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23:36-49
요절: 에스겔 23:48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가르칠 수 있고, 징계를 통해서 가르칠 수 있고, 호된 심판을 통해서 가르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은 경험과 학습, 반복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우리는 짓는 죄를 다시 짓고, 늘 하는 실수를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을 보면 경험과 반복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가 말하기를 사람이 역사로부터 배우는 유일한 한 가지 교훈은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옳은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의 역사는 주로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은 이 민족을
다루시는 역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특성을 잘 계시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지고, 징계를 받고 다시 죄에
빠지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과연 무엇을 배우는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시는가? 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6절입니다. [[주]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아홀라와 아홀리바를 심판하고자 하느냐? 그리하려거든 참으로 그들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들을 밝히 말할지니라.](36).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심판(판단)하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때로 범죄가 만연하고 사악한 세상과 사람들을 볼 때
심판하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는 꼭 의인이 아니더라도 술에 취한 어떤 사람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은 완전히 없어져야
해!” -이는 단순히 세상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과 불평불만이 아니라 악한 현 세상을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없어져야 한다.
불공평하다, 악하다, 썩었다는 말은 누구나 입에 담는 소리이며, 그들은 이미 세상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역시 전쟁의 폐허 속에서 동족
유대인들이 바빌론에게 포로가 당하고, 살육 당하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의 사악함에 대해 심판하고자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의식이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도 범죄한 민족을 향해 의분(義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그러하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심판하려거든 [참으로 그들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들을 밝히 말할지니라.](36b)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죄를 밝히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들을 밝히
말하라’는 것은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어려운 일입니다. 죄인에게 죄를 말해 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해 주라는 것입니다.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악을 밝히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처럼
인권이 중시되고, 개개인의 사생활이 철저히 보호되어야 할 귀한 덕목인 시대에는 죄악을 지적하는 일이 더욱 힘듭니다. 목사들은 좀처럼 성도의
죄들을 밝히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들을 밝히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크게 외치라. 네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소리 같이 높여서 내 백성에게 그들의 범죄를, 야곱의 집에게 그들의 죄들을 보여 주라.](사
58:1). 죄를 죄라고 선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죄를 지적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삯꾼 목자입니다. 어떤 이는 주님의 종이 주님의 말씀만 전하면 되지 무엇 하러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들추어내는가? 그런 목사는 목사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런 문제로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사야에게 “네
목소리를 나팔소리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범죄를, 야곱의 집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 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세상에 말씀을 전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세상이 악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고,
그들이 죄인임을 외치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첫
감독으로 세움을 받은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죄짓는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딤전5:20).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목자였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감독이요, 목자인 디모에게 죄짓는 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대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은밀히 처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른체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꾸짖습니까? 설교를 통해서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꾸짖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설교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설교를
통해서 목사가 누구에 대해서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도 열을 받고, 목사의 인격이 어쩌고 저쩌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는 죄인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합니다. 주일 11시 예배에 모든 사람이 참여하게 하여 그 설교 시간에 꾸짖어서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분이나 맞추어 주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악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설교자들은 주님이 부르신 주의 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죄악에 대한 책망이 없고
꾸짖음이 없는 설교는 성경적인 설교가 아니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여기서 우리는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는 말씀을 봅니다. 매일 도덕 강론 같은 윤리적인 설교나 하고, 칭찬이나 해주고, 힘과 위로를 준답시고 입술발린 이야기나 하는
것은 설교자의 직무를 무시하는 것이며,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꾸짖는 일은 주의 종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위로와 칭찬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를 책망하며, 성령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그렇다면 주의 종은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죄를 책망하고 죄인들을 책망하고 꾸짖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꾸짖게
하도록” 반복적으로 명령합니다. 크레테 교회의 첫 감독은 에바브로 디도였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건전한 자가 되게 하여](딛1:13). 바울은 디도에게 “엄히
꾸짖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죄를 행하는 자들, 잘못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은 사람들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침례인 요한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당대의 지도층 인사들의
