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44:15-31
요절: 에스겔 44:23
신분 차별, 인종 차별, 남녀 차별(성 차별), 종교 차별 등
차별은 나쁜 것이요, 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차별은 당해 본 사람만이 그 폐해와 쓰라림을 압니다. 피부 색이 다르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학업, 취업, 결혼 등 갖가지 사회 생활에 제약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소수 민족 인종들은 격분할 것입니다. 단지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승진, 연봉
등에서 차별을 받는다면 그들은 미칠 것입니다. 특히 이곳 미국은 인종 차별이 심했던 나라였던지라 현재에 와서는 일체의 차별을 모두 금지하는
법안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법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만 일체의 차이가 없는 획일적 평등에는 반대합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차별이 곧 악이요, 갈등의 요소입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름이란 차이일 뿐이지 우열적 요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이와 구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성 차별을 할 수 없지만 그 역할의 차이까지 부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자유와 더불어 평등을 가르치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독히도 차별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과 이교도들 사이에 엄연한 차별을 두십니다.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적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출8: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편애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더 사랑했지만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좋고 나쁨, 선과 악의 구별이 뚜렷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로써 [주]가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을 두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출11:7).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들로부터 엄연히 구별하신 후에는 다시 그들 사이에 구별을 두셨습니다. 구별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레위 사람들입니다. [너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 사람들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레위 사람들이 내 것이 될 것이니라.](민8:14). 구별은 곧
질서입니다. 구별은 조화입니다. 혼합, 통합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철저히 나누시고 분리하십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지금 인권, 평등을 외치며 하나님께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한 채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해 보겠다는 정치가들, 종교가들,
사상가들에게 성경은 너무나 모순 덩어리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이교도들 사이에 큰 차별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먹는 것
심지어 짐승들 조차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차이를 두셨습니다. [/이것은/ 곧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을 수
없는 짐승 사이에 구별을 두려 함이니라.](레11:47). 하나님께서는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름과 같음이란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보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음의 장단이나 높낮이의 차이를 모르면 음치라 불립니다. 색깔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색맹이라 불립니다.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탁월한 은사입니다. 다름과 같음, 차이와 구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차별을 두십니다. 우리는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모든 종교,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든 이방 신들, 우상들과
차별을 두고 거룩히 구별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의 중요 사역은 백성들에게 이런 차이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주님이 나누신 것들을 철저히 구별해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합하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나누신 것을 사람이 합할 수 없습니다.
15-16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자손이 곁길로
나아가 나를 떠났을 때에 레위 사람 제사장들 곧 사독의 아들들은 내 성소의 책무를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나를 섬기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 것이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나를 섬기고 나에 대한
책무를 지킬 것이라.](15-16).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레위 지파들도 함께 타락했을 때 유일하게 주님의 성소의 책무를 지킨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사독의 아들들’입니다. 백성들과 함께 곁길로 떠났던 레위 지파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와 섬기는 일이 불허되었지만 사독의 아들들은
주님께 나아와 섬기는 특권을 위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을 지킨 자들, 하나님이 정해 준 자신의 지위를 떠나지 않고
지킨 자들은 세상과 사람들로부터는 실패자, 낙오자로 비난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상을 받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백성들이 다 떠났습니다.
같은 믿음의 동료들이라 할 수 있는 레위 사람들도 떠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독의 아들들만 성소에 남아 성소의 책무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주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니라.](히11:6).
모세가 그러했듯이(히11:26) 이들은 세상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칭찬과 인정, 동료들의 행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여전히 성소의
책무를 지켰습니다. 사독의 아들들은 천년 왕국의 성전에서 다른 레위 지파들이 밖에서 백성들을 섬길 때 안에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와 주님 앞에
서서 주님께 기름과 피를 드립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보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보상을 받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보상은 구원과는 달리 행위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報償)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행위에 따라 주리라.](계22:12). 보상은 주님을 섬길 때 주어집니다. [너희가 상속의 보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이는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니라.](골3:24). 보상은 수고에 따른 대가입니다.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수고(labour)에
따른 것입니다. 물론 이 행위는 믿음의 행위이며, 사랑의 수고임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는 자와 물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니](고전3:8).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런 수고가 없고, 행위가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보상은 없습니다. 성도들이 보상을 얻는 구체적인 방법을 몇 가지 성경적 실례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대접하라. 나와의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접하고 섬길 때 그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 하여 내 이름으로 마실 물 한 잔을 주면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자기 보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막9:41).
