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44:1-14
요절: 에스겔 44:10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견해나 조언, 참고 사항이 아니라 법이요, 원칙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자신의 지혜를
버리고, 세상의 충고나 조언을 따르지 아니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교회에서 어떤 회의를 할 때면 성도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견대로
좋은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내 놓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할 일을 결정짓고, 누구하나 성경을 펴들고 "주님의 교훈이 분명히
이러하니 이 말씀대로 합시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는가? 돌아 보십시오. 부끄럽게도 오늘날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알아서 주님을 섬기는 그런 교회들이 대부분입니다. 세상이 각종 정보와 조언을 쏟아 낼 때 성도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쫓아가는 일이 지혜요, 기도 응답이요, 하나님이 형통케 하신 길인 것처럼 달려갑니다. 이는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모여 어떤 회의를 할 때 주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주님의 말씀 역시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의견이나 조언과 지혜를 전혀 필요치 않으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거침없이 쏟아냅니다. 주일학교 교사, 교회 운영 위원회, 집사들, 모임에 참석한 성도들은 사업 계획에 있어서 먼저 말씀을 연구하고 찾습니까?
아니면 보다 좋은 계획, 보다 좋은 방침, 좋은 방법, 등 기술적인 새것을 추구했지, 참으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주님의 방법이 무엇인가?
일심으로 기도하여 주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기도가 있다면 이미 계획되어진 일을 도와주고 형통케 해달라는 것뿐입니다. 주님은
일개 사업의 조력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교회 일만이 아니라 가족회의에서도 주님의 뜻을 구하고,
어떻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합심해서 더욱 열심히, 효율적으로 일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내심 결정해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일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사를 하든, 직장 문제이든, 자녀 교육
문제이든 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교회, 가족만이 아니라 “나”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결정지을 때 주님의 나의 주인이며, 모든 고려의 대상이
주님이 되셨는가? 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자 한다면 주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결단과 의지, 마음의 소원이 앞서야
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는 오지만 주님의 존재와 그분의 뜻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행하는 것에 질려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는 오지만 주님은 손님의 지위도 차지하지 못하고 아무 실권도 없는 명예직 회장님이나 입헌 군주제의 명목상 왕처럼 되어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성전을 맡았던 레위인들 역시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우상을 섬겼고,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가게 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 불법들을 담당하리라](12-14)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지위와 특권을 빼앗아 버리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서 주신 지위와 특권을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1절입니다. [그때에 그가 나를 데리고 동쪽을 바라보는
바깥 성소의 문 길로 돌아오니 그 문이 닫혀 있더라.](1). 하나님은 에스겔을 동쪽 문을 바라보는 바깥 성소의 문이 있는 길로
돌아오셨는데 ‘바깥 성소’란 성전 건물 자체와는 구별되는 구역으로 제사장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바깥 성소의 동쪽 대문 문설주 옆에 통치자가 서게
됩니다(46:2 참조할 것). [통치자는 바깥 문의 주랑(柱廊) 길로 들어와서 그 문의 기둥 옆에 서고 제사장들은 그를 위하여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예비할 것이요, 통치자는 그 문의 출입 통로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갈 것이로되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겔46:2). 동문은 주님께서 출입하시는 문입니다. 이 문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굳게 닫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천년 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 관련된 기사입니다.
지금 교회 시대의 신약 성도들에게 성전 건물로서의 문이 아니라
영적인 문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양들의 문이십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몇 개의 영적인 문을 보십시오.
- 주님이
문이시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들의 문이라.]
(요10:7),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9).
문이신 주님을 통과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물론 하늘로 갈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길이시며 동시에 문이십니다.
- 믿음의 문.
말씀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들어가는 “믿음의 문”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심으로 누구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도착하여 교회를 함께 모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또 그분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되풀이하여 말하고](행14:27). 이 전에는 결코 열리지 않았던
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이 문은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를 거쳐 이방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열렸습니다.
- 말씀전할 문.
복음을 전할 때도 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는 알기에 ‘문을 열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합당한 기도입니다. [아울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말씀 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또한 이것을 위하여 결박당하였나니] (골4:3).[그러나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고자 함은 내게 크고 효력 있는 문이 열렸으며 대적(對敵)들도 많기 때문이라.] (고전16:8~9). [또한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드로아에 이르매 {주}께서 내게 문을 열어 주셨으되] (고후2:12).
- 열린 문:
하나님은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문이 넓고 크게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교회로 들어 올 수 있고 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의
문턱은 높지 않습니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닫지
못하리라. 이는 네가 적은 힘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계3:8).
