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34:1-15
요절: 에스겔 34:15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에 대해 경고하신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해 대적하십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앞에 우리는 본문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목자”와 교회의 목사를 같은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대언자, 제사장, 서기관, 왕과 같은 직분이 있고, 장로들이 있었지만 목자란 직분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
전체가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정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목자라고 하면 왕들, 고관들, 총독들을 비롯한 통치자들을 일컫습니다. [또한
지나간 때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나가게 하고 들어오게 하신 이는 왕이었고 주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며 이스라엘의 대장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삼하5:2). 다윗이 왕이 된 것은 그가 이스라엘을 감독하고 보호하고
먹일 목자로 세움 받은 것입니다. 왕은 백성들을 영적 양식을 먹이는 일이 아니라 정치, 경제, 입법, 행정, 세금 문제 등 전반적인 모든 일을
통해 백성들을 먹여야 합니다. 왕이 목자입니다. 다윗 왕은 이새의 아들로서 들에서 문자 그대로 양치기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상속 백성인
이스라엘을 먹이고 지도하는 능숙한 목자로서 왕이 되었습니다. [또 그분께서 자신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그를 양 우리에서 취하시고 새끼 밴
어미 양을 뒤따르던 그를 이끌어 내사 자신의 백성 야곱과 자신의 상속 이스라엘을 먹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자기 마음의 순전함으로 그들을 먹이고
자기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78:70~72). 구약에서 말하는 목자는 정치적으로 왕을 비롯한 총독, 귀족, 고관들을
말하는 것임을 기억해 두시고 본문을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목자들을 향해 대적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양떼인 백성들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털과 가죽을 벗기고 살을 삶아 먹는 거짓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로 타락하고
심판을 받아 바빌론의 포로가 된 데는 ‘타락한 목자들’의 책임이 무엇보다 컸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파수꾼들의 역할에 대해서 증거했고, 오늘은
목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목자들의 기본적인 임무는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떼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먹였습니다. 많은 세금을 거두고 노역을 시키고 자신들의 종처럼 부려먹었습니다. 고리대금을 통해 땅을 빼앗고, 돈을 갚지 못하는 자들의
자식들을 잡아 종을 삼거나 이교도들에게 팔아 버리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양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양들을 수탈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파수꾼들(대언자들)이 타락하자 양들을 치는 목자들도 타락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삯꾼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의
목자들에 대해서 통렬히 죄를 지적하시고 화를 선포하십니다.
1-2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쳐서 대언하고 또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목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화 있을진저,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여! 목자들이 마땅히 양떼를 먹여야 하지 아니하냐?](1-2). 목자는
마땅히 양들을 먹여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양들을 먹이지 않고 양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아서 자기들만 먹였습니다. 돈을 빼앗든지 땅을
빼앗든지 노동력을 빼앗든지 그들의 자녀를 빼앗든지 간에 무엇인가를 빼앗아 자기들의 배만 채우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의 죄를
물으시고 “화 있을진저!”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양들에게 목자가 필요한 것은 양떼를 삼키는 이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절대적으로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를 비롯한 하나님의 대언자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미리 경고해지만 이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득실대는 이리들을 보면서도 평안을 외치고, 화평을 노래했습니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두시면서 세상과 동화되지 말고, 일치되지 말고, 사랑하지 말고, 친구가 되지 말며, 세상에 속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온통 사나운 이리들,
뱀들, 개들, 사자들이 득실댑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자를 세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나니 이는 내가 알거니와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임이요,](행20:28-29). 하나님이 목자를 세우시는 것은 사나운 이리들로부터 양들을
감독하고 돌보고 먹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양들은 알아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주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목자는 자원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양들을 먹이고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더러운 이익을 탐해서는 안
됩니다. 양들 위에 군림해서도 안 됩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벧전5:2-3).