둘째, 주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을 때 큰 보상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자기들의 무리에서 따돌리고
너희를 꾸짖으며 너희 이름을 악한 것으로 여겨 내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너희가 즐거워하며 기뻐 뛰놀지니 이는, 보라,
하늘에서 너희 보상(報償)이 크기 때문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대언자들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니라.] (눅6:22~23). 셋째,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이자나 대가를 바라지 말고 빌려 줄 때 보상이 큽니다. 세상 말로 하면 망하기 딱 좋은 말인데 이 땅에서 믿음으로
망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보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그분께서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기 때문이니라.](눅6:35).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자란
세상의 성공보다 거룩함과 경건함과 의를 추구합니다. 성공하면 우쭐하고 실패하면 낙심하는 사람은 아직도 육신적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다 보면
세상적으로는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망할 때까지, 망하는 그 순간까지 타협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성경적 원칙을 견지하며,
의를 추구하는가? 란 문제입니다. 믿음의 삶은 실패할 수 있는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누가 성공하고 누가 실패하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드러날 것이요, 그 때를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이 진정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확신을 버리지 말지니 이 확신이 큰 보상(報償)을 얻게 하느니라.](히10:35). 넷째, 자신을 살피라.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 이로써 우리가 이룬 것들을 우리가 잃지 아니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되리라.](요이1:8).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진리에서
벗어나 마귀의 올무에 빠지고, 어둠에 속하는 일은 자신을 살피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을 살피는 대신 교회의 행정이나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만 살피고 판단하고 떠드는 것을 자주 봅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의 교회, 어떤 목사 이야기, 헌금 이야기 등 영혼을 살피고 돌보고 덕을 세우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비난, 판단, 험담 등으로
시간을 다 보냄으로써 어둠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린 혼들은 보상을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다섯째, 자원해서 복음을 선포하라. [이는 내가
자원하여 이것을 행하면 보상(報償)을 얻으려니와 자원하여 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청지기직을 내가 맡았기 때문이라. 그런즉 나의 보상이
무엇이냐? 진실로 내가 복음을 선포할 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없이 선포하고 복음 안에서 내가 가진 권리를 남용하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9:17-18).
하나님은 각 성도들의 행위에 따라 다양한 왕관을 주실 것입니다.
17-19절입니다. [그들이 안뜰의 문들로 들어올 때에는
아마 의복을 입을 것이요, 안뜰의 문들과 그 안에서 섬기는 동안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 것이며 아마 모자를 머리에 쓰고 아마 반바지를 허리에
입고 땀이 나게 하는 것으로 몸을 동이지 말 것이며 그들이 바깥뜰 곧 바깥뜰로 백성에게 나아갈 때에는 자기들이 섬길 때 입던 의복을 벗어 거룩한
방들에 두고 다른 의복을 입어 자기 의복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지 못하게 할지니라.](17-19). 하나님은 사독의 아들들의 복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복장에 대한 규례가 있었습니다. 천년 왕국 때에도 제사장들이 입는 옷은 일반인들이 입는 옷과는
구별되었습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강단에 설 때 검은 제의와 같은 가운을 입고 설교하시는 것을 자주 보는데 이는 복장에 대한 구약의 규례나 천년
왕국의 규례를 따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지키는 이는 없고 대충 흉내만 내는 것이 전부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특별한 복장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유행을 따르는 옷들이나 화려한 치장이나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옷, 남자들이 반바지를 입고 교회에 오는 것
등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자매는 늘 다리와 허벅지의 선이 쫙 드러나는 그런 바지를 입고 교회에 다닙니다. 팔은 소매가 너무 짧고, 목은
다 패여서 가슴이 다 보이는 그런 옷을 입고 태연스럽게 교회에 옵니다. 어떤 자매는 복장에 대해서는 감이 없었는데 어느 날 외국 교회에 한번
갔다 오더니 무엇을 보았는지 그 다음 주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애들까지 긴 치마를 입고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 때에 “이 분들은 외국 교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국 교회에 단 한 번 참석한 것이 이 교회에서 3년 배운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나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적 제사장들입니다. 자신이 영적 제사장이라고 믿는다면 제사장처럼 단정한 옷차림은 자연스런 성품입니다.
