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33:17-33
요절: 에스겔 33:31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세상이 어찌 이리도 불공평하단 말인가?” 탄식하는 소리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람들
역시 불공평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한 이 사회는 불공평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볼 수 없는 세상, 그런 사회에 살다 보니 사람들은
하나님조차도 불공평하신 분인 줄로 압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가장 큰 오해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불의한 자, 사악한 자, 죄인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선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으며 사는가?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질병, 가난, 무지 등을 모두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며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도무지 공평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 대해서 철저히
공평하다고 믿지는 않는 듯합니다. 자신에게 고통이나 어려운 일이 다가오면 “하나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란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남의 불행이나 어려움에는 주님의 깊은 뜻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찬양하며, 인내로 참고 견디라고
위로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닥치는 환란과 시련 앞에서는 전혀 그러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겔18:25).
17절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네 백성의 자녀들이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그러나 그들로 말하건대 그들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도다.](17). 주님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투덜대고 불평하시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자신의 판단자(심판/judgement)로 믿고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물의 판단자(심판자)요, 척도로 두기 때문입니다.
공평과 불공평의 기준이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공평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선과 악의 기준은 자신의 유익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욕망입니다. 자신의 머리로 이해가 되고, 감정에 용납이 되고, 판단이 서는 것입니다. 기준이 잘못되면 선악이 바뀝니다. 사람들은 육신, 현
세상, 물질,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 다가올 세상, 영적인 것들, 영원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불공평해
보이고, 불합리해 보이는 것입니다.
공평이란 말이 획일적 평등이나 차별이나 구별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공평이란 잣대가 정확하다, 추가 정확한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정확한 저울로 정확하게 무게를 달아 보십니다. [거짓된
저울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꼭 맞는 추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니라.](잠11:1). [서로 다른 추와 서로 다른 자는 둘 다
[주]께 똑같이 가증한 것이니라.](잠20:10). [서로 다른 추는 [주]께 가증한 것이요, 거짓된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잠20:23).
주님의 저울, 주님의 추는 거짓됨이 없습니다. 그래서 측량이 틀림이 없고 오차나 실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겉모양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지위나 돈이나 권력이나 성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행동을 달아 보시며(삼상2:3), 그 속의 영을 달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저울에 올려놓으면 합당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기를, [참으로 지위가 낮은 자들은 헛되며 지위가 높은
자들은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을 다 더해도 허무보다 가볍도다.](시62:9)라고 합니다. 바빌론 제국의 왕이었던 벨사살을 보십시오.
그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기록된 글은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단5:25).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있다 함이요,](단5:27). 우리는 사람이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달아 보시면
“부족함” 뿐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fall short of/ 부족하더니. 우리는 죄로 인해서 결코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 질 때마다
미달, 불량이란 기록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내가 한 모든 일, 내가 가진 모든 재산, 모든 지위를 다 올려 두어도 여전히
“부족”이라고만 나옵니다. 다윗은 일찍이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한 뼘만큼 되게 하셨사오니 내 시대가 주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듯 하오며 참으로 사람은 최선의 상태에서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39:5). 하나님이 우리를 달아 보시면
저울의 눈금은 0(zero)를 가리킬 뿐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저울에는 더 이상 부족함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 들일 때 그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18-19절입니다. [의로운 자가 돌이켜 자기 의에서 떠나
불법을 행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요, 사악한 자가 돌이켜 자기 악에서 떠나 율법에 맞는 일과 옳은 일을 행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8-19).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공평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불공평이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말씀이 신약 성경이
말하는 혼의 구원이나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지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선을 행하던 사람이 불법을 행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라 할지라도 ‘돌이켜 회개하고 율법을 행하고 옳을 일을 행하면’ 그것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혼들을 고난에서,
