 솥을 비우고 숯불 위에 놓아 솥의 놋을 뜨겁게 하여 달구며 그것의 더러운 것을 그 안에서 녹여 그 찌끼를 소멸시킬지니라.](11).
이렇게 더러움을 제거한 후에 그 안에 음식을 넣고 물을 부어서 삶으면 됩니다. 미리 녹과 때를 씻어낸 솥이라면 이런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더러움과 피를 그대로 간직한 예루살렘은 달굴 필요가 있는 솥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바빌론 군대에게는 고기
파티나 다름이 없었던 지라 누가 먹겠다고 제비를 뽑을 필요도 없이 조각조각 그것을 내어 와서 먹으면 됩니다. 그들은 왕이든 고관이든 백성이든
아무나 골라서 잡아먹으면 됩니다.
찌끼가 남아 있는 솥! 이것이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그릇들입니다. 그릇에 때가 있고, 찌끼가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여러분은 그릇의 용도에 따라 씻는 정도가 다를 것입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은 늘 깨끗해야 합니다. 귀한 것을 담는 그릇일수록 깨끗하게 씻고,
정결하게 보관합니다. [저마다 거룩히 구별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그릇을 소유할 줄 알되](살전4:4). 우리 몸은 성령을 담는
그릇입니다. 더러운 그릇에 귀한 것을 가득 담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딤후2:20-21).
7-8절입니다. [이는 그녀의 피가 그녀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라. 그녀가 그것을 땅에 쏟아 먼지로 덮이게 하지 아니하고 바위 꼭대기에 두었나니 그 목적은 그것으로 하여금 격노를 일으켜 원수를 갚게
하려 함이라. 내가 그녀의 피를 바위 꼭대기에 두어 덮이지 아니하게 하였느니라.](7-8). 하나님은 피에 대한 규례를 주셨는데, 아무도
피를 먹거나 마시지 못할 뿐 아니라 피를 흘렸을 때는 흙으로 덮어서 땅에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셨습니다(레17:13). 그러나 이들은 피를
얼마나 흘렸던지 도시 곳곳에 피 자국이 남아 있었고, 바위 꼭대기에도 그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을 잡아 인신 공양을 드리고,
짐승을 마구 잡아서 먹었으며, 이들의 피를 덮지도 아니하고 아무 곳에나 핏자국이 흥건하게 고여 있거나 묻어 있는 상태인데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영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이런 행위는 주님의 격노를 일으켜 원수를 갚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피는 피로써만 깨끗해집니다. [이와 같이 너희는 너희가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가 흘려진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깨끗하게 할 수 없느니라.](민35:33). 누군가의 피를 흘릴 때는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도 흐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9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화 있을진저, 피 흘린 도시여! 내가 불 피울 /장작/더미를 크게 하리니](9). 불을 피울 장작더미는 바빌론의 군대입니다.
하나님은 무쇠 솥이라고 자랑하는 예루살렘에 장작더미를 크게 더 하심으로 삶아 버리십니다. 가마솥에 불 피울 장작더미를 크게 하심으로 예루살렘은
그 안에서 푹 고인 고기처럼 모두 삶아져 버렸습니다.