제사장들이 밖에 나갈 때는 거룩한 방에서 반드시 옷을 갈아 입고
나가야 합니다. 백성들이 만약 제사장들이 입는 옷을 만지거나 접촉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나 접촉했던 모든 것들이 거룩하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에 접촉되는 것은 무엇이나 거룩해 지기 때문인데(출29:37) 천년 왕국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20절입니다. [그들은 또 머리를 밀지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하지 말고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20). 사독의 아들들의 용모입니다. 구약의 규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레위기
21:1-5을 보면 머리를 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교도들의 제사장들의 머리를 보았을 것입니다. 불교를 비롯한 몇 몇 종교는
완전히 삭발을 합니다. 중동의 대부분 이교도들은 머리를 둥근 달처럼 밀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머리를 밀지 못하게 하심으로 이들과 구별을
두셨습니다.
21절입니다. [어떤 제사장이든지 안뜰로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지니라.](21). 제사장들은 술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거룩한 제사장(벧전2:5, 계1:6)이라고 믿는
성도들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몸이 성전입니다. 고로 우리는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때로 성경에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술 한 두잔 쯤은 마셔도 괜찮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술을 만들어
주셨다느니, 바울이 디모데의 위장병에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다느니,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마시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이
많습니다. 변개된 성경은 성도들의 타락을 부추깁니다. 술은 용의 독입니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 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즙은 용들의 독이요, 독사의 지독한 독이라.] (신32:32~33). 용들의 독과
독사의 지독한 독을 성령의 전이 된 몸에 쏟아 붓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요, 가증한 일입니다. [너는 포도주가 붉거나 잔에서
제 빛깔을 내거나 스스로 똑바로 움직일 때에 그것을 바라보지도 말지니라. 그것이 끝내는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쏘나니]
(잠23:31~32). 타락한 성경은 타락한 성도들의 죄성을 부추기며, 육신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순수한 말씀인 킹 제임스 성경은 이 부분에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22절입니다. [그들은 과부나 버림받은 여자를 아내로
취하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의 집 씨에 속한 처녀나 전에 제사장과 살았던 과부를 취할 것이요,](22). 제사장들의 결혼에 대한
규례입니다. 제사장들은 ‘과부나 버림받은 여자를 아내로 취하지 말라’고 금지 규정이 있습니다. 하물며 불신자와 결혼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창녀나 신성 모독하는 여자를 아내로 취하지 말고 남편이 버린 여자를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께 거룩하기
때문이니라.](레21:7). 결혼만큼 인생의 가치관과 신앙 정도를 잘 보여 주는 일이 없습니다. 침례가 불신자들과 다른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고백을 보여 주는 일이라면 불신자와의 결혼은 신자들과 불신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와 성경에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불순종하는 행위를 보여 주는 선포식과 같습니다. “나는 성경대로 살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결혼만큼은 성경에 쓰인 대로 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여자(남자), 내가 택한 사람과 할 것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는 교리적으로는 영적 제사장이라고
말하겠지만 제사장으로서 행해야 할 규례는 완전히 버린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면 성경이 제사장들에게 말한 것이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으며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한 몫을 나누겠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너희 자신을/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고후6:14~17). 이런 가르침은 이혼과 재혼이 잦은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교회의 목사들이 매우 주저하는 주제입니다.
23절입니다. [또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를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23).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분별하게 해야 합니다.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은 영적 성장과 성숙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라나지 않으면 그 판단력은 형편없게 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어린
아이들은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합니다. 호(好), 불호(不好)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의의 판단이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이 어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분별력을
구했습니다. [과연 누가 주의 이 큰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그러므로 깨닫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나로 하여금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하니라.](왕상3:9). 우리 역시 이런 영적 분별력을 갖출 수 있도록 영적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야
합니다.