죄를 낱낱이 공개적으로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여,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그는 왕이라고 해서 봐 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당대의 왕이었던 헤롯에게 가서 그의 사적인 죄를 지적하며 설교했습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녀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 하였음이라.](마14:4). 주님 역시 마찬가지이십니다. [오 독사들의 세대여, 너희가 악하니 어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으리요? 이는 입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라.](마12:34). “같은 말을 해도 고운 말을 써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며 예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성과 교양이 넘쳐 흐르는 자칭 경건한(?) 성도님들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여,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마23:33). 이는 구약의 모든 대언자들은 물론이요, 교회사를 통해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했던 모든 주의 종들이 죄와 죄인들을 향해 대적했던 전사의 모습입니다. 가장 온유하셨던 주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독사들, 회칠한 무덤, 위선자들이여, 눈 먼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죄를 밝히 말해 주셔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37절입니다. [그들이 간음을 행하였고 그들의 손에 피가
있으며 또 그들이 자기 우상들과 간음을 행하였고 또 내게 낳아 준 자기 아들들로 하여금 그 우상들을 위해 불 사이를 지나가게 하여 삼킴을 당하게
하였으며](37). 예루살렘은 주변 이방 신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따랐던지 자녀들을 인신 공양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내게 낳아 준 자기 아들”이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낳은 아들들은 자기 자식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 자식은 내 자식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아들딸들을 데려다가 그것들에게 희생물로 드려 삼킴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네가 이러한 네 행음(行淫)을 작은 일로
/여겨서](겔16:20).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주의 법도로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주권(主權) 신앙을
배워야만 합니다. 주님이 온 땅의 주인이시며, 모든 소유는 다 주님께 속한 것이란 평범한 진리를 성도들이 잊고 지내거나 무시하는 일은 무서운
죄입니다. [누가 나보다 앞섰기에 내가 그에게 갚아야 한단 말이냐? 무엇이든지 온 천하에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니라.](욥41:11).
[이는 숲의 짐승과 천 개의 작은 산 위의 가축이 다 내 것이기 때문이며 산의 모든 날짐승도 내가 아는 것이고 들의 들짐승도 내 것이기
때문이로다. 가령 내가 주린다 할지라도 네게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세상과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로다.](시50:10-12).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하면 그는 도둑놈이거나 사기꾼입니다. 정당한 소유권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악인들은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고, 무시하고, 잊어버립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2:8). 주님의 것을 자신의 것인 줄 알면 주님이 그것을 빼앗아 자신의 뜻대로 아무에게나
주십니다. 여러분의 재산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산과 시간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이 내게 주신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인에게 우리가 행한 대로 회계 보고(Account report)를 해야만
합니다(롬14:12). 세상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무단으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러해서는 안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대제국 바빌론을 건설하고 자신이 이룬 그 영광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왕국의 주인이 누구인지 소유권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이 일은 순찰자들의 명령에 따른 것이요,
/이같이/ 요구한 것은 거룩한 자들의 말에 따른 것이니 그 목적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들의 왕국에서 다스리시고 자기 뜻대로 그 /왕국/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를 그 /왕국/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산 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단4:17).
주님은 이 땅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기에 자신의 뜻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데 이의를 제기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단 말이냐?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한 것이냐?](마20:15). 주님은 그런 불평, 불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해 드리고, 주님께 받은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음식이면 음식, 물질이면 물질(신8:18), 건강이면 건강, 자식이면 자식, 아내면 아내(잠18:22) 등
무엇이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니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이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없기 때문이요,](딤전4:3-4). 우리가 가진 돈은 하나님의 것이며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오직 너는 [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는 그분께서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니 이것은 그분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8:18). 아내도 그러하고 자식도 그러합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님의 것을 우상에게 드렸습니다. 그냥
드린 정도가 아니라 헌신적으로 드렸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것으로 우상들에게 바쳐 버렸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요, 그들의 소유와 자식들이 다
주님의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처음 난 것 곧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를 여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그것은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13:2). 소와 나귀가 주인이 있듯이 이스라엘 자손은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도 따로 주인이 있는 이상 함부로 잡을 수도 없고, 때릴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란 주인이
있었기에 이방인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안전한 이유는 그들 자신의 힘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란
튼튼한 보호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울타리요, 방패요, 산성이셨습니다. 주인을 이기지 않는 이상 주인의 소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태를 여는 것은 다 내 것이니 네 가축 가운데 첫 새끼로 수컷은 소든지 양이든지 다 그러하니라.](출34:19).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식, 가축들을 모두 자신의 소유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청지기적인 삶입니다. 주님은 모든 소유에 대한
표시고 레위 자손들을 대표로 받으셨습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 사람들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태를 연 자들 곧
처음 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노라. 그러므로 레위 사람들은 내 것이니 그 까닭은 처음 난 모든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 이는 내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을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 안에서 처음 난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이니라.