10-12절입니다. [/너희는/ 나무를 쌓아 올려 불을
붙이며 고기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양념을 잘하며 그 뼈들을 태울지니라. 그 뒤에 솥을 비우고 숯불 위에 놓아 솥의 놋을 뜨겁게 하여 달구며 그것의
더러운 것을 그 안에서 녹여 그 찌끼를 소멸시킬지니라. 그녀가 거짓들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지치게 하였고 그녀의 큰 찌끼가 그녀에게서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그 찌끼가 불 속에 있으리로다.](10-12). 예루살렘이 얼마나 더럽고 더덕더덕 녹이 슬었든지 솥을 뜨겁게 하여 달구어도
더러움과 찌끼가 불속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불로 죄를 정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죄는 물로 씻어도 없어지지 않고, 불로 끓여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네가 천연소다로 네 몸을 씻고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불법이 여전히 내 앞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렘2:22). 죄를 제거하는 일은 어린 양의 피로 됩니다. 말씀의 물로만 씻깁니다. 죄는 사람의 노력으로는 결코
제거되지 않습니다. 찌끼는 불 속에 그대로 있습니다. 불 속을 통과한 다음에는 물이 필요합니다. [불에 견딜 만한 것은 다 불을 통과하게
하라. 그리하면 정결하게 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히 구별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하게 할 것이며 불에 견디지 못할 것은 다 그 물을 통과하게
할 것이니라.](민31:23).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씻기셨습니까? 하나님의 영을 통해
씻으셨습니다. [/전에는/ 너희 가운데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김을 받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게 되었느니라.](고전6:11). 성령을 통해 씻으시는 것을 중생의 씻음이라고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딛3:5).
다음에는 말씀의 물로 씻으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엡5:26).
성경에서 씻음은 늘 피와 물 이 둘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씻기지 않습니다. 피와 물은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13절입니다. [네 더러움 속에는 음탕함이 있도다.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하였으되 네가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내 격노를 네 위에 풀기까지는 네가 네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리라.](13).
이스라엘은 바빌론, 로마 등에 의해 심판을 받아도 결코 깨끗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내 격노를 네 위에 풀기까지는”이란 말씀은 대환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격노가 42개월 동안 이스라엘 위에 쏟아 부어지는 야곱의 대 환란을 통과할 때 이들은 정결해집니다.
14절입니다. [나 [주]가 이것을 말하였으니 이 일이
이루어지겠고 내가 이 일을 행하리라. 내가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고 아끼지도 아니하며 후회하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네 길과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14). 주님은 심판에 대해서 일곱 번에 걸쳐 확고하게 반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변개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주목해서 보시면 주님의 확고한 의지를 거듭 읽을 수 있습니다.
15-16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보라, 내가 한 번 쳐서 네 눈이 바라는 것을 네게서 빼앗으리니 너는 애곡하거나 울지 말고 눈물도 흘리지 말며](15-16).
하나님은 에스겔의 아내를 죽여 버리셨는데, 이는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복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눈은
예루살렘이었고, 에스겔의 눈이 바라는 것은 아내였습니다. 주님은 아내의 죽음에 대해서 애곡하거나 울지 말고, 눈물도 흘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대언자로서 예루살렘이 죄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에 대한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대언자들의 일상 또는 가족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하실 일에
대해서 백성에게 보여 주게 하시는데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울부짖는 것을 자제하고 그 죽은 자를
위하여 애곡하지도 말며 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네 발에 신을 신으며 네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의 빵을 먹지 말라, 하시매](17).
에스겔에게 아내의 죽음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울부짖는 것이나 애곡하는 것 따위를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예레미야 역시
동일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곡하는 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그들을 위하여 슬퍼하지도 말며 탄식하지도
말지니 이는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 곧 인자(仁慈)와 긍휼을 제거하였음이라. [주]가 말하노라.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묻히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해 슬퍼하는 자도 없고 그들을 위해 자기 몸을 베거나 자기 몸을 미는 자도 없으리라.] (렘16:5~6).
에스겔에게 눈이 바라는 바(욕망) 아내의 죽음이나 예루살렘의 성소가 그러한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솔로몬 때
세워진 성전의 소멸이야말로 가족 중에 아내를 잃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아픔이요, 슬픔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은 조문을 하거나 애곡의 표시로
수건을 둘렀지만 제사장의 경우에는 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습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이었기에 아내의 죽음에 수건을 벗어야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수건을 두르고, 발에 신을 신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빵을 먹지 말라는 것은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들이 위로의 잔치를 베풀어 주거나 초상집에 위로의
표시로 빵이나 잔을 가져 왔던 관습에서 나온 말인데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아내가 죽었을 때나 죽지 않았을 때나 행동과
몸가짐에 조금도 차이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내가 명령받은 대로 아침에 행하니라.](18). 에스겔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대로 행했습니다. 이것이 대언자의 직무요,
자세입니다. 대언자는 주님이 하라는 명령에만 그대로 충실하면 됩니다.
