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에스겔 34:16-31 
요절: 에스겔 34:2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십니다. 또한 믿는 모든 성도들의 목자이십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고 노래한 다윗의 시편에는 목자이신 주님에 대해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양떼들입니다. [오라, 우리가 경배하고 절하며 우리를 만드신 이 곧 [주] 앞에 무릎을 꿇자. 이는 그분께서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분의 풀밭에 /거하는/ 백성이요, 그분의 손이 /기르시는/ 양들이기 때문이로다.](시95:6~7a).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릅니다. 목자와 양은 대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양은 여느 동물과 달리 목자에 대해 절대적 의존을 필요로 합니다. 양은 시력이 매우 약해서 적이 가까이와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대신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청력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후5:7). 믿음의 삶이란 보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들음으로 옵니다(롬10:17). 양은 넘어지거나 상처를 입으면 목자가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보통 짐승들처럼 핥아 주거나 굶어서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자가 치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싸매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양은 앞발이 유난히 짧아서 앞으로 따라가는 것은 상관없지만 뒤로 물러날 때는 잘 넘어집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를 자들이 아니요, 오직 믿어서 혼의 구원에 이를 자들이니라.](히10:38-39). 모든 짐승들은 자신들이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는데 반해 양들은 양초와 독초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목자가 인도한 초장, 목자가 주는 꼴을 받아 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선한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아 먹어야 합니다. 모든 짐승들을 물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양들은 물을 찾는 능력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스로 생수의 샘, 생수의 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목자로서 양떼를 인도하십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양떼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시80:1). 주님은 목자로서 양떼를 지도하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은 양같이 나아가게 하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양떼같이 지도하시며](시78:5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양들의 큰 목자이시며(히13:20), 혼의 목자이십니다. [이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 돌아왔음이니라.](벧전2:25). 주님은 목자장이십니다(벧전5:4). 여러분은 지금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을 따르고 있습니까? 나의 혼을 인도해 주시고, 감독해 주시며, 지도해 주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는 인격적인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면 나의 무능, 무지, 무익함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양은 독립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면 그만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으며 쫓겨난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아픈 자를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16).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잃어버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자랑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잃어버린 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잃어 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음이니라.](눅19:10). “잃어버린 자”는 이교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마10:6)하셨습니다. 주님은 할례자들의 사역자이셨습니다(롬15:8).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마15:24). 주님은 잃어 버린 양들을 찾고 또 찾으시는 그런 목자이십니다(눅15:4).

주님은 쫓겨난 자를 다시 데려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주의 면전에서 쫓아 낼 수 있는 것은 불신, 불순종, 배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났듯이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 그들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의 온 씨를 쫓아낸 것같이 너희를 내 눈앞에서 쫓아내리라.](렘7:15).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서 있다 할지라도 내 생각은 이 백성을 향하여 기울 수 없나니 그들을 내 눈앞에서 쫓아내고 떠나게 할지어다.](렘15:1).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끝이 아닙니다. 포로의 땅에서 절망 가운데 있던 유대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다시 데려 오고”란 약속을 주셨습니다.