하지만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3절입니다. [너희가 살진 것을 먹고 그 털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먹이를 먹는 양들을 죽이되 양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3).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에서 목자는
통치자들을 일컫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삼하5:2). 우리 주님 역시 “이스라엘의 목자”(시80:1)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고 어린양을 자기 팔로 모아 품에 안아 옮기시며 어린것들과 함께하는 어미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시리로다.](사40:11).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선한 목자’(요10:4)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양들의 목자장이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자신만을 먹이고 양들을 죽이고
먹이지 않는 목자는 우상 목자의 계열입니다. 거짓 목자들입니다. 그래서 약탈을 일삼습니다. 성경은 선한 목자와 거짓 목자인 우상 목자의 차이를
뚜렷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여 그들의 몸에서 가죽을 벗겨 내고 그들의 뼈에서 살을 뜯어내며 또 내
백성의 살을 먹고 그들의 몸에서 가죽을 벗겨 내며 그들의 뼈들을 꺾어 조각조각 자르기를 냄비와 솥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미3:2-3).
이것이 거짓 목자들이 양떼에게 하는 짓입니다. 우상 목자의 특징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내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도살할 양떼를 먹일지니 이 양떼를 소유한 자들은 그것들을 죽이고도 스스로 죄 없다 하며 그것들을 파는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자가 되었은즉
주께서 찬송을 받으시리로다, 하고 양들을 직접 치는 목자들은 그것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느니라.](슥11:4-5). 선한 목자와 우상
목자의 차이는 양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습니다. 우상 목자는 양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버리고 대언자들을 죽이고 우상을 숭배했을 때 그들에게 ‘우상 목자’를 주셨습니다. [이는,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켜 세울 것임이니 그가 끊어진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어린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고
잠잠히 서 있는 자를 먹이지 아니하며 오히려 기름진 것들의 고기를 먹고 또 그 발굽들을 갈기갈기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그 양떼를 버리는 우상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임하리니 그의 팔이 완전히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완전히 어둡게 되리라, 하시니라.](슥11:16-17).
양들에게 복과 저주는 어떤 목자를 만나는가? 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하나님을 버리면 그들 위에는 우상 목자가 서게 됩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4절입니다. 타락한 목자들이 양떼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 병든 것을 강하게 하지 아니하고 아픈 것을 고쳐 주지 아니하며 상한 것을 싸매 주지 아니하고 쫓겨난 것을 다시 데려오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아니하고 오히려 폭력과 학대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4). 거짓 목자들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행하시는
것과는 정반대로 합니다. 거짓 목자는 병든 양들을 강하게 하지 않습니다. 병든 양들을 귀찮게 여깁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안식일에라도 병든 자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병든 자들을 모두 다 고치셨고, 바리새인들의 고소와 위협 속에서도 치유의 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마12:10-12).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나아오는 병자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 거짓 목자는 ‘아픈 것을 고쳐 주지 아니하고
상한 것을 싸매주지 아니’합니다. 이들은 고칠 능력도 없거니와 고칠 의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상한 자를 싸매
주시는 분이십니다(눅4:18). 주님은 우리의 치유를 위해 자신의 몸에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주님은 양떼들을 위해 자신이 상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거짓 목자는 쫓겨난 것을 다시 데려오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섭니다. 거짓 목자는
폭력과 학대로 다스립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다스리지 않으시고” 섬기시며(막10:45), 본을 보이십니다.
5절입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들의 모든 짐승에게 먹이가 되었도다.](5). 목자는 많으나 모두 거짓 목자들이요, 우상 목자들입니다. 선한 목자가 없으면 양들은
흩어집니다. 교회는 많으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없고, 목사는 많지만 주님의 부름을 받아 세움을 입은 목사는 적고 성경 교사는 많지만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진리를 가르치는 이는 적습니다. 양들에게 목자가 없는 것은 물이 없는 것이나 초장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목자가 없는 양들은 강도들이 훔쳐갑니다. 모든 들의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리 저리 흩어진 양들이
되었고, 사방의 우글거리는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몰아내었도다. 처음에는 아시리아
왕이 그를 삼켰고 마지막에는 이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이 그의 뼈들을 꺾었도다.](렘50:17).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망대요,
산성이요, 요새요, 피난처로 삼을 때는 어떤 외적도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목자가 있을 때는 그들이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버린 악한 왕들과 치리자들로 인해 그들은 모두 흩어진 양떼요,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복음을 전하실 때 이스라엘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음이라.](마9:36).