‘명령받은 대로’ 행하는 것이 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종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종이 명령받은 일을 했다고 해서 그가 그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노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그 일들을 다 행한 뒤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이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이다, 할지니라.](눅17:9-10). 저와 여러분이 취할 태도입니다. 노아가 보여준 본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창6:22), [노아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더라.](창7:5).
모세 역시 이런 점에서 탁월한 모범이었습니다. [모세가 그와 같이 행하되 곧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출40:16).
우리 역시 우리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다 행할 수 있는 종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의미요, 목적이며, 삶의 유일한
의의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느냐?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얼마나 수행하였느냐? 로
평가받습니다. 나의 꿈과 계획에 충실한 삶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충실한 삶이 의미 있는 삶입니다.
19절입니다. [이에 백성이 내게 이르기를, 네가 행하는
이 일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너는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19). 백성들은 에스겔이 하는 행동이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던지라 그가 하는 이런 행동이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말해 달라고 합니다. 에스겔의 말과 행동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주님의
말씀이요, 대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대언자들의 행동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주님의 뜻이
계시되기도 하며, 말씀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20-21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내 성소는 너희
기력의 탁월함이고 너희 눈이 바라는 것이며 너희 혼이 딱하게 여기는 곳이거니와 내가 그곳을 더럽힐 것이며 너희가 남겨 둔 너희 아들딸들을 칼에
쓰러지게 하리라.](20-21). 에스겔은 즉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갖는
의미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성소는 너희 기력의 탁월함이었고, 너희 눈이 바라는 것이며, 너희 혼이 딱하게 여기는 곳’이라고
합니다. 성소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력의 탁월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미워하시고, 더럽히십니다.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주} [하나님]이 자신을 두고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뛰어남을 몹시 싫어하며 그의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도시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넘겨주리라, 하시니라.] (암6:8). 이들은 성전을 통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자체의 위엄과 영광을
높이고, 성전 건물을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공공연히 성전에서 이교도들의 풍습과 우상 숭배를 획책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성전을 멸해
버리셨습니다.
“너희 눈이 바라는 것”은 에스겔에게 아내와 같은 것으로서
이스라엘은 성전을 보기만 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황금색 지붕에다 화려한 건물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배교했을 때 주님은 성전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솔로몬을 통해 성전 봉헌을 받으실 때 성전이 없어질 것에
대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돌이켜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법규와 내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경배하면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친히 그들을 뿌리째 뽑아내며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집도 내 눈앞에서 던져 버리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비록 이 집이 높을지라도 그 옆으로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이르되, [주]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집에 이같이 행하셨는가? 하면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들이 자기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 곧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붙잡고 그들에게 경배하여 섬기므로 그분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신 것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대하7:19~22). 백성들의 행동에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은 던져 버려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22-2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내가 행한 것같이
행하여 너희 입술을 가리지도 말고 사람들의 빵도 먹지 말며 너희 수건을 머리 위에 두르고 너희 신을 발에 신고 애곡하지도 말며 울지도 말며 오직
너희 불법들로 인하여 쇠약해지며 서로 바라보고 애곡하라.](22-23). 에스겔은 자신이 아내를 잃고도 슬퍼하지 않았던 모습을 보이면서,
심판의 경고를 듣는 백성들 역시 동일한 자세를 취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들에게 성전을 잃는 일은 아내를 잃는 일보다 더 큰 충격일 수 있습니다.