나는 [주]니라.](민3:12-13). 이는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란 이런 것입니다. 모든 날들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안식일을 주셔서 그 한 날만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이란 표시로 십일조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어머니를 공경하지만 특별히 어머니 날에 선물을 드리고,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데 이는 대표성의 원리에 따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레위 사람들, 레위 사람들의 가축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처음 난 모든 자 대신 레위 사람들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 레위 사람들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 사람들은 내 것이니 나는
[주]니라.](민3:45).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을 우상에게 재물로 태워 바쳤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엄히 금지하신
일입니다. [너는 결코 네 씨 가운데 하나라도 몰렉을 위하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지 말고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8:21). 대표성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을 때 우리는 전체를 다 잃어 버리게 됩니다.
38-39절입니다. [이 외에도 그들이 내게 이 일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같은 날에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안식일을 더럽혔도다. 이는 그들이 자기 자녀들을 죽여 그 우상들에게 바치고는 바로 그
날에 내 성소로 들어와 그것을 더럽혔음이라. 보라, 그들이 내 집의 한가운데서 그와 같이 행하였도다.](38-39). 이들은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안식일도 더럽혔습니다. 이들은 아이들을 태워서 몰렉에게 바치고 또 그 몸으로 성전으로 왔습니다. 다신 숭배는 이것 저것 가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소를 내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성전을 아버지의 집(요2:16)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성전,
성소, 내 집이란 말은 동일한 표현입니다(*삼상1:9 참조).
40-42절입니다. [또 너희가 사람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먼 곳에서 오게 하였은즉, 보라, 그들이 왔느니라. 네가 그들을 위하여 네 몸을 씻으며 네 눈에 그리고 장식물로 몸을 단장하며 품위 있는
침상에 앉아 그 앞에 상을 예비하고 그 위에 내 향과 내 기름을 놓으며 안락하게 지내는 무리들의 소리와 함께하고 광야에서 평범한 부류의 사람들과
사바 사람들을 데려오매 사람들이 그들의 손에 팔찌를 끼우며 머리에 아름다운 왕관을 씌웠도다.](40-42).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고
몸을 단장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음녀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직업 창녀들은 돈을 받는 댓가로 음행을 저지르지만 영적인 창녀들은 돈을 주면서 음행을
합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안락하게 지내는 무리들, 광야에서 평범한 부류의 사람들, 사바 사람들(이들은 폭력배들이다-욥1:15).
