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37:1-14
요절: 에스겔 37:5,6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지만 그 답을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그 해답을 정확히 압니다. 다윗은 현대의 어떤 무신론자, 진화론자, 물리학자, 생명
공학자들이 결코 찾지 못한 생명의 기원을 정확히 알고 노래하고 찬양했습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 주께 있으므로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빛을 볼 것임이니이다.](시36:9).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주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할지라도 [주]께서 낮에는
자신의 인자하심을 명령하시며 밤에는 그분의 노래가 내게 있으므로 내가 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42:8). 생명의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코에 불어 넣으셨을 때 사람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고, 사람 속에는 영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숨을 거두다’란 표현을 쓰는데 킹 제임스 성경은 give
up ghost 라고 합니다. *ghost는 spirit의 인격적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靈)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전12:7). 몸과 영은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혼이 돌아오는
것 - 산다(왕상17:21~22).
하나님은 숨을 불어
넣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부활의 주님을 가장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상징이나 비유로 치부해 버리지만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주님께서 행하실 일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흙덩어리이든 죽어 있는 뼈들이든 그 속에 주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시면 그는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현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죽지 못해 사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세상은 거대한 공동묘지와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갑니다. 예외 없이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죽은 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쟁터에서, 도로에서, 병원에서, 바다에서, 저 하늘에서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나마 살아 있다고 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영이 죽은 채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犯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5).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고] (골2:13).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8:22). [향락에 빠져 사는 여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니라.] (딤전5:6). 성령이 없는 육신은 먹고 숨을 쉬지만 그는 실상 시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탕자를 맞이한 아버지는 아들을
죽었던 자라고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사람들이 즐거워하더라.] (눅15:24).
아들은 자신이 단지 고생했고, 방탕했고, 죄를 지었을 정도라고 여겼겠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32). 향락 속에 사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향락에 빠져 사는 여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니라.] (딤전5:6).
죽은 자들은 세상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도 얼마든지 시체들이 넘칩니다. 주님은 죽은 성도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하시느니라.] (엡5:14).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성도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줄을 알거니와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 안에 거하느니라.](요일3:14)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은 자로다.] (계3:1b).
성경은 온통 죽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는 산 자로서 죽은 자들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죽은 자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이같이 판단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4). *죽었고...
이 세상은 마른 뼈들로 가득한 거대한 공동묘지입니다. 뼈들이 삭아서 가루가 되고, 흙이 되어 버린 그런 묘지 위로 주님의 숨이 불어 올 때 그
무덤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군대로 변모합니다. 성도가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의 숨이 우리 위로 불어 올 때입니다. *슥4:6
참조할 것. [그가 내게 대답하며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내 영으로 되느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슥4:6). 하나님의 숨이 없으면 이 우주는 거대한 공동묘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대언자 에스겔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마른 뼈들 위에 숨을 불어 넣으시는 장면은 참으로 전율스럽고도
황홀한 기사입니다.
1절입니다. [[주]의 손이 내 위에 임하사 [주]의 영
안에서 나를 데려다가 뼈가 가득한 골짜기 한가운데 두시고](1).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에스겔을 순간적으로 공간 이동을 시키셨습니다.
“주의 영 안에서”란 표현은 전부는 아니지만 시, 공간의 이동에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이런 순간 이동은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이 경험한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에스겔을 옮기신 곳은 “뼈가 가득한 골짜기 한 가운데”입니다. 주의 영께서 사람을 순간 이동하는 일은 에스겔에는
자주 나오는 장면입니다. *겔3:14, 8;3, 11:1, 11:24, 43:5. 사도행전에서 빌립은 광야로 가서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준 후에 곧 바로 성령께서 다른 지역으로 순간 이동을 시키셨습니다. [그들이 물 속에서 나와 올라올 때에 {주}의 영께서
빌립을 채어 가시니 내시가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더라. 내시는 기뻐하며 길을 가되](행8:39). 이는 우리가 휴거될 때 성령의 역할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어 올림을 받은 자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1). 우리는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나는 순간 성령에 의해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채어 올림을 받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없다면 하늘로 들림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시, 공간을 초월해서 주님의 음성이 나는 그 순간에 곧 바로 저 하늘로 우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시켜 버립니다. 이는 공상 과학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 실제입니다. 우리가 모두 겪게 될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뼈가 가득한 골짜기 한 가운데’ 두셨습니다. 사방에
갈비뼈와 해골 바가지, 각종 뼈들이 가득 차 있는 그런 곳을 생각해 보십시오. 캄보디아의 Killing Field를 연상케 합니다.