성전을 잃었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성전을 잃게 된 그들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참된 회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이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시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교회에
다닌다’ 와 같은 죄에 대한 종교적 변명만 일삼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도 자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주님과 교제가 단절되고, 마귀의
올무에 걸려 넘어지고, 온갖 더러움 속에서 허우적대면서도 나는 교회에 다닌다고 외친다면 그에게 주어진 모든 영적인 복들은 거두어지며, 은사들은
소멸되고, 은혜는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 등은 아침 햇살의 안개처럼 흩어지고 맙니다.
[오직 너희 불법들로 인하여 쇠약해지며 서로 바라보고
애곡하라.]- 이것이 에스겔이 백성들에게 준 명령입니다. 성전의 소실로 울지 말고, 너희 불법들로 인해 쇠약해지고 서로 바라보고
애곡하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법으로 인해 약해지며, 서로 바라보며 애곡하는 그런 참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조금도 애통함이 없고, 죄로 인해 쇠약해짐도 없이 웃으며 기쁘게 지내는 사람들은 하나님과는 단절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고 나의 죄, 나의 불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 죄란 사실을 기억하고 울어야 합니다.
24절입니다. [이와 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한 표적이
되리니 그가 행한 모든 것대로 너희도 행할지니라. 이 일이 이를 때에 내가 {주}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24).
포로로 잡혀온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날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조국이 다시 강성해져서 자신들을 구출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은 조국이 박살나고 성전은 불타 버리며,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절망적인 소식입니다. 에스겔이 아내를 잃어 버리듯이,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 일들이 모두 사실로 드러나는 날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하신 말씀이 모두 사실로 판명날 것이며, 기타
모든 말씀들 역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25-26절입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또 내가
그들에게서 그들의 기력과 그들의 영광의 기쁨과 그들의 눈이 바라는 것과 그들이 마음을 두는 아들딸들을 취하여 데려가는 날 곧 그 날에 도피하는
자가 네게 와서 네 귀에 그것을 들려 주지 아니하겠느냐?](25-26). 이들은 에스겔이 한 주의 말씀에 반신반의하면서 듣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에서 온 도피자들을 통해 그 말이 마치 뉴스에서 본 것처럼 사실로 확인됩니다. 수 백리가 넘는 먼 나라에서 에스겔은 고국의 상황을 생방송
중계하듯이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백성들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표적이요, 대언자요, 모든 것이 그 입에서 나온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27절입니다. [그 날에 네 입이 도피한 자를 향하여
열리므로 네가 말하겠고 다시는 말 못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들에게 표적이 되리니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7).
에스겔이 말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조만간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국의 소식을
듣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에스겔이 그들 앞에서 한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포로 된 지 십이 년이 되는 해 시월 곧 그
달 오일에 예루살렘에서 도피한 자가 내게 이르러 말하기를, 그 도시가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하니라. 이제 그 도피한 자가 이르기 전날 저녁에
[주]의 손이 내 위에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마침내 그가 아침에 내게 이르렀더라. 내 입이 열렸으므로 내가 다시는 말 못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였노라.] (겔33:21~22).
한 때 하나님은 에스겔을 벙어리로 만드신 적이
있습니다(겔3:26). 그러나 이제는 말 못하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말이 사실로 확증됨으로써 그는 주의 대언자요, 표적으로서 포로된
백성들 사이에 거하게 됩니다. 에스겔은 백성들에 의해서 대언자로서 확실하게 인정을 받게 되고, 백성들은 에스겔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담대히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
못하는 자가 되지 않고 입을 열어 할 수 있는 일은 복음 전파입니다. [{주}여, 이제 그들의 위협을 보시옵고 또 주의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주의 말씀을 말하게 해 주시오며](행4:29). 담대함이 없으면 우리는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세상 이야기는 잘하다가 갑지가
주님과 복음에 대해서는 입이 막히고, 벙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말씀
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또한 이것을 위하여 결박당하였나니](골4:3).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할 것/은 내게 말 할 기회를 허락하사 담대히 입을 열어 복음의 신비를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엡6:19).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을 열어 주시며, 말씀 전할 문을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