여자들 주변을 맴돌며 음행을 저지르는 무리들은 주로 먹고 살만한 자들로서 안락하게 지내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음행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차를
몰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며, 어디 물이 좋다는 소식만 들리면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졸부들 가운데 이런 자들이 많습니다. 평범한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음행의 초청에 거절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음행은 전 국민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요, 직장인들,
공무원들, 교사들, 심지어 성직자들에게까지 공공연하게 저질러지는 죄악입니다. 폭력배들이야 음행을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팔찌를
끼우고, 머리에 아름다운 왕관을 씌웠는데 참으로 이 시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죄악시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음행으로 방탕한 것이
업적이 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며 칭찬하는 세대입니다. 팔찌를 끼우고 왕관을 씌운 것은 존경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플레이 보이지를 만든 사람들이나 카사노바와 같은 사람을 왕처럼 떠받드는 시대입니다. 록 가수들이나 연예인들이 동거, 이별, 결혼, 이혼을
반복해도 그들을 star라며 떠받듭니다. 그들의 손목을 잘라 버리고, 머리통을 때려 주거나 부수어 놓아야 할 것 같은데 손에는 팔찌를, 머리에는
왕관을 씌워주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43-44절입니다. [그때에 내가 간음 중에 늙은 그녀에게
말하기를, 이제 그들이 그녀와 행음하고자 하며 또 그녀가 그들과 함께 /그리하고자/ 하리요? 하였으되 그들이 그녀에게로 들어가기를 창녀 짓을
행하는 여인에게로 들어가는 것 같이 하여 음탕한 여인 아홀라와 아홀리바에게로 들어갔도다.](43-44). 간음 중에 늙은 그녀란 평생을
음행 가운데 살다 보니 늙어 버린 여자를 말합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해도 나이를 속일 수 없는 법인데, 평생을 간음을 일삼다 보니 늙어 버린
것입니다. 간음 중에 늙은 그녀란 간음 중에 달고 닳아 낡아 버린 여자란 의미입니다. 음행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45절입니다. [그런즉 의로운 자들이 간음하는 여자들을
다루는 관례대로 그들을 심판하며 피를 흘리는 여자들을 다루는 관례대로 심판하리니 이는 그들이 간음하는 여자들이기 때문이요, 그들의 손에 피가
있기 때문이라.](45). 의로운 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심판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앗시리아의 산헤립,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이들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는데 다 사용된 후에는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46-47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한 무리를 데려다가 그들 위에 임하게 하며 그들을 내어 주어 제거 당하고 노략 당하게 하리니 그 무리가 그들을 돌로 치고
칼로 신속히 처치하며 그들의 아들딸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들을 불태우리라.](46-47). 주님께서는 한 무리를 데려다가 그들 위에 임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의 도끼인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입니다(렘51:20). 때로 우리는 침략 전쟁이나 어떤 전쟁을 볼 때 전쟁을 일으킨
강대국을 비난하기 쉽지만 전쟁은 악에 대한 주님의 심판입니다. 밥 죤스 시니어 목사님은 말하기를, “전쟁은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주님의
심판이요, 지옥은 저 세상에서 행해지는 주님의 심판이다”라고 했는데 정확히 옳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국제적 역학 관계에서 외교력이나 경제력,
군사력의 부재로, 정치인의 무능력이나,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낮아서 바빌론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로 인해 망한 것입니다.
현재 미국과 이라크는 전쟁을 합니다. 전 세계에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비난하고 이라크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의 젊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자 마치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악(惡)을 선택한 줄로 생각하거나, 반대로 부시가 몇 가지 기독교 정책을
내세워 순진한 기독교인들을 속였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자기 멋대로 한 편리한 해석이고 분석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판단과 말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없으며, 그들의 역사관 세계관에는 하나님이 전혀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을 요절냈을 때 예루살렘의 무고한 시민이
죽었습니까? 어린 아이가 죽고, 부녀자들이 벌거벗기고, 불에 타서 죽고, 귀와 코가 베이고, 포로로 잡히는 등의 일이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느부갓네살의 잘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전쟁에 대한 성도들의 관점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전쟁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전에 가나안 지역에 살던 족속들은 죄악이 충만했을 때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통해 주의
천사가 앞장서고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멸절시킨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어느 민족을 통해서라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심판자가
의롭다거나 정당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는 쓰임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현재 미국은 죄악이 가득 찬 나라들을 향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의 도구인 나라입니다. 미국은 스스로 그 사명을 잘 인지하고 세계의 경찰 국가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권세를 주시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어느 시대에나 전 세계의 질서를 잡고 힘을 가진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바빌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영국, 현재는 미국입니다. 앞으로는 세워질 적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마지막 날에 적그리스도 역시 주님이 행하실 심판의 도구입니다. 대
환란 때 벌어질 살육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대행해서 행하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끝난 후에 그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못에 던져집니다.
