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33:1-16
요절: 에스겔 33:8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았고, 임명받았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집에게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내가 주는 경고를 그들에게 줄지니라.](겔3:17). 파수꾼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에게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듣고...줄지니라. 파수꾼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는 {주}께서 내게 이같이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로 하여금 보는 것을 밝히 알리게 할지어다,
하셨음이라.](사21:6).
파수꾼들은 단지 말씀만 받아서 전하는 대언자가 아니라 망대나
성벽 위에서 적이 오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 기본 임무입니다(사62:6, 삼하18:24). 파수꾼의 임무는 위기의 순간일수록 더욱 커집니다.
솔로몬의 노래에는 성읍을 돌아다니는 파수꾼(아3:3,5:7)이 나옵니다. 이들은 감찰 기능, 질서의 유지와 같은 경찰 임무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파수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해주고,
구원받은 형제들에게는 마귀의 미혹과 공격에 대해 경고를 발하며, 형제들을 돌아보며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주어야 하는 그런 파수꾼입니다. 교회
내에는 거짓 대언자들이나 거짓 교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 양들 사이에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진리를 부패시키는 이들을 찾아내고 처단하는 것
역시 파수꾼의 임무입니다. 파수꾼은 단지 정찰, 보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지하고 적을 분별하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사람들이 서 있을 때에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거주민들 중에서
파수꾼을 임명하여 각각 자기가 맡은 곳에서 파수를 서게 하고 각각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라.](느7:3). 성도들이라면
세상을 향해 ‘지옥의 경고’,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알려 주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마귀의 궤계와 간계를 알아채고,
인본주의의 누룩이나 과학의 속임수, 허망한 전통이나 철학의 이름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들을 알아내고 소리치는 그런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가져다가(가져올 때-KJV) 어느 땅 위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의 백성이 자기 지역에서 한 사람을 취하여 자기들의 파수꾼으로 세웠더니](1-2). 주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시며, “너는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고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대언자를 보내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칼=심판. 전쟁, 기근, 역병이 주로 하나님이 땅에 보내신 칼입니다. 그 때에 파수꾼이 미리 보고 이 사실을 경고해야 합니다. “내가 칼을
가져 올 때”란 것은 교리적으로 보면 대환란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위에 야곱의 대 환란을 보내시는 것이 칼을 보내시는 때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많은 전쟁, 기근, 전염병 등이 있었지만 이런 것들은 장차 대환란 때 임할 모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3-4절입니다. [칼이 그 땅 위에 임하는 것을 그가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어떤 사람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칼이 임하여 그를 제거하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가리라.](3-4). 파수꾼이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죽게 되면 그것은 듣지 않는 자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칼은 단지 경고용이나 위협용이 아닙니다. 칼이 임하면 ‘그를 제거’합니다. [그분의 입에서 예리한 칼이 나오니 그분께서 그 칼로
민족들을 치시고 친히 철장(鐵杖)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또 친히 전능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으시리로다.](계19:15),
[그 나머지는 말 타신 분의 칼 곧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 죽임을 당하니 모든 날짐승이 그들의 살로 배를 채우더라.](계19:21).
하나님의 칼은 상징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칼입니다. 우리는 대환란이나 지옥을 상징이나 비유나 풍유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언된
모든 사건은 다 문자 그대로 실제입니다. 파수꾼들이라면 이런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지옥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 자는 참된 설교자가
아니며 전도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끊임없이 지옥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파수꾼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의의
선포자” 노아와 같이 계속해서 경고를 발해야 합니다. 땅 위에 임하는 칼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 교회들의 문제는 “나팔을 불고 백성에게 경고”하는 대신 성도들끼리 모여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해 버리는