죄에서, 마귀의 올무에서 구원하십니다. 반면 자기 의를 의지하는 자는 넘어지게 하십니다. [또한 의로운 자가 자기 의에서 돌이켜 불법을
행할 때에는 내가 그 앞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두리니 그가 죽을 것이니라.](겔3:20a).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고전10:12)고 말했습니다. 성도가 겪는 가장 큰 위기는 영적
자만(自慢)입니다. 성령을 통해 말씀이 주는 영적 확신은 믿음과 겸손으로 나타나지만 자신이 머리로 깨우친 교리적 지식은 “교만, 자만, 오만,
거만”으로 드러나 넘어지는 앞잡이요, 멸망의 선봉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롭게 되었습니까? 믿음으로,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의”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으로서 의롭게 살지 않고 데마처럼 현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으로 돌아서거나 갈라디아 교인처럼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돌아서거나,
고린도 교인들처럼 육신으로 돌아서거나 돈을 사랑함으로 믿음을 저버리거나 건전한 교리를 버리고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의 교리를 따르는 등등의 일을
할 때 구원받은 혼이 지옥에 가지는 않을 지라도 죽을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 (롬8:13). 성도들은 죄를 행함으로 그 육신이 병들거나 약해지거나 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로 병든
육신과 영혼이라 할지라도 죄를 시인하고 회개할 때 그는 고침을 받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이와 같습니다.
20절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오 너희 이스라엘의 집아, 내가 너희를 다 각 사람의 길들에 따라 심판하리라, 하시니라.](20).
하나님은 자신의 공평함을 탓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 각 사람의 길들에 따라 심판하리라."고 하십니다. 주의 길은 언제나
공평합니다. 바른 것이 비뚤게 보이는 것은 진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뚤기 때문입니다. 범죄자들은 언제나 모든 법이 악법으로
보이고, 불공평해 보이는 법입니다.
21절입니다. [우리가 포로 된 지 십이 년이 되는 해
시월 곧 그 달 오일에 예루살렘에서 도피한 자가 내게 이르러 말하기를, 그 도시가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하니라.](21). 역사적
사건입니다. 에스겔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에는 이 사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의 제십구년 오월 곧 그 달 십일에 바빌론 왕을 섬기는 호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주]의 집과 왕의 집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우되 지위가 높은 자들의 집까지 다 불태웠으며] (렘52:12~13).
예루살렘은 유다 왕 시드기야 제 구년 시월에 포위되었고(렘39:1), 시드기야 제 십일년 사월 구일에 함락되었습니다(렘39:2). 포로로
잡혀왔던 이들에게 성전 함락 소식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기대와 꿈을 가지고
있었던 터입니다. 이들은 현재 자신들이 당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불평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성전이 함락되고 불태워졌다는 것은 [성전] 중심 신앙에 젖어 있던 이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성전이 불태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떠나고, 자신들의 땅을 떠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자기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간 땅에서 회개하며 주께 간구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그릇되이 행하였으며 악한 일을 행하였나이다, 하며 또 자기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원수들의 땅에서 마음과 혼을 다해 주께로 돌아와 주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도시와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해
건축한 집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하늘 곧 주의 거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돌아보사 주께 범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들의 모든 범죄를 용서하시고 또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자들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사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왕상8:47~50).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로 사로잡힌 땅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주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사역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22절입니다. [이제 그 도피한 자가 이르기 전날 저녁에
[주]의 손이 내 위에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마침내 그가 아침에 내게 이르렀더라. 내 입이 열렸으므로 내가 다시는 말 못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였노라.](22). 하나님은 에스겔이 성전 함락 소식을 듣기 전날 저녁에 에스겔의 입을 열어 주셨습니다. 에스겔은 더 이상 잠잠하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입을 열면 헛된 말을 쏟아내고, 무익한 말을 쏟아냅니다. 일반적으로 잠잠해야 할 때는
입을 열고, 입을 열어야 할 순간에는 침묵합니다. 주께서 입을 열어 주시지 않을 때는 침묵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은 침묵을 배웠습니다.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였고 말 못하는 자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나이다.](시38:13). [주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므로 내가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였나이다.](시39:9). 너무나 말이 많은 시대입니다. 그러나 때로 입을 닫고 잠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고난을 당하실 때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학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그렇다면 우리가 입을 열어야 할 때는 언제입니까? ➊ 주님께서
입을 열어 주실 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말씀을 담아 주시면 우리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입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주님께서 우리 속에 말씀을
채우시고, 성령을 가득 채우시도록 입을 여십시오. [내가 주의 명령들을 사모하므로 내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119:131).
