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40:1-4
요절: 에스겔 40:4
에스겔 40장부터는 천년 왕국에 있을 하나님의 성전을 보여
줍니다. 40-48장까지 아홉 장에 걸친 성전의 모습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솔로몬의 성전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출애굽기 40장 중에 거의 절반이 성막 건축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 놀랄
것입니다. 35-40장까지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성막에 대한 기사를 그대로 다시 한번 기록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역사서에도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대한 기사는 매우 상세하고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려 아홉 장에 걸쳐 성전에 관해서 기술합니다.
담장에서부터 뜰, 문, 방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하게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하실 곳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성전은
지상에서 주님이 거하시는 장소이며, 주님의 전, 주님의 집입니다. 주님은 역사상 어느 성전보다 에스겔에게 보여 준 이 성전에 관심이 더욱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친히 거하시며 다스릴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왕으로서 궁궐에
거하시지 않고 성전에 거하십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천년 통안 통치할 보좌가 놓이는 곳입니다(마25:31). 이
점으로만 보아도 주님께서 왜 그토록 깊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세세하게 일러 주시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나무나 돌로 지어진 어떤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전 건축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친히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I will build my church.
주님은 지옥의 문들이 결코 이기지 못할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build란 말에 주목하라. 교회는 나무나 돌이나 쇠로 지을
수 있는 건축 구조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우리라/지으리라’(build)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무엇으로 교회를 지으십니까? 땅에 있는
돌들, 지하 자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들’(living stone)로 지으십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벧전2:5a).
예수님이 반석이 되시고,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교회는 어디에 세워집니까? 예루살렘이나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시내 산이 아니라 ‘주님 자신’
위에 세우십니다. 주님은 교회의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서 모든 건물이 서로 꼭 맞게 뼈대를 이루어 {주} 안에서 거룩한 전(殿)으로
자라가고 그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세워졌느니라.] (엡2:21~22). *모든 건물=성도.
building, builded. 교회는 생명체로서의 건물이다.
이 시대에 주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전에 거하지 않으시고 우리
몸을 전으로 삼으십니다(고전3:16-17, 고후6:16). 그래서 따로 성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그 누가 성전을 짓고 거기에 주님이
거하신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외에 이 땅 어디에 거하시는가?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하늘의 하나님과 더불어 성전의 거룩한 지성소에 거하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은 주님 몸 안에 거하셨습니다. 주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그러나 그분께서는 /성/전인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19,21).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도들의
몸이 성전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전6:19). 우리 몸이 주님의 거룩한 전이란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집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학적,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영적 실제요, 체험적으로 이론의 여지없이 스스로 확증하고 있어야 할 문제입니다. 지역
교회와 성도들이 이 진리에 대해서 애매모호하고 희미할수록 경건과 거룩의 능력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바리새적인 종교심만 들끓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관심을 가지시고, 애정을 가지실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관심을 재물, 지위, 명예, 학문 등 주로 소유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지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무엇이 있다면 자신이 친히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성도들의 몸에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께 우리 몸을 의의 지체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기를 원하십니다(롬12:1). 주님은 우리의 영만 소유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 값에는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주님은 우리 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몸이
없다면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몸의 말과 행실을 통해서 주님의 거룩한 성품과 능력과 하신 일들을 드러내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 시대에 주님은 분명히 성전에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다가올 천년 왕국의 성전 역시 주님이 몸소 거하실 곳입니다. 천년 왕국의 성전은 에스겔이 보았다고 해서 ‘에스겔의 성전’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출애굽 할 때 세워진 모세의 성막, 다윗의 통일 왕국을 건설하고 솔로몬이 세운 솔로몬의 성전, 70년 바빌론 포로
생활을 하고 귀환한 유대인들이 세운 스룹바벨의 성전에 대한 기록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 공생애 사역 당시에 있던 성전으로 헤롯이 건축한 헤롯의
성전이 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거늘 네가 그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느냐? 하더라.](요2:20).