것입니다. 각종 모임이나 행사는 많지만 경고 나팔을 불기 위해 성벽에 서지 않습니다. 거리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미 지레짐작으로 어차피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 사람이라고 단정을 하고, 전도지를 뿌려봐야 바로 휴지통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경험적으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책임을 질 사람은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전하는 일은 우리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쓰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군사란 점에 착안하여 구세군이란 복음 전도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환상을 보았는데 검푸른 바다에 높은 파도와 바람이 몰아치고 사람들이 떠 내려 오는 그런 무서운 광경이었습니다. 비명 소리가 들리고, 어둠 속으로
사람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어디선가 사람들은 끊임없이 떠 내려왔고 또 사라져 갔습니다. 그 때 누군가 구명줄을 던지고, 보트를 던져 한 명, 두
명 건져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건짐받은 사람들은 즉시 기운을 차리고 자신들 역시 구조 작업에 동참했습니다. 점점 건짐 받은 무리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구조 작업을 하는 대신 자기들끼리 구조를 위한 조직을 만들고, 조직의 효율성을 위해 건물을 짓고, 조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돈을 모으고,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모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여전히 풍랑이 일고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떠내려가는데 바닷가에 지은
멋진 건물 안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따스한 음식들을 가운데 두고 모두 즐겁게 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5절입니다. [그가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은즉 그의 피가 그에게 돌아가려니와 경고를 받아들이는 자는 자기 혼을 건지리로다.](5).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은
이는 전적으로 그 죽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경고를 듣고 받아들이는 자는 자기 혼을 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부분이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복음을 들었지만 거절한 혼들은 파수꾼의 책임이 아닙니다. 파수꾼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히 반역하는 자들이니
그런즉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너는 내 말들을 전할지니라. 사람의 아들아, 오직 너는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반역하는 집같이
반역하지 말며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니라.] (겔2:7~8). 상대방이 듣고자 하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전하라고 하십니다. 교양있고, 예의바른 현대인들은 좀처럼 순종하지 못하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너는/ 가되
포로로 잡힌 자들 곧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하라, 하시니라.] (겔3:11).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와 정욕의 포로, 돈의 노예, 출세와 욕망의 노예, 사망의
포로들입니다.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에게 가서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경고의 나팔 소리를 듣고도 반응이 없는 것이 마지막 세대의 특징입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비뚤어진 이 세대는 지옥의 경고를 들어도 도무지 반응이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가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은즉 그의 피가 그에게 돌아가려니와”(5a).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책임은 전적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 그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6절입니다. [그러나 칼이 임하는 것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칼이 임하여 그 중에서 누구든지 제거하면 그는 자기 불법 가운데서 제거된 것이거니와 내가
그의 피를 파수꾼의 손에서 요구하리라.](6). 파수꾼이 자신의 직무를 게을리 하여 나팔을 불지 않고 경고를 하지 않음으로 백성들이 아무
소리를 듣지 못한 경우에는 둘 다 죽습니다. 죽는 이는 ‘자기 불법 가운데서 제거되거니와’란 말씀대로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죄의 삯을 받아
죽습니다. 동시에 나팔을 불어 경고하지 않는 파수꾼에게 주님은 책임을 물으십니다. 오늘날 전도자들은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하는 성도들을 ‘광신자’라고 비난합니다. 불신자들의 비난도 비난이려니와 같은 성도들까지도 ‘능률, 효율, 합리성’을 따지며 전도하는 이들의
힘을 빼 놓습니다. 복음 전파는 합리성, 능률, 효율과 같은 경제성의 논리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듣지도 않는 전파를 왜 하는가? 받지도 않는
전도지를 왜 돌리는가? 싶고, 그런 비능률, 비생산, 비효용이 없다고 싶어도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는 파수꾼, 전도자, 증인들을
그들의 불신에 대한 증거자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들 가운데 지금까지 한 대언자가 있었음을 그들이
알지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 (겔2:5). 우리의 증거는 장차 그들이 심판받을 때 핑계치 못할 증거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크게 외치라. 네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소리 같이 높여서 내 백성에게 그들의
범죄를, 야곱의 집에게 그들의 죄들을 보여 주라.] (사58:1). 이것이 파수꾼들이 나팔을 불어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내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내어 이 땅의 모든 거주민들로 하여금 떨게 할지니 이는 [주]의 날이 이르기 때문이니라.