주님께서 입을 열라고 하실 때 우리는 담대하게 소리쳐야 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나팔처럼 소리 높여 외쳐야 할 때 짖지 못하는 개처럼 잠잠해서는
안 됩니다. ➋ 우리 속에서 말씀이 불타오를 때 입을 열어야 합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그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 같아서 내 뼈 속에 사무치니 내가 참기에 지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노라.](렘20:9). ➌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입을 열어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 세상의 지혜로 입을 열면 유창한 언변이나
웅변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빼어난 말, 좋은 말은 사람을 속이는데나 유익할 뿐입니다. [지혜를 가지고 입을 열며 자기 혀로 친절의
법을 베풀고](잠31:26). ➍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주님께 입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할
것/은 내게 말 할 기회를 허락하사 담대히 입을 열어 복음의 신비를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23-24절입니다. [그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땅의 그 피폐한 곳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한 사람이었는데도 이 땅을 상속하였거니와
우리는 많으니 /주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사 상속물이 되게 하셨도다, 하는도다.](23-24).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고 크게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땅의 그 피폐한 곳에 거주하는 자들”이란 예루살렘이나 주요 도시에
살지 않고 변방에 살던 덕분에 포로로 잡혀 가지 않았던 이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혼자에게도 그 넓은 땅을 상속으로 주셨는데
우리는 이렇게 수가 많은데 땅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의 땅을 빼앗을 리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점이 모든 죄와 불법과 잘못에서부터 면책 되는 특권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선민사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침례인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라 말할 생각을 하지 말라.](마3:9a)고 경고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라](요8:33)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처럼 행동해야지 육신의 혈통만
강조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요8:39).
아브라함이 땅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했습니다(창12). 말씀을 들었을 때 믿었습니다.(창15) 시험을 받을 때 드렸습니다(창22).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면 아브라함이
믿은 대로 믿고, 아브라함이 행한 대로 해야 합니다.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피 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을 향하여 눈을 들고 피를 흘리니 어찌 너희가 이 땅을
소유하겠느냐?](25).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너희가 피 째 먹으며. 이것은 율법 이전에도 율법에도 모두 금지된 것입니다. 둘째, 너희 우상들을 향하여 눈을 들고. 이 말은 우상 숭배를
말합니다. 셋째, 피를 흘리니. 이는 살인을 말합니다. 피를 흘리면 땅이 더러워집니다. 이런 죄를 범하면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땅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책망합니다.
26절입니다. [너희가 너희 칼을 의지하여 서고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 사람이 자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어찌 너희가 이 땅을 소유하겠느냐? 하라.](26). “너희 칼을 의지하여 서고”란
말은 약탈, 강도짓을 일삼는 행위이며, “가증한 일을 행하며”란 말씀은 주님께서 가증하다고 하는 일들을 행했음이요, “자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란 말은 음행, 간음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음을 말합니다. 이런 짓을 행하면서도 단지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이유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자신들에게서 결코 빼앗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영적 망상에 불과합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생각, 삶의 방식에는 하나님의 법이 없습니다. 이들은 여느 이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정글의 법칙에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만약 신약 성도들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그 믿음만 자랑하고 세상을 따라 육신을 따라 살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상속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속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성화된 남자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고전6:9-10). 유업의 상속, 보상은 믿음의 행위로 받는 것입니다.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미리 말하노니,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갈5:21).