이 성전은 주후 70년 경 로마의 타이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예루살렘에는 어떤 성전도 건축된 적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이미 실존했던 역사적 성전들입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에스겔의 성전은 아직 이 땅에 세워지지 않은 미래에 있게 될 성전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에 관계된 규례들은 천년 왕국 때 성전이 세워지면 다시 있게 될 것들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의 의미는 단순히 성전 예배, 성전 제사를
드리는 그런 장소적인 의미가 전부가 아닙니다. 성전은 신앙의 핵심이요, 생존의 최후 보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1. 성전을 향해
기도한다. 성전은 기도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한다면 구약 성도들은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기도 응답의 비결이었습니다. [[주]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거기에 내 이름을 두리라, 하신 곳 즉 이 집을 향하여
밤낮으로 주의 눈을 여시고 주의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옵소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되 하늘 곧 주의 거처에서 들으시고 들으실 때에 용서하여 주옵소서.] (왕상8:29~30). 성전은 그들의
기도 중심이었고, 기도할 때 몸의 방향을 정해 주는 나침반이었습니다. *“이곳을 향하여”란 말에 주목. 성전을 향해서 기도할 때 용서를
받습니다. 죄 사함의 근거도 성전이었습니다.
2. 성전은 회개의
중심이었습니다.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원수 앞에서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다시 돌아와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집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를 드리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옵소서.] (왕상8:33~34). 이스라엘은 원수 앞에서 패하게 되어도 성전으로 돌아와 기도하고 간구하면 됩니다.
3. 성전은
바빌론의 포로 된 백성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자기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간 땅에서 회개하며 주께 간구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그릇되이 행하였으며 악한 일을 행하였나이다, 하며 또 자기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원수들의 땅에서 마음과 혼을 다해 주께로 돌아와 주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도시와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해 건축한 집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하늘 곧 주의 거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돌아보사 주께 범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들의 모든 범죄를 용서하시고 또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자들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사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왕상8:47~50). 비록 육신의 몸이 먼 이방 땅에 포로가 되었을지라도 성전이 존재하는 한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전은 그들의 패배를 승리로, 포로 됨에서 놓여 자유와 귀환을 약속해 주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이 불타 없어져 버림으로써 이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4. 성전은 용서의
장소입니다. 꼭 이곳에 오지 않더라도 이 곳을 향하여 기도만 하면 됩니다. [한 사람이나 혹은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각각 자기 마음의 재앙을 깨닫고 이 집을 향하여 자기의 두 손을 내밀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드리거든 주는 하늘 곧 주의 거처에서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길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이는 주만 홀로 모든 사람의 자녀들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이니이다.)](왕상8:38-39).
핵심은 “이 집을 향해서”입니다. 이 집을 향해서 기도하고 간구하고 회개하고 무엇을 하든지 이 집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성전을 향해서
하는 기도, 성전을 향해 드리는 간구와 회개를 들으십니다. 성전은 그들의 영적 생활의 온전한 중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전의 의미입니다.
5. 성전은 회복과
부흥의 장소입니다. 이는 그 건물 자체보다 주님께서 성전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반복해서 “이 곳을 향해, 이
집을 향해”라고 말하는 부분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성전이 왜 중요한가? 를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시공을 순간 이동해서 장차 예루살렘에 세워질
한 성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천년 왕국 때에 예루살렘에 세워질 하나님의 성전인데 주님께서는 환상 속에서 보여 주시고, 그 치수 하나하나를 모두
말씀해 주시고,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불타기 전에 늘 성전 예배를 드리고, 희생물을 드리던 유대인들에게는 누군가가 성전 구조와
치수를 말로만 설명해도 다 이해가 되고, 그림이 머리 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장면입니다만 성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글로만 읽어서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축 모형도나 상상도를 그려 보면 그리는 사람마다 제 각각의 그림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 통독을 하다 이 부분만 나오면 헷갈리고 머리가 아프다고 말합니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아서 그림이나 사진 한 장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부분입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은 읽어도 마음 속에 의미가 선명하게 새겨지지 않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건축 전문가가 건축 설계도를 놓고
설명하듯이 자세하게 성전 구조물의 각각의 치수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절입니다. [우리가 포로 된 지 이십오 년이 되는 해 즉
그 도시가 공격을 받아 무너진 후 십사 년이 되는 해 곧 그 해의 시작이 /되는/ 달 십일 바로 그 날에 [주]의 손이 내 위에 임하여 나를
데리고 그 도시로 가시니라.](1). “우리가”라고 말하는 ‘우리’는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와 있는 유대인들로서 여호야긴 왕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로 잡혀 올 때 함께 포로로 잡혀 왔던 유대인들입니다. 세월은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포로로 잡혀 온지 25년이나 되었습니다.