그 날이 매우 가까우니](욜2:1). 대언자 미가는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나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어 야곱에게는 그의 범죄를, 이스라엘에게는 그의 죄를 밝히 말하리라.] (미3:8). 이것이 성도로 부름받은
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죄인들은 죄 가운데서 죽으려니와 복음을 전하지 않는 우리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파수꾼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는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증인에게 올바르게 증거하지 않는 죄보다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7절입니다. [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와 같이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내게서 나온 /것으로/ 그들에게 경고할지니라.](7).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집에 파수꾼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파수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주어서 경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눈먼 자들이요, 다 무지한 자들이며 다 말 못하는 개들이므로 짖지 못하는
자들이며 잠자고 눕고 졸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참으로 그들은 탐욕이 심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개들이요, 깨닫지 못하는 목자들이라. 그들이 다
자기 길만 바라보고 저마다 자기 구역에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사56:10~11). 이들은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자신의 말을 받아 전할 신실한 일꾼, 신실한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이르시되,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 주인으로부터 그 집 사람들을 넘겨받아 다스리며 제 때에 그들 몫의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실한 종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교회는 많고 목사도 많고, 교인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이 너무나 없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로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8절입니다. [가령 내가 사악한 자에게 말하기를, 오
사악한 자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그 사악한 자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사악한 자는 자기 불법
가운데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요구하리라.](8).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들을 향해, [오 사악한 자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죄인들은 자신들이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 입에서 나온 그것으로 사악한 자에게 경고하는 자가 파수꾼입니다. 하나님은 사악한 자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파수꾼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듣지 않고, 전하지 않으면 사악한 자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자기 불법 가운데서 죽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파수꾼에게 그가 죽게 된 책임을 물으십니다. 죄인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고 해서 무죄하다거나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없는 자들은 복음
없이 죽습니다. 율법이 없는 자들은 율법 없이 죽습니다.
9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 사악한 자에게
그의 길에 대하여 경고하고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 하였으되 그가 자기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불법 가운데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혼을 건졌느니라.](9). 파수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경고를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파수꾼의 책임이
아닙니다. 파수꾼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말해 줍니다. 이것이 ‘회개’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신실하게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지옥과 심판을 줄기차게 외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꾸짖으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능력 있는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꾸짖기 시작하시니라.](마11:20). 주님은 그들이 죄를 지었다고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꾸짖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눅13:3,5). 신약 성경은 그 처음부터 “회개하라”는 강력한 선포로 시작됩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해서도 “회개하라”고
외치십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내 입의 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혼은 죽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깨닫고 돌아서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그것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회개한 후에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회개한 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을
것임이라.](요8:24). 사람이 왜 죽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 ‘죄들 가운데서’ 죽습니다.
10절입니다. [오 사람의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의 집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범죄들과 우리의 죄들이 우리 위에 있어 우리가 그것들 가운데서 쇠약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살리요? 하는도다, 하라.](10). *우리 위에-upon us,
그것들 가운데-in them. 죄가 우리 위에 있고, 우리가 죄 가운데서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주님 양 옆에는 인류의 죄인들을 보여 주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둘 다 죄인이란 점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는 회개한 강도였습니다. 그의 죄는 그 안에 있었지만 그 위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위에 있던 죄들은 주님이 모두 지고 가셨습니다. 죄로 인해 몸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혼은 구원받아 낙원으로 갔습니다(눅23:43).
반면 주님을 믿지 않고 조롱하던 죄인은 그 위에 죄가 있었고, 그 안에도 죄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위에 인류의
죄가 있었지만 그분 안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자신 안에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 위에 모든 사람의 죄가 두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위에 있던 죄들은 모두 주님께로 옮겨집니다.
11절입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사악한 자의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사악한 자가 돌이켜
자기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돌이켜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떠나라.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11). 우리 주님의 위대한 성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사악한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며 그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어찌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그가 돌이켜서 자기 길들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주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눈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5:10).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죄가 있습니까?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의 피로 씻음
받으십시오. 나의 양심을 누르고, 마음을 무겁게 하며, 영을 괴롭히는 어떤 죄들이 있다면 회개함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가슴을 치며 회개의 기도를 하는 세리를 회개할 것이 없다고
감사하는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눅18:13). 이런 기도를 들으십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재산을 허비했고, 불효했습니다. 그는 탕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무엇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까? 죄를
깨닫고 돌아선 회개, 아버지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한 고백이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아버지의 눈앞에서 범죄하였사오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눅15:21). 이런 죄의 시인과
고백이야 말로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12절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의로운 자가 범죄하는 날에는 그의 의가 그를 건지지 못할 것이요, 사악한 자의 악으로 말하건대 그가 돌이켜 자기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지 아니할 것인즉 의로운 자가 범죄하는 날에는 자기 의로 인하여 능히 살지 못하리라](12). 이
부분은 ‘행위로 말미암는 의’의 한계를 잘 보여 줍니다. 자신의 행위,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언제라도 모두 사라지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의인은 백 가지 선행을 했다고 하더라고 한 가지 죄를 범하면 그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야고보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모든 것에서 유죄가 되나니 이는, 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께서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이제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기 때문이라.] (약2:10~11)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믿음의 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 점이 신약 성도들의 구원을 영원히 안전하게 보증해 줍니다. 어떤 의인도 자신의
의를 의지할 수 없고, 어떤 악인도 자신의 악으로 인해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의 완전한 의가 되어 주십니다.