“상한 자를 싸매 주며 아픈 자를 강하게 하려니와”란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동안 행하신 핵심 사역이셨습니다. 주님께서 회당에서 처음 성경을 펴시며 자신의 사역을 선포하시기를,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음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구원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짓밟힌 자를 자유하게 하며](눅4:18)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로서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사역입니다. 욥기에 말하기를, [이는 그분께서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자신의 손으로 온전하게 하시기 때문이라.](욥5:18).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147:3). 현대인들은 마음의 상처가 유난히 많습니다. 가족 간에도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부모에게 상처받는 자식들이 있고, 자식들에게 상처받는 부모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서로 상처를 주는 이들도 있고, 친구 간에, 교회 성도들 간에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상처만 있고, 상처를 치유 받았다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약물 치료나 상담 치료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Christian Psychology. 교회에 와서 상처를 받았다는 분은 많이 보았지만 자신의 모든 상처를 깨끗이 씻음 받고, 고침 받았다는 간증은 좀처럼 듣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용서없이는 치유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네 모든 불법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멸망에서 구속(救贖)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네게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입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3-5). 죄로 인한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 그 무엇으로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맞으신 그 채찍으로 인해 우리는 고침을 받습니다(벧전2:24). 주님이 온 몸으로 당하신 그 몸의 상처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참된 치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상처가 치유받는 방법은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서 고치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며 멸망들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시107:20). 말씀을 보내사 병을 고치신 예는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보여졌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오심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마8:8).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심으로써 마음의 상처와 질병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상처가 치유 받는 또 하나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고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시리라. 혹시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용서받으리라.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뜨겁고 효력 있는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5-16). 다윗은 자신이 아플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내가 연약하오니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오 [주]여, 나의 뼈들이 괴로워하오니 나를 고치소서.](시6:2). 그리고 그는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나를 고치셨나이다.] (시30:2). 기도하십시오. 육신의 질병은 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의사의 지시를 잘 따름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 영혼의 치유는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16절 후반절입니다. [...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16). 하나님께서 왜 살진 자와 강한 자를 멸하시는 것입니까? 이들이 살진 것은 “양 떼를 먹이는 대신 자신들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세금과 노역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했습니다. 폭력으로 약탈했습니다. 그들이 살진 것은 불법을 통해서 자신들만 먹였기 때문입니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만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 역시 성전에 금은보화를 쌓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지상에 오셨을 때에도 여전했습니다. 성전에는 환전상을 비롯한 장사꾼들만 가득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나는 부자라.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a)고 말할 정도로 풍족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영적 진리의 풍요로움이 아니고 탐욕으로 인해 쌓아둔 재물의 풍요이며, 불법으로 인해 쌓아둔 것이기에 주님은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오 나의 양떼여, 너희에 관하여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내가 가축과 가축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17). 이 말씀은 재림의 때에 있을 민족들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땅 위의 민족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마태복음 25:31-33,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 중에 모든 거룩한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으리니 그가 모든 민족들을 자기 앞에 모으고 목자가 염소들로부터 자기 양들을 갈라내듯 그들을 일일이 분리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편에 두되 염소들은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이방 민족은 양과 염소로 나누어져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대해 주었는가를 자신에게 대해 준 것과 동일하게 보시며, 심판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천년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민족들은 양으로 분류된 민족들입니다.

18-19절입니다. [좋은 꼴 먹은 것이 너희에게 작은 일로 보이므로 너희가 너희의 남은 꼴을 너희 발로 밟느냐? 깊은 물을 마신 것이 /너희에게 작은 일로 보이므로/ 너희가 나머지 /물/을 너희 발로 더럽게 하느냐? 내 양떼로 말하건대 그들이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게 한 것을 마시는도다.](18-19). 가난한 자들에게는 없어서 못 먹는 것일지라도 부자들에게는 값비싼 좋은 음식도 먹다 남기고 버릴 수 있고, 발로 밟아 버리기도 합니다. 부자들은 먹고 남은 것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쓰레기 통에 버리고, 발로 밟아 버리기에 가난한 자들은 그것을 주워서 씻어 먹습니다.

성도들에게 먹어야 할 “꼴”과 마셔야 할 “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젖(우유), 꿀, 사과, 고기, 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씻는 물이기도 하고, 마실 물이기도 합니다(엡5:26). 그런데 이런 말씀을 짓이겨 놓고 패대기치고, 자신들의 더러운 발을 담그어서 하나님의 양들에게 먹이로 줍니다. 많은 양들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개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 현대어 성경, 새 번역 등등 다양한 이름을 붙여가며 엉망이 된 성경을 성도들에게 줍니다. 교리가 혼잡하고, 수천 단어가 빠지고 더해진 성경을 줍니다. 진리가 아닌 것들을 마치 성경의 진리인 것처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선포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양떼로 말하건대 그들이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게 한 것을 마시는도다.](19)라고 하신 것입니다.

20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나 곧 내가 살진 가축과 야윈 가축 사이에서 심판하리라.](20). 살진 가축은 양들을 약탈해서 자신들을 먹인 목자들로서 왕, 귀족, 고관들입니다. 야윈 가축은 과부와 고아를 비롯한 힘없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사이에서 심판하십니다. 어떻게 심판하시는가? [주린 자들을 좋은 것들로 배부르게 하셨으며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눅1:53). [자 이제, 너희 부자들아, 앞으로 너희에게 임할 비참한 일들로 인하여 슬피 울며 울부짖으라.](약5:1).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부요하지 못한 자를 일컬어 주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너 어리석은 자여, 이 밤에 네 혼을 요구하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시니라.] (눅12:21). 많은 사람들이 부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자가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이가 극히 적고, 재물을 신뢰하는 자는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잘 살아 보세”가 아니라 “바르게 살아 보세”라고 해야 합니다. 부자가 된 것이 복이 아닙니다. 의가 없는 소득은(잠16:8)은 저주요, 심판의 대상입니다. 부자들은 모두 자신이 일해서 벌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어떻게 벌었는지 보십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자가 되었도다. 내가 나를 위해 재물을 얻었은즉 사람들이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가 되는 불법 곧 내 안에 있는 /불법을/ 찾지 못하리라, 하거니와](호12:8). 사람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도 하고, 찬송도 돌립니다. 어떤 분들은 왕창 헌금도 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하는 행태를 잘 알고 계십니다. [이 양떼를 소유한 자들은 그것들을 죽이고도 스스로 죄 없다 하며 그것들을 파는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자가 되었은즉 [주]께서 찬송을 받으시리로다, 하고 양들을 직접 치는 목자들은 그것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느니라.](슥11:5). 주님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않으시며(마9:13), 공의와 사랑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보다 더 중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11:42)