2절입니다. [또 나로 하여금 사방에 있는 그 뼈들 곁으로
지나가게 하시기에 /본즉/, 보라, 그 열린 골짜기에 뼈들이 심히 많으며, 보라, 그 뼈들이 심히 말랐더라.](2). 하나님은 에스겔로
하여금 사방에 있는 뼈들 곁으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이 뼈들은 모두 죽은 이스라엘 집 사람들의 것입니다. 에스겔이 그 골짜기에 뼈들을 보니
매우 많았고, 모두 말라 있었습니다. 백골이 진토가 된 그런 뼈들이었습니다. 흔히 이 부분을 설교하거나 주석할 때 이 기사는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운명의 척박함을 나타낸다.”는 정도로 주석하고 넘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포로 된 이스라엘이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구약 성도들의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합니다.
3절입니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에 내가 대답하되, 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3).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닳고 삭은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이는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자문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란 질문부터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질문까지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질문에 에스겔의 답변은 “모르겠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뜻하시면
가능합니다....” 등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은 “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아시나이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내 세우지
않았습니다.
4-5절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뼈들 위에 대언(代言)하여 그것들에게 이르기를,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의 말씀을 들으라. {주} [하나님]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숨을 너희 속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4-5). 하나님은 산을 향해서도 바다를 향해서도 말씀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말씀하실 수 있고
명령하실 있습니다.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의 말씀을 들으라”라고 외치시면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수 있고,
재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죽어서 뼈만 남은 사람들을 향해서 부활을 명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른 뼈들을 향해, [보라, 내가 숨을
너희 속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5b)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이
말에 놀라지 말라. 이는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이니](요5:28). 주 하나님께서 “일어나라”
외치시면 일어나게 됩니다. “이리 올라오라”하면 순 식간에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 때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신 것처럼
죽은 자들을 다시 일으키실 때도 ‘내가 숨을 너희 속으로 들어가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다시 살리십니다. 욥이 일찍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시고 전능자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욥33:4)한 그대로입니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들이 만들어지고
하늘들의 모든 무리가 그분의 입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도다.](시33:6). 사람이 만든 것은 아무리 정교하고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도 숨이
없습니다. 때로 어떤 평론가들이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극찬을 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호흡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아는 것이 짐승 같고
주물공마다 새긴 형상으로 말미암아 당황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형상이 거짓이요, 그 속에 호흡이 없기 때문이로다.](렘10:14),
[화 있을진저, 나무에게 말하기를, 깨라, 하며 말 못하는 돌에게 말하기를, 일어나서 가르치라, 하는 자여! 보라, 그것은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한가운데는 전혀 호흡이 없느니라.](합2:19). 인간의 기술을 자랑하느라 첨단 로봇을 만들어 전기 에너지로 걷고 일하게
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호흡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입니다.
6절입니다. [내가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너희 위에 살이
생기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숨을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6).
주님께서 죽은 뼈들에 힘줄을 두고, 살이 생기게 하고 살갗을 덮으면 육체가 됩니다. 이 속에다 하나님께서 ‘숨’을 넣으시면 살이 있는 혼이
됩니다. 숨을 불어 넣기 전에는 좀비와 같습니다.
7-8절입니다. [이에 내가 명령을 받은 대로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며, 보라, 흔들림이 있어 그 뼈들이 함께 와서 뼈마다 자기 뼈에 이르더라. 내가 또 보니, 보라, 힘줄과 살이
그 뼈들 위에 생기며 그 위에 살갗이 덮였으나 그것들 속에 숨은 없더라.](7-8). 에스겔은 단지 명령을 받은 대로 뼈들을 향해
대언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음성은 주님의 말씀이었던지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끄러운 소리가 나며 뼈들이 함께 뼈마다 자기 뼈에 붙기
시작했습니다. 화장을 해서 한 줌 흙이 되었던지 물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되었던지 시체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각자 알아서 뼈들이 함께 와서 뼈마다 자기 뼈에 이르게 됩니다. 뼈에 힘줄과 살이 생기고, 그 위에 살갗이 덮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몸은 부활할 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이 육신은 모두 썩어 없어졌다 할지라도 주님은 이 몸을 다시 살리십니다. 이 몸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할 때 영광스런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몸은 버리시거나 폐기 처분했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그 몸이 부활의 몸이 되었고, 영광스런 몸이 됩니다. 현재 나의 몸이 불구라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9절입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바람에게 대언하라. 바람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숨아, /사방의/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죽임 당한 자들 위에 숨을 불어 그들로 하여금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9). 창조의 마지막 과정은 숨을 불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에게 대언하라”하신 것은 성령의 바람을 말합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3:8). 성령의 바람이 사람들 속에 들어가면
죽어있던 영이 살아납니다. 설교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함으로써 사방으로부터 바람이 불어 오게 함으로써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영을 살려야
합니다. 마른 골짜기의 뼈들 같은 세상에 좀비처럼 살고 있는 자들 속으로 하나님의 호흡, 전능자의 영감이 담긴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바람에게 대언하라”는 이 명령은 신약에서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과 동일한 명령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라. 말씀을
선포하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숨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딤후3:16). [이는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아 말하였음이라.](벧후1:21).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지 않습니다.