- 마음의 문: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3:20). 이 문은 하나님이 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열어야 할 문입니다. 주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일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 하늘에 열린 문:
휴거할 때 우리는 이 문을 통해서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바라보니, 보라, 하늘에 문이 열려 있더라. 전에 내가 들은
첫 번째 음성 곧 나팔 소리와 같이 내게 이야기하던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
(계4:1).
2절입니다. [이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말 것이며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는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그것을 닫아
둘지니라.](2). 이미 43:2에서 언급한 대로 동문은 주님만이 열고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문을 닫고 열지 말라고 하셨는데
과거 성전에서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 문을 통과해서 성전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통행이 허용되지 않는 문입니다. 과거에 터키가
예루살렘을 정복했지만 이들은 이 문을 열지 못합니다. 회교도들이 이 성읍을 점령했을 때도 역시 이 문을 열지 못했고, 십자군 전쟁이 있었지만 이
동문을 열지 못했고, 영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으나 이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랍 군대가 들어왔을 때나 그 이후에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차지했을 때도 이 동문은 열지 못했습니다. 1543년 터키의 술탄이 이 동문을 완전히 막아 버리도록 명령한 후에 이 문을 열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914년 독일의 카이저 빌헤름이 베를린에서 이라크의 바그다드에 이르는 철도 건설을 계획하고 이 문을 통과해 보려는 마음을
가졌지만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영국의 알렌 베이 장군이 이 지역을 통치할 때도 동문이 아닌 북문을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황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동문을 통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닫아 둘지니라”하신 예루살렘 동문은 아직까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동쪽 대문을 막고 있는
콘크리이트를 완전히 걷어내시고 흰말을 타신 채 그 문을 통과해서 성소 안으로 들어가실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이 그러합니다.
3절입니다. [이 문은 통치자를 위한 것이니 그 /사람/
곧 통치자가 그 안에 앉아 [주] 앞에서 빵을 먹으며 그 문의 주랑(柱廊) 길로 들어가고 같은 길로 나갈 것이니라, 하시더라.](3).
‘통치자’는 부활한 다윗입니다. 45:22에 [그 날에 통치자는 자기와 그 땅의 모든 백성을 위해 수소 한 마리를 예비하여 죄 헌물로 삼을
것이요,]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통치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와 그 땅의 모든 백성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죄 헌물을 드린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물을 받으시는 분이시지 제물을 드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통치자는
‘주님 앞에서 빵을 먹습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들이 음식 제사의 남은 것을 먹고(레2:3, 24:9) 왕들도 먹을 수 없었으나 천년 왕국
시대에는 통치자인 다윗이 먹을 수 있습니다.
4절입니다. [또 그가 나를 데리고 북문 길로 그 집 앞에
이르매 내가 보니, 보라, [주]의 영광이 [주]의 집에 가득하므로 내가 얼굴을 대고 엎드리니](4). 북문은 일찍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던 장소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을 데리고 그들이 성전 안에서 행하던 우상 숭배를 낱낱이 보여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향한 길을 /바라보라/, 하시기에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향한 길을 /바라보니/,
보라, 제단 문의 북쪽 어귀에 그 질투의 형상이 있더라.] (겔8:5). 북쪽 문은 ‘질투의 형상이 있던 자리’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곳에 데리고 가셨을 때 에스겔은 이곳에서 행해진 백성들의 죄악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직접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방 신들로 그분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들로 그분의 분노를 일으켰도다.](신32:16).
[자기의 산당들로 그분의 진노를 일으키고 자기의 새긴 형상들로 그분의 질투를 일으켰도다.] (시78:58). 질투의 형상이 있던 이
자리는 이제 ‘주의 영광이 가득한’ 정결하고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성막에 임했고, 솔로몬의 성전 봉헌 때에 임했던 [주의
영광]이 주의 집에 다시 가득하게 된 것은 주님께서 이곳에 임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뒤에 구름이 회중의 장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중의 장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그 위에 있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기 때문이었으며](출40:34-35).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 한 가운데 거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주님의 영광은 한정적으로 성막, 성전에 충만히
거할 뿐이었지만 장차 온 땅에 충만히 거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온 땅이 [주]의
영광으로 충만할 것인즉](민14:21). 이는 주의 재림으로 성취될 위대한 약속입니다. [그분의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72:19). 이 역시 천년 왕국 때에 이 땅에 성취될 약속입니다.
[/그들이/ 서로 크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6:3).