25년이란 세월은 짧다면 짧지만 포로 생활을 하는 이들에는 너무나 길고도 긴 그런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소망이나 혈기나 의욕 등은
모두 꺾어지고 아무 소망이 없어질 만한 그런 세월입니다.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열렬히 기도했던 사람들도 이쯤 되면 ‘포기, 절망, 낙담’이란 단어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느꼈을 가장 큰 상실감, 절망의 근원은 ‘성전의 소멸’이었습니다. 성전의 소실은 이들에게
전부를 잃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주님께서 에스겔에레 성전을 보여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밝히 말하도록 계시를
주셨습니다.
에스겔이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본 것은 포로로 잡혀 온지 25년
째요,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이 공격을 받아 불탄지 14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에스겔을 비롯한 유대 포로들은 성전이 불타기 11년 전에 왔고
성전이 불탄 소식은 포로가 된 지 십이 년이 되는 해 시월 오일(겔33:21)이었습니다. 성경 본문이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관계로 달리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성전이 불탄지 14년이 지난 그 해 1월 10일에 주의 손이 에스겔 위에 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언자들에게는 “[주]의 영이
임했다, [주]의 말씀이 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의 손이 임했다는 것은 좀 특별한 것입니다. [주]의 손이 원수들에게 임하면 심판,
재앙을 나타냅니다. [주]의 손이 대언자들, 주의 백성들에게 임하면 권능을 드러냅니다.
* [주]의 손.
손의 일반적 기능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치거나 때릴 때 손을 듭니다. 무엇을 쓸 때도 손이 필요합니다. 잡을 때도 손이 필요합니다. 일을 할
때도 손이 필요합니다. 무엇인가를 만들 때 손을 씁니다. 손은 재주와 기술, 권능을 드러냅니다.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손을
잡았다고 하면 동맹이나 화합, 손을 얹었다고 하면 무엇인가를 위임하거나 수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손을 내밀었다는 것은 도움을 요청하거나 도움을
주는 행위를 드러냅니다. 손에 관련된 말은 부지기수입니다. [주]의 손이란 표현 역시 그러합니다.
주의 손이 임했을 때 이집트의 들에 있는 가축과 말과 나귀와
나타와 소와 양들에게 매우 심한 전염병이 생겼습니다(출9:3). 주의 손이 불신의 세대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주]의 손이 그들을 치사 그 군대 가운데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마침내 그들이 진멸되었음이더라.](신2:15). 주의 손이 임했을
때 가나안의 모든 백성들이 진멸되었습니다. [이것은 땅의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주]의 손이 강력함을 알게 하려 하심이며 또한 너희로
하여금 [주] 너희 하나님을 영원토록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하니라.](수4:24). 이스라엘이 “[주]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을 때”(삿2:13) 주의 손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크게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주]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이 크게 고통을 당하였더라.](삿2:15).
주님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그들이 이방 신들을 따르고 우상을 섬길 때 맹세로 저주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때 임하는 주의 손은 말 그대로 매를
든 손이요, 벌을 주시는 손입니다. 주의 손은 치시고, 멸하시는 손이십니다(삼상5:6,9). 주님의 손은 이와 같이 원수들에게는 재앙과 심판과
질병과 완전히 멸하시는 손이시오, 대적하는 손입니다.[그러나 너희가 만일 [주]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의 명령에 거역하면
[주]의 손이 너희 조상들을 대적한 것같이 너희를 대적하시리라.](삼상12:15).
주의 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이 모든 것 중에 어느 것이
[주]의 손이 이 일을 이루신 줄을 알지 못하랴?](욥12:9). 이 세상은 모두 주님의 손으로 이루신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손이 이것을 이루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한 것을 보고 알며 깊이 생각하고 함께 깨달으리라.](사41:20).
주님은 자신의 손으로 무엇이나 만드실 수 있고, 마음 먹은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고기를 먹고 싶어서 울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주]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하는지 보게 되리라,”(민1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손”은 권능을 드러냅니다. 주의 손은 구원의 손입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사59:1). 주님의 손으로
짓기도 하시고, 부수기도 하시며, 세우기도 하시고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주님의 손의 권능은 전능(Almighty)입니다. 사무엘 시대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했는데 성경은 기록하기를, “주의 손이 막으시매”라고 합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경(地境) 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사무엘의 전 시대에 [주]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으시매](삼상7:13).