이미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이요, 시작입니다. 구원을 받은 후로 우리는 주님을 섬겨야 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과 세상과 재물과 다른 무엇을 의지하고 자랑한다면 그가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27절입니다. [너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 피폐한 곳에 있는 자들은 반드시 칼에 쓰러질 것이요, 또 내가 빈
들판에 있는 자는 짐승에게 주어 삼킴을 당하게 하며 요새와 굴에 있는 자들은 역병으로 죽게 하리라.](27). 불법을 행하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것을 훈장처럼 자랑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맹세로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칼에 쓰러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칼에 죽든지, 들판에서 짐승에게
물려 죽든지 다른 안전한 피난처로 떠났다고 여기는 이들은 역병을 보내 죽여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일 너희가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보라, 너희가 [주]께 범죄하였으니 너희 죄가 너희를 찾아낼 줄을 분명히 알지니라.](민32:23).
죄로 인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숨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이는 내가 그 땅을 극히 황폐하게 하고
그녀의 세력의 영화(榮華)를 그치게 할 것임이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폐하게 되어 지나갈 자가 없으리라.](28).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가지 않았다고 해서 그 넓은 땅을 다 차지하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주어진 가나안 땅은 죄로 인해 황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으심으로 그 땅에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지금 팔레스타인 땅을 사진으로든지
T.V로 보면 살기는 고사하고 ‘지나갈 자’가 없는 그런 땅이 대부분임을 알 것입니다. 이 땅은 처음부터 그런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황폐케
하심으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리니 가지를 치거나 땅을 갈지 못하고 다만 찔레와 가시가 올라올
것이며 또 내가 구름들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5:6). 덕분에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땅은
황무지로 변하고 말았고, 아무 소출도 내지 않았습니다.
29절입니다. [내가 그들이 행한바 그들의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그 땅을 극히 황폐하게 할 때에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라.](29). 땅이 극히 황폐하게 되는 심판을 통해
그들은 “주 하나님”이 [주]인 줄을 알게 됩니다.
30절입니다. [또 너 사람의 아들아, 네 백성의 자녀들이
아직도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서로 서로 각각 자기 형제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청하노니 오라. [주]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 들어 보자, 하고](30).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아예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알아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이들도 있음을 볼 때 이들의 제안은 놀랍기만 합니다. [청하노니
오라. [주]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 들어 보자] (30b).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영적 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행하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기 위해서, 주의 뜻을 행하려고 듣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마치
연극을 보러 온 관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31-32절입니다. [그들이 백성이 오는 것같이 네게 오며
내 백성같이 네 앞에 앉아 네 말들을 들으나 그것들을 행하려 하지는 아니하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자기의 탐욕을 따르기 때문이니라. 보라, 네가 그들에게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악기를 잘 연주하는 자의 심히 사랑스런 노래같이 되었나니 이는
그들이 네 말을 듣고도 그것들을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31-32). 이들의 특징은 듣기는 하지만 행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자기의 탐욕을 따릅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 교인들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타락한 이스라엘의 신앙이 단지 형식이요, 위선이요, 종교심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으니 그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훈계로 가르침을 받은 것일 뿐이니라.](사29:13).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우리 주님께서 자주 인용하셨으며, 사도 바울
역시 그러했습니다. “말들을 들으나 그것들을 행하려 하지 아니하나니”, “자기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자기 탐욕을 따르기
때문”이란 말씀은 마지막 시대를 사는 이 세대의 교회들과 성도들을 표현하는 명구 중의 명구입니다. 종교는 사람을 위선자로 만들 뿐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오지만 관객으로서 만족하려 합니다.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참으로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참으로 그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속 중심은 머나이다.](렘12:2)라고 통탄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말씀을 배우는 것은 그대로 믿고 행하기 위해서임을 항상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33절입니다. [(보라, 이것이 이루어지리니) 이것이
이루어질 때에 그들이 자기들 가운데 한 대언자가 있었음을 알리라.](33). 이들은 자신들이 들은 말씀들이 다 이루어질 때에 자신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한 대언자가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