우리는 모두 하루 속이 이런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되고 70년의 바빌론 포로기를 겪은 유대인들이 다시 성전을
재건했지만 그 때는 하늘로부터 영광의 구름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학개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모든 민족들을 흔들
터인즉 모든 민족들의 바라는 바가 이르리니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충만하게 채우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2:7)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포로기가 끝난 후에 세워질 성전이 아니라 천년 왕국 때에 세워질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주님의
영광이 임한 어떤 건물이나 장소를 찾아 갈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도 영광의 구름은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지역 교회의 건물이나 예배 장소를
성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주님의 영광의 구름]이 눈에 보이도록 강하고 충만하게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영광은 주의 거룩한 전이 된 우리
몸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임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의 성령이 우리 몸 안에 들어옵니다. 이것을 성령 침례라고
합니다.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3:6). 주님은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십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집사를 뽑을 때 그 자격 요건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6:3).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수천명이 넘는 성도들 가운데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어떻게 찾습니까? 성령 충만은 사람들 눈에 전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이라면 그들은 일곱은 고사하고 한두 명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어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새벽 기도 잘
나오는 사람이 아닙니다. 헌금 많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도 많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기쁨으로 충만하고,
믿음으로 충만하고, 열매가 가득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은 우리를 통해 주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기쁨 충만, 믿음 충만을 구하십시오. 열매가 가득할 수 있도록 구하십시오. 이런 기도는 너무나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5절입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주목하여 네 눈으로 잘 보며 [주]의 집의 모든 규례와 그곳의 모든 법규에 관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 모든 것을 네 귀로 듣고 또 그
집의 들어가는 곳과 성소의 모든 나가는 곳을 잘 주목하며](5). 구약에서도 성전 규례가 엄격했지만 천년 왕국에서는 그 법이 더욱 엄할
것이며, 거룩한 성전에서 행해질 모든 규례와 모든 법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증거자로서 주목해야 할 것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주목하여 네 눈으로 잘 보며”- 주님이 보여 주신 것들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본 것을 말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대충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많은 전도자들이 어설프게
말씀을 증거 합니다. 성경 구절을 펴서 보여 주거나 완전히 암송한 것을 말하지 않고 대충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도 건성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주목해서 읽고,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고
합니다. “내가 네게 말하는 모든 것을 네 귀로 듣고”- 주님은 듣는 것에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롬10:17). 어떻게 듣는가?(눅8:18) 무엇을 듣는가?(막4:24) 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마음 역시 할례 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말씀을 선포하실 때, [들으라,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선포하시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이는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주의해서 듣고, 귀를 기울일 때 주님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민족들 위에 너를 뛰어나게 하시리라.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너를 따라 잡으리니](신28:1-2).
#부지런히, 주의해서, 주목해서.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다.
6절입니다. [너는 반역하는 자들 곧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너희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너희에게 족하니라.](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집을 반역자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이 행한 범죄는 이미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성 가운데 하나가 ‘반역의
기질’입니다. 완고하고 반역하는 기질은 출애굽의 순간부터 잘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좋은 말로 저항 의식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들의 반역은 기존
권위에 대한 반항을 표출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권위, 말씀의 권위에 대적하는 일로 드러나기 일쑤였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녀들이요, [주]의 법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는 자녀들이니라.](사30:9).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속성을 알고 말하기를, [이는 너의 반역하는 것과 뻣뻣한 목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보라, 이 날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지금까지 [주]께 거역하였거늘 하물며 내가 죽은 뒤에는 얼마나 더하랴?](신31:27)고
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반골 기질은 징계나 훈련이나 교육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은 개혁이나 개선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아담의 성품을 물려받은 사람은 누구나 반역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불순종의 영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개인의 유전적 요소나 환경 문제, 예절의 문제, 학교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옛 사람의 본성이요, 마귀의
성품이란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영적 문제임을 정확히 인지해야 합니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靈)이라.](엡2: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주가 되시지 않는 한 결코 반역, 불순종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대적합니다(갈5:17). 이런 삶은 지나간 날들로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宴會)와 가증한 우상 숭배 속에서 걸어 이방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한 것이 우리 삶의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이라.](벧전4:3).