주의 손이 에스겔에게 임했는데 이는 주님께서 에스겔을 어디론가
옮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창5:24), 엘리야(왕하2:11)를 하늘로 옮기셨듯이 에스겔을 천년왕국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옮기셨습니다. 에스겔, 사도 바울, 사도 요한 등은 모두 이런 순간적인 시·공간 이동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인 낙원으로
이끌림을 받았고, 사도 요한 역시 대 환란과 천년 왕국과 영원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환상 속에서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심히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그 곁에는 남쪽으로 도시의 형태 같은 것이 있더라.](2). “하나님께서
자신의 환상 속에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환상이란 꿈이나 몽상, 환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상은 영적
실재입니다. 비전(Vision)을 갖는다는 것이 야망이나 꿈을 갖는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환상’은 영적 실재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바빌론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옮겨 놓으셨고 에스겔을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에 내려 놓으셨습니다.
3절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데리고 거기로 가시니, 보라,
그 모습이 /빛나는/ 놋의 모습을 한 것 같은 사람 하나가 손에 아마 줄과 측량 갈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3).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예루살렘의 높은 산 위에 데려가셨을 때 거기에는 이미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모습은 ‘/빛나는/ 놋의 모습을 한 것 같은
사람인데 천사입니다. 천사는 언제나 사람의 모습입니다. 천사는 날개가 없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현현으로서 중성이나 여성이 아니라 남자입니다.
천사가 손에 아마 줄과 측량 갈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었는데 이는 무엇인가를 측량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4절입니다.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보여 줄 모든 것을 네 눈으로 보며 네 귀로 듣고 네 마음을 그 위에 둘지어다. 내가 그것들을 네게 보여 주려고 너를 여기로
데려왔나니 /너는/ 네가 보는 모든 것을 이스라엘의 집에게 밝히 드러낼지어다, 하더라.](4).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이곳에 데려왔습니다. 에스겔이 본 모든 것을 이스라엘 집에게 밝히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다니엘에게 보여 주신 것은 봉인하라고
하셨지만(단12:9)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것은 밝히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이스라엘 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은
이방인들이나 그 누구에게 다시는 짓밟히거나 파괴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겔37:28).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음에 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보여 줄 모든 것을 네 눈으로 보며 네 귀로 듣고 네 마음을 그 위에 둘지어다.](4a).
여러분은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애정은 무엇에,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어떤 이는 모든 애정을 자식들 위에 둡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성공에 둡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愛着)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골3:2).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 들려주신 것 위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대언자들, 증인들의
직무는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자들의 선행 조건이 이것입니다.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밝히 드러낼 수 없습니다. 보고 들은 말씀 위에 마음을 두는 것! 이것이야 말로 증거의 능력을 얻기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고 굳게 붙잡아 회개하라.](계3:3a)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을 볼 때 너무나 가볍게 흘려듣고, 대충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문이나 잡지나 소설을 읽듯이 성경을 대충 봅니다.
설교를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고 나서 설교 제목이나 말씀을 기억하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마음에 붙잡고 되새김질 하는 이가 없습니다.
덕분에 ‘밝히 드러낼지어다’ 하신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암송이나 묵상에 대해서 많이 다루었습니다. 의무적인, 기계적인 성경
암송이 아니라 말씀을 사랑함으로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자 하는 자세로 대할 때 ‘증거의 능력’을 갖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내게 들은 그 건전한 말씀들의 틀을 굳게 붙들고](딤후1:13)라고 했습니다. 디도에게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딛1:9a)라고 권면했습니다. 마음을 둔다는 것은 굳게 붙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굳게 붙들어야 할 것은
첫째도 말씀이요, 둘째도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바 믿음의 확신과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처음에 가진 확신을
끝까지 굳게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 될 것임이라.](히3:14),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제사장이 계시니 하늘들
안으로 지나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라.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굳게 붙들지어다.](히4:14).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것들을 소중한 유산이나 큰 재물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붙잡으라.](계2:25).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왕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증거 하도록 하기 위해 먼저 보여 주시고, 들려주십니다. 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보여 주시기를 빕니다.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기를 빕니다. 동시에 우리는 거기에 마음을 두고, 애정을 둠으로써 신실한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