저는 목자로서 성도들에게 가르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삶의
오락, 유희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산이나 바다, 강이나 공원 등으로 자주 여행을 즐기고, 영화나 연극이나 가요를 즐기는 사람들, 야구나 농구,
당구, 축구 등과 같은 스포츠를 즐기고, 사기도박은 아니지만 명절에 친척들이나 가족들과 화투 놀이, 카드놀이, 포커 등을 즐기는 그런 성도들,
인터넷으로 게임을 하는 성도들에 대해 그것을 절제하고 하지 말도록 설교하는 일이 자주 반발을 삽니다. 영화관에 가는 것이 뭐가 나쁘냐? “그것은
문화다. 예술이다. 취미 생활이다. 여가 선용이다. 삶의 재충전이다.” 등등의 반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 자기는 애들에게
DVD 빌려다 보여 주면서 그게 영화관 가는 것과 뭐가 다르냐?” 이런 반발과 시비를 합니다. 저는 영화, 연극, 노래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전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금욕주의를 주창하지 않습니다. 스포츠는 저도 엄청 좋아 합니다. 대부분의 게임은 싫어하는 체질이지만 바둑은
좋아합니다. 제가 어떤 성도에게 포커나 카드 놀이하는 것을 책망하면 그가 반골 기질에다 삐딱한 성품의 소유자라면 회개하는 대신 자기를 합리화하고
변명할 구실을 찾기 위해 목사를 씹을 것입니다. 목사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목사와 자신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판단하고 말씀 앞에서 성찰하면 그만입니다. 어떤 사람과 사람, 성도와 비교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과 악, 곧은 것과 굽은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해야 할 일과 말아야 할 일 등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때에 대한 분별력도 필요합니다(전3:1~8). 때를 분별할 수 있으면
최고의 지혜자라고 단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분명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저는 한 때 청년들이 볼링장이나 당구장, 커피숍에 가는 것까지도 반대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녀석은 "술집에 술만
팝니까? 음료수도 있습니다."라고 하고, 어떤 놈은 “만화방에 만화만 있는 게 아니라 소설도 있고 수필도 있고 잡지도 있어요.”라며 항변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영화, 연극, 가요, 뮤지컬, 스포츠, 게임, 여행, T. V 드라마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육신의 쾌락과 정욕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스포츠 게임의 결승전이나 월드컵 중계를 보느라 하나 앞에서 결단한 기도와 말씀을 중단하고, 교회에 정해진 예배
시간에 참석하지 못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못하게 되면 그것은 죄입니다. T. V 연속극의 중요 장면을 놓치기 싫어서 교회에 가지 않는
일은 한번만 양심의 찔림을 무시하면 몸과 마음이 함께 평안합니다.
이 시대는 각종 오락이 너무나 발달해 있고, 유혹거리가 너무
많기 때문에 본성에 잠재된 쾌락을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는 선택의
순간에 금방 드러납니다. 쾌락을 즐길 일이 있으면 영적인 일들은 사정없이 뒤로 미루어 버리고, 취소해 버리고 미루는 이는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스포츠 중계를 교회 기도 모임보다 더 사랑하고, 등산이나 여행을 주일 예배보다 더 사랑하고, 육신의 정욕을 하나님의 진리보다 더 사랑합니다.
선택의 순간에는 누구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딤후3:4).
이것은 말세의 특징이요, 표적 중의 하나입니다. 모세는 선택의 순간에 제대로 선택을 했지만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으며](히11:25)- 대부분의 성도는 모세와는 정반대로 선택합니다. 오락을 구하지 말라.
쾌락을 추구하지 말라. 대신 성경은 주의 기쁨, 영적 희락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 영적인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런데 영적 즐거움, 기쁨을 전혀 모르는 이들은 세상의 오락과 죄의 쾌락, 육체적 향락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 먹고 마시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 듣는 즐거움, 함께 노는 즐거움이 얼마나 큽니까?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함께 즐길 사람도 있다면
이런 유혹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가족과 오순도순 모여 영화관에 가는 것이 교회 가는 것보다 즐거운 분들이 있을 것이고, 주말에 함께 여행하는
것이 더 낫다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단지 취미요, 여가 선용일 뿐이지 죄가 아니라는 분들은 그대로 즐기십시오. 목사 자기는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전도만 하며 살지 않으면서 왜 우리에게 이런 강요를 하는가? 불만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말만 되면 등산이나
낚시를 즐기고, 골프를 치러가는 이에게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면 차라리 교회를 포기한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5에 [너희가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함에 빠져 살육하는 날에서와 같이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5:5)고
합니다. 이런 삶이 자신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늘날 이곳 미국처럼 개인 생활이 철저하고 중산층 정도의 수입만
되어도 대부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쾌락에 빠져 염려 없이 지내며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앉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알지 아니하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이 말을 들을지어다.](사47:8).