[오 숨아, /사방의/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죽임 당한 자들 위에 숨을 불어 그들로 하여금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9b).
하나님께서 대언하라고 하는 그대로 말씀을 선포할 때 성령의 바람이 불어 죽은 자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이에 내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언하였더니 숨이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살아서 자기 발로 서는데 심히 큰 군대더라.](10). 에스겔이 주님이 명령하신대로 말씀을
선포했을 때 숨이 그들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살아서 자기 발로 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 날에 [주]의 군대가 다 이집트 땅에서 나왔은즉](출12:41).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할 때 이스라엘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삼상17:26,36)라고 말합니다. 뼈들의 골짜기에서 살아난 이들은 부활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11절에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해석이
필요치 않는 분명한 주님의 설명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집이라. 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우리로 말하건대
우리는 끊어졌다, 하느니라.](11). *이 뼈들= 이스라엘의 온 집.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집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전체를 말함이요, 지금까지 죽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포함합니다.
바빌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얼마나 절망스러웠던지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역사는 반복되어 이런 고난은 A.D 70년에도 있었습니다. 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이들은 동일한 고난을 겪습니다. 대 환란을 통해 다시 한번 이런 고난을 겪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말라 버린 뼈들을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어 주십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고 너희로 하여금 너희 무덤들에서 나오게
하며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12).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셔서 영원히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무덤들을 열고”는 문자 그대로 부활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죽은 유대인들이나 바빌론에서 죽은
유대인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낯선 이방 땅에서 몸을 묻은 많은 주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주님께서 그들의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오게 하셔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몸이 죽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말씀하시고 영원을 말씀하십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겠고 그들이 나의 죽은 몸과 함께 일어나리이다.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할지어다. 주의 이슬은 풀잎의 이슬 같사오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부활의
소망이 있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13-14절입니다.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고 너희를 너희 무덤들에서 이끌어 올릴 때에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또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살게 하겠고
너희를 너희 자신의 땅에 두리니 나 [주]가 이것을 말하고 이행한 줄을 너희가 알리라. [주]가 말하노라.](13-14). 이미
역사적으로 이들의 무덤들이 열린 적이 있습니다. 에스겔의 입을 통해 대언한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한 번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많은 성도(聖徒)들의 몸이 그분께서 부활하신 뒤에 일어나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27:50~53). *많은 성도들. 모든 성도들이 아님. 이것은 첫 열매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열릴 무덤들은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는 욥기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 욥의 마지막 끝 부분을 처음보다 더 복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양 만 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와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였음이라. 또 그가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더라.] (욥42:12~13). 하나님은 욥의 모든 소유를 처음보다 두배로 주셨습니다.
양은 칠천 마리에서 일만 사천으로 낙타는 삼천에서 육천으로 소와 암나귀는 오백에서 천 마리씩으로 정확히 갑절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처음과 그대로입니다. 20명이 아니라 아들 일곱, 딸 셋이란 수 그대로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활을 말합니다. 죽었던
자녀들은 모두 다시 살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욥의 아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욥은 새 아내를 얻어서 다시 처음 1장에 등장하는 것처럼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딸을 똑같이 얻은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새 아내도 얻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자녀들을 주님으로부터 돌려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듯이(창22:5) 욥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는 내가 알기에 내 구속자(救贖者)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니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한 뒤에도 내가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 콩팥이 내 속에서 소멸될지라도
내가 직접 하나님을 보리니 다른 것이 아니요, 내 눈이 바라보리로다.] (욥19:25~27). 욥기는 대 환란의 이스라엘을 잘 드러내는
책입니다.
이스라엘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 속에 자신의 영을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미 수차례 거듭 약속된 예언입니다. 주님의 영이 들어올 때 그들은 진정으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