참 목자이신 주님께서 그들 한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님을 마음에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목자없는 양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진 것입니다. 종교나
전통은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은 *한 인격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이들은 지금 모두
흩어진 양떼와 같고, 짐승 앞의 먹이 신세입니다.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주변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짐승처럼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시리아, 앗시리아, 암몬 모압, 바빌론, 이집트 등은 그들을 삼키고도 남을 짐승들이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이런 모든
짐승들로부터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김으로써 스스로 짐승의 먹이가 되고 말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진리를 버리고, 건전한 교리를 버리고, 말씀을 떠날 때 똑같이 되고 맙니다. 성도들 주변에는 언제나 울부짖는 사자 마귀가 곁에
있습니다.
6절입니다. [내 양이 모든 산과 모든 높은 언덕에서
떠돌아다니며 참으로 내 양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그것들을 찾거나 찾으러 가는 자가 없도다.](6).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산과
언덕에 떠돌아다니는 양들처럼 떠돌고, 온 지면에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칼날을 피해서 이리 저리 유리방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 줄 목자가 없었습니다. 양떼를 찾아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목자라는 자들은 양떼를 흩어지게 하는 역할만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에게 화를 선포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화 있을진저, 내
초장의 양들을 멸하고 흩어지게 하는 목양자들이여!](렘23:1).
교회사를 보면 캐톨릭의 박해를 피해 산이나 굴로 유리하는
성도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들은 계곡이나 산에서 살았지만 결코 흩어진 양떼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를 따라 어린
양의 발자취,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간 것입니다. 오늘날 양떼를 흩어지게 하는 것은 박해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입니다. 성공과 출세와 같은 눈에
보이는 성취욕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그런 것을 이룰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것을 이룰 때 믿음의 보상이요, 믿음의
간증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은 어느 시대나 박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 더욱
강건해지는 것이 살아 있는 믿음의 신자들입니다.
7-8절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양떼가 먹이가 되고 들의 모든 짐승에게 먹을 것이
되었음이 분명하니 이는 목자가 없었음이로다. 내 목자들이 내 양떼를 찾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만 먹이고 내 양떼는 먹이지 아니하였도다.](7-8).
하나님은 양떼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한 원인과 책임을 “이는 목자가 없었음이로다”란 한 마디로 진단하십니다. 이는 정확한 진단이요, 옳은
말씀입니다. 양들이 흩어지고, 병들고, 상처 나고, 짐승의 먹이가 되고, 방황하는 것은 사나운 짐승들의 책임이 아니라 ‘목자’의 책임입니다.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목자다운 목자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양들을 돌보고 감독하며 먹을 것을 주고 진리로 인도하는 그런 목자,
이리들과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지켜 주는 목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그런 목자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더 이사 목자가 없는 그런 날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목자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고 목양을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흩어진 양떼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부흥을 꿈꾸고 명성을 얻기를 원하는
목자들은 많이 있지만 양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려는 목자는 거의 없습니다. 책을 쓰고, 방송을 타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려는 목사들은
넘쳐나지만 진리의 말씀으로 양들을 먹이는 일만 하는 이는 지극히 적습니다. “내 목자들이 내 양 떼를 찾지 아니하고.”- 주님의 양떼를 찾아.