다음에는 천년 왕국을 세우시고 민족들의 머리가 될 이스라엘입니다. 주님이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고 세계의 전 민족이 경배하러 올라 오도록 명하실
것이며, 지금의 미국과는 비교도 안 될 강력한 독재를 실시할 것입니다. 주님은 철장으로 다스리십니다. 여기에 반발해 또 전쟁이 날텐데 주님은
단번에 모두 죽여 버리십니다. 이것이 전쟁에 대한 성도의 관점입니다.
한국은 근대에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습니다. 흥선 대원군 때부터
시작해서 목 베어 죽은 순교자들만 수 만이 넘습니다. 그들이 흘린 무고한 피에 대해 주님은 일본을 들어 심판하셨습니다. 일본 역시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무고한 성도들의 피를 흘렸습니다. 일본은 미국에 의해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남북 전쟁을 통해 엄청난 피를
흘렸습니다. 피로써 더러워진 땅은 피로써만 정결하게 됩니다. 지금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북한 역시 지난 50년간 행한 죄악에 대한 심판이요,
남한은 그동안 행한 음행으로 인한 심판입니다. 주님께서 한국을 심판하지 않도록 교회와 각 성도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주님 앞에서 이 땅을
멸하지 마시도록 구해야 합니다(겔21:30). 부시 대통령이 재선된 것을 가지고 광분하는 미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부시 대통령이 움직이는 줄
압니다. 역사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왕의 마음이 [주]의 손 안에 있음이 마치 강물과 같으니 그분께서 친히 원하시는 곳으로 그것을
돌리시느니라.](잠21:1). 한국의 기독 청년들이 반미 감정에 기초해 시위를 일삼기 전에 그들은 무릎을 꿇고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 땅을 위하여 내 앞에서 울타리를 세우며 무너진 곳에 서서 나로 하여금 그곳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찾았으나
아무도 찾지 못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내 격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그들을 소멸시켜 그들의 길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겔22:30~31). 우리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몇 몇 정신 나간 정치인들에게 맡길 수
없으며, 스스로 애국자인양 외치는 정신 나간 교계 지도자들이나 성경도 알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진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움직이시며 의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고 이 민족을 긍휼이 여겨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심판이 임하기 전에 에스겔에게 그들의 죄악을 낱낱이 외치도록
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국 사람들과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짓는 죄악을 낱낱이 밝히고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된다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48-49절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이 땅에서 음탕한
짓을 그치게 한즉 모든 여자들이 가르침을 받아 너희의 음탕한 짓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너희의 음탕한 행위를 너희에게 보응하리니
너희가 너희 우상들을 /위하던/ 죄들을 담당할 것이요, 내가 {주}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48-49). 주님은 전쟁을 통해
죄악을 행한 자기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배우지 않고, 징계를 통해 바로 잡히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은 전쟁이란 심판을 통해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성경적 진리요, 역사의 반복적인 교훈입니다.
주님은 아들이실지라도 범죄하면 징계하십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불법을 범하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사람들의 자녀들의 채찍으로 벌을 줄 것이로되] (삼하7:14).
주님은 누구를 통해 벌을 주십니까? 사람들의 막대기, 사람들의 자녀들의 채찍으로 벌을 줍니다. 이는 적게는 갈등, 분열, 반목에서 시작되어
전쟁까지 포함됩니다. 전쟁이란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모든 여자들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죄에 대한 보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배우고, 주님의 징계를 통해 순종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전쟁을 통해 배울 수 밖에 없습니다.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 [이는 내가 너희에게 선한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니 너희는 내
법을 버리지 말라.](잠4:2). 이들이 말씀으로 배우지 못했을 때 전쟁으로 가르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2:7).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꾸준히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바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서신으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붙들라.](살후2:15).
우리가 먼저 배워야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가르침을 줄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 이로써 그가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건전한 교리로 능히 권면하고 확신시킬 수 있으리라.](딛1:9). 여러분이 말씀을 통해 늘 배움을 얻고, 가르침을
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