이들은 지극히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추구하며 교회가 자신을 간섭하지 않고, 보장해 주기를 원합니다. *사58:3, 13참조. 쾌락을 사랑하는
이는 100년을 성경 공부를 해도 그의 마음 속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쾌락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숨(영감)을 다 막아버리기 때문입니다(눅8:14,
마13:22). *삶의 염려, 재물의 속임수, 쾌락- 숨을 막는 3대 요소이다.
24절입니다. [시비가 있을 때에는 일어나 재판하되 내
법도대로 재판하고 내 모든 집회에서 내 법률과 내 법규를 지키며 또 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 것이니라.](24). 제사장들은 영적 직무를
하는 것 뿐 아니라 재판관의 임무를 겸합니다. 의회에서 의원들이 정한 법률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 등이
모여서 결정을 짓지만 천년 왕국의 이스라엘은 신정 일치의 왕정 국가란 점에 유의하십시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적힌 법도대로 재판해야
합니다. 성경은 영적 원리만의 규정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모든 것에서 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시대에서 지켜지지 않던 안식일이 다시
지켜지고 율법이 다시 준수됩니다. 우리는 천년 왕국에서 왕과 제사장으로서 이 모든 직분을 겸직하게 될 것입니다(계1:6).
25-26절입니다. [또 그들은 죽은 자에게 가까이 나아가
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말 것이로되 오직 부모나 아들이나 딸이나 형제나 남편이 없는 자매를 위해서는 더럽힐 수 있으며 그가 깨끗하게 된 뒤에도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이레를 /더/ 셀 것이라.](25-26). 천년 왕국에도 죽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수명이 나무의
수명처럼 길게 되겠지만 여전히 사망은 있습니다. 시체는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만지지 못하게 되어 있고, 직계 가족과 결혼하지 않는
자매의 시체는 만질 수 있었습니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므로 정결례를 행해야 했습니다.
27절입니다. [그가 성소에서 섬기기 위하여 성소로 들어가
안뜰에 이르는 날에는 자기의 죄 헌물을 드릴지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27). 구약과 동일합니다. 민수기 6:9-12에
있는 대로 자신이 더럽혀지면 ‘자기의 죄 헌물’을 드려야 합니다.
28절입니다. [그들에게 상속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들의
상속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에게 아무 소유도 주지 말라. 내가 그들의 소유니라.](28). 성도들이 받게 될 보상은 다섯 가지
왕관이 전부가 아닙니다. 생명의 왕관, 의의 왕관, 영광의 왕관, 자랑의 왕관, 썩지 아니할 왕관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이요 상급은 주님 자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님은 많은 복을 주셨지만 가장 큰 상급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防牌)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報償)이니라,
하시니](창15:1). 바울은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8).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이요, 보상은 주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소유보다 주님 자신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29-30절입니다. [그들은 음식 헌물과 죄 헌물과 범법
헌물을 먹을지니 곧 이스라엘 안에서 아주 바친 모든 것이 그들의 소유가 되며 온갖 것의 모든 첫 열매의 처음 것과 너희의 온갖 봉헌물의 모든
봉헌물이 제사장의 소유가 되리라. 또 너희는 너희 반죽의 처음 것을 제사장에게 주어 그로 말미암아 복이 네 집에 머물게 할지니라.](29-30).
구약과 일치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4). 주의 일꾼은 주의 상에서 나는 것으로 삽니다. 신약 시대의 목회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비량 선교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31절입니다. [제사장들은 날짐승이든 짐승이든 저절로 죽은
것이나 찢긴 것은 먹지 말지니라.](31). 제사장들의 음식 규례입니다. 이 역시 구약과 정확히 일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