7절입니다. [너희가 내 빵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타국인들 곧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들을 내 성소 안으로 데려다가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그곳 즉 내 집을 더럽혔나니 그들이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내 언약을 어겼느니라.](7). 타국인이 성소에 들어와 헌물을 드리려면 먼저 유대인으로 개종해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함께 거하는 타국인들은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가운데 대대로 거하는 자들 중에 누구든지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릴 때에는 너희가 행하는 대로 그도 행할
것이니라. 회중에 속한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에게도 다 한 규례니 /이것은/ 너희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주] 앞에서
너희가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그러할지니] (민15:14~15).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성소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타국인의 손에서도 그런 것을 받아 너희 하나님의 빵으로 드리지 말지니라. 이는 그들의 부패함이 그 안에 있고 흠이
있기 때문이니 /내가/ 너희를 위한 것으로 그것들을 받지 아니하리라.] (레22:25)고 하셨습니다. 성전에 대해 타국인들에게 허용된
것은 ‘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왕상8:41-43)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물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히 구별된 민족으로서 분리해야 하는데 이방인들과 연합, 동맹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언제나 분리해야 합니다. 세상과의 연합은 부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내 거룩한 물건들에 대한 책무를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 안에 나에 대한 책무를 지킬 자들을 두되 너희를 위하여 /두었느니라/.](8). ‘내 거룩한 물건들’이란 제단,
희생 제물, 제사에 관련된 여러 가지 기명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거룩한 것들이므로 다루는 책무 또한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성소
안에서 주님에 대한 책무를 지킬 자들을 두긴 했지만 주님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편리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녀의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고 내 거룩한 것들을 더럽히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차이를 전혀 보이지
아니하며 자기 눈을 가려 내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느니라.](겔22:26).
9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자손 가운데서 /거하는/ 타국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타국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9). 구약에서
그러했듯이 천년 왕국 시대에도 이방인들은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경이 구분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은 유대인,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았지만 몸에 할례를 받지 않습니다.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몸에 할례를
받았지만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겉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겉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그 할례가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속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런 사람에 대한 칭찬은 사람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롬2:28~29). 천년 왕국의 성전은 이스라엘을 위한 성전입니다.
10절입니다. [이스라엘이 곁길로 나아갔을 때에 레위
사람들도 나를 멀리 떠나 곁길로 나아가고 자기 우상들을 따라 나를 떠났은즉 자기 불법을 담당하리라.](10). 이스라엘이 곁길로 나아갈
때 성전을 맡았던 레위인들은 중심을 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멀리 떠나 곁길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우상들을 따라” 주님을 떠났습니다. *왕하23:4,5.
이로써 천년 왕국 때에 레위인들은 성전이 회복되었을 때 본래의 지위와 특권을 회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불법을 담당하리라”는 말씀은 레위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시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이
되어 그 집의 문들에서 책무를 맡아 그 집을 섬기며 백성을 위하여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잡아 백성 앞에 서서 그들을 섬기리라.](11).
곁길로 간 레위인들은 ‘자기 불법을 담당하리라’는 말씀대로 그들이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이 되기는 하되 ‘백성을 위하여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잡는
일’만 하게 됩니다. 이는 더 이상 제사장 직분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레위인들로서는 엄청난 신분 격하를 의미합니다(13절 참조).
12절입니다. [그들이 백성의 우상들 앞에서 백성을 섬겨
이스라엘의 집으로 하여금 불법에 빠지게 하였으므로 내가 손을 들어 그들을 쳤나니 그들이 자기 불법을 담당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12).
주님께서 “내가 손을 들어”라고 말씀할 때는 “맹세”의 표현입니다. 사람들 역시 서약을 할 때는 오른 손을 들고 합니다. 취임식이나 선서를 할
때를 보면 쉽게 생각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맹세나 서약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주님께서 ‘내가 손을 들어’라고
말씀하시면 반드시 지켜집니다.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습니다.
13절입니다.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내게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요, 지성소에서 내 거룩한 물건 중 어느 것에도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며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수치와 자기들이 범한
가증한 일들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내가 그들을 그 집의 책무를 맡은 자들로 삼아 그 집에서의 모든 섬기는 일과 그 집에서 행할 모든 일을 행하게
하리라.](13). 주님은 이들이 성소에서 백성들을 위해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어도 주님께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지성소의 거룩한 물건 중 어느 것에도 가까이 올 수 없습니다. 아론의 시절에도 이들은 성소와 제단에는 가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네 책무와 온 성막의 책무를 맡으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제단에는 가까이하지 못하리니 이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너희 또한 죽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민18:3). 범죄한 레위인들의 직분이 격하될 것임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산 삶이 이대로 끝이 아니라 천년
왕국과 영원에서의 삶의 질, 직분을 결정하게 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은 모두 동일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받게 될 상급은 모두 다릅니다. 권세도 영광도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가? 우리는 이 땅에서 저 하늘에 무엇을
쌓으며 사는가? 에 따라 결정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