21절입니다.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떠밀고 모든 병든 것을 너희 뿔로 밀어내어 밖으로 흩어지게 하였느니라.](21).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떼를 먹이지 않고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을 흩어지게 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관계를 정확히 직시하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들이 한 일들을 선포하시는 이런 음성을 들을 때 우리 역시 이와 동일한 음성을 들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양떼를 돌보아야 할 목자가 도리어 양떼를 떠밀고 병든 것들은 밀어내어 흩어지게 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화 있을진저, 내 초장의 양들을 멸하고 흩어지게 하는 목양자들이여!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먹이는 목양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내 양떼를 흩으며 그들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으니, 보라, 내가 너희의 악한 행위에 대하여 너희를 징벌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렘23:1~2). 하나님은 이들을 “개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심한 욕을 하셨는가 싶을 정도입니다만 주님은 양떼를 흩어지게 하는 목자들을 ‘개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탐욕이 심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개들이요, 깨닫지 못하는 목자들이라. 그들이 다 자기 길만 바라보고 저마다 자기 구역에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사56:11). 정치 지도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다 이와 같습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다시는 먹이가 되지 않게 하고 가축과 가축 사이에서 심판하리라.](22). 하나님은 친히 목자가 되셔서 이 땅에 오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들의 목자로서 양떼를 구원하시고, 다시는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주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면 주님은 여러분의 목자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주님의 양입니다.

23절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을 먹이게 하리니 그는 곧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되리라.](23). 하나님은 이스라엘 위에 한 목자를 세워 주십니다. 모세나 사무엘이나 다윗과 같은 목자라면 좋습니다. 주님이 세워 줄 목자는 ‘다윗’입니다. 이 일은 천년 왕국에서 다윗이 이스라엘 위에 세움받을 왕이란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여기서 “다윗”은 문자 그대로 다윗이 아니고 “예수님”이시다란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은 예수님을 예표할 수는 있어도 예수님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이시며(계5:5, 22:16), 다윗의 보좌 위에 앉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아닙니다. 여기서 잠깐 성도들의 지위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천년 왕국에 모두 왕이요, 제사장들입니다(계1:6, 5:10, 20:6). 우리는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합니다. 각자 주님께서 맡겨 주신 고을(도시)들을 다스립니다. 예수님은 왕의 왕이시며(King of kings), 주의 주(Lord of lords)가 되십니다. 다윗은 천년 왕국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의 왕은 누가 될지 알고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으리라. 그들이 또한 내 법도 안에서 걸으며 내 법규를 지켜 행하리라.](겔37:24). 다윗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이스라엘을 먹이는 목자입니다(삼하5:2, 시78:71). 그는 또 제사를 지냅니다. [통치자의 몫은 명절과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의 집의 모든 엄숙한 날에 번제 헌물과 음식 헌물과 음료 헌물을 드리는 것이니 그는 죄 헌물과 음식 헌물과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예비하여 이스라엘의 집을 위해 화해를 이룰지니라.](겔45:7). 구약의 율법이 다시 재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다가 올 것들의 그림자”(골2:16-17)라고 말한 것입니다.

에스겔 46장에는 ‘통치자’가 하는 일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일하는 엿새 동안에는 동쪽을 바라보는 안뜰의 문을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월삭이 되는 날에도 열고 통치자는 바깥 문의 주랑(宙欒) 길로 들어와서 그 문의 기둥 옆에 서고 제사장들은 그를 위하여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예비할 것이요, 통치자는 그 문의 출입 통로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갈 것이로되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이 땅의 백성도 이와 같이 안식일과 월삭(嫄朔)에 이 문의 입구에서 주 앞에 경배할 것이라. 안식일에 통치자가 주께 드리는 번제 헌물은 흠 없는 어린양 여섯 마리와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라](겔46:1-4).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천년 왕국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경배를 드리는 사실을 봅니다.