13절입니다. [가령 내가 의로운 자에게 말하기를, 그가
반드시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만일 자기 의를 신뢰하고 불법을 행하면 그의 모든 의는 기억되지 아니하겠고 그는 자기가 행한바 자기 불법으로
인하여 죽으리라.](13). 의인이 자신의 의를 신뢰할 때 사실 그는 가장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란 실상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합니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사64:6). 자기 의를 신뢰하는 것은 재물을 신뢰하는 것이나 세상을 신뢰하는 것이나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허망합니다. “주를 신뢰하라. 주의 말씀을 신뢰하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무엇을 신뢰해도 그는 자신이 신뢰하던 그
무엇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의”를 갖는 방법은 주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義)가 되리라,
할지니라.](신6:25).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 누구도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할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육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으니 곧
율법과 대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초림)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습니다. 이는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진리가 아닙니다. 구약의 모든 대언자들, 율법이 줄기차게 증거하고 또 증거한 것입니다.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무엇으로 계시되었습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의’는
율법의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행위로 의롭게 되려하면 그는 오히려 저주받은 자가 되고 맙니다. [오직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하나님은 사람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자에게 그리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이는 거기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롬3:22).
14-15절입니다. [또 가령 내가 사악한 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만일 돌이켜 자기 죄에서 떠나 율법에 맞는 일과 옳은 일을 행하여 담보물을 되돌려 주며
강탈한 것을 다시 내어 주고 생명의 법규 안에서 걸어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요,](14-15).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의인이라고 자랑할 것이 없고, 죄인이라고 절망할 것이 없다”는 말 그대로 죄인에게 길이 없지 않습니다. 죄인에게 길이
없다면 성경은 생명의 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죄인들이 파수꾼의 경고를 듣고, “돌이켜 자기 죄에서 떠나 율법에 맞는 일”을 할 때 그는 살게
됩니다. 참된 회개란 마음에 뉘우침 그 이상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과 눈물 그 이상입니다. 후회는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란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서는 행위까지를 내포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행위 구원처럼 들립니다. 세대주의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구약은 행위와 믿음, 신약은 오직 믿음이란 식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구약과 환란 시대에는 믿음과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는 해석입니다만 우리는 좀 더 범위를 넓혀서 보아야 합니다. 도둑은 도둑질을 그만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도둑질한 것을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그는 도둑질한 것들을 돌려주고 되갚아야 합니다.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지만 담보물을 되돌려 주지
않고, 강탈한 것을 내어 주지 않는다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 쇼(show)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회개없는
믿음’이 성행합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의 행위, 믿음의 열매를 볼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파수꾼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책망과 경고를 들음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회개를 근거로 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참된 믿음은 죄를 버리고 돌아선 후에는 자신의
길을 가지 않고 생명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범한 그의 죄들
중에서 하나라도 그에게 언급되지 아니하리라. 그가 율법에 맞는 일과 옳은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살리라, 하라.](16). 이 구절에
가장 합당한 예는 “므낫세 왕”입니다. 그는 12세에 왕이 되어 55년간 통치했습니다(대하33:1). 그는 가장 사악한 왕이라 불렸습니다.
역대기하 33장을 보십시오.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여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교도들의 가증한 일들과 같은
것을 행하였더라. 이는 그가 자기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건축하고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으며 작은 숲들을 만들고 하늘의
모든 천체에게 경배하여 그것들을 섬겼음이라. 또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예루살렘에 영원토록 있으리라, 하신 [주]의 집에 그가
제단들을 쌓으며 또 [주]의 집의 두 뜰에 하늘의 모든 천체를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자기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때를 살피고 요술과 마술을 행하며 부리는 영과 마술사들과 관계를 맺고 [주]의 눈앞에서 악을 많이 행하여 그분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대하33:2~6). 그는 자신이 범죄 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범죄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므낫세가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아시리아 왕의 군대 대장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매 이들이 므낫세를 가시 가운데 넣고 족쇄로 결박하여
바빌론으로 끌고 가매 그가 고통 중에 [주] 자기 하나님께 간청하고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크게 자기를 낮추어 그분께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간청하는 말을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사 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그의 왕국으로 데려오시매 그제야 비로소 므낫세가 [주]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대하33:11~13). 그 때 그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사악했지만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주를 찾고, 긍휼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리셨습니다. 회개함으로 구원받은 예는 유대인, 이방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