사람들은 자신의 동전 하나를 잃어 버려도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양떼를 잃어 버렸음에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뭔가 이상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9-10절입니다. [그러므로, 오 목자들아,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노라. 내가 내 양떼를 그들의 손에서 요구할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양떼 먹이는 것을 그만두게 하리라. 또한 목자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건져
내어 그들에게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할 것임이라.](9-10). 주님의 목자가 아닌 거짓 목자가 주님의 피와 상관없는 거짓 양떼를 먹이는
것은 그들의 종교심에 따른 것이며, 주님께서 개의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양떼를 먹이지 않는 목자들을 향해 손해 배상을 물라고 하십니다. “내가
내 양떼를 그들의 손에서 요구할 것이며.” -목자에게 변상, 보상을 요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양떼 먹이는 것도 그만 두게 하리라” -이는
해고입니다. 목자가 더 이상 자신도 먹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왕은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고 귀족은 더 이상 귀족이 되지 못한 채 모두 한낱
포로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먹임으로써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삽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서 양들을 건져 내어 버리면 그들은 더 이상 양들에게서 얻을 것이 없습니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보십시오. 통치자들과 고관들은 성전이
불타고 도시의 모든 집이 불타버림으로써 이들은 자신들이 양들에게서 강탈한 모든 재산을 다 날려 버렸습니다. 바빌론 군대는 그들의 재산을 남김없이
몰수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세금을 거둘 수도 없습니다. 자신들도 포로가 되었고, 백성들도 포로로 잡혀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더 이상
왕들과 통치자들의 먹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 먹이가 되지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으며 그들을 찾으러 가되](11). 주님께서 친히 ‘내 양을 찾으며 그들을 찾으러 가되’라고 하십니다.
목자로 오실 메시야 예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 구절은 주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양떼를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상하고 찢긴 자를 싸매시고 고쳐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보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으며 그들을 찾으러 가되](11b)란 말씀은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란
말씀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은 “내가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양들은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12절입니다. [목자가 자기 양들 가운데 있는 날에 양들이
흩어지면 자기 양떼를 찾으러 가는 것같이 내가 내 양을 찾으러 가서 구름이 끼고 어두운 날에 양들이 흩어져 /지내는/ 모든 곳에서 건져 내리라.](12).
여기서 양들이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구름이 끼고 어두운 날’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찾으러 온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다시 흩어진 양떼가 되고 말았습니다. 1948년 겨우 국가를 회복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구절은 대환란의 끝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가리키는 재림에 대한 구절입니다. 지상의 모든 나라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이 모두 고국으로 모여 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는 양들을 찾으시고 건지시는 아름다운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구름이 끼고 어두운 날에 흩어진 양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힘든 생활을 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은 그런 양들을 모두 찾아 오셔서
건져내십니다. 진실로 죄인들에게 주님이 찾아 오시고 죄에서 건지십니다. 부자다, 부족함이 없다고 외치는 이들, 지혜롭다 강하다 자랑하는 이들은
주님이 오셔도 건짐받지 못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이들은 목자이신 주님으로부터 건짐 받지 못합니다. 나의 인생에 구름이 끼고 어두운
날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어렵고 힘들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인됨과 무가치함을 깨달았다면 그는 더욱 주님의 은혜를 깊이
맛보게 될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백성들 가운데서 데려오며 여러
나라에서 모아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가서 강가에 있는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서와 그 나라의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먹이되](13).
B.C. 587 년경에 한 에스겔의 이 예언은 1948년에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귀환은 역사적으로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 성경의 예언이
은유나 상징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 교회사가들, 캐톨릭 교회 등에서 이스라엘은 끝이 났고 교회가 그 권리와 특권을 계승했다고
하면서 구약의 많은 예언들을 추상화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고 앞으로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양떼를 찾아 모으시고 약속의 땅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시고, 그들을 먹이십니다. 이 축복은 결코 누가 강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입니다. [좋은 목장에서 먹이고 그들의 우리를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 위에 있게 하리니 그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우며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서 기름진 목장에서 먹으리라.](14).
유대인의 회심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국가는 이미 회복되었습니다. 천년 왕국이 되면 이스라엘 땅은 가장 비옥한 땅이요, 좋은 목장이 될
것입니다. 그곳은 기름진 목장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소망하던 모든 물질적인 복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자신들이 배척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목자요, 자신들을 건지고 먹이시는 분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내 양떼를 먹이며 그들을 눕게
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15). 이 구절은 다윗의 시편에 나오는 한 구절을 연상케 합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분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시23:1~2). 이 부분은 천년
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오셨고, 제자들 역시 이스라엘 동네에만 보내셨습니다(마10:6).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을 거부함으로써 푸른 초장은 고사하고 온 세상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 구절은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취를 기다리고 있는 예언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역사적 사건들이나 예언들을 교훈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주님의 양떼들은 주님 안에서 안식하며 희락과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강을 마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언제나 시편 23편입니다.
결론: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