24절입니다. [나 [주]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가운데서 통치자가 되리라. 나 [주]가 이것을 말하였느니라.](24). *겔44:2-3절 참조. [이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말 것이며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는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그것을 닫아 둘지니라. 이 문은 통치자를 위한 것이니 그 사람 곧 통치자가 그 안에 앉아 주 앞에서 빵을 먹으며 그 문의 주랑(宙欒) 길로 들어가고 같은 길로 나갈 것이니라, 하시더라.](겔44:2-3). 여기서 우리는 천년 왕국에서 주님과 다윗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보좌 우에 앉으십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 때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치자’(prince)로 불립니다. 다윗은 개개인의 속죄가 아니라 민족적 속죄를 위한 희생제를 드립니다. 천년 왕국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등장하면 주님은 새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이 되십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주님이 다윗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신 것은 지상의 천년 왕국 기간입니다.

25절입니다. [또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이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광야에서 안전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잠을 자리라.](25). 이스라엘은 더 이상 어떤 민족이나 누구에게 위협을 받거나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습니다. 대환란이 끝나면 이스라엘은 열방의 머리가 됩니다. 광야에 있어도 그들을 해할 것이 없고, 수풀 가운데서 잠을 자도 그들을 상하게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26-27절입니다. [내가 그들과 내 산 주위의 처소들로 하여금 복이 되게 하고 때를 따라 소나기를 내리리니 거기에 복의 소나기가 있으리라. 그리한즉 들의 나무가 자기 열매를 맺으며 땅이 자기 소출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안전하리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매는 것을 꺾고 그들에게서 섬김을 받던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냈을 때에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6-27).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 땅에 비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으로 변하게 됩니다. 주님이 비를 내리시면 광야는 초원이 됩니다. 초원은 숲이 됩니다. 온통 광야와 사막 뿐인 그 땅이 푸른 초목으로 뒤덮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미래에 있게 될 현실입니다. [오 유다의 집아,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이교도들 가운데서 저주가 된 것같이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하여금 복이 되게 하리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오직 너희 손을 강하게 할지니라.](슥8:13). 이 말씀은 단지 자연 환경과 땅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천년 왕국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주님은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나 마침내 /주께서/ 위로부터 영(靈)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열매를 많이 맺는 밭이 되며 열매를 많이 맺던 밭은 숲으로 여겨지리라.](사32:15). 구약에서 대언자들에게 임했던 성령이 모든 백성들 위에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위에 부어졌던 성령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 위에 부어 질 것입니다.

28절입니다. [또 그들이 다시는 이교도들에게 먹이가 되지 아니하겠고 땅의 짐승도 그들을 삼키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이 안전히 거하리니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28). 그동안 이스라엘을 노략했던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론, 로마 등 과 같은 민족들이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더 이상 이교도들에게 먹이가 되지 않습니다. 땅의 짐승도 그들을 삼키지 못합니다. 이는 모든 동물들이 초식 동물이 되고,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을 넣어도 물지 않습니다. 자연 환경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아는 지식 역시 온 땅에 넘쳐 납니다. [/그때에/ 이리도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이들을 이끌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놀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로되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6~9).

29절입니다. [또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초목(草木)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소멸되지 아니하며 이교도들로 말미암은 수치도 담당하지 아니하리라.](29). 하나님께서 유명한 초목을 일으키시는데 그 초목으로 인해 더 이상 기근의 문제가 없습니다. 대체 무슨 초목이기에 그렇습니까? *유명한 초목= 예수 그리스도(사11:1). 사53:1-3.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사11:1).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스라엘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 받습니다.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는 그가 주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임이라.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당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니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1-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습니다. 양식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30절입니다. [저들이 이와 같이 나 [주] 곧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알겠고 그들 곧 이스라엘의 집이 내 백성인 줄을 알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30). 지금까지 많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선민 의식, 선민 사상, 시오니즘을 경멸하고 모독하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31절입니다. [내 양떼 곧 내 목장의 양떼인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31). 하나님은 비유를 스스로 명료하게 풀어 주십니다. 양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주] 그분께서 하나님이심을 너희는 알지어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신 이시요, 우리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그분의 풀밭에 /거하는/ 양이로다.](시100:3).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는 것이 영생입니다(요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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